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인 것 같다.좋아한다는 말은 쉽다.보고 싶다는 말도, 마음이 간다는 말도,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볍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하지만 사랑은, 그런 말들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한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이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 않는 모습을 함께 기억하고, 그 사람이 웃는 얼굴 뒤에 숨긴 아주 작은 그늘까지 눈치채는 일.내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처음 이 동네로 이사 온 날, 나는 부모님을 도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낯선 집, 낯선 거리, 낯선 공기.프랑스에서 건너온 뒤 처음 맞는 미국의 오후는 이상할 만큼 밝았다. 창문 밖으로는 햇빛이 흰 벽에 부서지고 있었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자들 사이로 먼지가 천천히 떠다녔다.나는 상자 안에 담긴 물건들을 대충 꺼내고 있었다.그때였다.창문 밖으로 네가 지나갔다.너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머리칼이 빛났고, 햇빛은 네 어깨 위에 너무 자연스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꼭 세상이 오래전부터 너를 위해 빛나는 법을 연습해온 것처럼 보였다.나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정확히 말하면, 내가 멈춘 게 아니라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아니, 정말 멈췄다.적어도 내게는 그랬다.부모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그날 오후의 온도가 어땠는지, 그런 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은 아주 선명하다.자전거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던 소리.네 치맛자락 끝에 스치던 바람.그때부터였다.너의 빛나는 그림자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건.너는 분명 빛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빛 아래에는 어딘가 슬퍼보였다.그걸 아주 나중에야 알았지만.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처음 배운 건, 우리 부모님을 통해서였다.두 사람은 가끔 별것 아닌 일로 다투기도 했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안았다.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사랑은 폭죽처럼 터지는 감정이 아니라, 매일 같
“어떻게 한 거야?”바네사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브리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울 것처럼 떨던 애가, 브리가 책을 찾으러 오래된 사물함 쪽으로 가자 따라붙었다. “제법 끈질긴 애였네.”브리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바네사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어떻게 했냐고.”“너야말로 어떻게 했는데?”브리는 벽에 기대 선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연기를 해?”“뭐?”바네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다친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니?”“다쳤어?”브리 시선이 바네사의 무릎으로 내려갔다. 깔끔한 밴드 아래로 아주 조금 붉은 자국이 비쳐 보였다.순간 바네사 눈빛이 흔들렸다.브리는 그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맞네. 그런 거네. 너 찔리지?”그녀는 낮게 말했다.바네사는 이를 꽉 깨물었다.그녀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마저 가늘게 떨렸다.“왜 또 아까처럼 애들 불러 모아서 작당질 좀 해보지 그래? 나한테 와서 이러지 말고.”“그러기엔 네가 좀 여우 같아야지. 브리야.”“응?”브리는 비웃음기 어린 얼굴로 눈썹을 들었다.“내가 여우 같다는 게 무슨 소리야?”“네가 에이든을 꼬신 것도. 그리고 어떻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내 발을 피한 것도.”“하.”이번엔 브리 쪽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방금 네 입으로 말했네.”“뭘.”“내가 네 발을 피했다고.”브리는 한 걸음 다가갔다. 목소리는 더 낮아졌고, 그래서 더 선명하게 들렸다.“내가 쌩뚱맞은 걸 피한 건 아니었나 봐.”바네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당장 뱉어낼 말을 생각하는듯 하더니 말인지 똥인지 모를 걸 마음대로 뱉어냈다. “고작 말실수 하나 가지고 물고 늘어지지 마. 추하니까.”“그래?”브리는 어깨를 으쓱했다.“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하고.”그리고 한 박자 쉬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내가 계속 너한테 당해주니까, 발 걸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겠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모함하고 괴롭히면
”그러니까 애 발을 걸긴 왜 걸어?“ 브리는 손에 가지런히 접어둔 교복을 땅에다 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에이든은 진짜 발을 건 게 맞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브리가 교복을 처량히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 나갔다. “하... 아까 못 들었어? 내가 안했다고.” 브리는 힘을 쥐어짜 말하는 듯했다. 꽤 지쳐있었다. 거기다 대고 에이든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그냥 얌전하게 학교 생활하면 된다고. 교복 갖다주랬지 누가 애 발걸랬어?” 브리는 끓어오르는 마그마를 한 번 으윽-하고 삼켰다. 근데 그게 잘 안되었다. 하. 엔딩봐야지. 브리야. 참자. 참자. 결국 브리는 참지 못했다. “내가 걔 발 걸 이유가 뭔데? 너 때문에? 그거야? 그래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걔가 너 약혼녀될 뻔 한 사람이어서?” 에이든은 쏘아붙이는 브리에 잠시 온 몸이 굳어 뒷걸음질 쳤다. “너가 그렇게 잘났어? 그래서 내가 너 미친듯이 좋아서, 발 걸었다고? 착각하지마. 아직도 내가 바본 줄 아나본데.....” 브리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아차차. 이렇게 말하면 에이든이 의심할 게 뻔했다. 브리가 회귀한 거라도 알면 계약은 당연히 무효고, 에이든이 까무러칠 게 뻔했다. ”어차피 내 말은 안 믿을테니까 니 알아서 생각해. 네가 말하는 계약 여친 규정도 어긴 적 없고, 난 그냥 날 보호한 거 뿐이야.“ “.....” 에이든은 꿀 먹은 병아리가 된 듯했다. 뭐지? 이 듣도 보도 못한 태도는? 이렇게 하면 에이든이 예상한 건 브리가 울고 불고 잘못했다고 빌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데이트를 가는 거였는데. 언제부터 브리가... 이렇게 똑부러지는 말을 할 수 있었지? ”흠흠“ 에이든은 약간 상기된 표정을 풀더니 브리에게서 교복을 건네 받았다. 약간 풀이 죽은 허스키처럼, 에이든은 교복을 건네 받았다. 시선은 옆으로 향하면서 약간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넌 안 따라와도 돼. 일단 수업 들어가.” 에이든의 말이 끝나자 마자 절묘하게 다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맞다. 이 기분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혼자가 되는 기분. 아무리 억울하다고 소리쳐봐도 누구도 듣지 않는 기분. 미영의 나날이 숱하게 내려앉은 먼지가 돌덩이가 되던 순간들. 모두가 자신의 탓을 하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와이프가 취향이 구려서, 며느리가 싹싹하지 못해서, 손이 빠르질 못해서, 야무지게 거절을 못해서. 남편 관리를 잘 못해서. 죄라면 살아온 것 뿐인데, 얼마나 큰 돌덩이를 지고 살아온 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 “브리양, 수업에 왜 이렇게 늦었나.“ 로버트 교수는 안경을 치켜내리곤 브리를 타일렀다. ”죄송합니다.“ 브리는 꾸벅 인사하고 강의실 자리로 들어갔다. 종종걸음으로 자리에 가서 앉는 브리의 뒤통수에 로버트와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애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웅성거림은 점점 퍼져 대강의실이 웅웅하고 울렸다. 모두들 브리와 바네사 얘길 하고 있었다. “야 이거 봤어?” 브리가 강의실 열을 지나치는 동안, 학생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켜고 바네사가 쉐이크를 덮어쓴 사진을 공유중이었다. “이게 글쎄, 브리아나가 발을 걸었다던데?” “정말이야? 브리아나 보기보다 용감한 애였네~” “야야 온다. 온다. 쉿.” 브리는 애써 그런 광경을 뿌리치려 애썼다. 일어난 일만 해도 버거웠으니까. 그런 브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강의실이 학생들이 떠드는 소음에 더 웅성거리다 울리기까지 했다. 로버트가 미간을 잔뜩 찌뿌리더니 원목 교탁을 세번 탁탁탁하고 크게 쳤다. ”어험! 다들 조용!“ 그리고서 로버트는 칠판에 분필을 가져갔다. 점심 시간에 생긴 일 때문에 거의 정신이 너덜너덜해져있었다. 브리는 옆 빈 의자에 에이든의 교복을 가지런히 놓았다. ‘아 맞다. 이거. 까먹고 전해주지도 못했네.’ 발을 걸려는
곧 터질 일을 예감한 듯, 브리의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 이 장면은… 눈에 익는데.’ 복도 한가운데서 브리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원작 속에서 브리아나가 크게 놀림받는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 쉐이크….’ 바네사 옆 시녀 하나가 뚜껑도 없는 뽀얀 밀크셰이크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브리 머릿속에 원작 장면이 번개처럼 스쳤다. 바네사가 지나가는 척 발을 슬쩍 내밀고, 브리아나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복도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손에 들고 있던 셰이크가 브리 머리 위로 전부 쏟아지고, 지나가던 학생들은 사진을 찍어 학교 커뮤니티에 올린다. 그날 이후 한동안 브리아나는 학교 안에서 웃음거리였다. 브리는 자기도 모르게 에이든의 교복이 걸린 옷걸이를 더 꽉 쥐었다. 복도 창문으로 쏟아진 햇빛이 바네사의 금발을 반짝이게 비췄다. 헤일리는 뭔가를 재잘거리고 있었고, 다른 애들은 하나같이 브리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브리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여기서 바네사가 아주 자연스럽게 발을 내민다. 누구도 고의라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아주 조금만 중심을 잃게 만들 정도로만. 브리는 속으로 숫자를 세듯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정말로, 바네사의 발끝이 아주 조금 앞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이번엔 그냥 안 당해.’ 브리는 원작의 브리아나처럼 멍청하게 당해주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몸을 아주 살짝 틀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바네사가 내민 발이 허공을 헛디뎠다. “어—?” 짧은 비명이 터지더니 바네사의 중심이 크게 흔들렸다. 하이힐 굽이 미끄러지자, 헤일리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 순간, 셰이크를 들고 있던 시녀 쪽으로 바네사가 쓰러졌다. 셰이크와 바네사가 한꺼번에 바닥으로 쏟아졌다. 콰앙. 하이힐 한 짝이 벗겨지며 바네사는 무릎부터 바닥에 내리찍혔다. 미끄러운 셰이크가 바닥에 퍼져, 그녀는 거의 슬라이딩하듯 앞으로
브리는 화장실 칸에서 볼일을 보고 나가려고 하는데 여자애들 한 무리가 왁자지껄 수다를 떨면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네사, 에이든이 정말 당황스러운 선택을 한거야. 아마 널 질투나게 하려는 작전일수도 있어.“ 브리는 나가려던 걸 그 자리에서 멈췄다. ”맞아. 바네사. 너보다 훨씬 못 생기고, 집도 못 사는 앨 에이든이 뭐가 좋다고 선택하겠어? 그냥 성격이 호구 같으니까 데리고 놀다 버릴려는 거지.“ “아니야. 뭐. 진짜 좋아할 수도 있지.” 바네사는 온갖 드라마에도 품위를 잃지 않은 여배우인 척, 풀이 죽은 묵소리로 말했다. 원작에서 바네사가 브리에게 개인적으로 직접한 말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면전에다가 대고 데리고 놀고 버릴 거라는 둥 하지 않았나? 새삼 바네사의 페르소나가 소름 돋을 정도로 느껴졌다. 브리는 화장실을 박차고 나가려다 이어지는 내용에 놀라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그 년이 에이든을 어떻게 꼬셨냐는 거야. 아는 거라곤 사치 밖에 없는데.“ “그러게. 걔네 둘이 안 어울려도 한 참 안 어울려. 브리도 참, 넘볼 땔 넘 봐야지 안 그래?” 브리아나 시녀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한바탕 지나갔다. “아 맞다 참. 걔네 집 이번에 부도나기 직전까지 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우리 엄마가 봤는데 거기 호텔 전염병 때문에 스태프들 다 자르고 난리도 아니었었잖아.“ ’전염병이 사람만 여럿 죽인 게 아니라 거지 근성까지 덤으로 줬네.‘ 흥미롭게 대화를 듣던 바네사는 한 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 정답 나왔네.“ ”뭔데?“ ”딱 봐도 에이든 비행기 탈려는 심산이지. 에이든 이름으로 뭐라도 얻을려는 거 아니겠어? 요즘 누가 그런 호텔 알아줘?“ “걔 기부금이 아니라 성적으로 들어왔다는 소문도 있던데?” “엥? 그런 거였어?” 시녀 중 한 명이 너무 놀랍다는듯 큰소리로 대답했다. ”와 이제 엘리즈하이에도 헝그리정신으로 인생 사는 애가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