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낯익은 천장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선우는 한참을 눈만 깜빡였다. 천장이 세 번쯤 흔들리고 나서야 시야가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억도. 아니. 기억 비슷한 것이 돌아왔다. 낮게 가라앉은 눈빛. 바짝 가까워졌던 숨결. 제 뺨을 감싸던 뜨겁고 단단한 손. 그리고— ‘……선우야.’ 쿵.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너 부정맥인 것 같아.’ “뭐?” 선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시 정적. “아…….” 꿈이 아니었다. 선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머릿속에 들어 있던 납덩어리가 한 박자 늦게 따라 올라왔다. 우욱. “…….” 누가 머리채를 양손으로 휘어잡아 흔드는 것 같았다. 숙취였다. 아니. 숙취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어제의 자신이 오늘의 자신에게 저지른 테러였다. 선우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꿈이야.” 그래. “꿈이겠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제발.” 선우가 이불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기억은 친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선명했다. 권윤오의 품에 기대었던 감각. 눈앞까지 내려왔던 짜증나는(잘생긴) 얼굴. ‘너 부정맥인 것 같아.’ Replay. ‘너 부정맥인 것 같아.’ “아아아악!” 선우가 이불을 걷어차 버렸다. 침대 위에서 미친 몸부림이 시작됐다. “미친 김선우!” 퍽. “왜 그랬어!” 퍽. “왜 하필 권윤오야!” 베개가 무고하게 구겨졌다. 선우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괴로웠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키스할 뻔했다. 그것도 누구와? 십이 년째 좋아하는 친구와. 그런데 더 끔찍한 건 그 순간 불쑥 들었던 불결한 생각이…… “……미쳤나 봐.” 선우가 손가락 사이로 천장을 노려봤다. 이건 사고였다. 술이 저질렀고. 감정이 공범이었으며. 자신은 피해자였다. ……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탁. 침대 옆에 놓인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 화면을 켰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윤오] 부재중 전화 2통 그 아래로. [민재] 부재중 전화 6통 선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 현실이 돌아왔다. 어젯밤의 키스 미수 사건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인간이 있었다. 메시지가 줄줄이 쌓여 있었다. [선우야 다 오해야 진짜.] [어제는 상황이 좀 그랬어.] [내가 설명할게.] [진짜 설명할 수 있어.] [전화 좀 받아봐.] [나 진짜 너 많이 사랑해.] 선우의 시선이 마지막 문장에 멈췄다. 사랑해. 픽. 웃음이 났다. “사랑은 무슨.”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그럴듯했다. 이번에는 정말 다를 수도 있다는 가련한 자기최면. 늘 똑같았다. 언제나 그랬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얼굴은 늘. “…….” 선우가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문제다.” 그러니까 선우는 가끔 다른 남자를 만났다. 혹시. 정말 혹시라도. 권윤오보다 더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 정말 이 지독한 짝사랑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권윤오를 잊기 위해 시작한 연애는 번번이 도돌이표를 찍었다. 마치 원을 그리듯. 도망쳐도 결국 같은 자리. “지긋지긋하다.” 그 순간. 진동이 울렸다. 지이잉—. 선우가 흠칫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그놈의 권윤오. “…….” 받지 말까. 혹시 기억 못 하면? 아니. 기억하고 있으면? 선우의 머릿속에서 온갖 재난 시나리오가 순식간에 펼쳐졌다. 그러나 권윤오 거부권같은 게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선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ㅡ “일어났어?” 권윤오의 목소리는 어제와 똑같았다. 낮았고. 차분했고. 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선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 ㅡ “머리는?” “죽겠어.” ㅡ “어쩐지 혼자 달리더라.” 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기억하고 있네. “…….” 끝났다. 선우가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ㅡ “일단 와.” “……어디를?” ㅡ “어디긴.” 아니지? ㅡ “병원.” “나 출근해야 돼.” ㅡ “반차 써.” “야!” 뚝. 통화가 끊겼다. “…….”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침대에 다시 주저앉았다. “미친놈.”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쿵. 또 뛰었다. “……너 때문에 그런 거잖아.” 물론 들을 사람은 없었다. 선우는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결국 옷장을 열고 있었다. 그놈의 병원에 가기 위해. *** 병원 복도는 지나치게 밝았다. 눈이 시릴 만큼 새하얀 조명 아래, 선우의 발걸음은 몇 번이고 멈췄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돌아가. 이 냄새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선우는 결국 여기까지 왔다. 권윤오면 만구땡이었다. 권윤오라는 이름 세 글자면 늘 그랬다. 머리는 가지 말라고 하는데, 발은 이미 그가 있는 곳을 향했다. 피하려고 할수록 더 깊이 끌려 들어갔다. 마치 오래전부터 제 안에 박혀 있던 거대한 관성이,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윤오에게 밀어 넣는 것처럼. “…….” 선우가 복도 바닥에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꼭 포로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걸음을 질질 끌었다. [권윤오 대표원장] 결국 진료실 앞에 도착했다. 이름 석 자를 보는 순간 어제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숨이 가까웠던 거리. 시선이 부딪히던 순간. 그리고— 으악. 선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김선우, 진짜 미쳤어.” 더 생각하기 전에 문을 밀어 젖혔다.“…….” “…….”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숨결에 섞인 희미한 위스키 향까지 느껴질만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선우가 눈을 들었다. “정말 안 갈 겁니까?” “…….” 끄덕. 선우의 목이 움직였다. 다음 순간. “……!” *** 입술이 맞닿았다. 처음에는 놀랄 만큼 가벼웠다.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처럼. 이윽고 손끝이 선우의 뺨을 감쌌다. 안개가 성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돌 틈 사이로 달빛이 길게 스며들었고, 산 능선 위에 낮게 걸린 별들은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잠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지가 뺨을 아주 느리게 쓸었다. 꿈이라면 느낄 수가 없는 온기였다. “눈 감아요.” 선우는 눈을 감았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바람 소리도. 안개 사이로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오직 체온과, 숨결 사이로 희미하게 번지는 위스키 향만 선명했다. *** 입술이 떨어졌다. 선우가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
젖은 풀 냄새가 짙었다. 발밑에서 이끼가 축축하게 눌렸고, 낮게 깔린 안개가 발목을 휘감았다. 몇 분쯤 걸었을까. 안개 너머로 거대한 돌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우가 걸음을 멈췄다. “……여긴.” “발베니 성입니다.” 에단이 말했다. “지금은 폐허지만,” 그가 무너진 성벽을 바라봤다. “한때는 이 하이랜드를 지키던 요새였죠.” 무너진 벽. 금이 간 계단. 이끼가 뒤덮은 돌. 800년이라는 시간이 돌 사이에 켜켜이 박혀 있었다. “…….” 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사이로 고성이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장엄하고 거대했다. 특히 산의 능선을 따라 걸린 별빛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검은 지평선 위에 하나씩 박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우와.” 별이 이렇게나
더프타운의 아침은 차가웠다. 3번 창고에 도착하자 이미 현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냉각기는 복구되어 있었지만, 폭풍이 남긴 습기와 열의 흔적은 여전히 창고 안에 남아 있었다. 에단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현지 책임자인 캘럼에게 다가간 그는 짧게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스코틀랜드 억양이 섞인 영어로 상황을 쏟아냈다. “냉각기 복구 시점.” 캘럼이 즉시 답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습도는?” “정상 범위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창고를 바라봤다. “어제 우리가 확인한 건 가능성이었어요.” 잠시 멈췄다. “오늘 필요한 건 확신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에단의 시선이 선우에게 향했다. “김 과장님.” “네.” “3번 창고 전체 캐스크를 다시 봅니다.” 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전부요?” “전부.” *** 작업은 힘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열 번째. 서른 번째. 캐스크마다 마개를 열고 샘플을 뽑았다.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입안에서 굴리고. 기록하고. 버리고. 다시 다음 캐스크. 같은 캐스크라도 숙성 위치와 열의 영향을 받은 정도에 따라 향과 질감이 미세하게 달랐다. 어떤 것은 바닐라가 지나치게 강했다. 어떤 것은 오크의 탄닌이 입안을 말려버렸다. 어떤 것은 향은 화려했지만 모틀락과 붙이는 순간 중심이 사라졌다. 선우의 머릿속이 점점 숫자와 향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87번 캐스크 앞에서 멈춰 섰다. 선우는 천천히 마개를 열었다. 퐁. 공기가 바뀌었다. “…….” 잔을 돌렸다. 색을 확인했다. 코끝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입안에 아주 조금 머금었다. “…….”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부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멀리서 도표를 확인하던 에단이 바로 시선을
“그리고.”낮은 목소리가 불꽃 사이로 스며들었다.“당신이 아직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내가 당신을 좋아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쿵.눈치없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눈앞의 남자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거리가 조금 좁혀졌다.하지만 닿지는 않았다.그가 언제든 물러날 수 있고, 선우 역시 언제든 피할 수 있는 거리.“그냥 당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보라고 하는 겁니다.”선우는 숨을 죽였다.“그리고 지금.”에단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당신은 나를 무서워하면서도.”그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도망가지는 않잖아요.”“……그건.”선우가 변명하려 했다.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질문 끝났으면 이제 자요.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에단이 잔을 내려놓았다.“벌써요?”아니.벌써가 아니라.선우는 어안이 벙벙했다.“…….”잠깐 전까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게 우스울 정도였다.잠이나 자라는거지?이 남자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선우는 헛웃음을 삼켰다.“본부장님.”“네.”“이 상황에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요?”에단이 눈을 들었다.“…….”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아까 그 말.”“어떤 말.”선우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주황빛 불꽃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지금도 내가 무섭습니까?”음.대답하지 못했다.“…….”괜히 고개를 돌렸다.얼굴이 뜨거웠다.벽난로의 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에단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무섭느냐고.그래.무서웠다.그런데 처음 그가 무서웠던 이유와 지금 무서운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처음에는 이 남자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그런데 지금은.선우가 그를 돌아봤다.에단의 눈빛이 불꽃 너머에서 느리게 휘었다.“……네.”반대였다.이 사람이 정말 진심일까 봐.“하.”말을 내뱉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웃음이 너무 초라해서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였다.“엄청 무서워요.”“왜죠?”“본부장님이…….”진짜일까봐요.선우가 말을 삼켰다. 대신 잔을 손안에 깊숙이 움켜쥐었다.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병신인데.선우는 잔을 내려다봤다.“가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손끝에 닿은 유리잔이 차갑게 느껴졌다.“본부장님이 원래 여자들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고, 나한테도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죄책감이 덜해지니까.선우가 또 말을 삼켰다.“…….”에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다만 그녀가 삼킨 말의 의미까지 알아들은 사람처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데 자꾸 아니더라고요.”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가 아빠 일 때문에 정신없이 뛰쳐나갔을 때도.”“…….”“다음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일을 대신 처리해놓으셨을 때도.”“…….”“오늘 여기까지 와서도.”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입장이 줄곧 같으시네요, 본부장님은.”“선우 씨니까요.”“그러니까요.”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윤오에게도.그 누구에게도.“윤오는 제가 아무리 오래 좋아해도 저를 선택하지 않았어요.”“…….”“그런데 본부장님은.”선우가 숨을 삼켰다.“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꾸 저를
“본부장님은 왜 저예요?”에단의 잔이 입술 앞에서 멈췄다.“…….”이번에는 선우도 피하지 않았다.술기운 때문인지, 폭풍 때문인지, 아니면 이 남자가 만들어낸 이상할 만큼 안전한 침묵 때문인지 모르겠다.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회사에 저보다 유능한 사람 많잖아요.”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선우가 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루시 씨처럼 진짜 프로인 사람도 있고.”잠시 숨을 삼켰다.“그런데 왜 굳이…….”선우가 에단을 바라봤다.“저예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달그락.작은 소리가 오두막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불꽃이 한 번 크게 일렁였다.그제야 선우는 알아차렸다.에단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느슨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그는 무릎을 세운 채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주황빛 불길이 날카롭게 정돈된 옆얼굴을 스쳐 지나갔다.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나도.”에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낮은 목소리였다.“지금의 선우 씨처럼 흔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선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에단은 여전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르벨라라는 이름은 달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는 몰랐어요.”짧은 웃음이 흘렀다.웃음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을 비웃는 소리에 가까웠다.“해야 할 일은 넘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