分享

무릎

作者: 차노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30 17:58:26

“너 설마.”

말리부 언덕 위 붉은 신호등 불빛이 에이든의 얼굴을 비스듬히 물들였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 반듯한 콧대, 사람을 내려다보는 게 당연시된 실루엣.

“우리 계약한 거 까먹은 거 아니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걸 까먹을 수 있나.”

에이든은 무시하듯 피식 웃었다. 그는 브리가 진짜로 기억 못한다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하는 것 같았다.

브리는 휘황찬란한 헐리우드 사인에 뺏긴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계약연애.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이틴 퀸카 여주와 프레스티지 사립고 킹카 남주의 뻔한 그림.

원작에서도 그 설정 정도는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늘 그렇듯, 조각들만 기억난다는 거였다. 열혈 시청자라면 몰라도.

브리는 어떻게 하면 계약 내용을 알 수 있을까 잠깐 고심했다.

에이든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굉장히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차 안에는 비싼 가죽 냄새와 에이든 향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브리는 괜히 창밖만 보는 척을 했다. 야자수, 언덕,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이 요망한 남주에게서 내용을 확인하고 싶어 브리는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안달하는 찰나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도로의 신호등 불빛이 빨간불이 되었다.

‘자, 하나아 두울 셋.’

에이든이 고개를 돌려 말을 걸려는 찰나 브리는 있는 힘껏 에이든에게로 달려들었다.

“흐읍!!!!”

에이든의 입술에 브리의 오동통하고 조그마한 입술이 겹쳐들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이든은 운전대를 잡고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브리의 코끝에 오랫동안 맡아본 적 없던 남자 향수 냄새가 훅 끼쳐들었다.

뜨뜨미지근한 입술을 감각이 브리의 온 몸에 베여드는듯했다.

’이쯤이면 됐어‘

브리는 그리고선 아무 일 없었다는듯이 앉았다.

“아이씨 이게 돌았나. 우리 키스는 금지한 거 몰라?!“

옳지. 그렇지. 걸려들었다.

에이든은 드러운 게 묻었다는듯 뒷자석으로 손을 뻗어 물티슈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무슨 결벽증 환자 마냥 두터운 입술을 박박 닦아냈다.

“에이. 진짜. 퉤퉤.”

에이든은 차문 밖으로 못 먹을 것을 먹은듯 침을 뱉었다. 그게 브리의 입술이라도.

네가 찾아와선 싹싹 빌어놓고, 이 따위로 사람을 농락해?”

“……내가?”

브리는 어리둥절하다는듯 표정을 짓다 이내 감췄다.

“어.. 그래 내가 음 그랬지. 그리고선? 어쨌든 확실하게 하고 가자고.“

브리는 핸드폰을 들어 녹음기를 켰다. 계약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뭐하는 거야?“

”계약서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나중에 또 딴 말하면 안되니까 녹음해두려고.”

사실 계약서가 어디있는지 몰랐다.

에이든은 신호가 바뀌자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스포츠카가 언덕길을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로즈가 자금 막힌 거, 너도 알았고. 네 아버지 숨통 붙이려면 우리 집 돈 필요한 것도 알았고.“

그 말들은 이상하게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들었다.

가슴께가 서늘하게 식었다. 이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앞에서 자존심이 바닥까지 긁히던 감각을.

그리고 에이든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무릎도 꿇었고.”

브리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내, 내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에이든은 어깨를 한 번 움직였다. 꼭 별일 아니라는 사람처럼.

“한 번만 도와달라고. 싹싹. 손 발이 닳도록.”

브리는 잠깐 말을 잃었다.

계약연애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릎이라니.

원작에선 그런 장면들쯤은 늘 생략하기 일쑤였으니까. 반짝이는 학교, 킹카 남주, 퀸카 여주. 독자는 그 뒤의 예쁜 장면만 본다. 브리아나 로즈가 어떻게 에이든 밀러 옆자리를 차지했는지는 대충 건너뛴 채, 완성된 그림만 소비했다.

아차차.

생각보다 꽤 짠한 여주인공이었다.

왈가닥한 성격에, 하는 거라곤 예쁘게 꾸미고 쇼핑하는 게 낙이었던 백치미 여주인공.

몰락해가는 가문 앞에선 그것조차 꽤 사치였을 테지.

‘꽤… 처절한 애였잖아.’

그동안은 브리아나를 그저 예쁘고 멍청하고, 에이든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여주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생각보다 맹물은 아니었다. 가진 걸 지키려고, 제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릎까지 꿇을 수 있는 애였다.

그런데 에이든은 그런 브리 속도 모르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 남들 앞에선 웃고, 팔짱 끼고, 잡부일 좀 하고.”

환생했더니 신세는 뭐 비슷한 거 같았다. 아. 열여덟에 엄청 이쁜 것만 빼면.

“그러면 너는, 넌 이 계약애서 뭘 얻는데?”

“너를 여친으로 두고, 바네사랑 약혼을 무기한 미룰 수 있달까? 뭐, 우리집에서 탐탁치않아하겠지만 좋은 핑계잖아?”

브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날 좋아한 건 아니고?”

끼이이익-

그 말에 에이든은 차를 멈춰세웠다. 에이든의 브레이크 소리가 귀가 찢어질듯 들렸다.

브리는 헛웃음을 삼켰다.

‘요놈 보소.’

“야, 운전 똑바로 안해?”

잔소리하던 습관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하.. 이게 진짜 보자 보자하니까. “

잘생기면 다냐. 저 얼굴 아니었으면 진작 한 대 맞았지. 브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니까 이딴 짓 하지마라. 확 죽여버리는 수가 있다.“

에이든은 백미러를 보면서 티슈로 입가를 정돈했다.

응. 이미 벌써 죽었지롱. 이런 위협 같은 건 남편으로 인해 면역이 생긴 지 오래였다.

박진수, 찌질한 전 남편 보다 막 대하는 이 놈이 더 나으려나.

하여간 남자들이란.

브리는 차갑게 말했다.

”알았어. 시키는 대로 할게.“

에이든은 만족한듯이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아오.”

에이든은 백미러로 입술에 뭐가 묻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겹쳐오는 입술의 촉감이 싫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런 값싼 행동은 질색이다. 개학 첫날부터 짜증나게 하네.

역시 브리아나구나. 전형적인 골드디거. 텅텅 빈 금발머리. 휴. 내가 이런 앨 좋아한다면 세상이 망하는 날일거다. 에이든은 몇번이고 되뇌였다.

얘도 들러붙은 여러 여자들 중 하나일뿐일 것이다. 브리여서가 아니라 불쌍해서. 이 계약을 받아준 것뿐. 착각하지마. 에이든 밀러.

에이든은 살짝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했다.

한참을 말없이 달리던 차가 거대한 철문 앞에서 속도를 늦췄다. 검은 대문 위로 학교 문장이 박혀 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 잘 깎인 잔디, 분수, 유니폼 입은 학생들. 프레스티지 사립고. 하이틴 스토리의 반짝이는 전쟁터.

엘리즈 하이.

브리는 숨을 삼켰다.

원작 여주는 분명 여기서 해피엔딩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에이든 비위만 적당히 맞춰주면 질질 끌지 않고 엔딩을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엔딩을 봐야 돌아가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

문제는, 남주 꼴을 보니 그 엔딩이 정말 해피엔딩일지는 전혀 모르겠다는 거였다.

엔딩 시점은 지금으로 부터 졸업식, 여주와 남주의 키스로 마무리되는 그 장면.

차가 멈췄다.

이미 몇몇 학생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킹카가 내리길 기다리는 는건지 팻말을 들고 선 후배들도 있었다.

에이든이 시동을 끄고 브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뭔데.”

“오늘부터 넌 내 여친으로 걷는 거야.”

그는 문 손잡이를 누르기 전, 아주 낮게 말했다.

“웃어, 브리. 그건 네가 원래 제일 잘하는 거잖아.”

‘초면에 명령이나 찍찍.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위아래로 에이든을 훑어볼 틈도 없이

슈웅 하고 차 문이 위로 열렸다.

在 APP 繼續免費閱讀本書
掃碼下載 APP

最新章節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내가 말할게

    박수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바네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주 자연스럽게 프로그램 북을 접어 무릎 위에 올리고, 허리를 곧게 편 채 객석 사이를 빠져나왔다. 누가 봐도 단정하고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다만 걸음이 평소보다 아주 조금 빨랐다. 힐 끝이 바닥을 찍는 소리도 유난히 날카로웠다.강당 바깥 복도는 무대 안보다 훨씬 어두웠다. 다음 후보 발표가 이어지고 있었는지, 안쪽에선 희미하게 마이크 울림이 새어 나왔다. 바네사는 운영 부스 뒤편 좁은 복도로 몸을 틀었다.올리버는 이미 거기 나와 있었다.헤드셋을 목에 건 채, 서류철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고 서 있었다. 얼굴은 벌써 하얗게 질려 있었고, 안경 너머 눈빛은 바닥만 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 실수한 사람의 얼굴이었다.바네사는 그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아주 낮게 물었다.“뭐 한 거야?”올리버 어깨가 움찔했다.“바, 바네사…”“내가 지금 이름 부르라고 했어?”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해서 더 무서웠다.올리버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미안해. 나… 나는…”“미안?”바네사가 짧게 웃었다.그 웃음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넌 그게 지금 미안하다고 끝날 일로 보여?”올리버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바네사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에게선 달콤한 향수가 났고,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눈빛만큼은 전혀 아니었다.“내가 뭐라고 했지?”“……”“실수처럼만 보이면 된다고 했잖아.”올리버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근데 넌 그것도 못 했어.”“나… 못 하겠더라.”올리버가 겨우 말했다.“그냥… 화면에 뜨는 순간… 너무…”“너무?”바네사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불쌍해 보였어?”올리버 얼굴이 굳었다.바네사는 그 반응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올리버.”그녀가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게 오히려 더 잔인했다.“착각하지 마.”바네사는 손끝으로 올리버 서류철 끝을 톡 건드렸다.“너 지금 나한테 실수한 거야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스피치 대회2

    첫 번째 후보가 무대에 올랐다. 박수 소리가 잔잔하게 번졌다. 교장은 앞줄에서 프로그램 북을 정리했고, 재단 관계자들은 다리를 꼬고 앉아 후보자 이름 옆에 작은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선 학생은 목소리를 한 번 떨었지만, 곧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브리는 무대 계단 옆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숨을 골랐다. 원고 첫 장은 이미 손에 땀이 배어 조금 눅눅해져 있었다. 종이 끝이 손가락에 달라붙는 감각이 이상하게 또렷했다. 강당 안은 시원했는데, 브리 손바닥만 자꾸 뜨거워졌다. 두 번째 후보, 세 번째 후보. 줄리안은 예상보다 잘했고, 에밀리는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케빈은 중간에 한 번 원고를 놓쳤지만 웃으며 넘겼다. 학생들은 그때마다 예의 바르게 박수쳤다. 브리는 무대 뒤 검은 커튼 틈으로 객석을 힐끗 봤다. 바네사는 후보석 끝에 앉아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손끝으로 프로그램 북 귀퉁이를 넘기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였다. 너무 여유로워서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운영 부스. 유리창 너머로 올리버가 보였다.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세가 조금 이상했다. 등을 잔뜩 굽힌 채 양손을 키보드 가까이에 두고,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누르지 못하는 사람처럼 멈춰 있었다. 브리는 미간을 좁혔다. ‘왜 저래.’ 그 순간, 객석 쪽에서 누군가 낮게 휘파람 비슷한 소리를 냈다. 브리는 시선을 돌렸다. 오스틴이었다. 그는 에이든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프로그램 북보다 후보석 쪽을 더 열심히 보고 있었다. 보기 좋은 정장 대신 교복 셔츠 위에 재킷만 대충 걸친 차림이라 혼자 약간 둥글둥글한 불량 모범생 같았다. 볼살이 웃을 때마다 먼저 들썩였고, 표정은 사람을 놀리기 직전인 얼굴이었다. 오스틴은 옆자리 에이든에게 아주 작게 몸을 기울였다. “야.” 에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 지금 브리아나 차례 기다리는 거 티난다.” “닥쳐.” “아니, 진짜로.”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스피치 대회1

    다음 날, 대회 당일. 학교 강당은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무대 위엔 푸른색 커튼이 반듯하게 걷혀 있었고, 천장에는 스피치 대회 현수막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계단식 객석 아래로는 후보자 이름이 적힌 좌석 표지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재단 관계자들이 앉을 앞줄엔 작은 생수병과 프로그램 북까지 가지런히 준비돼 있었다. 브리는 강당 입구 앞에 서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손엔 원고가 들려 있었지만, 그 종이는 아침부터 한 번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어젯밤 분명 문장들이 잘 흘렀는데, 막상 무대가 눈앞에 오자 단어들은 전부 낯설어진 것 같았다. 하얀 종이 위 활자들이 남의 얘기처럼 보여서 더 이상했다. “브리.” 뒤에서 로버트가 불렀다. 브리는 퍼뜩 돌아봤다. 로버트는 늘 그렇듯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안경 너머 눈빛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긴장되나?” 브리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조금 같지는 않군.” 그 말에 브리는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와서 다행이었다. 입이 마르도록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로버트는 브리 손에 들린 원고를 한 번 보고, 다시 얼굴을 봤다. “무대에 올라가면 다 잊어버릴 수도 있어. 순서도, 문장도, 준비한 표정도.” 브리는 침을 삼켰다. “그럼 어쩌죠?” “그럴 땐 기억하게.” 로버트가 낮게 말했다. “왜 이 글을 쓰고 싶었는지.” 그 한마디에 브리 손끝이 아주 조금 풀렸다. 로버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른 후보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한 위로도, 노골적인 격려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더 힘이 됐다. 브리는 원고를 가슴 쪽으로 붙여 안았다. 무대 아래 후보자 대기석엔 이미 몇몇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줄리안은 넥타이를 세 번째 고쳐 매는 중이었고, 에밀리는 입 모양으로 원고를 외우고 있었다. 케빈은 겉으론 여유로운 척했지만, 무릎을 떠는 걸 보면 긴장한 게 분명했다.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펜이 멈추질 않았다

    차가 멈춘 곳은 학교 근처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일식집 앞이었다.문이 열리자 안에서 우렁찬 구호가 터져 나왔다.“이랏샤이마세!”브리는 그대로 멈칫했다.안쪽 바 테이블 너머로 셰프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열댓 명쯤 되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조명은 은은했고, 실내엔 진한 육수 냄새가 감돌았다.브리는 에이든을 돌아봤다.“야.”“왜.”“이건 컵라면이 아니잖아.”“비슷해.”“어디가.”에이든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면이잖아.”브리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쳤다.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리자, 직원이 정중하게 둘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좁고 긴 바 자리였다. 셰프들이 바로 앞에서 면을 삶고, 육수를 따르고, 토핑을 올리는 게 다 보였다.브리는 속으로 생각했다.‘이렇게 좁아터진 의자 말고 한강공원에서 라면이나 땡기고 싶다고.’하지만 막상 첫 그릇이 나오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얇은 면부터 두꺼운 면, 맑은 육수부터 진한 미소 베이스까지, 조그맣게 나뉜 여러 종류의 라면이 차례대로 나왔다. 진짜로, 말도 안 되는 라멘 오마카세였다.브리는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렸다.“이건 또 뭐야…”“먹어봐.”브리는 조심스럽게 한입 먹었다.그리고 잠깐 눈을 크게 떴다.“…맛있네.”에이든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그러니까.”브리는 그다음 그릇도 먹고, 그다음 것도 먹었다. 마지막엔 후식처럼 작은 말차라떼까지 나왔다. 위에 얇은 꽃잎 모양 장식이 얹혀 있었다.브리는 컵을 내려놓고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고마운데.”“응.”“난 다음엔 그냥 분식집 가서 라면 먹고 싶어.”에이든이 그대로 멈췄다.브리는 턱을 괸 채 솔직하게 덧붙였다.“이렇게 좁은 의자 말고, 한강공원 같은 데서. 김밥이랑 같이.”에이든은 몇 초쯤 브리를 빤히 보더니, 휴대전화를 꺼냈다.“야야. 됐어. 또 뭘 해.”브리가 손을 내밀었지만 에이든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기 코리아타운 분식집, 내일 저녁 예약 가능한 데 전부 알아봐.”브리는 두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에이든과 오마카세

    브리는 밤새 스피치 원고를 붙들고 있었다. 처음엔 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노트북 화면 위에 커서만 깜빡이기 시작하자, 말들은 이상하게 전부 목구멍 근처에서 걸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새벽이 오자, 흰 창틀 사이로 스며든 빛이 방 안 바닥을 서서히 밀어냈다. 브리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 그 희미한 빛을 큰 숨으로 빨아들였다. ‘이런 새벽이면 먼저 밥부터 차렸지.’ 애들 학교 보내고. 남편 출근시키고. 싱크대에 쌓인 그릇 치우고. 집 안 청소하고. 황미영으로 살던 시간의 새벽은 늘 누군가의 배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자기 배가 고픈지, 피곤한지, 졸린지 같은 건 맨 끝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처럼 아무도 깨우지 않는 새벽은 아직도 조금 낯설었다. 노크 소리가 두 번 들렸다. “브리님?” 샐리였다. 브리는 노트북을 반쯤 덮고 문 쪽을 봤다. 문이 열리고, 샐리가 브런치가 차려진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버터 향이 은근하게 퍼졌다. 갓 구운 크루아상, 잘린 과일, 반숙 계란, 따뜻한 차.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브리는 은쟁반을 내려놓는 샐리를 보다가 문득 오래전부터 걸리던 질문을 꺼냈다. “샐리.” “네, 브리님.” “샐리한테 우리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샐리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하지만 그건 눈 깜빡일 사이의 일이었다. 샐리는 곧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주 멋진 분이셨죠. 꼭 요즘의 브리님을 보는 것 같아요.” 브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나요?” “네. 경쾌하면서도, 할 일은 척척 해내고… 현명하고 멋진 분이셨어요.” 브리는 괜히 어깨가 아주 조금 으쓱해졌다. “그 일만 없었다면…” 샐리의 말끝이 낮게 꺼졌다. 브리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 일?” 샐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그 말은 공손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지막 온도가 차갑게 느껴졌다. “이만 내려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아침 되시길.” 문이 닫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파자마 파티1

    브리의 방엔 희한할 정도로 달콤한 냄새가 가득했다.샐리가 올려준 미니 컵케이크, 포도, 젤리, 그리고 한 번 따면 절대 한 봉지로 안 끝나는 짭짤한 과자들까지. 침대 위엔 폭신한 담요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고, 세 사람은 각자 파스텔톤 파자마 차림으로 엉망진창이 된 채 그 위를 뒹굴고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브리만 뒹굴고 있었다.“아 진짜, 덥다.”브리는 침대 위에서 배를 깔고 누운 채 베개를 끌어안았다. 금발이 사방으로 흩어져 얼굴을 반쯤 덮었다.클로이는 네일 파일로 손톱을 다듬다가 브리를 힐끗 봤다.“네가 아까 담요 세 개나 끌어안고 있었잖아.”“그건 감성이지.”“지금은?”“지금은 더위.”앨리샤가 그 말을 듣고 빵 터졌다. 그녀는 침대 끝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는데, 웃다가 손에 들고 있던 젤리를 떨어뜨렸다.그 순간, 침대 아래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하얀 치와와 한 마리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퓨리!”브리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퓨리는 젤리를 물진 못하고, 대신 그 앞에 떨어진 리본끈을 덥석 물었다. 그러곤 마치 전리품이라도 얻은 것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클로이가 질색했다.“쟤 또 시작했다.”“안 돼, 그거 먹는 거 아니야!”브리가 손을 뻗자 퓨리는 즉시 크르릉거리며 침대 아래로 후퇴했다. 작은 몸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사납고 진지한 으르렁거림이었다.앨리샤가 배를 잡고 웃었다.“진짜 신기하다. 얘는 왜 너한테만 이래?”브리는 정색했다.“몰라. 나도 너무 억울해.”“아니, 근데 예전보다 좀 나아지긴 했어.”클로이가 턱을 괴고 말했다.“전엔 진짜 널 물어뜯으려고 했잖아.”“맞아.”브리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요즘은… 음.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아닌 것 같아.”그 말에 셋이 동시에 웃었다.그때 퓨리가 다시 침대 밑에서 얼굴만 쏙 내밀었다. 까만 눈이 반짝였다. 브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퓨리는 잠깐 망설이더니 아주 짧게 코끝을 킁킁대고는 다시 쏙 숨어버렸다.브리는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블링블링한 전쟁터

    문이 닫히자 방 안엔 다시 정적이 흘렀다. 황미영은—아니, 브리아나는 한참 동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금발. 파란 눈. 작고 예쁜 얼굴. 남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딱 그런 얼굴. “…미친.” 한 번 더 중얼거리고 나서야 현실감이 조금 따라왔다. 살아 있다기엔 이상했고, 죽었다기엔 너무 선명했다. 이불 감촉도, 카펫의 폭신함도, 향수 냄새도, 창문 밖으로 번지는 햇살도 전부 지나치게 또렷했다. 브리아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호텔처럼 길고 조용했다. 벽마다 커다란 그림이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브리?

    차가운 바닥에 얼굴이 닿기 직전까지도 황미영은 믿고 있었다. 사람 인생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는 있어도, 어디선가는 한 번쯤 멈춰 줄 거라고. 누가 어깨라도 붙잡아 주든가, 아니면 적어도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 생각 하나쯤은 정리하게 해주든가. 하지만 세상은 그런 친절이 없었다. 빛이 번졌다. 차가운 공기 대신, 이상할 만큼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세제 냄새도, 고기 연기 냄새도, 길바닥 먼지 냄새도 아니었다. 어디 비싼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나 맡을 것 같은 향. 황미영은 눈을 뜨려 했다. 눈꺼풀이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오늘은 들어올 생각하지마라

    “그래서. 내 돈으로 니들 결혼자금 하시겠다고?” 방 안 공기가 딱 멎었다. 시어머니는 생선살을 발라 주던 젓가락을 든 채 굳었고, 박진수는 입을 벌린 채 황미영을 노려보았다. 그 옆에 앉은 젊은 여자는 놀란 척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황미영은 식당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젖은 앞치마도 벗지 못한 채. 고무장갑 자국이 손목에 선명했고, 설거지 물이 바짓단을 타고 축축하게 번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불판 닦고 접시 나르던 사람의 꼴 그대로였다. “왜요? 계속하지 그러셨어요. 아주 분위기 좋아 보이던데.” 시어머니가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모히토에서 몰디브나 한 잔

    열심히 살면 언젠가 보답받는다고들 했다. 황미영은 마흔다섯이 넘도록 그 말을 믿어 보려 했고, 하늘은 꼭 그런 날을 골라 그 믿음을 짓밟았다. 황미영은 마흔다섯을 넘기고도 하루를 꽉꽉 채워 일했다. 새벽엔 마트 진열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엔 사무실 경리 일을 보고, 퇴근하면 부업으로 전단을 접었다. 그래도 모자라면 남의 식당 설거지까지 했다. 손끝은 늘 불어 있었고, 손등엔 세제에 데인 자국이 성한 날이 없었다. 그날도 저녁 피크가 막 빠진 식당 주방에서 미영은 산처럼 쌓인 그릇을 닦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손목을 타

更多章節
探索並免費閱讀 優質小說
GoodNovel APP 免費暢讀海量優秀小說,下載喜歡的書籍,隨時隨地閱讀。
在 APP 免費閱讀書籍
掃碼在 APP 閱讀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