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금화도감 관리들을 만나고 싶다면 우선 한성부(漢城府)를 찾아가셔야 합니다.’
마용이 그리 말했다.
‘길잡이로 삼을 방앗간이나 풍물점을 알려드릴 테니 그쪽을 따라가 보시지요.’
마용이 일러준 대로 행인들이 모이는 쪽으로 들어서자 전방을 향하여 시원시원하게 뻗은 대로(大路)가 나왔다.
양옆으로 고깃간, 대장간, 광목점 따위의 크고 작은 가게가 들어찬 골목을 지나치다보면 절로 인파의 흥에 취할 것만 같았다. 더
운 날씨임에도 저자는 북적였고, 사람들은 물건을 두고 흥정하느라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전에 살던 산골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청년은 처음 맛보는 도심의 활기를 다소 불편해하는 눈으로 마주하며 잰걸음을 옮겼다. 산에 있을 때는 이렇게 어수선한 적이 없었는데.
왜 그의 부친이 한양이라면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든 것인지,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무서운 곳이다. 한양은.’
청년의 부친은 종종 그리 말하고는 했다.
‘사람도 많고, 보고 즐길 것도, 골칫거리도 많지. 세상사 태반의 분쟁이 사람 사이에서 나오니, 어찌 한양이 무섭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
그럼에도 부친은 가끔 한양이 그리운 것처럼 운을 띄우기도 했다. 마치 그곳에서 살다 온 사람처럼 말이다.
이에 청년이 한양 생활에 대해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동경하지 말거라.’
늘 단호한 어조였다.
‘한양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 곳이 아니다.’
‘어딜 가든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는 곳이다.’
‘천우 너는 절대로 한양에 발을 들일 생각일랑 마라.’
천우.
그것이 청년의 이름이었다. 천우의 부친은 항상 하나뿐인 아들이 바깥세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종용했다.
‘또한, 벼슬아치와는 상종하지도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부친은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옆구리에 칼을 차거나 병장기를 다루는 자들을 매우 경계했다.
어릴 적부터 영민했던 천우는 따져 묻지 않고 부친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그저 말할 수 없는 과거가 있으려니 여기고 넘길 뿐이었다.
그러기를 몇 해가 지났다. 그리고 천우는 지금 한양, 그것도 온갖 인간 군상들로 북적이는 저자에 나타났다.
그동안 산골에서 숨죽여 지내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마치 오래전에 여기에서 살았다는 듯이.
‘아버님…….’
행여나 지나치는 사내들 중에 부친과 닮은 얼굴이 있을까 살폈으나, 허사였다.
‘대체 어디 계십니까?’
부친이 사라진지 벌써 2년째였다.
금방 돌아오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산골에 앉아 홀로 밤을 지새우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부친의 당부를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바깥세상에 관심가지지 말라는 철칙을 먼저 어긴 것은 바로 당신이었다.
‘한양에 불 끄러 다녀오마.’
부친은 분명 그리 말했었다.
갑자기 야밤에 자리가 부산스러워 잠깨어보니, 부친이 행장을 꾸리고 있었다.
천우가 일어났음을 알아챈 부친이 굳은 목소리로 천우의 손을 잡았다.
엄하고, 무뚝뚝하고, 천우의 응석하나 제대로 받아주지 않던 부친이었다. 그러나 천우의 손을 잡던 그 따스함만은 아직도 온전히 기억났다.
‘혼자서도 굳건히 버텨내거라. 알겠느냐?’
그게 부친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자식이 아비를 찾아 한양으로 올라왔다.
한양 나그네, 천우의 사정은 이러하였다.
* * *
천우는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으려 애썼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앞으로 걸어가던 사이, 그는 어느새 완전히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양옆으로 지나치던 사람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천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휙- 제 갈 길을 갔다.
‘아까 거기서 길을 물어보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군.’
운 좋게 좌포청 공노들을 만났으니 망정이지, 최악의 경우에는 필시 한양에 도달하자마자 길을 잃었을 것이다.
집 떠나온 첫 나들이에서 미아가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제 슬슬 갓을 맞출 고민을 할 정도로 번듯한 성인이 되었는데,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다.
성인. 어른이라.
문득 저 앞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던 여인 두 명이 눈에 띄었다.
머리에는 전모(氈帽)를 썼고, 화려한 색상의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가 눈에 띄었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 그리고 진홍빛 입술이 고혹적이었다.
마실 나온 기생들이 분명했다.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임에도 그녀들을 바라보던 천우의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쳤다.
산중에서 일평생을 지내온 한창 나이의 청년에게 있어 농익은 여인의 자태란 쉽사리 눈을 뗄 수 없는, 물씬한 자극이었다.
천우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두 기생이 동시에 천우와 눈을 마주쳤다.
“호호…….”
기생들이 자기들끼리 얼굴을 맞대고 수군거리며 킬킬 웃어댔다.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가느다란 웃음소리는 그들이 서로를 지나쳐 갈 때까지 끊이질 않았다.
“후…….”
기생들이 사라지자 천우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왔건만, 여인을 발견하고 두근대고 있다니. 부친을 찾겠다는 결심이 무뎌져서는 아니 되었다.
빨리 한성부를 찾아야했다. 마용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이제 곧 이정표가 될 자모전가(子母錢家:고리대금업자)의 가옥이 나올 것이다.
서둘러야 했다.
천우가 지팡이 끝을 오른발 옆에 툭 내려놓던 때였다.
“아악!”
등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들치기다!”
화들짝 놀란 천우가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비렁뱅이 복장을 한 사내가 쏜살같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내의 손에는 아낙네가 차고 다닐만한 복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비명을 지른 것은 아까 천우를 비웃던 기생들이었다.
한 기생이 땅에 주저앉아 있고, 다른 한명은 이쪽을 보며 고함을 치고 있는데, 필시 아까 그 비렁뱅이가 복주머니를 낚아 채간 것이었다.
“나으리!”
소리치던 기생이 갑자기 천우를 보고 꽥꽥됐다.
천우가 남은 손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나 말인가?”
“여기 나으리 말고 누가 계십니까!”
“무, 무슨…….”
“저놈 좀 잡아 주시어요! 저희 목숨이 달렸습니다!”
“아니, 내가 왜…….”
“부디 도와주시어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기생이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릴 듯 그렁거리는데 제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되돌아봄직했다.
부탁? 부탁이라고 했다.
천우는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부터, 이미 몸이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성격이랄까? 아니면 천성이 그러했던 것일까. 천우는 예전부터 남을 돕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심신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것일지. 돕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었다.
탓-
다음 순간, 천우는 어느새 사내를 쫓고 있었다.
발이 빠르기는 하나,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여럿 사람 놀라게 할 정도로 몸놀림이 기민한 천우였다.
저런 소매치기 한놈 잡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 틈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비렁뱅이가 대로를 벗어나더니 후미진 뒷골목으로 숨어드는 것이 보였다.
천우 또한 놈이 들어간 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갔다. 문 닫은 가게며 인적 드문 창고 따위가 성곽처럼 늘어서 있어 대낮에도 그림자가 지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비렁뱅이의 그림자가 저쪽 폐쇄된 참점(站店)쪽으로 사라졌다.
이를 발견한 천우가 얼른 그 뒤를 쫓았다. 막다른 곳처럼 보이는데, 굳이 저 길로 도망치는 것이 수상했다.
이곳 지리를 잘 모르는 풋내기이거나, 아니면…….
‘함정?’
퍼뜩 그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천우가 멈추어 서자마자 담벼락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패거리가 튀어나왔다. 모두 여섯 명이었고, 손에 조악한 칼이며 녹슨 낫 따위를 거머쥔 채였다.
패거리가 앞뒤로 천우를 포위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금화도감 관원들을 찾게 된 천우는 그들을 한명한명 눈여겨보았다.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현장 주위에 얕은 호(濠)를 파고, 물을 채워 넣어 방화선을 만든 뒤 빗속을 뚫고 들어가 불타는 기둥과 지붕 따위를 부수고 무너뜨렸다.거기에 젖은 흙을 퍼부어 불의 숨통을 조이니, 금방이라도 시장 한구석을 태워먹을 것 같았던 불길이 이내 꺼져버렸다.‘아!’멍하니 그들이 하고 있던 양을 살피던 천우가 얼른 주문을 외웠다.“바라옵니다. 아픈 눈물, 이제 그치소서.”그러자 비도 멈추었다.관원들은 홀딱 젖은 모양새가 되어 주변을 정리하고 부상자들을 살폈다.“불씨 하나까지 모두 없앴습니다!”“다친 사람을 선별하여 혜민국(惠民局)으로 보내겠습니다!”“알겠다!!!”포교가 호방하게 외치며 수하들을 감독하는 한편, 모여 있던 군중을 향해 뒤돌아섰다.포교는 키가 8척(尺)에 가까울 정도로 장대한 기골에, 멧돼지라도 때려잡을 수 있을 듯한 팔뚝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정도로 보였고, 긴 수염과 구레나룻이 정기(精氣)가 서린 눈과 조화를 이루어 강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성체로 이르기 직전의 표범이 사람의 형상을 띄었다면 아마 이 포교와 같았을 것이라고, 천우는 생각했다.“모두 들으시오!”포교가 별안간 군중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몇몇은 그
곰보나 비렁뱅이나 발 빠른 것은 비슷했다.놈은 물벼락 맞은 개 마냥 우당탕 뛰었다. 천우는 칼집을 수습하자마자 곧바로 놈을 따라갔다.천우를 등진 채 도망가던 곰보가 일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골목을 벗어나 저자로 섞여든 것이었다.천우가 저자로 나왔을 때는, 놈은 이미 저쪽 내리막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행인을 거칠게 떠미는 것은 덤이었다.“뭐냐!”“어이구구…….”“이 사람이! 미쳤어?!”고함과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곰보는 아랑곳 않고 천우와 거리를 벌리는 데만 집중하였다.놓칠 수 없었다.곰보 놈이 빼앗아간 저 옥표(玉票)는 부친을 찾기 위한 수단이자 그들 부자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빼앗겨서는 아니 되었다. 절대로.천우는 사람들 틈을 힘겹게 빠져나가며 곰보를 뒤쫓았다. 더 이상 멀어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워지지도 않았다.게다가 곰보는 바구니며 놋쇠 그릇 등 닥치는 대로 물건을 뿌리며 길을 막고 있었다. 갑자기 하루 벌이가 엉망이 된 상인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저게…….’곰보가 던진 소쿠리를 타넘은 천우가 순간 멈칫했다.곰보가 이번에 손에 든 것은 꽤 위험해보였다.대충 진흙을 구워 만든 간이 아궁이를 세워놓고 좁쌀죽을 끓여 팔던 노파의 장작이었다. 반쯤 남은 장작 끝에서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뭐하는 짓…….”당황한 노파가 장작을 빼앗으려 했다.그러나 곰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붙은 장작을 천우에게로 날렸다.딱-!천우는 그대로 지팡이를 휘둘러 쳐냈다. 얻어맞은 장작이 자치기를 한 것처럼 보기 좋게 날아갔다.그리고 날아간 장작이 하필이면 각종 식용유를 취급하던 유전(油廛)으로 떨어졌다.바깥에서 졸고 있던 점주가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장작을 옆으로 치웠다. 그 바람에 그릇에 담겨있던 들기름, 콩기름 따위가 엎어졌고, 불똥이 닿자마자 삽시간에 화약 터진 것처럼 불길이 치솟았다.화아아악-!!!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이 터졌다.점주가 불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다.
“이보슈, 나그네 양반.”패거리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천우를 불렀다. 얼굴 반쪽이 곰보로 뒤덮여 남 보기에 흉측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거 보아하니, 과거 치르기 전에 미리 올라와 숙식하려는 서생이신거 같은데 여기서 붓 한번 못 잡아보고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소?”천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굴리며 패거리의 위치, 무기, 그리고 퇴로를 확인할 뿐이었다.“골방에 박혀 책만 뒤적이던 분이라 너무 순진하셨소.”곰보가 이어 말했다.“계집년들 분냄새에 아랫도리가 뜨끈뜨끈하시던가? 겁도 없이 들치기 하는 놈을 쫓아오다니 말이오.”그러면서 자기 옆을 기웃거리는데, 아까 복주머니를 채어 달아나던 사내가 낄낄 웃고 있었다.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기생들과 들치기, 곰보 모두가 한패였다.완전히 당했다.“맛난 것도 급히 먹으면 체하는 게 세상 이치요, 서생 양반.”곰보가 살벌하게 말을 이었다.“그런데 이걸 어쩌나? 우리는 식성이 워낙 좋은 천것들이라서. 사람이고 양반이고 다 잡아먹는다고.”“원하는 게 뭔가?”천우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기생들 앞에서 어리바리하던 때와는 달리 상당히 결기가 어려 있었다.“가진 거 다 내놓으시오.”곰보가 중얼거렸다.“그럼 포청에 신고 못하게 혀만 자르고 보내드리지.”“못하겠다면?”“그럼 죽어야지.”곰보가 양옆을 돌아보며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낫을 든 두 패거리가 천우를 향해 달려들었다.인의(仁義)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사냥하기에 바쁜 짐승의 눈을 한 채였다.패거리가 천우의 이마를 향해 낫을 찍었다.그리고 동시에, 천우의 지팡이가 허공을 갈랐다.금속에 비친 햇빛이 일순간 번쩍 광채를 뿜었다.“으아아악!”패거리가 고통에 찬 괴성을 질렀다.어느새 잘려나간 그의 손목이 낫과 함께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분수처럼 쏟아지는 반쪽 팔을 감싼 채, 패거리가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아마 팔이 잘린 격통(激痛)에 의식을 잃은 것이리라.모두가 말을 잃었다.
‘금화도감 관리들을 만나고 싶다면 우선 한성부(漢城府)를 찾아가셔야 합니다.’마용이 그리 말했다.‘길잡이로 삼을 방앗간이나 풍물점을 알려드릴 테니 그쪽을 따라가 보시지요.’마용이 일러준 대로 행인들이 모이는 쪽으로 들어서자 전방을 향하여 시원시원하게 뻗은 대로(大路)가 나왔다.양옆으로 고깃간, 대장간, 광목점 따위의 크고 작은 가게가 들어찬 골목을 지나치다보면 절로 인파의 흥에 취할 것만 같았다. 더운 날씨임에도 저자는 북적였고, 사람들은 물건을 두고 흥정하느라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전에 살던 산골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청년은 처음 맛보는 도심의 활기를 다소 불편해하는 눈으로 마주하며 잰걸음을 옮겼다. 산에 있을 때는 이렇게 어수선한 적이 없었는데.왜 그의 부친이 한양이라면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든 것인지,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무서운 곳이다. 한양은.’청년의 부친은 종종 그리 말하고는 했다.‘사람도 많고, 보고 즐길 것도, 골칫거리도 많지. 세상사 태반의 분쟁이 사람 사이에서 나오니, 어찌 한양이 무섭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그럼에도 부친은 가끔 한양이 그리운 것처럼 운을 띄우기도 했다. 마치 그곳에서 살다 온 사람처럼 말이다.이에 청년이 한양 생활에 대해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동경하지 말거라.’늘 단호한 어조였다.‘한양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 곳이 아니다.’‘어딜 가든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는 곳이다.’‘천우 너는 절대로 한양에 발을 들일 생각일랑 마라.’천우.그것이 청년의 이름이었다. 천우의 부친은 항상 하나뿐인 아들이 바깥세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종용했다.‘또한, 벼슬아치와는 상종하지도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부친은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옆구리에 칼을 차거나 병장기를 다루는 자들을 매우 경계했다.어릴 적부터 영민했던 천우는 따져 묻지 않고 부친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그저 말할 수 없는 과거가 있으려니 여기고 넘길 뿐이었다.
청년이 여전히 공손하게 물었다.“맞습니다요.”그런 청년 앞에서 노비들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한양 좌포청에서 나왔습니다요.”“그렇다면 혹시 금화도감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금화도감(禁火都監)이라면 도성의 화재에 대응하기 위해 2년 전에 설치된 관청이자 여기 모인 사내들이 한낮에 우물 파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갑자기 나타난 청년이 난데없이 금화도감을 찾으니 노비들로서도 황망하기 그지없었다.“물론입죠.”마용이 대답했다.“저희가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걸요.”“그렇습니까? 아까는 좌포청이라고…….”“관청이 멀리 떨어져 있어, 일이 생길 때면 저희 같은 공노를 동원해 부리고는 합니다.”마용의 설명을 청년은 주의 깊게 듣는 듯했다. 그러다 슬쩍 마용의 어깨 너머로 파다 만 우물 구덩이를 넘겨보는데, 그 표정이 자뭇 진지했다.“일이 생길 때라…….”청년이 홀로 중얼거렸다. 그때 마용은 이 청년이 혹시 그들이 모르는 단계에서 파견된 감독관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퍼뜩 들었다.“우물을 파다 잠시 쉬고 있던 참이었지요. 금방 끝날 겁니다.”마용이 얼른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자 다른 공노들도 무언가 낌새를 느꼈던지 주섬주섬 삽을 들고 구덩이 쪽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그 꼴을 보고 있던 청년이 다시 마용을 불렀다.“우물이라 하셨습니까?”“네. 가옥 다섯 간 거리마다 우물을 하나씩 두어야 해서 말이지요.”“다섯 간이라.”“지금이야 보송보송하지만 해질녘쯤이면 여기서 물이 콸콸…….”“이상하네요.”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어찌 물 한 방울도 나지 않을 곳에 우물을 팔 수 있단 말입니까?”“네?”마용이 놀란 소리를 냈다. 그러자 청년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공노들이 일하고 있던 구덩이 쪽을 가리켰다.“지금 일손들께서 딛고 계신 곳은 수맥(水脈)이 비켜나는 곳이라 아무리 깊이 들어간들, 아침 이슬만한 물 한방울 얻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도 여기를 계속 파실 생각이십니까?”그들을 탓한다기보다
세종 10년 7월, 여름.유난히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이었다.“아이구구…….”사람 죽는 소리가 들렸다. 흙더미가 봉분(封墳)처럼 볼록 솟아 오른 주변은 일꾼들이 내뿜는 숨소리와 열기로 가득했다.삽날이 땅바닥을 찍어 나르는 소음이 공허하게 울렸다.3시진이 넘는 시각 동안, 이들은 구덩이를 파고 또 팠다. 못해도 여덟 자는 파고 들어갔을 것이다.“안 돼, 안 돼, 이거…….”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던 일꾼이 삽을 내던지며 내뱉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구덩이 주위에 모여 있던 일꾼들이 모두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삽을 내던진 일꾼이 구덩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흙먼지를 탁탁 두들겨 터는 그의 손은 고된 작업에 이미 부르터있었다.“망할…….”일꾼이 구덩이 속에 침을 탁- 내뱉으며 욕지거리를 했다.“습기 하나 없는 땅에 대고 2길은 되는 깊이의 우물을 파라니……. 일단 물이 있을 법 직한 땅을 골라야 뭐라도 할 것 아닌가.”그가 투덜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한다는 듯 끙- 옅은 신음을 흘렸다. 달궈진 지면 사이에서 새어나온 아지랑이가 옷가지 속 땀방울로 번져들어 몸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한양 좌포청에서 파견된 공노비들이었다. 여름 맞은 노비네 삶 중에 무어 하나 힘들지 아니한 것 있겠느냐만, 종일 땡볕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이들 신세만큼 처량한 것도 없을 것이다.어쨌거나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는 반드시 우물을 파야 했다. 그것도 반드시 맑은 물이 퐁퐁 솟는 것으로.문제는 그들이 하루 종일 들고 파고 있는 곳이 우물은커녕, 진흙 한 움큼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척박한 황무지라는 것이었다.그리고 누가 봐도 우물을 세우기에는 무리인 이곳을 포청 공노비들이 뒤집어엎고 있는 데에는 ‘풍수사(風水師)’의 일방적인 지시가 결정적이었다.‘지세를 보아하니 반드시 물이 있겠군.’그 말을 끝으로 앞뒤 가리지 말고 땅을 파라 명령하고 휙- 가버리는 것이 풍수사였다.궁궐에서 꽤 끗발 날리는 벼슬아치의 차남으로서 행실이 가볍고 교만하여 아랫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