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청년이 여전히 공손하게 물었다.
“맞습니다요.”
그런 청년 앞에서 노비들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한양 좌포청에서 나왔습니다요.”
“그렇다면 혹시 금화도감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금화도감(禁火都監)이라면 도성의 화재에 대응하기 위해 2년 전에 설치된 관청이자 여기 모인 사내들이 한낮에 우물 파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갑자기 나타난 청년이 난데없이 금화도감을 찾으니 노비들로서도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물론입죠.”
마용이 대답했다.
“저희가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걸요.”
“그렇습니까? 아까는 좌포청이라고…….”
“관청이 멀리 떨어져 있어, 일이 생길 때면 저희 같은 공노를 동원해 부리고는 합니다.”
마용의 설명을 청년은 주의 깊게 듣는 듯했다. 그러다 슬쩍 마용의 어깨 너머로 파다 만 우물 구덩이를 넘겨보는데, 그 표정이 자뭇 진지했다.
“일이 생길 때라…….”
청년이 홀로 중얼거렸다. 그때 마용은 이 청년이 혹시 그들이 모르는 단계에서 파견된 감독관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퍼뜩 들었다.
“우물을 파다 잠시 쉬고 있던 참이었지요. 금방 끝날 겁니다.”
마용이 얼른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자 다른 공노들도 무언가 낌새를 느꼈던지 주섬주섬 삽을 들고 구덩이 쪽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청년이 다시 마용을 불렀다.
“우물이라 하셨습니까?”
“네. 가옥 다섯 간 거리마다 우물을 하나씩 두어야 해서 말이지요.”
“다섯 간이라.”
“지금이야 보송보송하지만 해질녘쯤이면 여기서 물이 콸콸…….”
“이상하네요.”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찌 물 한 방울도 나지 않을 곳에 우물을 팔 수 있단 말입니까?”
“네?”
마용이 놀란 소리를 냈다. 그러자 청년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공노들이 일하고 있던 구덩이 쪽을 가리켰다.
“지금 일손들께서 딛고 계신 곳은 수맥(水脈)이 비켜나는 곳이라 아무리 깊이 들어간들, 아침 이슬만한 물 한방울 얻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도 여기를 계속 파실 생각이십니까?”
그들을 탓한다기보다는 진정으로 궁금해 묻는 어조였다.
수맥이라. 망나니 풍수사가 입버릇처럼 들이미는 단어였다.
툭하면 여기에 수맥이 흐르네, 어쩌네 하며 주위를 들들 볶는데 듣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었다. 늘 세상만사 다 꿰뚫어본다는 표정으로 젠체하는 다른 풍수사들의 행태 또한 이골이 나도록 봤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런데 이 청년은 달랐다. 희한하게 신뢰가 갔다. 정말로 땅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마을 처녀 여럿 울렸을지 모를, 단정하고 수려한 용모에 홀렸다고 해야 하나?
“외람되오나…….”
마용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공자께서도 풍수사이십니까?”
“아닙니다.”
청년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 뒤에 덧붙이는 말도 함께였다.
“그렇지만 물이 나오는 곳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너무나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 덕에 오히려 의심이 커졌다.
“어떻게 말입니까?”
“제가 말하는 대로 한번 해보시지요.”
청년은 마용이 그를 탐탁찮아 한다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는 듯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마용은 청년에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청년은 ‘직접 보여드리는 것이 좋겠다’ 답하고는 성큼성큼 구덩이 쪽으로 걸어왔다.
“음…….”
그리곤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대는 것이었다. 다른 공노들이 뭐하는 짓인가 싶어 이쪽을 쳐다보는 사이, 청년은 ‘아!’ 하는 탄식을 내뱉곤 별안간 기쁜 얼굴이 되어 허리를 구부렸다.
“이거면 되겠다.”
청년이 찾아낸 것은 주먹만 한 돌덩이였다.
돌을 집어든 청년이 휙 몸을 돌려 구덩이로부터 여섯 발자국을 걸어갔다.
뭘 하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 다음에 청년이 한 행동은 그저 걸음을 멈춘 곳에 우두커니 서 있다 천천히 손에 들린 돌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게 다였다.
툭-!
돌을 떨어뜨린 청년이 다시 구덩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구덩이 속에 하반신을 파묻고 있던 공노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딱 2자만…….”
공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거기서 딱 2자만 더 파보시길 바랍니다.”
“네?”
“하시던 대로 땅을 파시라는 말씀입니다. 그쪽으로 흘러가라고 말해두었으니 곧 나올 것입니다.”
“저, 뭐가 나온다는 말씀이신지…….”
공노들이 떨떠름해하며 물었다. 청년은 빙긋 웃을 뿐,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신분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옆에서 빤히 지켜보고 있는데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노들은 다시 삽을 들어 구덩이 아래쪽을 파고 내려갔다.
“어어?”
한 공노가 갑자기 놀란 소리를 냈다. 방금 땅속에 박아 넣은 삽날 사이로 무언가 차가운 것이 새어나온 탓이었다.
물이었다.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물이다!”
“물이 나온다!”
공노들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살았다. 우물도 제시간에 팔수 있을 거고, 망나니 풍수사에게 얻어맞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 여럿 살린, 말 그대로 생명수였다.
구덩이 속에서 공노들이 기뻐하는 동안, 역시 환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용은 슬쩍 옆에 서 있던 청년을 살폈다. 유려한 턱선, 갸름한 볼 사이로 가느다랗게 올라선 미소 끝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저 어딘가 명산 한 자락에 기거하던 신선이 청년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다.
아득했다. 마용은 청년에게 압도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찌…….”
마용이 어려워하며 입을 열었다. 청년이 그를 향해 몸을 돌렸을 때, 옷자락에서 나는 소리마저 영험하게 들렸다.
“어찌 아셨습니까? 물이 나온다는 것…….”
“저곳은 물이 나올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탁했습니다. 여러분이 파놓은 구덩이 쪽으로 흘러주기를요.”
“그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대개는 잘 안 들어줍니다. 물은 변덕이 심한 친구들이라…….”
청년이 지팡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아까 땅에 떨어뜨린 돌덩이 쪽으로 향했다.
“그래서 돌을 들어 지축을 흔들며 부탁을 했습니다. 조금만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주지 않겠느냐고요. 다행히 말을 들어주더군요. 그나저나 앞으로 이 일대에는 우물을 파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금이야 물줄기가 흐른다고 쳐도, 천거(川渠)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니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물이 마르고 말겁니다. 우물을 파기에는 좋지 않은 곳입니다.”
청년의 말대로, 망나니 풍수사가 지정한 이쪽은 강물은커녕, 저지대로 내려드는 개울 하나 없어 발 한 되 일구기조차 쉽지 않은 땅이었다.
“그러니 우물을 파고 싶다면 저 구덩이를 중점으로 동편으로 5리 떨어진 곳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그 아래로 일곱 길을 파면 물이 나올 것입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물이라 양이 풍족하고 시원할겁니다.”
거기에 물어보지도 않은 다음 작업 장소까지 물색을 해주니 보면 볼수록 신통했다. 마용은 그런 청년이 더더욱 궁금해졌다.
“공자께서는……. 대체 뭐 하는 분이시기에…….”
“그저 한양에 부모님 찾아 올라온 일개 서생입니다.”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얼굴에 서린 남모를 외로움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갑자기 세상에 나와 너만 남겨두고 숨을 거두었을 때, 그냥 아무런 생각도 안 나더구나. 몸은 여기 있는데 영혼은 어딘가로 떠나버린 기분. 그래. 그랬었다.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지.”“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조금도 나질 않습니다.”“그럴 수밖에. 네가 젖을 떼자마자 가버렸으니.”“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아름다웠다.”백사성이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현명하고 헌신적이며, 또 누구라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예뻤지. 사람이 아닌 미르조차 그 미색(美色)에 반해버렸으니 말이다.”“아버님께서도……. 혹시 사모하셨습니까?”“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왜 기우사를 떠나 용의 알을 밴 사람을 따라갔겠느냐?”백사성의 얼굴에 시원섭섭한 빛이 어렸다.“그래도 좋았다.”백사성이 말을 이었다.“내 몸 하나 바쳐 사모하는 여인을, 그리고 조선의 하늘을 수호할 물빛미르를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그것이 사람이다. 어리석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기 뜻하는 대로 살아가는 생물이지. 어찌 보면 붉빛미르는 사람을 증오하면서도 더욱 사람과 가까운 존재였는지도 모른다.”백사성이 거기까지 말하곤 술 한 잔을 홀짝 비웠다.천우가 얼른 부친의 빈 잔을 채워넣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이도가 못내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옆에 함께 서 있던 백사성, 지운도 눈을 반짝이며 답을 채근하고 있었다.“그렇게 안고 난 뒤에 말입니다.”이도가 조바심을 냈다.“그렇게 그냥 끝났습니까? 붉빛미르가 그냥 끝을 냈습니까?”“그러하였습니다. 전하.”천우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붉빛미르는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포옹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말입니다.”“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껴안고 있던 중에 붉빛미르가 사라졌습니다.”“물빛께서 안고 계시던 품에서 말입니까?”“네. 마치 연기처럼.”천우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웅얼거렸다.“이 팔에 안겨있던 감촉이 여전히 남아있거늘…….”아쉬운 것인지, 꿈을 걷는 것 같은 몽롱함에서 벗어나려는 것인지는 몰랐다.그러나 품안 가득 다가왔던 온기, 촉감, 부드러움은 방금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천우 네 말은.”잠자코 듣고 있던 백사성이 나서 말했다.“붉빛미르가 나타났고, 하늘로 돌아가겠다며 작별을 고했고,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달라고 했고
붉빛미르가 이어 말했다.“우리 두 미르는 사람들의 지혜가 늘어나 천문을 읽게 되는 순간, 더 이상의 쓸모가 없어 하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알고 있소.”“저는 그것이 싫어 불로 저항했던 것입니다. 왜 사람의 행보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요. 하지만 물빛미르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만을 바라보셨지요. 사람과 섞여 사셨고요.”머리칼을 가만히 넘기는 기척이었다.“저 또한 그것이 어떤 삶일지 궁금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여인의 모습으로 지내보기도 하였습니다만……. 여전히 저는 사람보다는 미르에 가까운 넋이었습니다. 더욱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사람은 여전히 어리석고 폭력적인 생물이지요. 그렇지만 미르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생명이기도 하고요.”“…….”“물빛미르와 여러 번 싸우면서 겨우 깨달았습니다. 나와 같은 미르가, 이토록 사력을 다해 사람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미르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 붉빛미르가 일으킨 사단은 항상 울음소리와 피만을 불러왔지요.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언제부턴가 의심이 들더군요. 그래도 인정 못하고 마지막 발악으로 내가 당신을 가장 미워하던 때로 시간을 돌려 싸워보기도 하였고요.”“이포교를 숙주로 삼았을 때의 말이로군.”“네. 그리고 결국 물빛께서 저와 대등하게 맞서셨지요. 그리고 천지신명께서도 직접 답을 주셨고요.”붉빛미르의 고개가 올라갔다.
“역시 당신이었군.”천우가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붉빛미르 쪽에서 어둠 속에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보였다.“언젠간 찾아올 것이라고 짐작했소.”천우의 칼 쥔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당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생각했지.”“똑똑하시네요.”“이렇게 나타나주어 고맙소. 마음 졸이며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끝을 내는 것이 나을 것이오. 나한테든, 당신에게든.”천우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산속에 잠든 물 전체가 우르릉- 대는 소리와 함께 진동했다.천우의 명에 맞추어 움직이겠다며 한껏 예기(銳氣)를 다듬는 듯했다.붉빛미르는 가만히 이쪽을 살피기만 할뿐, 손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불길이라도 내밀 줄 알았는데, 별일이었다.“어떠셨습니까?”불쑥, 붉빛미르가 그리 물었다.“뭐를 말이오?”천우가 되물었다.“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지금의 조선 땅 말입니다. 물빛께서 보시기에는 이쪽의 삶이 만족스러우십니까?”“갑자기 무슨…….”“이쪽의 삶은, 시간은, 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 천지신명의 뜻을 받든 붉빛미르가 세상을 침범하지 않고, 천문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놔두기로 결심한 세계.
지운이 물었다.“서촌 말씀이십니까?”“이왕 여기까지 나온 김에 그동안 하늘 보는 거 어디까지 되었나 살펴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학사들 은자(銀子)라도 좀 챙겨줘야 닭백숙이라도 고아 먹으면서 일하지 않겠습니까?”“전하의 은덕이 하해와 같으십니다.”그렇게 4명의 사내는 순식간에 다음 행보를 정하고는 곧바로 서촌으로 옮겨갔다.“저, 전하!”어김없이 장영실이 나와 맞이했다.지난 기억보다 조금 더 피곤하지만, 눈의 생기만큼은 곱절은 더한 장영실이었다.장영실뿐 아니라, 다른 학사들도 여럿이 한자리에 있었다.밤중에 오직 장영실 혼자만 일하던 기억 때문일까. 학사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이 오히려 낯설게 보였다.“어, 어인 일로 옥체를 직접 행차하셨습니까?”“잠깐 볼일이 있어 암행을 나왔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한번 와 보았다. 자, 일단 이것들 좀 받고.”이도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옆에 있던 학사에게로 건넸다.천문 연구에 지친 사기(士氣)를 채워줄 묵직한 은자 덩어리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은자를 받아든 학사가 전원이 허리를 굽히며 감사했다.장영실이 그 학사를 가만히 불렀다.“이여립. 자네는 얼른 그것을 가지고 장터에 나가 좋은 술과 포(脯)를 사오게.”“
“뉘십니까?”맑은 목소리가 들렸다.여인의 목소리였다.“지나가던 길손인데, 말씀 좀 묻겠소.”천우가 의아함을 숨긴 채로 대답했다.끼익-문이 열렸다.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엇…….”놀란 천우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냈다.어리였다.틀림없는 어리였다.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자태로 문을 열고 나와 이쪽을 보는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붉빛?”천우가 부지불식중에 그리 불렀다.“네?”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외람되지만, 선비님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빙긋 웃으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서는 어리였다.그 바람에 천우는 뒤로 물러서며 물의 힘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물보라를 일으켜 다시금 물과 불의 다툼을 재현할 작정이었다.“나, 나는…….”천우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백……. 백천우라고 하는데&he
어리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더 이상 미르가 필요 없음을 천지신명께 증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그리고 파괴적으로 그 작업은 행해지고 있지요. 착실하게.”“그게 무슨……”“사람들도 애초부터 우리를 노리고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벌이는 일이 우연찮게도 미르를 몰아내는데 일조하고 있을 뿐이지요.
일순간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흘렀다.바람조차 놀란 것인지 밤중의 산속임에도 나뭇잎 하나 흔들리는 소리 하나 들리질 않았다. 세상 만물이 모두 이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했다.“그, 그게……”천우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시오?”“지금 이 조선 땅.”
“무엄하오.”천우가 지친 와중에도 주의를 주었다.“왕을 바꾸다니. 그리고 그것이 하찮다니. 백성으로서 품을 수 없는 참람한 사상이오.”“백성으로서?”어리가 되물었다.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천우를 노려보는 것이 조금 발끈한 것 같기도 했다.“물빛께서는 진정으로 당신이 이 땅
“으음……”천우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상자 안에 넣고 마구 흔들어진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머리는 지끈거리고,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으며 속도 울렁거렸다.무엇보다,일어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너무나도 지쳐버린 탓인지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감각의 통제력을 상실한 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