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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잊은 거 아니지?

Penulis: 차노운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4-29 23:26:29

브리아나는 문간에 선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 빳빳한 셔츠 깃, 대충 서 있어도 뭔가 압도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탄탄한 어깨는 교복의 각을 더 세웠다. 주머니에 한 손을 찌르고 브리를 노려보는 남자.

좋게 말하면 영화배우 같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금수저 같았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하며, 브리를 향해 싸늘하게 식은 표정.

아 이 남자는.... 황미영은 그 얼굴을 알아봤다.

저 얼굴.

설거지 끝나고, 시어머니 자는 틈에 몰래 이어폰 꽂고 보던 하이틴 무비.

하이틴 여주 나오는 로맨스 드라마.

거기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었다.

재벌 밀러홀딩스의 아들 에이든.

성격은 더럽고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는데, 이상하게 여주한테만 집착하는 남자 주인공.

‘하. ㅈ됐다.’

생각해보니 자기 얼굴도 그랬다.

지나치게 예쁘고, 지나치게 반짝이고, 남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얼굴.

딱 미영이 밤마다 몰래 보던 하이틴 여주였다.

”어쩐지 낯이 익다했더니.“

이야기가 번개처럼 브리의 뇌리를 스쳤다.

그럼 여기는 있는 집 자식들만 산다는 LA 베버리힐스 타운.

그리고 나는 금발 머리 퀸카 여주다.

…아니, 잠깐.

브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분명 본 적 있는 이야기 같은데, 늘 그렇듯 본 지 좀 돼서 결말만 어렴풋했다.

에이든이랑 이어진 건 확실한데, 굵직굵직한 사건들만 흐릿하게 기억이 났다.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으니까.

금발 여주가 끝에 가서 울었나, 웃었나.

꼭 이런 건 내 일이 되면 기억이 안 난다니까.

‘아오. 남의 연애 구경은 재밌었지. 하 내가 그 여주가 될 줄이야.’

“안녕.”

브리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히 밀리기 싫었다. 먼저 인사하자.

이런 이야기에서 남주가 먼저 기세를 잡으면, 여주는 꼭 끌려다니게 되어 있으니까.

에이든 입꼬리가 아주 조금 비틀렸다.

“오늘은 꽤 친절하네?“

그 말이 어째 아까 아버지가 한 말과 비슷해서 브리아나는 더 불안해졌다.

‘뭐야. 내가 원래 얼마나 개차반이었길래 다들 첫마디가 저거야.’

알렉산더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늦기 전에 데려가.”

“네”

에이든은 당연한듯 턱짓했다.

“가자, 브리.”

가자고?

누가 들으면 어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줄. 이래뵈도 난 대한민국 출신이야.

브리아나는 순간 머뭇했지만, 샐리와 알렉산더가 너무도 당연한 얼굴로 둘을 보고 있는 바람에 얌전히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현관을 나서는 순간 바깥 공기가 얼굴을 훑었다.

마당 끝엔 낮게 깔린 회색 스포츠카가 서 있었다. 차 문이 위로 들리는 꼴을 보니 가격부터 무서운 종류였다.

‘이제 차도 문이 위로 열리네. 사람 사는 세상 맞아?’

브리아나는 속으로만 욕을 삼키고 조수석에 앉았다.

가죽 시트가 몸을 감싸듯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에이든이 운전석에 앉자 차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은은한 향수 냄새.

잘 정리된 대시보드.

“너.”

에이든이 시동을 걸며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좀 이상한데.”

브리아나의 심장이 철렁했다.

역시. 이 남자도 눈치가 빠른 쪽이었다.

“사람이 매일 어떻게 같냐. 참네.”

최대한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에이든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슬쩍 웃었다.

“그건 맞아. 근데 넌 원래 이런 식으로 말 안 했거든“

”으..으응. 하하.“

’오늘은 최대한 닥치고 있자.‘

브리아나는 창밖만 봤다.

집 앞에서부터 풍경이 달랐다.

잘 깎인 울타리, 햇빛에 번들거리는 잔디, 정문 앞 분수까지. 미국 드라마에서나 보던 동네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해외에 한 번 꼭 가보고 싶었던 여자.

영어로 쇼핑도 해 보고 싶고, 멋진 사람들 구경도 하고 싶었던 여자.

황미영은 횡단보도 앞에서 죽었는데,

황미영의 꿈은 지금 말도 안 되게 반짝이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 생각이 들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울어?”

에이든이 갑자기 물었다.

브리아나는 화들짝 놀라 자기 볼을 만졌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브리는 빠르게 금색의 긴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들을 가녀린 손으로 닦아냈다.

“안 울었거든.”

“그럼 왜 그래.”

“원래 아침엔 좀 촉촉해.”

말을 뱉고 나서도 황당했다.

무슨 개소리야, 황미영.

그런데 에이든은 피식 웃었다.

“그래. 재밌네.“

재밌다니. 아예 개그캐로 밀어붙어야하나?

차가 언덕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멀리 푸른 하늘과 야자수가 보였다. 진짜 미국이었다.

간판도, 신호등도,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도 전부 영어였다. 그런데 그게 이제는 낯설면서도 읽혔다.

브리아나는 창문 쪽에 시선을 둔 채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 진짜 미국이네…”

“뭐?”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든은 잠깐 브리아나를 봤다가 다시 전방을 봤다.

그 시선이 짧았는데도 이상하게 뜨거웠다. 이 몸은 이 남자를 원래 알고 있었다. 아니, 아는 정도가 아니라 반응하고 있었다. 가슴이 괜히 빠르게 뛰었다.

‘진정해. 몸아. 난 얘 처음 본다고.’

한참 말없이 달리던 에이든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제도 연락 씹더니, 오늘은 또 딴사람 같고.”

“……어제?”

“왜. 그것도 기억 안 나?”

브리아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 안 난다. 진짜로. 어제 이 몸이 누구랑 뭘 했는지, 브리아나 로즈가 에이든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아무것도.

에이든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설마.”

차가 신호 앞에 멈췄다.

붉은 불빛이 에이든 얼굴에 걸렸다. 잘난 콧대며 턱선이 더 선명해졌다.

그가 몸을 살짝 기울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서 브리아나는 숨을 멈췄다.

“너 설마,”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우리 계약 내용도 잊은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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