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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Penulis: 밤이불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7-17 23:15:41

하이랜드의 아침은 태초의 지구를 닮아 있었다.

낮게 깔린 안개가 끝없이 이어진 구릉을 타고 흘렀다. 짙은 초록의 목초지 사이로 젖은 갈색 흙이 드러났고, 보랏빛 헤더가 바람을 따라 낮게 흔들렸다.

사람이 이 땅에 이름을 붙이기 전부터 존재했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수백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대지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풀잎을 흔드는 바람과 희미한 새소리뿐이었다.

웨어하우스의 묵직한 철문이 열렸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순간, 선우가 본능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음.”

젖은 목재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냄새.

밤새 비를 머금은 흙의 묵직한 향.

수십 년 동안 습기를 품어온 돌벽의 냄새.

그리고 그 위에 겹쳐진, 달고 따뜻한 알코올의 잔향.

오랜 시간 동안 캐스크에서 증발한 원액이 공기 속에 남긴 흔적이었다.

선우는 문턱을 넘으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어제와 똑같은 웨어하우스였다.

수없이 늘어선 캐스크도, 천장 가까이 쌓인 먼지도, 오래된 나무와 돌벽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선우의 감각이었다.

어제는 끝없이 이어지는 캐스크와 묵직한 냄새, 그 안에 갇힌 시간의 양에 압도당했었다.

오늘은 달랐다.

냄새 하나에도 출처가 느껴졌다.

나무의 습도와 상태가 눈에 들어왔고, 캐스크마다 조금씩 다른 온도와 향이 피부에 닿았다.

어제는 시간을 들이마셨다면,

오늘은 시간의 결을 읽고 있었다.

“시작해볼까요.”

에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망설임이 줄어든 만큼 시선은 또렷해졌다.

에단이 한쪽에 놓인 캐스크 앞에서 멈췄다.

그가 손끝으로 거친 오크 표면을 천천히 쓸었다.

“어제 확인했던 구간입니다.”

선우가 한 걸음 다가섰다.

거대한 캐스크 위로 시선이 움직였다.

세월이 나무에 새겨놓은 굵은 결.

미세하게 벌어진 틈.

습도와 압력을 견디며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한 나무의 흔적.

선우는 캐스크 앞에서 호흡을 고르며 향을 확인했다.

아주 희미한 단서 하나가 코끝에 걸렸다.

손바닥을 오크통 표면에 올렸다.

거친 나뭇결이 손끝에 닿았다.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결을 훑다가—

툭.

캐스크를 두드렸다.

“이건…….”

선우가 캐스크를 바라본 채 말했다.

“생각보다 숙성이 빠르게 진행됐네요.”

에단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근거는요?”

“오크가 많이 열렸습니다.”

선우는 손끝으로 나뭇결을 짚었다.

“숙성 과정에서 알코올과 오크의 교환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아요.”

선우의 시선이 캐스크 위쪽을 향했다.

“초반 임팩트는 분명할 거에요. 향도 빠르게 올라오고요.”

손가락이 멈췄다.

“하지만 피니시가 끝까지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아요.”

선우의 시선이 캐스크 안쪽을 꿰뚫듯 향했다.

“중간부터 힘이 빠질 가능성이 커요. 첫인상은 강한데 마지막까지 같은 밀도로 이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에단은 캐스크를 바라봤다.

그의 손끝이 나무 표면에서 멈췄다.

“맞습니다.”

담담한 한마디였다.

선우는 그 말에 힘을 얻었다거나 안도하지 않았다.

대신 바로 다음 캐스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는 에단의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으로 캐스크를 읽고 있었다.

이번에는 선우가 먼저 걸음을 멈췄다.

웨어하우스 깊숙한 곳.

천장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조차 비껴가는 자리였다.

습도계를 확인했다.

“……”

다른 곳보다 습도가 높았다.

선우는 캐스크 앞에 서서 손바닥을 올렸다.

이번에는 감촉부터 달랐다.

단단했다.

오크가 아직 깊게 닫혀 있었다.

“이건 느린 캐스크 같은데요.”

에단의 시선이 캐스크로 향했다.

“오크가 아직 충분히 열리지 않았어요.”

선우가 나뭇결을 따라 손끝을 움직였다.

“향도 깊게 잠겨 있고요.”

에단이 캐스크 가까이 다가섰다.

선우는 그의 움직임을 의식하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지금 상태만 보면 표현력이 부족해 보일 수 있는데…….”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아.”

시선이 맞닿았다.

감청색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는 한 박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간을 더 주면 훨씬 길고 견고한 구조감을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단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낮은 빛을 머금은 눈동자까지 함께 휘어지자, 차갑고 완벽하게 정돈돼 있던 얼굴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좋네요.”

좋다고?

하지만 선우는 그 두 글자가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는 걸 알아들었다.

자신의 판단을 믿는다는 뜻.

그리고 그 판단을 더 보고 싶다는 뜻.

선우는 괜히 시선을 캐스크로 돌렸다.

방금 전까지 나무의 결을 읽고 있던 손끝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

문을 하나 더 밀어 열었다.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여긴…….”

“테이스팅 룸입니다.”

웨어하우스가 시간을 쌓아두는 곳이라면, 이곳은 그 시간을 꺼내 비교하는 자리였다.

길게 놓인 테이블 위에는 글렌케런 잔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맞추고 있었다.

잔마다 다른 호박색이 빛을 받아 흔들렸다.

어떤 액체는 맑고 밝았다.

어떤 것은 붉은 갈색을 머금었다.

잔을 기울일 때마다 유리벽을 타고 내려오는 레그의 속도도 달랐다.

같은 원액에서 시작했더라도 어떤 캐스크를 거쳤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이 만들어졌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느끼고.

비교하고.

골라내는 것.

“테이스팅 들어가죠.”

에단이 첫 번째 잔을 들었다.

선우도 따라 잔을 들었다.

에단이 잔을 천천히 기울이자 호박빛 액체가 유리벽을 따라 길게 흘렀다.

“버번 캐스크입니다.”

잔을 코끝으로 가져간 에단이 향을 확인했다.

바닐라.

은은한 캐러멜.

잘 익은 곡물에서 느껴지는 깨끗한 단맛.

한 모금을 머금은 뒤, 에단이 먼저 말했다.

“베이스로 쓰기엔 가장 안정적입니다.”

선우도 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첫맛은 부드러웠다.

캐러멜 같은 단맛이 혀끝을 감싸고, 뒤이어 바닐라와 오크의 은은한 향이 따라왔다.

화려하게 튀는 맛은 아니었다.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

선우가 잔을 내려놓았다.

“피니시는 짧지만.”

“…….”

“그래서 다른 개성을 받아들일 공간이 남죠.”

두 번째 잔.

셰리 캐스크였다.

색부터 달랐다.

붉은 기운을 머금은 짙은 마호가니.

잔을 돌리자 농도가 높은 액체가 유리벽을 천천히 타고 내려왔다.

향을 맡는 순간 말린 과실의 단맛이 먼저 올라왔다.

농축된 건포도.

무화과.

말린 자두.

뒤이어 따뜻한 스파이스가 혀끝을 스쳤다.

선우가 잔을 내려다봤다.

“셰리를 단독으로 쓰면 전체적인 밸런스가 기울어질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습니다.”

에단이 잔을 손끝으로 돌렸다.

“결국 원액이 얼마나 버티느냐의 문제죠.”

“…….”

“캐스크는 방향을 정해줍니다.”

잔 안의 액체가 천천히 원을 그렸다.

“하지만 본질은 원액이에요.”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류 직후의 결이 약하면 아무리 좋은 캐스크를 써도 끝까지 끌고 갈 수 없죠.”

“맞습니다.”

에단이 다른 샘플 잔 하나를 선우 쪽으로 밀었다.

“원액은 전부 같은 라인입니다. 스페이사이드.”

선우가 잔을 받아 들었다.

“증류 시점도 크게 차이 나지 않고요.”

에단이 설명을 이어갔다.

“스코틀랜드는 지역마다 성격이 꽤 다릅니다. 아일라는 피트가 강하고, 하이랜드는 증류소마다 편차가 큰 편이죠.”

“로우랜드는 가볍고요.”

“그렇죠.”

선우가 향을 다시 확인했다.

잔을 기울이고, 코끝에 닿는 향을 한 번 더 분리해냈다.

“스페이사이드라서 셰리를 얹어도 원액이 무너지지 않는군요.”

에단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이번 웃음은 아까와 달랐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드러난 치열은 가지런했고, 살짝 내려앉은 눈매 때문에 눈동자가 한층 깊어 보였다. 조명이 닿은 콧날과 턱선이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평소의 냉정한 얼굴에 아주 잠깐 장난스러운 남자의 표정이 얹혔다.

“…….”

선우는 무심코 그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리고 늦게 시선을 내렸다.

에단은 눈치챘는지 못 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본이 흔들리지 않으니까.”

손가락이 잔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쓸었다.

“캐스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원하는 방향으로 가져가기 좋죠.”

선우는 두 잔을 번갈아 바라봤다.

버번.

부드러운 단맛과 바닐라, 단정한 오크.

셰리.

농축된 과실과 깊은 단맛, 느리게 이어지는 스파이스.

한 모금.

그리고 또 한 모금.

버번의 선명한 구조 위에 셰리의 깊이가 겹쳐졌다.

다시 셰리를 맛본 뒤 버번으로 돌아가자,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차이가 더욱 선명해졌다.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었다.

선우의 머릿속에서 두 가지 풍미가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버번이 중심을 세우고,

셰리가 그 위에 깊이를 얹는다면?

버번이 가진 단정한 골격에 셰리의 깊이를 더하면, 서로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훨씬 입체적인 맛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선우가 두 잔을 나란히 놓았다.

시선이 잔에서 에단에게로 올라갔다.

“…….”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가 스스로 답을 찾아낼 때까지.

이 남자는 위스키를 너무 잘 알았다. 캐스크 하나를 만지는 손끝부터 달랐다. 잔을 기울이는 각도, 향을 맡는 호흡, 한 모금을 머금고 맛이 변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표정까지.

그래. 김선우.

여기까지 왔는데 뭐가 무서워.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한 번 더 머릿속으로 경우의 수를 따졌을 것이다.

내가 너무 앞서가는 건 아닐까.

아직 결정권도 없는 제가 괜히 의견부터 밀어붙이는 건 아닐까.

에단이 이미 생각해둔 방향이 따로 있는데, 내가 섣불리 끼어드는 건 아닐까.

혹시 내 판단이 틀렸다면?

괜히 자신 있게 말했다가 틀린 답을 내놓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까지 흐려지는 건 아닐까.

선우에게는 늘 그런 계산이 따라붙었다.

“…….”

그런데 저 확신 가득한 눈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망설임이 거짓말처럼 정리됐다.

그래.

이상하게 저 남자 앞에서는 자꾸만 난데없는 용기가 생기는 거였다.

저 눈앞에서는, 초라해지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선우의 손끝이 버번 잔 옆에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더블 캐스크로 가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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