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렇다면…….”
선우가 잔을 내려놓았다. “혹시 더블캐스크(Double Cask)로 가는 건 어떨까요?” 동시에. 조밀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단은 잠시 생각의 심해에 잠긴 듯 멈췄다가, 이내 확신을 베어 문 목소리로 답했다. “그 방향으로 가죠.” 결단은 짧았다. "버번으로 골조를 세우고." 그가 첫 번째 잔을 밀었다. "셰리로 입체감을 만든다." 이번에는 두 번째 잔. "그 방향으로 갑시다." 그는 이미 머릿속에서 모든 설계가 끝난 듯한 톤이었다. “NAS로 갑니다.” 선우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짧은 정적 끝에 선우가 미세하게 미간을 좁히며 우려를 표했다. "숙성연도를 버린다구요?" No Age Statement. 라벨에 숙성연도를 표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선우가 토끼 눈을 했다. “……조금은 과감한 선택이 아닐까요?” 에단이 잔을 들어 빛에 비췄다. 황금빛이 유리 안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과감하죠. 하지만 숫자는 친절한 설명은 될지언정, 결과까지 말해주진 않으니까요.” 잠시 멈춘 그가 낮게 덧붙였다. “베이스가 되는 원액은, 18년 숙성으로 갑니다. 그 정도의 세월은 퇴적되어 있어야 무엇을 얹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뼈대가 굵어야 화려함도 무게를 갖는 법이죠.” “…….” “하지만.” 아주 짧고 강렬한 악센트. 그가 상체를 조금 더 선우 쪽으로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단 한 뼘 남짓으로 좁혀졌다. 은은한 위스키의 잔향과 그의 체온이 조용히 선우의 경계를 침범했다. “우리가 팔려는 건 고작 18년이라는 숫자가 아닙니다.” 곧게 뻗은 콧대 아래로 단단한 턱선이 백색 조명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감청색 눈동자는 흔들림 하나 없이 선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빈틈이 없었다. “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공기, 그리고ㅡ.” “…….” “그때의 감정. 그것들을 숫자가 남겨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배어 있었다. 모든 것이 이상할 만큼 사람의 정신을 흐트러뜨렸다. 선우는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렸다. “지독하게 불친절한 마케팅이네요. 소비자들에게 너무 많은 숙제를 내주는 거 아닙니까?” 에단의 입꼬리도 아주 느리게 올라갔다. “그 숙제를 기꺼이 풀게 만드는 게 우리가 할 일이죠.” 그가 잔을 들어 선우의 잔 가까이로 가져왔다. 챙. 맑은 울림이 두 사람 사이를 가볍게 스쳤다. "우리는 위스키가 아니라." “…….” "기억의 심박수를 팔 겁니다." 에단은 선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꼭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 5월의 스코틀랜드는 비의 계절이라 부르기엔 모호했으나, 마른 날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시기였다. 낮은 구름이 안개처럼 내려앉았고, 예고 없이 찾아온 비는 머물지 않고 금세 흘러 내렸다. 테이스팅을 마친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증류소 근처의 오래된 바였다. 낮은 조명 아래, 벽면을 가득 메운 위스키 병들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묵묵히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현지에서의 경험은 중요하니까요.” 에단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담담했다. 선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는 비에 젖은 도로가 길게 이어졌다. 가로등 불빛이 물웅덩이 위에서 황금빛으로 번졌다가, 자동차 한 대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조용히 산산이 흩어졌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정말 스코틀랜드에 와 있구나. 선우가 바 테이블에 손을 얹었다. 세월을 견딘 나무의 온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에단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잔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향을 맡고, 액체를 굴리는 모든 움직임이 오래 연습된 사람 특유의 정교함을 품고 있었다. 선우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끝을 따라가고 있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잔을 감싸는 방식도, 목울대가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순간도, 시선을 내렸다 다시 드는 짧은 호흡까지도.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위스키를 배우러 왔는데, 시선은 거의 사람을 시음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에단의 시선이 느리게 올라왔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네요.” 어느새 내일이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짧게 흘러갔다. “……그러게요.” 에단은 잔을 한 번 굴린 뒤 조용히 물었다. “이번 출장은 어떠셨습니까.”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덧붙였다. “인상적이었나요?” 인상적이었느냐고. 선우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인상적이었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한 것 같네요.” 에단은 작게 웃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아주 괜찮은 출장이었네요.” 명쾌한 결론이었다. 선우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 덕분에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어요. 감사해요.” 이번엔 에단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비에 젖은 창밖을 바라보며 잔을 천천히 굴리던 그가 낮게 말했다. “I’d say it was mutual.” (내 생각엔, 서로에게 그랬던 것 같네요.) 그는 쑥스러운 듯 보이기도 했다.“…….” “…….”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숨결에 섞인 희미한 위스키 향까지 느껴질만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선우가 눈을 들었다. “정말 안 갈 겁니까?” “…….” 끄덕. 선우의 목이 움직였다. 다음 순간. “……!” *** 입술이 맞닿았다. 처음에는 놀랄 만큼 가벼웠다.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처럼. 이윽고 손끝이 선우의 뺨을 감쌌다. 안개가 성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돌 틈 사이로 달빛이 길게 스며들었고, 산 능선 위에 낮게 걸린 별들은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잠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지가 뺨을 아주 느리게 쓸었다. 꿈이라면 느낄 수가 없는 온기였다. “눈 감아요.” 선우는 눈을 감았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바람 소리도. 안개 사이로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오직 체온과, 숨결 사이로 희미하게 번지는 위스키 향만 선명했다. *** 입술이 떨어졌다. 선우가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
젖은 풀 냄새가 짙었다. 발밑에서 이끼가 축축하게 눌렸고, 낮게 깔린 안개가 발목을 휘감았다. 몇 분쯤 걸었을까. 안개 너머로 거대한 돌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우가 걸음을 멈췄다. “……여긴.” “발베니 성입니다.” 에단이 말했다. “지금은 폐허지만,” 그가 무너진 성벽을 바라봤다. “한때는 이 하이랜드를 지키던 요새였죠.” 무너진 벽. 금이 간 계단. 이끼가 뒤덮은 돌. 800년이라는 시간이 돌 사이에 켜켜이 박혀 있었다. “…….” 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사이로 고성이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장엄하고 거대했다. 특히 산의 능선을 따라 걸린 별빛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검은 지평선 위에 하나씩 박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우와.” 별이 이렇게나
더프타운의 아침은 차가웠다. 3번 창고에 도착하자 이미 현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냉각기는 복구되어 있었지만, 폭풍이 남긴 습기와 열의 흔적은 여전히 창고 안에 남아 있었다. 에단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현지 책임자인 캘럼에게 다가간 그는 짧게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스코틀랜드 억양이 섞인 영어로 상황을 쏟아냈다. “냉각기 복구 시점.” 캘럼이 즉시 답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습도는?” “정상 범위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창고를 바라봤다. “어제 우리가 확인한 건 가능성이었어요.” 잠시 멈췄다. “오늘 필요한 건 확신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에단의 시선이 선우에게 향했다. “김 과장님.” “네.” “3번 창고 전체 캐스크를 다시 봅니다.” 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전부요?” “전부.” *** 작업은 힘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열 번째. 서른 번째. 캐스크마다 마개를 열고 샘플을 뽑았다.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입안에서 굴리고. 기록하고. 버리고. 다시 다음 캐스크. 같은 캐스크라도 숙성 위치와 열의 영향을 받은 정도에 따라 향과 질감이 미세하게 달랐다. 어떤 것은 바닐라가 지나치게 강했다. 어떤 것은 오크의 탄닌이 입안을 말려버렸다. 어떤 것은 향은 화려했지만 모틀락과 붙이는 순간 중심이 사라졌다. 선우의 머릿속이 점점 숫자와 향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87번 캐스크 앞에서 멈춰 섰다. 선우는 천천히 마개를 열었다. 퐁. 공기가 바뀌었다. “…….” 잔을 돌렸다. 색을 확인했다. 코끝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입안에 아주 조금 머금었다. “…….”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부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멀리서 도표를 확인하던 에단이 바로 시선을
“그리고.”낮은 목소리가 불꽃 사이로 스며들었다.“당신이 아직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내가 당신을 좋아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쿵.눈치없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눈앞의 남자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거리가 조금 좁혀졌다.하지만 닿지는 않았다.그가 언제든 물러날 수 있고, 선우 역시 언제든 피할 수 있는 거리.“그냥 당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보라고 하는 겁니다.”선우는 숨을 죽였다.“그리고 지금.”에단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당신은 나를 무서워하면서도.”그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도망가지는 않잖아요.”“……그건.”선우가 변명하려 했다.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질문 끝났으면 이제 자요.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에단이 잔을 내려놓았다.“벌써요?”아니.벌써가 아니라.선우는 어안이 벙벙했다.“…….”잠깐 전까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게 우스울 정도였다.잠이나 자라는거지?이 남자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선우는 헛웃음을 삼켰다.“본부장님.”“네.”“이 상황에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요?”에단이 눈을 들었다.“…….”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아까 그 말.”“어떤 말.”선우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주황빛 불꽃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지금도 내가 무섭습니까?”음.대답하지 못했다.“…….”괜히 고개를 돌렸다.얼굴이 뜨거웠다.벽난로의 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에단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무섭느냐고.그래.무서웠다.그런데 처음 그가 무서웠던 이유와 지금 무서운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처음에는 이 남자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그런데 지금은.선우가 그를 돌아봤다.에단의 눈빛이 불꽃 너머에서 느리게 휘었다.“……네.”반대였다.이 사람이 정말 진심일까 봐.“하.”말을 내뱉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웃음이 너무 초라해서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였다.“엄청 무서워요.”“왜죠?”“본부장님이…….”진짜일까봐요.선우가 말을 삼켰다. 대신 잔을 손안에 깊숙이 움켜쥐었다.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병신인데.선우는 잔을 내려다봤다.“가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손끝에 닿은 유리잔이 차갑게 느껴졌다.“본부장님이 원래 여자들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고, 나한테도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죄책감이 덜해지니까.선우가 또 말을 삼켰다.“…….”에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다만 그녀가 삼킨 말의 의미까지 알아들은 사람처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데 자꾸 아니더라고요.”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가 아빠 일 때문에 정신없이 뛰쳐나갔을 때도.”“…….”“다음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일을 대신 처리해놓으셨을 때도.”“…….”“오늘 여기까지 와서도.”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입장이 줄곧 같으시네요, 본부장님은.”“선우 씨니까요.”“그러니까요.”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윤오에게도.그 누구에게도.“윤오는 제가 아무리 오래 좋아해도 저를 선택하지 않았어요.”“…….”“그런데 본부장님은.”선우가 숨을 삼켰다.“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꾸 저를
“본부장님은 왜 저예요?”에단의 잔이 입술 앞에서 멈췄다.“…….”이번에는 선우도 피하지 않았다.술기운 때문인지, 폭풍 때문인지, 아니면 이 남자가 만들어낸 이상할 만큼 안전한 침묵 때문인지 모르겠다.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회사에 저보다 유능한 사람 많잖아요.”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선우가 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루시 씨처럼 진짜 프로인 사람도 있고.”잠시 숨을 삼켰다.“그런데 왜 굳이…….”선우가 에단을 바라봤다.“저예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달그락.작은 소리가 오두막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불꽃이 한 번 크게 일렁였다.그제야 선우는 알아차렸다.에단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느슨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그는 무릎을 세운 채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주황빛 불길이 날카롭게 정돈된 옆얼굴을 스쳐 지나갔다.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나도.”에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낮은 목소리였다.“지금의 선우 씨처럼 흔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선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에단은 여전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르벨라라는 이름은 달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는 몰랐어요.”짧은 웃음이 흘렀다.웃음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을 비웃는 소리에 가까웠다.“해야 할 일은 넘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