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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맥 메이커
부정맥 메이커
Author: 밤이불

Prologue.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3 16:44:58

어둡게 가라앉은 바 안에서는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오래된 위스키 배럴 속에 갇혀 있던 공기처럼 눅눅했고, 한여름의 열병처럼 묘하게 뜨거웠다.

낮은 조명 아래 잔을 기울일 때마다 금빛 액체가 천천히 흔들렸다.

낡은 스피커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가 먼지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ㅡ Elvis Presley - Can’t help Falling in Love.

느리고, 달콤하고, 그래서 더 사람 심장을 긁어대는 종류.

“…….”

선우가 턱을 괸 채 잔을 빙글 돌렸다. 잔 안쪽을 타고 흘러내리는 위스키의 흔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ㅡ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현명한 사람들은 사랑에 쉽게 뛰어들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바보들만이 앞뒤도 재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법이라고.

“하.”

선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잔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툭.

“난 바보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선우가 덧붙였다.

“똥멍청이.”

“또 시작이네.”

맞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

흰 셔츠.

단정하게 여민 카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옷차림.

이런 낡고 어두운 바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반듯한 얼굴.

권윤오.

“네가 뭘 알아?”

괜히 시비나 한 번 털어보기.

“또 똥차야?”

윤오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이번엔 뭔데.”

선우의 연애사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바람.”

“또?”

또는.

선우가 눈을 흘겼다.

첫 연애도 그랬고.

바로 전 연애도 그랬고.

끝은 늘 비슷했다.

그러니까, 바람만 세 번째라고.

“…….”

윤오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확률적으로 네 문제일 가능성이 높은데.”

“닥쳐.”

선우가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독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긁고 내려갔다. 그제야 억눌러두었던 비참함이 뒤늦게 역류했다.

하지만 자신을 이토록 별볼일없게 만든 건 전남친의 배신 따위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ㅡ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선우가 가사를 천천히 입안에서 굴렸다. 그러면서 빈 잔을 다시 채웠다.

꼴꼴꼴.

“그러니까.”

금빛 액체가 잔을 채우고, 유리벽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나는 바보라는 거지.”

“야.”

윤오의 손이 뻗어왔다.

탁.

샌님같은 얼굴과는 어울리지않는 굵직한 손이 잔이 아니라 선우의 손목을 잡았다.

“안 놔?”

괜히 심술이나 부려보기.

“그만 마셔.”

“싫다면.”

“너 취했어.”

“안 취했거든.”

“하여간에 똥고집은.”

권윤오가 웃었다.

“…….”

권윤오.

너에게서 도망을 쳐야겠다.

“거봐.”

정말 이번에는.

“취했잖아.”

“아니라고.”

선우가 홱 몸을 일으켰다.

“나 아직 멀쩡—.”

한 줄 알았는데?

세상이 기울었다.

“어?”

발밑이 휘청했다.

“어, 어어…….”

아.

잠깐.

나 넘어간다.

탁.

이마가 테이블 모서리에 닿기 직전이었다.

윤오의 팔이 먼저 움직였다.

한쪽 팔이 선우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손이 뒤통수를 받쳤다.

순식간이었다.

“…….”

“…….”

그 바람에 둘 사이의 거리가 단숨에 소멸했다.

서로의 숨결이 섞이고, 권윤오 옷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가 위스키 향을 모조리 덮어버릴 만큼.

“…….”

선우는 그대로 굳었다.

“…….”

“…….”

윤오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흐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권윤오의 얼굴만은 선명했다.

반듯한 콧날.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

“…….”

시종일관 무덤덤하던 눈이 지금만큼은 제 얼굴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참, 새카만 게 예쁘기도 하다.

“…….”

시선이 눈에서 입술로 천천히 내려갔다.

멈췄다.

다시 시선이 올라갔다.

눈이 마주쳤다.

새검은 눈동자 깊숙이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도망칠 곳도 없이, 시야 한가운데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나를 담고 있는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너.”

쿵.

심장이 튀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

“…….”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이 눅눅한 공기 속에서 취한 척 입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쩌적.

어디선가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친구.

그 두 글자로 십이 년을 버텨온 마지막 안전장치에, 아주 가느다란 금이 갔다.

그리고 그 얇은 균열 사이로, 감춰두었던 마음이 기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쿵.

쿵, 쿵.

쉿.

조용히 좀 해.

제 주인의 사정도 모르고 제멋대로 펌프질을 해대는 몹쓸 심장아.

선우가 속으로 심장을 다그쳤다.

그때였다.

윤오의 손이 움직였다.

“……!”

손끝이 선우의 뺨에 닿았다.

뜨거웠다.

“……선우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쿵.

심장이 또 한 번 무모하게 뛰었다.

선우가 숨을 삼켰다. 윤오의 손끝이 뺨을 감싼 채 아주 조금 움직였다.

“너.”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부정맥인 것 같아.”

정적.

“뭐라고?”

선우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잘못된 게 내 귀인가.

아니면 저 자식의 주둥이인가.

“심박이 불규칙해.”

권윤오는 진심이었다.

“…….”

선우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붙들고 있는 손은 여전히 뜨거웠고, 숨결은 여전히 가까웠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도 그대로였고, 눈앞의 얼굴은 여전히 미치도록 잘생겼는데.

문제는.

그 입에서 나온 말이.

“……부정맥?”

“응.”

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

심장내과 전문의 아니랄까 봐.

“심장이 너무 빨리 뛰잖아.”

“…….”

“정상 아니야.”

확인사살.

“내일 시간내서 병원으로 와.”

“…….”

“알코올 영향이라고 치더라도 확인은 해보자.”

그러니까 그 원인이 너라고, 이 미친 의사야.

***

“관계라…….”

에단이 낮게 읊조렸다.

찻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느릿했다.

달그락.

작은 소리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왜 내 눈을 피합니까.”

선우의 손끝이 멈췄다.

“선우 씨가 지금 나한테 화를 내는 건.”

에단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내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어서 아닙니까?”

“……본부장님.”

끝내 피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이었다.

꾹 눌러두었던 감정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울컥 치밀었다.

억울했다.

화가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부장님.”

선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척 묻고 있다는 게 화가 났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거예요?”

에단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짙은 검은 눈동자가 선우를 향해 고요히 가라앉았다.

“제가 권윤오를 십이 년이나 마음에서 못 놓고 있었던 거.”

지금은 제 마음을 주워담는 게 우선이었다.

“본부장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차갑게 정돈된 이목구비. 빛을 받아 날카롭게 선 콧날. 감정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듯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

모든 것이 지나치게 완벽해서, 마치 처음부터 흐트러지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

끝까지 태연한 척 버티면서도.

“그 시간 속에 있던 저를 억지로 끌어당겨서 옆에 앉혀 놓은 것도 본부장님이니까요.”

보고도 못본 척 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선우는 제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그런데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저를 헤집어 놓으셨으면.”

선우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눈가가 붉어졌다.

“제가 흔들리는 것 정도는 본부장님이 감당하셔야죠.”

알고있었다.

난 지금 제일 만만한 곳으로 화살을 돌렸다.

병신.

그의 손을 잡은 건 자신이면서.

선우가 제 입술을 깨물었다.

“…….”

에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

그는 늘 그렇듯 참고 있는 듯 보였다.

말하지 않은 것들을.

보여주지 않은 마음을.

모르는 척 지나간 순간들을.

그 모든 걸 아주 오랫동안 혼자 삼키고 있었다.

“감당하라고요?”

에단이 되물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늘 정확하고 차분했던 말투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선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하고 있습니다, 지독한 감당.”

선우의 입술이 아주 조금 벌어졌다.

평소라면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락하지 않았을 눈이었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달랐다.

두 눈에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질투인지, 애틋함인지, 아니면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욕망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뒤엉킨 감정이었다.

분노로 쏟아내는 말이었다면 차라리 반박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이 낡은 원액을 붙잡고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는 것부터가, 나한텐 지독한 감당이니까.”

“…….”

“하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은 그저 기억하라고.

“내가 당신을 끌어낸 건, 고작 적당히 시간을 때우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에단의 눈이 선우를 똑바로 꿰뚫었다.

“당신의 십이 년을 단숨에 덮어버릴 만큼 압도적인 피니시를 주겠다고 약속했죠.”

억눌러온 모든 마음이, 선우에게로 쏟아졌다.

가라앉혀둔 감정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그 남자 곁에서 마음껏 흔들리세요. 그리고 깨달으세요.”

“…….”

“당신이 돌아올 곳은 그 지루하고 다정한 십이 년이 아니라, 나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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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맥 메이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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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맥 메이커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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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맥 메이커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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