LOGIN하지율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연재영 씨와 연상진 씨가 박태규를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차라리 저를 기절시켜서 그 남자의 침대에 던져 넣는 건 어때요? 사과의 의미로요, 그 치한의 소원까지 이루어 줄 수 있으니 좋지 않겠어요?”“하!”연상진이 냉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벌써 남의 침대에 기어오를 생각이나 하고... 박 대표가 그 정도로 마음에 드나 보지.”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연재영이 차갑게 말을 끊어냈다.“연상진, 그만해.”동시에 컵 하나가 날아와 연상진의 머리를 정통으로 가격했다.“!”컵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고 충격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연상진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주용화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입조심하시죠, 하지율 씨는 당신의 여동생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그는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사건의 전후 사정은 묻지도 않고 서둘러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다니요, 남 잘되는 꼴은 못 보는 그 추악한 얼굴이 너무 역겹지 않습니까?”잠시 숨을 고른 그가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라면 제가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욱한 연상진이 반박하려 했지만 연재영이 다시 한번 그를 제지했다.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사실 연재영은 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었다.그 또한 오래전부터 박태규가 색을 밝힌다는 소문을 들어왔으니까.하지율의 말로 사건의 윤곽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율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계약을 맺으러 간 자리에서 박태규가 제 몸에 손을 댔어요. 그래서 약간의 교훈을 준 것뿐이에요.”그녀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가족의 불신도, 타인의 불신도... 이미 너무 익숙해져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심장이 불편하게 쿵, 쿵 진동하는 건... 어쩌면 실망이 극에 달해 뇌가 이상 신호를 보내는 건지도 몰랐다.“두 분은 설마
박태규의 눈이 욕망의 빛으로 번뜩였다.‘그래, 손 대표가 직접 나서겠다는데 망설일 이유는 없지!’그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비비며 물었다.“저어... 그럼 언제가 가장 좋을까요?”손형원은 술잔에 있는 액체를 한 번에 들이켰다.헤이즐 빛의 투명한 리퀴드가 목을 타고 흘러내리며 남자의 목선을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다음 주.”그가 낮게 말했다.“정미 생일입니다. 그때가 좋겠죠.”그 말을 들은 박태규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불쾌한 일을 겪은 하지율은 더 이상 일에 묶여있지 못했다. 그녀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표서준은 습관처럼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하지율이 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주용화가 입을 열었다.“표 비서.”그의 시선이 표서준에게 머물렀다.“나와 하지율 씨는 집으로 갈 생각인데... 설마 표 비서님도 같이 갈 생각인 겁니까?”담담한 말이었지만, 묘하게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했다.“아...”표서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으나 곧 어색한 미소로 가려졌다.“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회사로 돌아가실 줄 알고...”주용화는 미소인지 냉소인지 구분하기 얼굴로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하지율 씨더러 다시 회사로 돌아가 야근이라도 하라는 겁니까?”숨을 고른 그가 바로 말을 덧붙였다.“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사람을 조금 쉬게 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소에는 눈치가 빠른 것 같더니 지금 보니 사람 챙길 줄은 전혀 모르시는군요.”“...”표서준의 동작이 멎었다. 이윽고 잘생긴 얼굴 위로 미안함이 숨김없이 드러났다.“죄송합니다, 대표님.”그가 고개 숙여 하지율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회사가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길 바라는 마음에... 제가 경솔했습니다.”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한 상황에서 그를 몰아붙인다면 오히려 주용화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 될 터.그는 표서준을 힐끗 바라본 뒤 더 입을 열지 않고 곧바로 가속 페달을 밟아 자리를 떴다.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한 두 사람은 연재영과
박태규의 마음은 마치 새끼 고양이가 할퀴는 듯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저렇게 아름다울 수가...’“그럼요.”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제가 어떻게 감히 하 대표 같은 미인을 속이겠습니까.”박태규는 하지율의 미모에 혼이 반쯤 빠져나간 듯했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그녀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자.”박태규가 잔을 들어 올렸다.“제가 하 대표님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남자의 눈빛에 음흉한 빛이 스쳤다. 박태규는 잔을 든 채 하지율의 작고 매끈한 턱을 들어 올리려 했다.그대로 입안에 액체를 쏟아 넣으려는 수작이었다.그 순간 하지율의 얼굴에 남아있던 온기가 완전히 사라졌다.아무 말 없이 박태규의 손에서 잔을 낚아챈 그녀는 안에 든 음료를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끼얹었다.촤악!웃음과 잡담으로 가득하던 룸 안의 공기가 단번에 얼어붙었다.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박태규는 액체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미쳤어? 이 계약 필요 없는 거냐고!”그의 호통에도 하지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계약 하나 때문에 나 자신을 팔 생각은 없어요.”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긴 박태규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순간의 분노가 그대로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남자들이랑 할 건 다 해본 주제에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너...”그러나 박태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머리가 거칠게 탁상 위에 눌렸다.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의 얼굴이 술잔이 놓인 테이블 위로 세차게 내리꽂혔다.쾅!술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룸 안은 순식간에 완벽한 정적에 잠겼다.박태규는 굴욕적인 자세로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고 그의 머리 위에는 비싸 보이는 가죽 구두가 얹혀 있었다.“...”하지율의 얼굴에는 놀람도, 분노도 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일 사람이 박태규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율이 담담하게
박태규는 연정미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분명 예쁘긴 했지만, 하지율만큼 여성적인 끌림은 느껴지지 않았다.눈앞의 얼굴은 맑고도 청아했다. 동시에 화사하고 요염했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아름다움은 농밀했으나 속되지 않았고 타고난 요물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박태규는 지금껏 온갖 유형의 미녀를 상대해 왔다. 그러나 하지율 같은 여자는 처음이었다.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았고, 매혹적이지만 요사스럽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근질거렸고, 이유 없이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스쳤다.그 순간, 박태규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그는 본능으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든 그는 서릿발처럼 차갑고 깊은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잠시 멈칫한 박태규는 곧 그 남자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하지율이 데려온 애송이로군. 경호원이었던가...’정신을 가다듬은 그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계약 내용은 이미 다 확인했습니다. 굳이 다시 볼 필요는 없죠.”그에 하지율이 그에게 계약서를 내밀며 공손히 말했다.“그렇다면, 먼저 계약서에 서명부터 해 주시겠어요?”박태규는 계약서를 대충 훑은 뒤 옆으로 밀어놓았다.“계약은 급하지 않습니다. 처음 뵙는 자리이니 인사도 나눌 겸 친구가 되고 싶은데... 계약은 어차피 오늘 안에 진행할 테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죠.”하지율은 시계를 훑어본 뒤, 옅게 미소 지었다.“죄송하지만, 회사에 처리할 일이 조금 많습니다. 이 계약만 끝나면 바로 돌아가야 해요.”그녀의 철벽에 박태규의 눈빛이 순간 미세하게 가라앉았다.마음속에서 경멸이 스쳤다.‘듣자 하니 뒤에서 꽤 문란하게 논다던데... 이혼 후에 여러 남자와 얽혔었다더니 이제는 이런 반반한 애송이까지 데리고 다니고... 이제 와서 점잖은 척이라니, 밀당하는 것도 아니고.’박태규는 일부러 아쉬운 듯 미간을 축 늘어뜨렸다.“하 대표님께서 바쁘시다는데 제가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죠. 하지만 이
주용화에게 시선을 돌린 하지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녁에 중요한 계약이 있거든요.”그에 주용화가 담담한 얼굴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말했다.“그래요? 나는 표 비서가 생긴 뒤로 더는 내가 필요 없어진 줄 알았는데.”평온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묘하게 뒤틀린 의미가 담겨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하지율이 곧바로 반박했다.“무슨 소리예요. 화야 씨랑 서준 씨는 달라요.”그에 주용화가 눈썹을 까딱이며 하지율의 눈을 마주했다.“둘 다 하지율 씨를 위해 일하는 사람인데 뭐가 다르다는 거죠?”“...”하지율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런 식으로 비교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그녀가 입을 벙긋거리는 사이, 사무실의 문이 가볍게 두드려졌다.“대표님, 급히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보셔야 해요.”그에 하지율이 문을 사이에 두고 답했다.“사무실에서 기다려요. 바로 갈게요.”“알겠습니다.”발소리가 멀어지고, 하지율이 주용화를 향해 말했다.“오해하지 말아요, 화야 씨. 당신은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에요. 서준 씨가 당신보다 중요해질 일은 없다는 말이에요.”그 말에도 주용화의 말투는 퉁명스럽기만 했다.“함우민 씨도 하지율 씨를 구했죠. 그럼 그도 중요해요?”하지율은 오늘따라 주용화가 낯설게만 느껴졌다.하지만 더 묻고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서류를 확인해야 했고 저녁의 계약도 준비해야 했다.“화야 씨는 물론 함우민 씨도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에요. 모두 나한테 중요한 친구들이고요.”그녀가 말을 정리하듯 덧붙였다.“이따 출발하기 전에 전화할게요.”말을 마친 하지율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주용화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서늘한 눈빛에는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실망과 체념이 내려앉아 있었다.최근 하지율은 눈에 띄게 바빴다.주용화와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시간은 눈에 띄게 줄었고, 겨우 몇 마디 나누려 하면 표서준이 업무를 들고 나타났다.오늘 같은
하지율이 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할 때, 주용화는 보통 탁자와 의자밖에 없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쉬었다.하지율은 그런 그를 위해 별도의 사무실을 마련해 주었는데 그 안에는 컴퓨터와 텔레비전, 게임기뿐만 아니라 침대와 욕실까지 갖춰져 있었다.주용화는 할 일이 없을 때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을 즐길 수 있었고, 필요하면 잠도 잘 수 있었다.이날, 프로젝트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저녁에 중요한 계약을 체결해야 하니 회사 책임자인 하지율이 직접 참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소식을 전해 들은 그녀는 주용화에게 전화해 함께 미팅에 참석하도록 준비시키려던 참이었는데 문득 최근 들어 주용화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고, 말수도 부쩍 줄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바쁜 일정 탓에 최근 화야 씨 상황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지.’생각을 마친 하지율은 직접 주용화를 찾아가, 최근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물어보기로 했다.탕비실을 지나던 그녀는 우연히 두 직원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그냥 포기해... 그 경호원 여자한테 관심 하나도 없어 보여. 너만 고생할 뿐이지... 얼마 전에 비서실에 있던 엄청 예쁘게 생긴 언니가 일주일 내내 도시락 싸줬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잖아. 지난번에는 나타샤가 일부러 넘어지면서 그 사람한테 안기려고 했는데 바로 밀쳐져서 이가 부러졌었고... 뱉는 말은 또 얼마나 독한지, 전에 그 경호원한테 고백했던 어린 직원이 울면서 도망치는 거 본 사람도 수두룩 빽빽이야. 네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도 그 남자랑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성격이 좀 지랄맞거든.”다른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방금 내가 화야 씨 사무실로 찾아갔는데... 내 향수 냄새가 너무 역겹다고, 내가 못생겼다고 하면서 그냥 쫓아냈어... 그 사람 말 너무 심한 거 아니니? 허엉...”남녀 사이에 있는 흔한 해프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하지율은 주용화의 이름을 듣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저들이 묘사하는 화야 씨가... 정말 내가 아는 화야 씨가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