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렇다면…….”
손끝에 남아 있던 온기가 테이블 위로 옮겨갔다. “혹시 더블 캐스크(Double Cask)로 가는 건 어떨까요?” 말이 떨어진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에단의 시선이 버번과 셰리, 두 잔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 “…….” 선우가 괜히 무릎 앞으로 손끝을 모았다. 내가 너무 나갔나? “그 방향으로 가죠.” 확신이 실린 목소리였다. “네? 정말요?“ 에단이 첫 번째 잔을 선우 쪽으로 밀었다. “버번으로 골조를 세우고.” 이번에는 두 번째 잔을 밀었다. “셰리로 입체감을 만듭니다.” 두 잔이 나란히 놓였다. 꼭 처음부터 한 세트였던 것처럼. 에단의 목소리에는 이미 완성된 그림이 들어 있었다.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NAS로 갑니다.” 선우의 눈이 커졌다. “……NAS요?” “No Age Statement.” 라벨에서 숙성 연도를 빼겠다는 뜻이었다. 선우가 토끼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니…….” 숙성연도는 소비자가 병을 집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숫자이자, 가격표를 납득시키는 가장 쉬운 근거였다. 숫자가 올라갈수록 소비자는 자연스럽게 더 오래 숙성된 원액이라고 이해했고, 그 시간에 기꺼이 더 많은 돈을 지불했다. 특히 프리미엄 위스키라면 더했다. 그런데 그걸 지운다고? “숙성 연도를 버린다고요?” 황금빛 액체가 조명 아래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가 잔을 기울이자 빛이 액체를 통과하며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번졌다. “과감한 선택이죠.” 에단의 시선이 잔 너머로 선우에게 향했다. “하지만 숫자는 친절한 설명은 될지언정.”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결과까지 설명해주지는 않죠.” 선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가 팔려는 건 18년이라는 숫자가 아닙니다.” 그가 상체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거리가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선우의 시야에 에단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백색 조명을 받은 콧날은 매끄럽게 곧았고, 턱선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감청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깊었다. 에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함께했던 사람.” 한 단어가 천천히 떨어졌다. “그날의 공기.” 그의 시선이 선우의 눈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깐의 호흡. “그때의 감정.” 선우의 손가락이 잔 옆에서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걸 숫자가 남겨주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배어 있었다. 모든 것이 이상할 만큼 사람의 정신을 흐트러뜨렸다. “지독하게 불친절한 마케팅이네요.” 선우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습니까?” “소비자들에게 너무 많은 숙제를 내주는 거 아닌가요?” 에단의 입가가 천천히 휘었다. 이번에는 웃음이 분명했다. 차갑고 단정했던 얼굴에 장난기가 얹히면서 눈꼬리가 부드럽게 내려갔다. 낮게 깔린 조명 아래 선명한 턱선과 입술의 곡선이 한꺼번에 살아났다. “…….” 선우가 또 한 번 시선을 붙잡혔다. “그 숙제를 기꺼이 풀고 싶게 만드는 게 우리의 일이죠.” 그가 잔을 들어 올렸다. 선우의 잔 가까이 가져갔다. 챙. 맑은 울림이 두 잔 사이에서 번졌다. “우리는 위스키가 아니라.” 선우의 눈이 그에게 머물렀다. 에단의 시선은 선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기억의 심박수를 팔 겁니다.” 이 남자는 정말 위스키를 닮았다. 혀끝에 남은 한 모금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다른 표정을 드러내듯, 에단 역시 알면 알수록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어느 순간부터 그다음 맛을 기다리고 있었다. *** 5월의 스코틀랜드는 비의 계절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그렇다고 마른 날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낮은 구름이 산자락을 타고 내려왔고, 하늘이 한 번 밝아졌다 싶으면 가느다란 비가 다시 유리창을 두드렸다. 비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도로를 적시고, 돌벽을 검게 물들이고, 젖은 풀잎 끝에 작은 물방울을 남긴 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테이스팅을 마친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증류소 근처의 오래된 바였다. 낮은 천장. 짙은 나무색의 벽. 수십 년을 견딘 듯한 바 테이블. 벽면을 가득 채운 위스키 병들은 조명 아래에서 하나의 오래된 컬렉션처럼 빛나고 있었다. “우와…….” 선우가 바 안으로 들어서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현지에서의 경험도 중요하니까요.” 에단이 말했다. 창밖으로 비에 젖은 도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물웅덩이에 황금색으로 번졌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갈 때마다 그 빛이 길게 찢어졌다가 다시 물 위로 흩어졌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선우는 비로소 실감했다. “…….” 정말 스코틀랜드에 와 있었다. 한국에서 자료를 뒤지고, 회의실에서 숫자를 맞춰보고, 수많은 샘플을 비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여기까지 와서 직접 캐스크를 만지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원액을 맛보고. 그리고 지금은 그 원액이 태어난 곳에서 에단과 마주 앉아 있었다. 선우가 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오래된 나무의 매끈하게 닳은 표면이 손바닥에 닿았다. “Another dram of the Speyside, please.”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Of course. The same one?” 에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Not quite. Give me something with a little more character this time.” “Something peaty?” 짧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에단의 손은 잔을 놓지 않았다. 긴 손가락이 잔의 몸통을 느슨하게 감싸고 있었다. “No. Keep the smoke for another night.” 마디가 또렷한 손가락. 손등을 따라 가늘게 솟은 힘줄. 잔을 돌릴 때마다 손목이 아주 조금씩 움직였고, 그 움직임에는 불필요한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 그가 향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였다. 짙은 속눈썹 아래로 시선이 내려갔다. 코끝을 스치는 향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한 모금. 그리고 천천히 삼켰다. 그때 목울대가 움직였다. 목 아래에서 시작된 선이 턱을 향해 부드럽게 이어졌다. “…….” 목울대가 다시 움직였다. 선우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잠깐. 선우가 황급히 눈을 돌렸다. 왜 죄다 흐릿하고, 저 남자의 목울대만 또렷한 건데. 목울대. “…….” 선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Do you want to try this one?” “네?” 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에단이 자신의 잔을 살짝 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가 잔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Go on.” 선우는 잔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그의 손가락을 스쳤다. 순간 또다시 시선이 목으로 갈 뻔했다. 안 돼. 선우는 이를 악물고 잔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향을 맡았다. “…….” 이번에는 제대로 집중해야 했다. 그런데 코끝에 위스키 향이 닿는 순간, 옆에서 에단이 낮게 웃었다. “Careful.” 선우가 눈을 들었다. “뭐가요?” 에단이 잔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봤다. “Too much at once.”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받아들이지 말라니, 무슨? “Whisky. Not me.” 선우의 머릿속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삐이이이이이익—. “……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네요.” 에단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러게요.” “이번 출장은 어떠셨습니까?” 하이랜드의 안개를 마주했던 아침. 낯선 웨어하우스에서 캐스크를 하나씩 만져보던 순간. 처음으로 스스로 캐스크의 숙성 상태를 읽어냈을 때 느꼈던 짜릿함. 그리고 지금. 비 내리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바에서, 맞은편에 앉은 이 남자와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나요?” 질문은 간단했다. 그런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인상적이었다는 말로는…….” 선우의 시선이 천천히 옮겨갔다. 눈 앞의 남자로. “조금 부족한 것 같네요.” 정말 그랬다. 전부 하나의 장면처럼 떠올랐다. “그렇다면.” 에단이 잔을 손끝으로 한 바퀴 굴렸다. 황금빛 액체가 유리벽을 타고 천천히 돌았다. “아주 괜찮은 출장이었네요.” “네.” 웃음이 한 번 더 새어 나왔다. “덕분에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어요.” “…….” “감사해요.” 에단의 손이 잔 위에서 멈췄다. “…….” 평소라면 바로 시선을 맞춰왔을 남자가 이번에는 창밖을 바라봤다. “I’d say it was mutual.” (내 생각엔, 서로에게 그랬던 것 같네요.)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윤오의 검은색 SUV가 선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김선우.”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오가 내렸다. 단정한 셔츠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괜찮아.” 웃는 얼굴이 영 어색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무거웠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혹시 새벽에라도 연락이 왔을까 싶어 눈을 뜰 때마다 손부터 뻗었다. 알림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깨어났다. 에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상하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물어볼 곳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찮기는. 눈 밑이 다 꺼졌구만.” 윤오가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빠 상태는 어때?” “오전 검사 결과는 다 좋대. 어제보다 안정적이고, 담당 교수님도 회복 경과를 괜찮게 보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제야 선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다행이다…….” “그래. 이제 한시름 놔도 돼.”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에 걸렸다. 윤오가 운전하는 서울의 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했다. 출근길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횡단보도 앞에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밤새 술을 마신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로변 카페에서는 직원이 야외 입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만 어딘가 잘못 도착한 사람 같았다. “…….” 상하이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면서.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바쁠 수 있었다. 지사에 문제가 생겨 직접 날아
고요하던 정원에 진동음이 길게 번졌다. 선우를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휴대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에단이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가 놓았다.“Ethan Lowell speaking.”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영어가 쏟아졌다.“Slow down. Start from the beginning.”(천천히 말하세요. 처음부터.)조금 전까지 선우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부드러운 기색이 빠르게 걷혔다. 그는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다만 손에 들린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에단의 얼굴만으로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차례 짧게 질문했고, 마지막에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Don’t send anything else. Preserve every original file. I’ll review it myself.”(추가로 아무것도 보내지 마세요. 원본 파일은 전부 보존하고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 에단이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무슨 일이에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일정이 바뀌었습니다.”“네?”“오늘 오전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가세요. 항공편은 변경해 뒀습니다.”***공항 전용기 터미널 앞에 차가 멈췄다.“큰일은 아니죠?”그의 얼굴을 살폈다. 상하이 지사에서 걸려 온 전화, 통화 내내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 전화를 끊은 뒤 평소보다 빠르게 이어지던 지시들.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정을 정리했지만, 그럴수록 선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전화하셨을 때 표정이…….”“선우 씨.”에단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걱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독이려는 듯, 그녀의 뺨
“여기 있었군요.”에단이었다.선우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화면을 끄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에단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든 휴대폰에 잠깐 머물렀다.“연락이 왔습니까?”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오한테서요.”에단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무슨 일 있습니까?”“그냥 안부요.”작게 끄덕인 에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에단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나와 조금 더 걸을까요?”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깊게 들어왔다.“오늘 밤은 제가 독점해도 되겠습니까?”선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본부장님.”“네.”“질문이 많으세요.”에단이 낮게 웃었다.테라스 끝에는 작은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연회장의 음악은 유리문 너머로 물러나 있었다. 현악기의 선율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고, 정원에는 낮에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짙은 녹음을 머금은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맺혀 달빛을 받아냈다.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돌담 아래 소담하게 피어 있었고, 젖은 풀과 꽃잎에서 우러난 싱그러운 향이 밤공기 속에 번졌다.정원 너머로는 코모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산자락을 따라 늘어선 마을의 불빛이 수면 위에 길게 번졌다. 검푸른 물결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조용히 흩어질 때마다 불빛도 함께 잘게
그때였다. 셔츠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우가 걸음을 늦추며 화면을 확인했다. [윤오] ㄴ선우야, 아버님 수술 방금 잘 끝났어. 경과도 아주 좋대. 이제 걱정 마. 한순간,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 선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경과가 좋다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안도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와닿았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아버지가 괜찮아졌다는 말.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우 씨?” 몇 걸음 앞서가던 에단이 돌아봤다. 선우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진열대의 조도와 설치 일정을 따지던 눈빛에서 날카로운 업무의 기색이 걷혔다. 그가 선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
무라노의 아침은 수로를 가르는 바포레토의 엔진음으로 시작됐다.물살을 밀어내는 둔중한 소리가 오래된 건물 사이를 돌아 들어왔다. 창틀에 걸린 햇빛은 밤새 식지 못한 방 안의 공기를 무심하게 밀어냈다. 여섯 월의 햇살은 유난히 투명했다. 어젯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과 입맞춤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침대 위로 떨어진 빛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선우는 홑이불을 걷어 내고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눈을 감으면 어젯밤이 떠올랐다.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에단의 목소리. 입술이 닿기 직전, 마지막까지 대답을 기다리던 눈빛. 그리고 그가 자신을 안아 주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의 품을 찾아 들어갔던 자신의 몸.무엇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서로를 끌어 안았던 순간이 자꾸만 생각났다.에단.입안에서 소리 없이 이름을 굴려 본 선우는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 올렸다.미쳤나 봐.어제까지는 본부장님이었는데.물론 지금도 회사에서는 본부장님이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어젯밤 이후로 그 호칭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그렇다고 아침부터 달라진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할수록 사소한 것까지 의식하게 될 게 뻔했다.선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평소보다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 얼굴은 다행히 멀쩡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일어났습니까?”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의 발걸음이 멎었다.에단은 테라스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수트에 단정한 셔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넥타이.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