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그렇지만 백성의 삶이 곧 조선의 삶이 되는 법. 이 땅의 백성으로서, 모두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사람이 아닌 미르라 할지라도 미래는 결코 볼 수 없는 법.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이 언제 저승길로 갈지 알고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의 역법이 완성되어 제가 사라지게 되더라도 그것은 알 수 없을 일. 저는 제가 지금 숨 쉬고 살아가는 조선 땅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것뿐입니다.”천우가 싱긋 웃었다.“그리고 혹시 아십니까? 하늘이 감격하여 역법이 다 만들어진 후에도 저더러 남아있으라고 유예를 해줄 지도요.”“저로서도 그게 가장 좋은 길입니다.”이도도 웃어보였다.“경연하기 싫을 때 가끔 장대비나 좀 내려주시고 하면 더욱 좋겠지요.”“사주하시는 겁니까?”“부탁드리는 겁니다. 제발 좀. 저도 가끔씩은 비 핑계대면서 벼슬아치들이랑 안 떠들고 차나 좀 마시고 싶단 말입니다.”이도가 키득대는 한편, 안심하는 투로 한숨을 내쉬었다.“그래서.”이도의 한마디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붉빛미르의 뒤를 잡으려면 가까운 곳의 학사들부터 찾아야하는데…….”“한양 근방으로 파견하신 학사가 또 따로 있으십니까?”“인천 쪽으로 간 학사가 한 명
양녕대군과 김초시의 배웅을 받으며 나온 두 사람이 천천히 말을 몰았다.말머리를 나란히 했음에도, 천우와 이도 모두 머릿속이 복잡하여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괜찮으십니까?”작은 고을의 어귀로 들어섰을 무렵, 천우가 이도를 보고 물었다.이도가 이쪽을 돌아보았다.천우가 말을 이었다.“대군마마께서 크게 놀라신 듯 보였습니다. 하긴, 저 같아도 갑자기 상감마마께서 찾아오신다면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일 듯합니다.”“저는 딱히 형님이 반성한다거나 뉘우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이도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네?”천우가 되물었다.“하지만 대군마마께서 적으나마 붉빛미르의 정보도 알려주시고, 협조적으로 나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인즉슨…….”“형님께서는 항상 저러셨습니다. 자신한테 해가 될 것 같으면 납작 엎드리고, 힘이 될 것 같으면 그 위에 서려고 하셨지요. 강약약강의 자세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처세를 구사하십니다.”이도는 영 못마땅하다는 기색이었다.“예전부터 저러셨습니다. 이번에도 물빛께서 함께 계셨으니 망정이지, 저 혼자였다면 절대로 저리 굽히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마 지금도 겨우 떨쳐냈다 안심하면서 탁주 한 사발 하고 계실 겁니다. 안 봐도 뻔하지요.”“…….”“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형님이 무슨 큰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 우선은 놔두고 보는 수밖에요. 붉빛미르를 정인으로 두고 있었으니 추포하라고 의금부에 명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관리들이 그게 뭐냐며 반문하겠지요. 후후.”“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하.”“그래도 형님을 감시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붉빛미르와 형님 사이가 그리 얕다고는 느껴지질 않았습니다. 붉빛미르가 지금은 밖으로 돌아다니고 있다한들, 형님께 몸을 의탁하려 돌아올 수도 있겠지요.그러다 이도가 천우에게로 더 바싹 다가왔다.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런데 물빛. 물빛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무슨 말씀이신지?”“붉빛미르가 물빛미르께 거절당하여 크게 낙심했다고 하
“형님.”“네. 전하.”“어리는. 붉빛미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이도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어왔다.“그렇게 지치고 외로운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양녕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리와 지금까지 정을 나누며 살아온 동안, 한 번도 우울해하거나 눈물지은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별일이었다고 했다.“반촌에 볼일이 있다기에 잘 다녀오라 보내고선 저는 그저 개천에서 낚시나 하고 있었지요. 밤늦게까지 돌아오지를 않아 이상하다 싶었는데, 완전히 녹초가 된 채로 비틀비틀 집으로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옷 여기저기가 찢기고 헤진 채로 말입니다.”“놀라셨겠습니다.”“어떤 외간남자한테 겁탈이라도 당한 것인가 싶어 당장 죽여 버릴 요량으로 뛰쳐나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리는 나쁜 일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지친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하긴 붉빛미르가 쉽게 해코지를 당할 인물이 아니기도 하고요.”양녕이 천우를 흘깃거렸다.“붉빛미르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였다면 분명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기량이 뛰어난 무사라거나, 기우사를 만나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만 있기에 꿀물 한 잔 타주면서 타일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좀 해달라고요.”“뭐라 했습니까, 그래서?”“일생의 숙적을 만났고,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해묵은 원한을 내려놓
“반역?”양녕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지금 반역이라고 하셨습니까? 전하?”“그렇습니다.”이도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어느새 한손에 다시 칼 손잡이를 붙잡은 채였다.“무료한 인생 속에서 여인 하나를 만나 꽃을 피우게 되었는데, 어찌 그 꽃을 꺾으려하느냐, 다분히 말초적으로 반박하시는데 제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형님. 그따위 망발은.”“뭐, 뭐라…….”“형님이 폐세자 되신 것은, 형님의 성정이 포악하고 유희만 찾으며 백성보다 당신 한 몸을 더 중히 여기는 그 저열함 때문이오. 왕의 그릇이 아니었기에 폐위된 것이지 그 누구도 강제로 형님을 끌어내린 것이 아닙니다. 아바마마께서 형님을 폐위시킨 그날 밤에 얼마나 크게 통곡하셨는지, 형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어본 적 있소?”“…….”“그리고 어리는 사람의 형상을 한 붉은 용. 단신으로도 한 개 도(道)는 물론이고 일국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개념만 다른 역발산이오. 그런 어리의 정체를 알고도 그저 운우지정(雲雨之情)에 허덕여 정인으로 남겨두었다고?”이도가 코웃음을 치며 양녕을 노려보았다.“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형님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뻔히 다 알고 있는데. 나를 바보로 아시오, 형님? 형님께서 아무 저의 없이 그리 결정하셨다고 내가 믿기를 바라셨소? 아니, 형님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야심이 있소. 왕에 대한, 정점에 대한. 그러니 붉빛미르의 힘에 기대어 작품이나 하나 만들어보려 하신 것이겠지. 내 말이 틀리오?”이도가 반박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투로 되물었다.그러나
천우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무슨 말씀이신지?”“어리가 완전히 넋이 나간 채로 돌아왔었습니다. 지난밤에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려 해도 대답도 않고, 그저 마음 한구석이 아픈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달래도 보고, 캐 물어도 보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어리가 그렇게까지 실의에 잠긴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참으로.”“대군마마. 그것은…….”“어리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양녕이 천우에게로 한 발짝 더 다가서며 따져 물었다.“대답해보시오. 물빛미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요?”“…….”“그리고 어리는 새벽녘이 되기도 전에 갑자기 떠났소. 편지 하나만을 남겨둔 채 말입니다. 원래 드나듦이 자유로운 아이이기는 해도, 이번만큼은 뭔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단 말입니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겁니까?”양녕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붉빛미르가 함께 있었다면 남녀가 쌍으로 불을 뿜는, 괴이한 모습을 볼 수 있을 터였다.여인을 잃은 남자……. 그 강렬한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형님.”천우가 아무 말 않고 있자, 이도가 가만히 양녕을 불렀다.“물빛미르는 물빛미르가 할 일을 하셨던 것뿐입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함부로 재단하지 마시지요.”“…&hel
“형님.”“네. 전하.”“어리는. 붉빛미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이도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어왔다.“그렇게 지치고 외로운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양녕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리와 지금까지 정을 나누며 살아온 동안, 한 번도 우울해하거나 눈물지은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별일이었다고 했다.“반촌에 볼일이 있다기에 잘 다녀오라 보내고선 저는 그저 개천에서 낚시나 하고 있었지요. 밤늦게까지 돌아오지를 않아 이상하다 싶었는데, 완전히 녹초가 된 채로 비틀비틀 집으로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옷 여기저기가 찢기고 헤진 채로 말입니다.”“놀라셨겠습니다.”“어떤 외간남자한테 겁탈이라도 당한 것인가 싶어 당장 죽여 버릴 요량으로 뛰쳐나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리는 나쁜 일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지친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하긴 붉빛미르가 쉽게 해코지를 당할 인물이 아니기도 하고요.”양녕이 천우를 흘깃거렸다.“붉빛미르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였다면 분명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기량이 뛰어난 무사라거나, 기우사를 만나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만 있기에 꿀물 한 잔 타주면서 타일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좀 해달라고요.”“뭐라 했습니까, 그래서?”“일생의 숙적을 만났고,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해묵은 원한을 내려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