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둘이서 무슨 얘기 했어요?”하지율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원래는 굳이 설명할 생각이 없었지만 문득 마음을 바꿨다.“별말은 안 했어요. 제가 바이올린 켜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것뿐이에요.”손형원이 하지율을 바라보며 물었다.“아직 하지율 씨를 기억해요?”그 순간, 하지율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잠시 뒤에야 하지율은 입을 열었다.“3년 전 단 어르신 댁에서 저를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진소현 씨와 같이 있었거든요. 그 기억은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아요.”하지율은 고개를 들어 손형원을 바라봤다.“아직 왜 M국에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어요. 여기 화야 씨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소현 씨랑 남시온 씨가 잘 처리하겠죠.”“연씨 가문 사람들도... 저와 화야 씨가 헤어졌다는 걸 알고 있고 화야 씨가 두통 문제 때문에 최면 치료를 받았다는 것도 알아요.”“굳이 화야 씨 앞에서 과거를 들춰서 기억을 되찾게 만들고 저한테 다시 든든한 지원군을 만들어 줄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거예요.”하지율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러더니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낮아졌다.“게다가 화야 씨도... 최면을 받기 전에 이미 다 준비해 뒀을 거예요. 원래 무슨 일을 하든 빈틈이 없는 사람이니까요.”“제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미리 생각해 두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아는 화야 씨라면 분명 만일의 경우까지 대비해 뒀을 거예요.”“다른 사람들은 크게 걱정되지 않는데 문제는 손형서 씨예요.”하지율은 손형원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에도 화야 씨를 못 잊은 것 같더라고요. 화야 씨가 직접 물으면 아마 아는 걸 전부 말할 거예요.”손형서는 하지율과 마찬가지로 지난 몇 년 동안 결혼은커녕 남자 친구조차 사귀지 않았다.아직 주용화를 잊지 못했다는 뜻이었다.그러자 손형원이 대답했다.“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형서를 M국에서 떠나게 하죠. 주용화와 마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지율 씨 곁에 있는 유소린 씨도 바로 보내는 게 좋을 겁니다.”“유소린 씨도 속
주용화의 시선은 하지율의 얼굴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검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뜬 채 하지율을 유심히 살펴보는 듯했다.주용화의 최면은 분명 성공했고 하지율도 직접 확인한 일이었다.하지만 최면은 어디까지나 최면이었다.언젠가 틈이 생기거나 기억이 되살아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하지율은 순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아니에요.”주용화는 여전히 하지율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이상하게 낯이 익어요.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그 순간, 하지율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주용화가 무언가 기억해 낸 건지 아니면 정말 단순히 낯이 익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율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 주용화가 갑자기 말했다.“아, 생각났습니다.”하지율은 동공이 살짝 흔들렸고 손가락도 자신도 모르게 움켜쥐어졌다.주용화는 하지율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웃었다.“3년 전 제가 최면 치료를 받을 때 단 어르신의 댁에서 본 것 같네요. 진소현 씨의 친구 맞죠?”‘3년 전이라...’하지율은 팽팽하게 긴장했던 온몸의 힘이 한순간에 풀리는 걸 느꼈다.안도한 건지 실망한 건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그러자 하지율이 말했다.“기억력이 좋으시네요.”주용화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저를 아세요?”“네. 진소현 씨한테 얘기를 들었어요.”주용화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제 얘기까지 했다니 두 분이 꽤 친한가 보네요?”하지율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그렇게까지 자세히 들은 건 아니에요. 그날 우연히 뵙고 나서 제가 진소현 씨한테 누구냐고 물어봤거든요. 그래서 이름이랑 두 분이 아는 사이라는 정도만 들었어요.”주용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하지율을 바라봤다.“저에 대해 따로 물어봤다고요? 저한테 관심이 있었어요?”하지율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화야 씨가 이렇게 직접적인 사람이었다니.’처음 알게 됐을 무렵 하지율은 주
최근 반년 동안 하지율은 거의 모든 일을 뒤에서 처리하며 전면에 나서는 일이 줄었다.자유 시간도 훨씬 많아졌고 손도 완전히 회복됐다. 덕분에 한동안 놓았던 취미를 다시 시작해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얼마 전, 하지율은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반지 하나를 발견했다.예전에 주용화가 그녀에게 청혼하며 건넸던 반지였다.그때 주용화는 바로 이 뒷정원에서 하지율을 위해 바이올린곡을 연주했었고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하지율도 문득 이곳에서 한 곡 연주하고 싶어졌다.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한 뒤에도 하지율은 한 번도 “백월광”을 연주하지 않았다.그 곡에는 너무나도 깊고 선명한 추억이 담겨 있었기에 돌이켜 보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다시는 손대고 싶지 않았던 “백월광”이 자연스럽게 손끝에서 흘러나왔다.그리고 익숙한 그 모습을 본 순간, 하지율은 어렴풋이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밝은 달빛 아래, 훤칠한 남자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고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하지율의 심장 위를 밟는 것만 같았다.만약 이게 꿈이라면 하지율은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시간이 끝없이 늘어진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불과 몇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남자는 금세 하지율 앞에 도착했다. 눈부시게 잘생긴 얼굴에는 하지율이 기억하는 익숙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시간은 유독 그에게만 관대한 듯했고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다. 이미 서른을 넘겼는데도 여전히 스무 살을 갓 넘긴 사람처럼 젊어 보였다.주용화가 물었다.“방금 연주하신 곡은 무슨 곡인가요?”맑고 서늘한 목소리는 좋은 술처럼 깊고 부드럽게 귀를 울렸지만 하지율은 순간 머리 위로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꿈결 같은 안개가 한순간에 완전히 걷혔다.이건 꿈이 아니라 정말 현실이었다. 하지율은 곧 정신을 차렸다.‘그런데 주용화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그는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영원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지금 눈앞에 정말로 서 있었다.하지율은 순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이런 장면은 꿈속에서 수천수만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매번 눈을 뜨고 나면 남는 건 끝없는 허탈함과 쓸쓸함뿐이었다.하지율은 이미 평생 주용화를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마음먹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너무도 익숙한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눈시울이 단숨에 붉어졌다.그제야 하지율은 자신이 주용화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알았다.헤어진 뒤 처음 2년 동안은 주용화가 꿈에 자주 나타났다.하지만 최근 1년 동안은 꿈에서조차 거의 볼 수 없었다.두 사람을 이어 주던 인연이 줄이 끊어진 연처럼 점점 멀어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지난 3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연태훈은 아직 연경 그룹에서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았지만 하지율이 손형원의 지분까지 넘겨받은 뒤 사실상 모든 실권을 잃었다.하지율은 정식으로 가주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이미 가주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됐다.연재영은 추문이 터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서현과 서둘러 결혼했다.좋아하던 남자와 결혼하지 못하고 연재영과 결혼하게 된 현실을 단서현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끝까지 결혼하지 않겠다고 난리를 피웠다.하지만 이미 사건이 워낙 크게 퍼진 뒤였기에 연씨 가문은 물론이고 단씨 가문에서도 단서현이 제멋대로 굴게 둘 수는 없었다.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라 해도 두 집안은 어떻게든 둘의 결혼으로 추문을 덮고 사람들에게 명분을 보여 줘야 했다.단서현이 아무리 버텨도 소용없었다.무엇보다 그 사건 이후 단서현은 임신까지 했다.하지만 단서현은 임신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아이를 지웠다.원래도 단서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던 연재영은 그 일을 계기로 더욱 차갑게 변했다.단서현 역시 그런 연재영에게 별 관심은 없었다.다만 연정미와의 관계도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연정미는 그때 조산하면서 몸을 크게 상해서 다시는 아이를 가질
연태훈이 연정미를 도운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심수현은 지금 연정미가 결혼할 수 있는 최고의 상대였다.만약 심씨 가문에서 쫓겨난 데다가 아이까지 심수현의 친자가 아니라는 추문이 터진다면 이미 온갖 악재에 시달리는 연씨 가문에는 또 한 번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그때 유소린이 턱을 괴고 의아한 듯 물었다.“단성훈이 그렇게 대단해? 단보현까지 제치고 친자 확인 결과를 손댈 정도로?”하지율이 말했다.“단성훈 본인은 그 정도 능력은 없어. 하지만 아버지가 단아 그룹에서 입지가 꽤 탄탄해. 손에 쥔 인맥이나 자원도 만만치 않아.”“그런 노련한 사람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정도로 따지면 단보현 못지않지.”그러자 유소린이 다시 물었다.“그런데 단성훈의 아버지가 왜 직접 나서서 연정미를 도와주는 거지?”하지율이 웃었다.“단성훈이 연정미 뱃속의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말했다면? 그러면 아버지도 도와주지 않을까?”유소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너무 복잡한데? 하지만 단씨 가문은 사생아를 인정하지 않는 거 아니야?”하지율이 담담하게 말했다.“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어. 그 사생아가 훗날 다른 명문가의 가주가 될 수도 있다면 욕심이 생기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유소린은 그제야 이해했다.“아... 단성훈 쪽에서는 그걸 노린 거구나.”...얼마 뒤, 연정미는 딸을 낳았다.누군가에게 떠밀려 넘어지는 바람에 조산하게 된 데다가 출산 과정도 매우 위급했다.자칫하면 수술대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고 의료진은 연정미를 살리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연정미는 앞으로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됐다.연정미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있다는 소식에 연씨 가문 사람들도 모두 병원으로 달려왔다.아이가 먼저 밖으로 나왔을 때조차 모두 잠깐 얼굴만 확인했을 뿐, 다시 연정미의 수술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하지율은 화장실로 가던 길에 갓난아이를 품에 꼭 감싼 한 산모와 마주쳤다.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산후조리 문화는
단종건은 하지율에게 어느 정도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어찌 됐든 하지율이 자기 집에서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다.물론 단종건이 직접 벌인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하지율은 단종건을 믿었기에 그곳에서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았고 단종건 역시 함우민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결국 그 일로 하지율은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그런 상황에서 하지율이 도움을 청하자 단종건은 거의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다.헤이서 가문의 가주를 진찰한 단종건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기력이 다한 상태라 살릴 방법은 없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길어야 몇 달 정도 수명을 늘려 주는 것뿐이라네.”그러자 헤이서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몇 달이면 충분해요... 그 안에 적당한 남편감을 골라 결혼할 수 있으니까요.”그 말을 들은 하지율이 헤이서를 바라봤다.“헤이서 씨, 아직도 꼭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헤이서는 병상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그래야 아버지가 안심하실 테니까요.”그러다가 헤이서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아버지께서는 자신이 돌아가신 뒤 제가 가문 내부의 분쟁을 정리하지 못하고 가주 자리를 제대로 이어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세요.”“헤이서 가문도 세력이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솔직히 저 혼자서는 감당할 능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요.”하지율은 헤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러면 만약에 아가씨가 무사히 가주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그래도 서둘러 결혼하고 싶어요?”헤이서는 잠시 멈칫했다.“하지만 제 능력으로는 아마...”하지율이 말을 끊으며 미소 지었다.“그냥 대답만 하세요. 결혼할 건지, 안 할 건지 말이죠.”헤이서도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하지율의 말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금세 알아챘다.순간 헤이서의 눈에 희망이 떠올랐다.“당연히 안 하죠! 속셈이 뻔한 남자들은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요.”그러자 하지율이 말했다.“그런 이유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할 필요는 없어요.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