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무릎

Author: 차노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30 17:58:26

“너 설마.”

말리부 언덕 위 붉은 신호등 불빛이 에이든의 얼굴을 비스듬히 물들였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 반듯한 콧대, 사람을 내려다보는 게 당연시된 실루엣.

“우리 계약한 거 까먹은 거 아니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걸 까먹을 수 있나.”

에이든은 무시하듯 피식 웃었다. 그는 브리가 진짜로 기억 못한다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하는 것 같았다.

브리는 휘황찬란한 헐리우드 사인에 뺏긴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계약연애.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이틴 퀸카 여주와 프레스티지 사립고 킹카 남주의 뻔한 그림.

원작에서도 그 설정 정도는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늘 그렇듯, 조각들만 기억난다는 거였다. 열혈 시청자라면 몰라도.

브리는 어떻게 하면 계약 내용을 알 수 있을까 잠깐 고심했다.

에이든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굉장히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차 안에는 비싼 가죽 냄새와 에이든 향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브리는 괜히 창밖만 보는 척을 했다. 야자수, 언덕,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이 요망한 남주에게서 내용을 확인하고 싶어 브리는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안달하는 찰나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도로의 신호등 불빛이 빨간불이 되었다.

‘자, 하나아 두울 셋.’

에이든이 고개를 돌려 말을 걸려는 찰나 브리는 있는 힘껏 에이든에게로 달려들었다.

“흐읍!!!!”

에이든의 입술에 브리의 오동통하고 조그마한 입술이 겹쳐들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이든은 운전대를 잡고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브리의 코끝에 오랫동안 맡아본 적 없던 남자 향수 냄새가 훅 끼쳐들었다.

뜨뜨미지근한 입술을 감각이 브리의 온 몸에 베여드는듯했다.

’이쯤이면 됐어‘

브리는 그리고선 아무 일 없었다는듯이 앉았다.

“아이씨 이게 돌았나. 우리 키스는 금지한 거 몰라?!“

옳지. 그렇지. 걸려들었다.

에이든은 드러운 게 묻었다는듯 뒷자석으로 손을 뻗어 물티슈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무슨 결벽증 환자 마냥 두터운 입술을 박박 닦아냈다.

“에이. 진짜. 퉤퉤.”

에이든은 차문 밖으로 못 먹을 것을 먹은듯 침을 뱉었다. 그게 브리의 입술이라도.

네가 찾아와선 싹싹 빌어놓고, 이 따위로 사람을 농락해?”

“……내가?”

브리는 어리둥절하다는듯 표정을 짓다 이내 감췄다.

“어.. 그래 내가 음 그랬지. 그리고선? 어쨌든 확실하게 하고 가자고.“

브리는 핸드폰을 들어 녹음기를 켰다. 계약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뭐하는 거야?“

”계약서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나중에 또 딴 말하면 안되니까 녹음해두려고.”

사실 계약서가 어디있는지 몰랐다.

에이든은 신호가 바뀌자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스포츠카가 언덕길을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로즈가 자금 막힌 거, 너도 알았고. 네 아버지 숨통 붙이려면 우리 집 돈 필요한 것도 알았고.“

그 말들은 이상하게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들었다.

가슴께가 서늘하게 식었다. 이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앞에서 자존심이 바닥까지 긁히던 감각을.

그리고 에이든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무릎도 꿇었고.”

브리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내, 내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에이든은 어깨를 한 번 움직였다. 꼭 별일 아니라는 사람처럼.

“한 번만 도와달라고. 싹싹. 손 발이 닳도록.”

브리는 잠깐 말을 잃었다.

계약연애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릎이라니.

원작에선 그런 장면들쯤은 늘 생략하기 일쑤였으니까. 반짝이는 학교, 킹카 남주, 퀸카 여주. 독자는 그 뒤의 예쁜 장면만 본다. 브리아나 로즈가 어떻게 에이든 밀러 옆자리를 차지했는지는 대충 건너뛴 채, 완성된 그림만 소비했다.

아차차.

생각보다 꽤 짠한 여주인공이었다.

왈가닥한 성격에, 하는 거라곤 예쁘게 꾸미고 쇼핑하는 게 낙이었던 백치미 여주인공.

몰락해가는 가문 앞에선 그것조차 꽤 사치였을 테지.

‘꽤… 처절한 애였잖아.’

그동안은 브리아나를 그저 예쁘고 멍청하고, 에이든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여주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생각보다 맹물은 아니었다. 가진 걸 지키려고, 제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릎까지 꿇을 수 있는 애였다.

그런데 에이든은 그런 브리 속도 모르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 남들 앞에선 웃고, 팔짱 끼고, 잡부일 좀 하고.”

환생했더니 신세는 뭐 비슷한 거 같았다. 아. 열여덟에 엄청 이쁜 것만 빼면.

“그러면 너는, 넌 이 계약애서 뭘 얻는데?”

“너를 여친으로 두고, 바네사랑 약혼을 무기한 미룰 수 있달까? 뭐, 우리집에서 탐탁치않아하겠지만 좋은 핑계잖아?”

브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날 좋아한 건 아니고?”

끼이이익-

그 말에 에이든은 차를 멈춰세웠다. 에이든의 브레이크 소리가 귀가 찢어질듯 들렸다.

브리는 헛웃음을 삼켰다.

‘요놈 보소.’

“야, 운전 똑바로 안해?”

잔소리하던 습관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하.. 이게 진짜 보자 보자하니까. “

잘생기면 다냐. 저 얼굴 아니었으면 진작 한 대 맞았지. 브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니까 이딴 짓 하지마라. 확 죽여버리는 수가 있다.“

에이든은 백미러를 보면서 티슈로 입가를 정돈했다.

응. 이미 벌써 죽었지롱. 이런 위협 같은 건 남편으로 인해 면역이 생긴 지 오래였다.

박진수, 찌질한 전 남편 보다 막 대하는 이 놈이 더 나으려나.

하여간 남자들이란.

브리는 차갑게 말했다.

”알았어. 시키는 대로 할게.“

에이든은 만족한듯이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아오.”

에이든은 백미러로 입술에 뭐가 묻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겹쳐오는 입술의 촉감이 싫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런 값싼 행동은 질색이다. 개학 첫날부터 짜증나게 하네.

역시 브리아나구나. 전형적인 골드디거. 텅텅 빈 금발머리. 휴. 내가 이런 앨 좋아한다면 세상이 망하는 날일거다. 에이든은 몇번이고 되뇌였다.

얘도 들러붙은 여러 여자들 중 하나일뿐일 것이다. 브리여서가 아니라 불쌍해서. 이 계약을 받아준 것뿐. 착각하지마. 에이든 밀러.

에이든은 살짝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했다.

한참을 말없이 달리던 차가 거대한 철문 앞에서 속도를 늦췄다. 검은 대문 위로 학교 문장이 박혀 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 잘 깎인 잔디, 분수, 유니폼 입은 학생들. 프레스티지 사립고. 하이틴 스토리의 반짝이는 전쟁터.

엘리즈 하이.

브리는 숨을 삼켰다.

원작 여주는 분명 여기서 해피엔딩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에이든 비위만 적당히 맞춰주면 질질 끌지 않고 엔딩을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엔딩을 봐야 돌아가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

문제는, 남주 꼴을 보니 그 엔딩이 정말 해피엔딩일지는 전혀 모르겠다는 거였다.

엔딩 시점은 지금으로 부터 졸업식, 여주와 남주의 키스로 마무리되는 그 장면.

차가 멈췄다.

이미 몇몇 학생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킹카가 내리길 기다리는 는건지 팻말을 들고 선 후배들도 있었다.

에이든이 시동을 끄고 브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뭔데.”

“오늘부터 넌 내 여친으로 걷는 거야.”

그는 문 손잡이를 누르기 전, 아주 낮게 말했다.

“웃어, 브리. 그건 네가 원래 제일 잘하는 거잖아.”

‘초면에 명령이나 찍찍.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위아래로 에이든을 훑어볼 틈도 없이

슈웅 하고 차 문이 위로 열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네가 내 인생의 가장 긴 문장이 된 순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인 것 같다.좋아한다는 말은 쉽다.보고 싶다는 말도, 마음이 간다는 말도,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볍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하지만 사랑은, 그런 말들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한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이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 않는 모습을 함께 기억하고, 그 사람이 웃는 얼굴 뒤에 숨긴 아주 작은 그늘까지 눈치채는 일.내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처음 이 동네로 이사 온 날, 나는 부모님을 도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낯선 집, 낯선 거리, 낯선 공기.프랑스에서 건너온 뒤 처음 맞는 미국의 오후는 이상할 만큼 밝았다. 창문 밖으로는 햇빛이 흰 벽에 부서지고 있었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자들 사이로 먼지가 천천히 떠다녔다.나는 상자 안에 담긴 물건들을 대충 꺼내고 있었다.그때였다.창문 밖으로 네가 지나갔다.너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머리칼이 빛났고, 햇빛은 네 어깨 위에 너무 자연스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꼭 세상이 오래전부터 너를 위해 빛나는 법을 연습해온 것처럼 보였다.나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정확히 말하면, 내가 멈춘 게 아니라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아니, 정말 멈췄다.적어도 내게는 그랬다.부모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그날 오후의 온도가 어땠는지, 그런 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은 아주 선명하다.자전거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던 소리.네 치맛자락 끝에 스치던 바람.그때부터였다.너의 빛나는 그림자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건.너는 분명 빛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빛 아래에는 어딘가 슬퍼보였다.그걸 아주 나중에야 알았지만.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처음 배운 건, 우리 부모님을 통해서였다.두 사람은 가끔 별것 아닌 일로 다투기도 했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안았다.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사랑은 폭죽처럼 터지는 감정이 아니라, 매일 같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아무것도 없네

    “어떻게 한 거야?”바네사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브리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울 것처럼 떨던 애가, 브리가 책을 찾으러 오래된 사물함 쪽으로 가자 따라붙었다. “제법 끈질긴 애였네.”브리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바네사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어떻게 했냐고.”“너야말로 어떻게 했는데?”브리는 벽에 기대 선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연기를 해?”“뭐?”바네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다친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니?”“다쳤어?”브리 시선이 바네사의 무릎으로 내려갔다. 깔끔한 밴드 아래로 아주 조금 붉은 자국이 비쳐 보였다.순간 바네사 눈빛이 흔들렸다.브리는 그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맞네. 그런 거네. 너 찔리지?”그녀는 낮게 말했다.바네사는 이를 꽉 깨물었다.그녀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마저 가늘게 떨렸다.“왜 또 아까처럼 애들 불러 모아서 작당질 좀 해보지 그래? 나한테 와서 이러지 말고.”“그러기엔 네가 좀 여우 같아야지. 브리야.”“응?”브리는 비웃음기 어린 얼굴로 눈썹을 들었다.“내가 여우 같다는 게 무슨 소리야?”“네가 에이든을 꼬신 것도. 그리고 어떻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내 발을 피한 것도.”“하.”이번엔 브리 쪽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방금 네 입으로 말했네.”“뭘.”“내가 네 발을 피했다고.”브리는 한 걸음 다가갔다. 목소리는 더 낮아졌고, 그래서 더 선명하게 들렸다.“내가 쌩뚱맞은 걸 피한 건 아니었나 봐.”바네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당장 뱉어낼 말을 생각하는듯 하더니 말인지 똥인지 모를 걸 마음대로 뱉어냈다. “고작 말실수 하나 가지고 물고 늘어지지 마. 추하니까.”“그래?”브리는 어깨를 으쓱했다.“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하고.”그리고 한 박자 쉬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내가 계속 너한테 당해주니까, 발 걸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겠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모함하고 괴롭히면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착각하지마

    ”그러니까 애 발을 걸긴 왜 걸어?“ 브리는 손에 가지런히 접어둔 교복을 땅에다 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에이든은 진짜 발을 건 게 맞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브리가 교복을 처량히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 나갔다. “하... 아까 못 들었어? 내가 안했다고.” 브리는 힘을 쥐어짜 말하는 듯했다. 꽤 지쳐있었다. 거기다 대고 에이든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그냥 얌전하게 학교 생활하면 된다고. 교복 갖다주랬지 누가 애 발걸랬어?” 브리는 끓어오르는 마그마를 한 번 으윽-하고 삼켰다. 근데 그게 잘 안되었다. 하. 엔딩봐야지. 브리야. 참자. 참자. 결국 브리는 참지 못했다. “내가 걔 발 걸 이유가 뭔데? 너 때문에? 그거야? 그래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걔가 너 약혼녀될 뻔 한 사람이어서?” 에이든은 쏘아붙이는 브리에 잠시 온 몸이 굳어 뒷걸음질 쳤다. “너가 그렇게 잘났어? 그래서 내가 너 미친듯이 좋아서, 발 걸었다고? 착각하지마. 아직도 내가 바본 줄 아나본데.....” 브리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아차차. 이렇게 말하면 에이든이 의심할 게 뻔했다. 브리가 회귀한 거라도 알면 계약은 당연히 무효고, 에이든이 까무러칠 게 뻔했다. ”어차피 내 말은 안 믿을테니까 니 알아서 생각해. 네가 말하는 계약 여친 규정도 어긴 적 없고, 난 그냥 날 보호한 거 뿐이야.“ “.....” 에이든은 꿀 먹은 병아리가 된 듯했다. 뭐지? 이 듣도 보도 못한 태도는? 이렇게 하면 에이든이 예상한 건 브리가 울고 불고 잘못했다고 빌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데이트를 가는 거였는데. 언제부터 브리가... 이렇게 똑부러지는 말을 할 수 있었지? ”흠흠“ 에이든은 약간 상기된 표정을 풀더니 브리에게서 교복을 건네 받았다. 약간 풀이 죽은 허스키처럼, 에이든은 교복을 건네 받았다. 시선은 옆으로 향하면서 약간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넌 안 따라와도 돼

    “넌 안 따라와도 돼. 일단 수업 들어가.” 에이든의 말이 끝나자 마자 절묘하게 다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맞다. 이 기분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혼자가 되는 기분. 아무리 억울하다고 소리쳐봐도 누구도 듣지 않는 기분. 미영의 나날이 숱하게 내려앉은 먼지가 돌덩이가 되던 순간들. 모두가 자신의 탓을 하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와이프가 취향이 구려서, 며느리가 싹싹하지 못해서, 손이 빠르질 못해서, 야무지게 거절을 못해서. 남편 관리를 잘 못해서. 죄라면 살아온 것 뿐인데, 얼마나 큰 돌덩이를 지고 살아온 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 “브리양, 수업에 왜 이렇게 늦었나.“ 로버트 교수는 안경을 치켜내리곤 브리를 타일렀다. ”죄송합니다.“ 브리는 꾸벅 인사하고 강의실 자리로 들어갔다. 종종걸음으로 자리에 가서 앉는 브리의 뒤통수에 로버트와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애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웅성거림은 점점 퍼져 대강의실이 웅웅하고 울렸다. 모두들 브리와 바네사 얘길 하고 있었다. “야 이거 봤어?” 브리가 강의실 열을 지나치는 동안, 학생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켜고 바네사가 쉐이크를 덮어쓴 사진을 공유중이었다. “이게 글쎄, 브리아나가 발을 걸었다던데?” “정말이야? 브리아나 보기보다 용감한 애였네~” “야야 온다. 온다. 쉿.” 브리는 애써 그런 광경을 뿌리치려 애썼다. 일어난 일만 해도 버거웠으니까. 그런 브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강의실이 학생들이 떠드는 소음에 더 웅성거리다 울리기까지 했다. 로버트가 미간을 잔뜩 찌뿌리더니 원목 교탁을 세번 탁탁탁하고 크게 쳤다. ”어험! 다들 조용!“ 그리고서 로버트는 칠판에 분필을 가져갔다. 점심 시간에 생긴 일 때문에 거의 정신이 너덜너덜해져있었다. 브리는 옆 빈 의자에 에이든의 교복을 가지런히 놓았다. ‘아 맞다. 이거. 까먹고 전해주지도 못했네.’ 발을 걸려는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피했을 뿐인데

    곧 터질 일을 예감한 듯, 브리의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 이 장면은… 눈에 익는데.’ 복도 한가운데서 브리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원작 속에서 브리아나가 크게 놀림받는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 쉐이크….’ 바네사 옆 시녀 하나가 뚜껑도 없는 뽀얀 밀크셰이크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브리 머릿속에 원작 장면이 번개처럼 스쳤다. 바네사가 지나가는 척 발을 슬쩍 내밀고, 브리아나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복도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손에 들고 있던 셰이크가 브리 머리 위로 전부 쏟아지고, 지나가던 학생들은 사진을 찍어 학교 커뮤니티에 올린다. 그날 이후 한동안 브리아나는 학교 안에서 웃음거리였다. 브리는 자기도 모르게 에이든의 교복이 걸린 옷걸이를 더 꽉 쥐었다. 복도 창문으로 쏟아진 햇빛이 바네사의 금발을 반짝이게 비췄다. 헤일리는 뭔가를 재잘거리고 있었고, 다른 애들은 하나같이 브리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브리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여기서 바네사가 아주 자연스럽게 발을 내민다. 누구도 고의라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아주 조금만 중심을 잃게 만들 정도로만. 브리는 속으로 숫자를 세듯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정말로, 바네사의 발끝이 아주 조금 앞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이번엔 그냥 안 당해.’ 브리는 원작의 브리아나처럼 멍청하게 당해주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몸을 아주 살짝 틀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바네사가 내민 발이 허공을 헛디뎠다. “어—?” 짧은 비명이 터지더니 바네사의 중심이 크게 흔들렸다. 하이힐 굽이 미끄러지자, 헤일리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 순간, 셰이크를 들고 있던 시녀 쪽으로 바네사가 쓰러졌다. 셰이크와 바네사가 한꺼번에 바닥으로 쏟아졌다. 콰앙. 하이힐 한 짝이 벗겨지며 바네사는 무릎부터 바닥에 내리찍혔다. 미끄러운 셰이크가 바닥에 퍼져, 그녀는 거의 슬라이딩하듯 앞으로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파우더룸의 영웅

    브리는 화장실 칸에서 볼일을 보고 나가려고 하는데 여자애들 한 무리가 왁자지껄 수다를 떨면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네사, 에이든이 정말 당황스러운 선택을 한거야. 아마 널 질투나게 하려는 작전일수도 있어.“ 브리는 나가려던 걸 그 자리에서 멈췄다. ”맞아. 바네사. 너보다 훨씬 못 생기고, 집도 못 사는 앨 에이든이 뭐가 좋다고 선택하겠어? 그냥 성격이 호구 같으니까 데리고 놀다 버릴려는 거지.“ “아니야. 뭐. 진짜 좋아할 수도 있지.” 바네사는 온갖 드라마에도 품위를 잃지 않은 여배우인 척, 풀이 죽은 묵소리로 말했다. 원작에서 바네사가 브리에게 개인적으로 직접한 말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면전에다가 대고 데리고 놀고 버릴 거라는 둥 하지 않았나? 새삼 바네사의 페르소나가 소름 돋을 정도로 느껴졌다. 브리는 화장실을 박차고 나가려다 이어지는 내용에 놀라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그 년이 에이든을 어떻게 꼬셨냐는 거야. 아는 거라곤 사치 밖에 없는데.“ “그러게. 걔네 둘이 안 어울려도 한 참 안 어울려. 브리도 참, 넘볼 땔 넘 봐야지 안 그래?” 브리아나 시녀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한바탕 지나갔다. “아 맞다 참. 걔네 집 이번에 부도나기 직전까지 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우리 엄마가 봤는데 거기 호텔 전염병 때문에 스태프들 다 자르고 난리도 아니었었잖아.“ ’전염병이 사람만 여럿 죽인 게 아니라 거지 근성까지 덤으로 줬네.‘ 흥미롭게 대화를 듣던 바네사는 한 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 정답 나왔네.“ ”뭔데?“ ”딱 봐도 에이든 비행기 탈려는 심산이지. 에이든 이름으로 뭐라도 얻을려는 거 아니겠어? 요즘 누가 그런 호텔 알아줘?“ “걔 기부금이 아니라 성적으로 들어왔다는 소문도 있던데?” “엥? 그런 거였어?” 시녀 중 한 명이 너무 놀랍다는듯 큰소리로 대답했다. ”와 이제 엘리즈하이에도 헝그리정신으로 인생 사는 애가 생겼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