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낯익은 천장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초점이 겨우 맞물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억은 파편화되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빛,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느껴지던 숨결, 그리고 제 뺨을 감싸 쥐던 단단하고 뜨거운 손가락. 나는 홀린 듯 권윤오를 올려다보았고, 그의 시선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내 입술로.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던 정적 속에서 윤오가 아주 조금 고개를 숙였을 때—. ‘……선우야.’ 고막을 간질이던 낮은 음성. 쿵.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너 부정맥인 거 같아.’ 뭐라고? “뭐야?” 선우가 눈을 깜빡였다. “아…….”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머릿속의 무게추가 한 박자 늦게 따라붙으며 관자놀이를 마구 때려댔다. 숙취의 통증이 뇌세포 하나하나를 망치로 때리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올렸다. 꿈인가? 꿈이겠지? “…….” 그냥 죽자, 김선우. 콱 죽어버리자. 선우가 제 얼굴을 이불로 둘둘 감아 봉인해버렸다.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이 차라리 머릿속에서 상영 중인 흑역사 필름보다 나았다. “죽어! 그냥 죽어!” 퍽ㅡ, 퍽ㅡ. 선우가 침대 위에서 발버둥을 쳤다. 이불이 여기저기 형편없이 주름졌다. 어제는 꽤 마셨다. 아니, ‘꽤’라는 부사는 이 대참사에 너무 예의 바른 표현이었다. 명백히, 그리고 아주 화려하게 선을 넘었다. 원래 이 정도로 자신을 방치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글로벌 위스키 브랜드 한국지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해온 그녀에게 술은 업무의 연장선이었고, 스스로의 주량 컨트롤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제는 감정이 이성을 앞질렀고, 위스키는 그저 그 뒤를 따르는 훌륭한 공범이었을 뿐이다. 근데 왜 하필! 권윤오냐고! 선우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괴로워. 너무 너무 괴로웠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어제의 '키스 미수 사건'의 충격 때문에 뇌가 정지한 건지 분간이 안 갔다. 이게 다 내 술기운이 만들어낸 화려한 망상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이윽고 화면을 확인하던 선우의 손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윤오] 부재중 전화 2통 [민재] 부재중 전화 6통 전남친. 구질구질한 현실이 카톡 더미로 쌓여 있었다. [민재] (7) ㄴ[선우야 다 오해야 진짜] ㄴ[어제는 상황이 좀 그랬어] ㄴ[내가 설명할게] ㄴ[설명할 수 있어] ㄴ[전화 좀 받아봐] ㄴ[진심이야 나 한번만 봐주라] ㄴ[나 진짜 너 많이 사랑해] “…….” 사랑. 유독 그 두글자가 망막에 선명하게 찍혔다. 픽. 이윽고 선우의 입술 사이로 자조 섞인 웃음이 비져나왔다. 그녀의 모든 연애는 데자뷰처럼 똑같은 궤적을 그렸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을 거라는 걸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그 확신이 빗나가는 기적을 바랐을 뿐이었다. 항상 비슷한 부류. 비슷한 이유로 시작하고, 비슷하게 실망하고, 비슷하게 마침표를 찍는다. “……내가 문제겠지.” 툭 내뱉고 나니까,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괜찮은 사람도, 내 영혼을 채워줄 운명도 아니라는 것쯤은. 대충 훑어봐도 견적이 나오는 오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기어코 가벼운 관계들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윤오] 다시 진동. 이번엔 전화였다. “…….” 이걸 받아, 말아. 선우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나에게 거부권이라는 게 있을리가. 결국 수화기를 귀 가까이에 들이 밀었다. “……여보세요.” ㅡ “일어났어? 머리는?” “죽겠어 그냥.” ㅡ “어쩐지 혼자 달리더라.” 아이씨, 망상이 아니었네. 선우가 이불을 목 밑으로 끌어당겼다. ㅡ “일단 와.” “……어디를?” ㅡ “어디긴 어디야 병원이지.” “나 출근해야 돼.” ㅡ “반차써 그럼.” 뚝. ……뭐지? 선우가 벙쪘다. 그리고. 쿵. 심장이 또 튀어 올랐다. “…….” 그녀가 조용히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다 놓았다. 짱구보다 못 말리는 건 내 심장이 아닐까. 여기 이쯤에 있는 게, 심장 위치일까. 아니면 권윤오라는 이름표가 붙은 전용 좌석일까. '친구'라는 이름의 안전장치를 깨뜨릴 용기가 없어서, 선우는 번번이 시선을 억지로 돌려야만 했다. 지금껏 스쳐 간 남자들이 정말 하나같이 똥차였던 걸까, 아니면 내가 그런 부류만 골라 만나는 자해를 반복한 걸까. 돌아보는 시선의 끝은 결국 자신을 향했다. 왜 또, 선을 넘을 뻔했냐고. 그리고 왜, 그 위태로움이 싫지만은 않았냐고. “…….” 아니, 좋았잖아 너. 눈을 질끈 감았다. 망가져도 손해 볼 것 없는 남자들만 골라 시작한 도피성 연애. 윤오보다 더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가련한 자기최면. 서른 넷이나 먹고, 사랑을 끝내는 법보다 도망치는 법만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징-징-징-. 이번엔 핸드폰이 세번 울렸다. [윤오] (3) ㄴ[와.] ㄴ[병원.] ㄴ[농담 아니야.] 쿵. 심장이, 또. 기어코 제 멋대로 뛰기 시작한다. *** 병원 복도는 여전히 밝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조명 아래서 선우의 발걸음은 몇 번이나 멈춰 섰다. 공기 중에 떠도는 소독약 냄새가 돌아가라 경고하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발을 들인 건 지우려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 거대한 관성 때문이었다. 권윤오면 만구땡이었다. 권윤오라는 이름 세 글자면, 이성은 멈춰 서라 명하는데도 몸은 이미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쏠리고 만다. 피해 가려 몸부림쳐도 결국엔 빨려 들어가고 마는 비겁한 이끌림. 선우는 병원 복도 바닥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가 꼭 그에게 붙들린 포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걸음을 질질 끌다 결국 진료실 문앞에 섰다. [권윤오 대표원장님] 어제의 장면이 비릿할 만큼 생생하게 망막을 긁고 지나갔다. 숨이 가까웠던 거리, 시선이 부딪히던 순간, 그리고—. “……미쳤지, 미쳤어.” 더 생각하기 전에 문을 밀어 젖혔다.“뭐야?”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다. 회사 정문 앞,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긋지긋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지는 얼굴. 민재였다.“……선우야.”그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평화롭던 공기가 단숨에 비틀렸다. 윤오와 걷던 길 위에 남아있던 가슴 떨리는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회사까진 왜 왔어?”“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보고…. 계속 연락했는데…….”“차단했거든.”정곡을 찔렸다. 그가 멍청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비굴함은 이내 집요함으로 변질되어 또 끈질기게 거리를 좁혀왔다.“그래도 우리 얘기 좀 하자.”“할 얘기 없어.”“나 진짜 이번에는…….”“됐어.”더 들어 볼 이유도 없었기에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이미 바닥까지 드러낸 관계에 미련 따위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남이야 그러던 말던 민재는 끈질겼다. 그의 손이 선우의 팔을 향해 뻗어지던 찰나, 묵직한 그림자가 들어섰다.“그만하지 좀.”언제 다가왔는지 윤오가 선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민재의 미간이 단번에 일그러졌다.“권윤오?”윤오는 대답 대신 선우의 상태를 짧게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민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는 건조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회사까지 와서 뭐 하는 짓이야.”민재의 시선이 윤오와 선우. 두 사람을 번갈아 향하더니 이윽고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니네 진짜….”그의 시선이 선우에게 날카롭게 꽂혔다.“나랑 헤어지고 바로 붙어먹는 게 또 권윤오야?”“뭐? 김민재, 너 말 똑바로 해.”선우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였다. 민재가 답답한 듯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선우야, 내가 말했잖아. 어제 그거 다 오해라고—.”“오해?”기어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내가 도대체 무슨 시간 낭비를 한 거지?“바람 피운 게 오해야?”결국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다보니 회사 입구를 채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
권윤오가 있었다. 차트를 넘기고 있는 손, 고개를 드는 타이밍, 모두 평소와 다름이 없이 무결했다.“왔네.”“어.”짧은 인사와 대답이 오갔다. 윤오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앉아.”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 질렀다. 윤오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물린 찰나, 선우의 머릿속으로 어제의 장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제발 좀 잊어버리고 싶었다.결국 화상을 입은 듯 먼저 시선을 꺾었다. 12년이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의 세월 동안 숨소리 하나, 눈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해왔던가. 권윤오의 두 눈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의식되는 거였다.“……야.”결국 선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어제 있잖아.”용기를 냈는데.“심전도 검사 한번 하자.”선우의 해명이 허공에서 맥없이 잘려 나갔다.“……뭐?”“금방 끝나.““야, 나 멀쩡ㅎ…….”“확인만 하는 거야.”선우가 입을 합죽이했다. 확인이라니. 지금 네 눈앞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심장 소리를, 기계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선우는 제 마음을 들킬까 겁이 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심하게 차트만 넘기는 저 잘생긴 옆얼굴이 야속해졌다.“금방하고 점심이나 같이 하자. 배고프잖아.”어르고 달래는 투였다. 항상 이런 식이다. 12년째 반복되는 이 뻔한 술래잡기는 그녀의 속만 시커멓게 태웠다.“갑자기 왜 난린데.”선우의 날 선 물음에 윤오가 들고 있던 차트를 ‘툭’ 소리 나게 덮었다. 두 눈.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제일 두려워하는 눈이 자신을 향했다.“어제 심박 이상 있었어.”윤오가 선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눈동자 너머로 숨겨진 맥박 하나까지 다 읽어낼 것 처럼 고요한 시선으로.“…….”간질 간질, 가슴 쪽이 신경
낯익은 천장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초점이 겨우 맞물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억은 파편화되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낮게 가라앉은 눈빛,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느껴지던 숨결, 그리고 제 뺨을 감싸 쥐던 단단하고 뜨거운 손가락.나는 홀린 듯 권윤오를 올려다보았고, 그의 시선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내 입술로.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던 정적 속에서 윤오가 아주 조금 고개를 숙였을 때—.‘……선우야.’고막을 간질이던 낮은 음성.쿵.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너 부정맥인 거 같아.’뭐라고?“뭐야?”선우가 눈을 깜빡였다.“아…….”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머릿속의 무게추가 한 박자 늦게 따라붙으며 관자놀이를 마구 때려댔다.숙취의 통증이 뇌세포 하나하나를 망치로 때리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올렸다. 꿈인가? 꿈이겠지?“…….”그냥 죽자, 김선우.콱 죽어버리자.선우가 제 얼굴을 이불로 둘둘 감아 봉인해버렸다.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이 차라리 머릿속에서 상영 중인 흑역사 필름보다 나았다.“죽어! 그냥 죽어!”퍽ㅡ, 퍽ㅡ.선우가 침대 위에서 발버둥을 쳤다. 이불이 여기저기 형편없이 주름졌다.어제는 꽤 마셨다. 아니, ‘꽤’라는 부사는 이 대참사에 너무 예의 바른 표현이었다. 명백히, 그리고 아주 화려하게 선을 넘었다.원래 이 정도로 자신을 방치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글로벌 위스키 브랜드 한국지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해온 그녀에게 술은 업무의 연장선이었고, 스스로의 주량 컨트롤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제는 감정이 이성을 앞질렀고, 위스키는 그저 그 뒤를 따르는 훌륭한 공범이었을 뿐이다.근데 왜 하필! 권윤오냐고!선우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괴로워. 너무 너무 괴로웠다.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어제의 '키스 미수 사건'의 충격 때문에 뇌가 정지한 건지 분간이 안 갔다.이게 다 내 술기운이 만들어낸 화려한 망상아닐까?
어둡게 가라앉은 바 안에선 나무 냄새가 났다. 오래된 위스키 배럴 속에 갇힌 것처럼 눅눅하고, 또 열병처럼 뜨거운 향. 낮은 조명 아래서 잔 속의 원액이 흔들릴 때마다 금빛 파동이 일렁였다. 낡은 스피커에선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가 먼지처럼 깔리고 있었다.ㅡ Elvis Presley - Can’t help Falling in Love.느리고, 달콤하고, 그래서 더 잔인하게 사람 심장을 긁어대는 종류. 선우는 턱을 괸 채 잔을 기울였다. ㅡ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ㅡ현명한 이들은 사랑에 투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바보들만이 앞뒤 재지 않고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고.“하.”그래. 난 바보 똥멍청이다. 선우가 자조했다. 잔이 테이블에 내려앉으며 둔탁한 비명을 질렀다.“또야?”윤오가 물었다. 흰 셔츠, 지나치게 단정한 카라, 그리고 조명이 낮게 깔린 이 고루한 공간과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무결한 얼굴. 권윤오. 그는 선우의 가장 오래 된 ‘친구’ 였다.“또 똥차야.”“이번엔 뭔데.”선우의 사랑 실패는 그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바람.”“또?”또는. 선우가 눈을 흘겼다. 첫 연애, 그리고 바로 이전 연애 전부 다 상대방의 바람으로 막을 내렸었다.“바람만 세 번째네.”윤오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확률적으로 너 문제일 가능성이 높은데.”“닥쳐.”선우가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식도가 타들어가는 듯한 열기가 번지자, 참았던 비참함이 역류했다. 그녀가 느끼는 비참함의 이유는 전남친의 배신.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ㅡ ‘But I can’t help…’ ㅡ흘러나오는 가사를 선우가 나직이 읊조렸다. 손은 새로 잔을 채우고 있었다. 꼴꼴꼴. 유리잔을 타고 액체가 레그를 그렸다.“그러니까, 나는 바보라는 거지.”“야.”윤오가 손을 뻗어 선우의 잔을 가로챘다. 그리고 짐짓 엄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그만 마셔. 취했어.”저 표정.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