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주용화는 상대의 체면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사실을 공개석상에서 그대로 짚어냈다.그 한마디에 연재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연정미의 눈동자 깊은 곳에도 스치듯 굴욕이 번졌다.주용화는 여전히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는 태도였다.연태훈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마저 옅어졌다.처음 주씨 가문에서 협력 의향서를 보내왔을 때, 연태훈은 적잖이 놀랐다.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주용화의 진짜 신분을 몰랐다.연재영이 주씨 가문에 사과하러 갔다가 겸사겸사 프로젝트까지 따온 줄로만 알았다.그때까지만 해도 주씨 가문이 먼저 손을 내밀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규모가 큰 조건까지 내걸었다는 것이 놀라웠다.주씨 가문을 둘러싼 소문이 아무리 껄끄럽다 해도 연태훈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익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연태훈은 이 협상이 연재영의 성과라고 판단했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전권을 맡겼다.그러나 주씨 가문 측에서 가주가 직접 다음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연경 그룹 내부는 순식간에 긴장 상태에 들어갔고 주요 주주들은 미리 일정을 비워두기까지 했다.그러나 단 한 사람, 하지율만 제외된 채였다.연태훈을 따르는 주주들이 모여 논의하는 협력 건에 한해서 하지율은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부 규정 때문이었다.연재영 역시 그 암묵적인 규정에 힘입어 이번 협력을 연정미에게 맡겼고 연정미가 회의를 주관하도록 지시했다.하지만 주용화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회의실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혔다.몇몇 주주들은 그가 자리를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주용화가 착석할 때까지 착각한 게 아닌가 싶었다.담당자의 설명이 이어진 뒤에야 그가 정말 주씨 가문의 가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그야말로 대놓고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연태훈을 지지하던 주주들이든, 하이현을 따르던 주주들이든, 모두의 체면이 산산이 부서졌다.하지율의 옆에서 주용화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조금이라도 상황을 파악하고 계셨다면, 이런 자리가 이토록 민망한 자리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문을 밀고 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시선이 동시에 하지율에게 꽂혔다.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정적이 내려앉았다.회의실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연경 그룹에 들어온 이후, 하지율은 이런 분위기를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시선을 천천히 옮기자, 표정이 복잡하게 굳어 있는 연태훈과 얼굴을 잔뜩 굳힌 채 앉아 있는 연재영, 그리고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연정미가 눈에 들어왔다.‘무슨 일이야... 오늘 온다는 그 고객이 대체 누구지?’그 생각과 함께, 하지율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그리고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희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하지율의 시야에 들어왔다.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낯설기는커녕 오히려 지나치게 익숙한 인상이었다.그 얼굴은 여전히 소년 같은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하지율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자료가 힘없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옆에 있던 비서가 급히 허리를 숙여 자료를 주웠다.남자는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인사했다.“지율 씨, 오랜만입니다.”하지율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었다. 흔들리던 시선을 억지로 붙잡으며 답했다.“오랜만입니다...”연경 그룹이 이번에 끌어온 고객의 정체는 다름 아닌 주용화였다.연태훈이 적절한 타이밍에 말을 이었다.“지율아, 자리에 앉아라.”회의실 안을 훑자, 주용화 옆자리 하나만 비어 있었다.의도적으로 남겨둔 자리라는 게 분명했다.하지율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한층 더 경직됐다. 사람들의 눈길이 하지율과 주용화,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얼굴 잘생긴 경호원’ 정도로 여겨졌던 남자가 주씨 가문의 가주라는 사실을.연경 그룹의 주주들과 임원들 가운데 주용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한때 하지율의 경호원으로 늘 하지율의 곁을 지키며 함께 드나들던 인물이었다.게다가 그 얼
진소현의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그녀는 한숨을 삼키듯 말을 이었다.“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최면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 이상, 최소 1년은 걸려. 그것도 완치가 아니라... 증상을 늦추는 수준에 그쳐. 다음 발작 시점을 미루는 정도일 뿐이지,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야.”이정인은 작게 혀를 찼다.“하... 역시 세상은 공평하네요.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인가 봐요.”진소현의 얼굴에 근심이 스쳤다.“그게 용화 씨의 유일한 결점이야. 그런데... 치명적이지.”이정인은 주용화에 대한 그녀의 걱정을 눈치채고 물었다.“그 정도예요? 설령 발작이 온다 해도, 주용화 씨 실력이면 웬만해서는 목숨까지 위험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진소현이 고개를 저었다.“정인아, 꼭 피를 봐야만 목숨이 위험한 건 아니야. 예전의 용화 씨라면... 그 사람에게 치명적인 약점 따위는 없었을 거야. 하지만 이젠 아니야. 하지율 씨는... 그 사람의 갑옷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이야.”...돌아오는 길, 유소린은 하지율이 줄곧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큰 프로젝트를 따낸 직후였지만 하지율의 얼굴에는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연씨 가문 쪽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차근차근히 해나가면 돼. 지금 상황만 보면 우리한테 불리할 건 없잖아.”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연정미가 등에 업고 있는 두 사람도 지금은 손이 묶인 상태야. 손형원은 아예 모습을 감추고 지내고 있고, 단보현은 자기 일 처리하기도 벅차. 당분간 연정미를 도울 여유 따위 없을 거야.”유소린이 말을 이어갔다.“연정미는 지금 완전히 눌려서 꼼짝도 못 하는 상태야. 연경 그룹을 장악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 시간만 벌면 우리 쪽이 훨씬 더 커질 수 있어. 저쪽이 다시 회복했을 때쯤이면, 그땐 우리를 어쩌지 못할 거야.”주용화가 하지율 곁에 머문 시간은 절대 짧지 않았다.그러나 1년이라는 시간으로 두 가문을 무너뜨리는 건 애초에 불가능
하지율은 잠깐 시선을 거둔 뒤,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때, 하지율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유소린은 슬쩍 몸을 기울였다.“린 씨가 또 메시지 보낸 거야?”하지율의 신상이 유출된 뒤, 감춰두었던 개인 활동들도 세상에 드러난 상황이었다.그중 하나가 화가 ‘summer’라는 신분이었다.연씨 가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표정은 유소린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그들의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 그리고 뒤늦게 밀려오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그들이 하찮게 여기던 하지율이 여러 분야에서 이미 성과를 쌓아온 인물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했다.특히 연정미의 반응이 그랬다.그녀는 한때 ‘summer’의 작품을 경매로 낙찰받은 적도 있었다.신상이 공개된 이후, 린은 종종 하지율에게 선물을 보내왔다.작품을 무료로 받은 데 대한 답례라는 이유였다.값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정성이 담겨 있었다.직접 만든 물건도 적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하지율의 취향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그래서인지 거절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린이 보낸 선물을 볼 때마다 유소린은 감탄하곤 했다.“이 친구 보통 아닌데? 네 취향을 이렇게 정확히 안다고? 네 그림 좋아하는 이유가 있네. 너랑 꽤 잘 맞는 것 같아.”하지율이 휴대전화 화면을 내밀었다.“맞아. 린 씨야.”화면에는 버려진 길고양이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유소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이 길고양이 상태가 완전히 달라졌네. 털도 윤기 나고... 눈빛도 훨씬 또렷해졌어.”석 달 전, 유소린은 길가에서 어린 고양이 한 마리를 주웠다.하지만 두 사람 모두 바쁜 탓에 직접 키울 여유는 없었다.그래서 SNS에 입양자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었다.그런데 글을 올린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린이 하지율에게 메시지로 고양이를 맡고 싶다고 했다.이후 린은 매일 고양이의 근황을 전해왔다.그 덕분에 하지율과 린의 교류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유소린이 말했다.“이 친구, 손재주도
유소린이 말을 이었다.“아무리 그래도 한두 해 안에 이런 가문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단아 그룹은 진작 끝났겠지. ‘최상위 재벌가’라는 이름도 우스워지는 거고. 드라마에서도 그렇게는 안 써.”하지율이든 주용화든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연씨 가문, 강씨 가문, 심씨 가문, 단씨 가문, 손씨 가문처럼 뿌리가 깊은 가문들은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이상, 설령 가주가 사망하더라도 그들을 파산으로 몰아넣기란 쉽지 않았다.게다가 이들 가문의 권력 구조는 복잡하게 분산되어 있었다.가주의 판단 하나로 모든 것이 좌우되지 않도록 의사 결정 권한 역시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는 구조였다.하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상대를 무너뜨릴 방법을 고민하기보다는 시장 점유율을 분산해서 확보하는 게 현실적이야.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은 생각보다 많아. 애초에 단종건 회장님이 핵심 자원을 넘겨주지 않았다면...”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단아 그룹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끼어들 틈조차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시작도, 시련도 모두 단씨 가문 때문에 맞닥뜨린 거라고 볼 수 있어.”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지금 단계에서는 완전히 독립할 수 없으니까, 자회사 형태의 브랜드를 만드는 게 맞아. 단아 그룹 명성을 등에 업고 시작하면 사업 확장도 빠르고 시장을 나눠 가지는 과정에서도 단종건 회장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어.”유소린이 물었다.“그 계획으로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이익은 잘 알겠어, 다만 리스크는?”하지율이 싱긋 웃었다.“단번에 판을 뒤집을 수는 없다는 거지. 상대를 한 번에 무너뜨리는 그림은 안 나와. 그 과정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유소린이 어깨를 으쓱했다.“답답하면 어때. 이득을 보면서 불평까지 하는 건 욕심이 지나친 거지. 단종건 회장님이 우리를 돕는 건, 옛 인연이 마음에 걸려서지 단씨 가문을 무너뜨리라고 도운 건 절대 아닐 거야.”단보현이 어떤 사람인지와는 별개로, 단종건이 하지율
하지율은 눈앞에서 춤을 청하는 가면 쓴 남자를 바라봤다.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사람 같지가 않았고 묘하게 낯이 익었다.하지율은 자기도 모르게 남자를 몇 번 더 찬찬히 살폈다.지난 반년 동안 하지율도 적지 않은 연회에 얼굴을 비췄지만 꼭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대개 춤을 추자는 제안은 받지 않았다.그런데 이번에 하지율이 한참 상대를 바라보고만 있자 옆에 있던 유소린이 은근슬쩍 등을 떠밀었다.“지율아, 그냥 한 곡 춰. 지금 이 사람을 거절해도 조금 있으면 또 다른 사람이 올 거야.”하지율은 다시 한번 눈앞의 남자를 훑어봤다.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본 사람인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던 하지율은 결국 손을 내밀어 남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남자는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하지율의 왼손을 잡았다.그 손끝에는 어딘가 모르게 굳은 기색이 배어 있었다.남자가 쓰고 있는 건 늑대 모양의 가면이었고 얼굴 대부분이 가려져 있었기에 짙고 깊은 검은 눈동자만 희미하게 보였다.동양인 남자였다.하지율은 그제야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그런데 남자는 내내 말이 없었다.하지율이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데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결국 하지율이 먼저 말을 꺼냈다.“저희 어디서 본 적 있나요?”남자는 몇 초쯤 침묵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없습니다.”남자는 일부러 자신의 목소리를 낮춘 듯했다.약간 쉰 듯하기도 했고 발음도 어딘가 흐릿했다.하지율은 자기가 대체 어디서 이런 이상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러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탓인지 하지율의 발이 순간 엇나갔다.그 바람에 하지율은 실수로 상대의 발을 밟고 말았다.그러자 하지율은 얼른 사과했다.“죄송해요.”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괜찮습니다.”그러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한 곡이 끝나자 남자는 짧게 인사했다.“먼저 실례하겠습니다.”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떠나 버렸다.하지율은 남자가 멀어지는
정시온은 물었다.“그럼 형아는 채아 이모가 뭐가 좋아?”고윤택은 화가 나서 대답했다.“채아 이모는 나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줘.”정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그래서 너는 알레르기 생겼잖아.”고윤택은 계속해서 말했다.“채아 이모는 직접 음식도 만들어 줘.”정시온이 재빠르게 받아쳤다.“아. 해물 죽 줬다가 또 알레르기 생겼잖아.”고윤택은 마지막으로 외쳤다.“채아 이모는 바이올린도 잘 켜.”정시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응. 그래도 지율 이모한테 졌지.”...고윤택은 꽉 다문 입술을 풀고 천천히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하지율이라는 사실에 최혜은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싶었다.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어디까지나 수많은 일을 겪어온 인물답게 최혜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애써 감정을 눌러냈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오늘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자신의 명성은 한순간에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걸.‘모두 다 저 하지율 때문이야. 진짜 재수 없게 저런 게 끼어들어가지고... 우리 가문을 뒤흔드는 불청객이라니까!’곧 최혜은은 말을 꺼냈다.“하지율, 윤택이가
더 듣고 싶었는데 고지후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장하준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장하준, 거기서 뭐 해?”장하준은 하도 낯짝이 두꺼워서 들켜도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윤택이 찾았다길래 채아랑 보러 왔지.”장하준이 오자 하지율도 더 말하지 않았다.“먼저 갈게. 약속한 것 잊지 마. 내일 오전 10시, 꼭 나와.”하지율은 장하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뒤돌아 떠났고 장하준은 경멸하듯 콧방귀를 뀌며 고지후를 돌아보았다.“지후야, 내일 어디 가?”고지후의 표정은 태연했다.“
하지율은 그녀의 흥분된 표정을 보고 궁금해하며 물었다. “어떤 좋은 소식인데?”“지율이 네가 유명해졌어!”유소린은 흥분해서 자신의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넸다.“지난번에 정시온과 함께 대회에 참가했잖아. 어떤 좋은 사람이 네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어! 너 지금 엄청나게 유명해져서 팬이 천만명에 육박해. 듣기론 해외에서도 네가 바이올린 연주하는 영상이 빠르게 퍼지고 있대! 지율아, 너랑 선배 연주회 투어 준비 중이잖아. 지금이 네가 복귀할 절호의 기회야!”유소린은 훌륭한 에이전트가 되어 실력 있는 세계적인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