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금화도감 관리들을 만나고 싶다면 우선 한성부(漢城府)를 찾아가셔야 합니다.’
마용이 그리 말했다.
‘길잡이로 삼을 방앗간이나 풍물점을 알려드릴 테니 그쪽을 따라가 보시지요.’
마용이 일러준 대로 행인들이 모이는 쪽으로 들어서자 전방을 향하여 시원시원하게 뻗은 대로(大路)가 나왔다.
양옆으로 고깃간, 대장간, 광목점 따위의 크고 작은 가게가 들어찬 골목을 지나치다보면 절로 인파의 흥에 취할 것만 같았다. 더
운 날씨임에도 저자는 북적였고, 사람들은 물건을 두고 흥정하느라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전에 살던 산골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청년은 처음 맛보는 도심의 활기를 다소 불편해하는 눈으로 마주하며 잰걸음을 옮겼다. 산에 있을 때는 이렇게 어수선한 적이 없었는데.
왜 그의 부친이 한양이라면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든 것인지,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무서운 곳이다. 한양은.’
청년의 부친은 종종 그리 말하고는 했다.
‘사람도 많고, 보고 즐길 것도, 골칫거리도 많지. 세상사 태반의 분쟁이 사람 사이에서 나오니, 어찌 한양이 무섭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
그럼에도 부친은 가끔 한양이 그리운 것처럼 운을 띄우기도 했다. 마치 그곳에서 살다 온 사람처럼 말이다.
이에 청년이 한양 생활에 대해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동경하지 말거라.’
늘 단호한 어조였다.
‘한양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 곳이 아니다.’
‘어딜 가든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는 곳이다.’
‘천우 너는 절대로 한양에 발을 들일 생각일랑 마라.’
천우.
그것이 청년의 이름이었다. 천우의 부친은 항상 하나뿐인 아들이 바깥세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종용했다.
‘또한, 벼슬아치와는 상종하지도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부친은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옆구리에 칼을 차거나 병장기를 다루는 자들을 매우 경계했다.
어릴 적부터 영민했던 천우는 따져 묻지 않고 부친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그저 말할 수 없는 과거가 있으려니 여기고 넘길 뿐이었다.
그러기를 몇 해가 지났다. 그리고 천우는 지금 한양, 그것도 온갖 인간 군상들로 북적이는 저자에 나타났다.
그동안 산골에서 숨죽여 지내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마치 오래전에 여기에서 살았다는 듯이.
‘아버님…….’
행여나 지나치는 사내들 중에 부친과 닮은 얼굴이 있을까 살폈으나, 허사였다.
‘대체 어디 계십니까?’
부친이 사라진지 벌써 2년째였다.
금방 돌아오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산골에 앉아 홀로 밤을 지새우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부친의 당부를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바깥세상에 관심가지지 말라는 철칙을 먼저 어긴 것은 바로 당신이었다.
‘한양에 불 끄러 다녀오마.’
부친은 분명 그리 말했었다.
갑자기 야밤에 자리가 부산스러워 잠깨어보니, 부친이 행장을 꾸리고 있었다.
천우가 일어났음을 알아챈 부친이 굳은 목소리로 천우의 손을 잡았다.
엄하고, 무뚝뚝하고, 천우의 응석하나 제대로 받아주지 않던 부친이었다. 그러나 천우의 손을 잡던 그 따스함만은 아직도 온전히 기억났다.
‘혼자서도 굳건히 버텨내거라. 알겠느냐?’
그게 부친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자식이 아비를 찾아 한양으로 올라왔다.
한양 나그네, 천우의 사정은 이러하였다.
* * *
천우는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으려 애썼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앞으로 걸어가던 사이, 그는 어느새 완전히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양옆으로 지나치던 사람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천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휙- 제 갈 길을 갔다.
‘아까 거기서 길을 물어보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군.’
운 좋게 좌포청 공노들을 만났으니 망정이지, 최악의 경우에는 필시 한양에 도달하자마자 길을 잃었을 것이다.
집 떠나온 첫 나들이에서 미아가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제 슬슬 갓을 맞출 고민을 할 정도로 번듯한 성인이 되었는데,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다.
성인. 어른이라.
문득 저 앞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던 여인 두 명이 눈에 띄었다.
머리에는 전모(氈帽)를 썼고, 화려한 색상의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가 눈에 띄었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 그리고 진홍빛 입술이 고혹적이었다.
마실 나온 기생들이 분명했다.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임에도 그녀들을 바라보던 천우의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쳤다.
산중에서 일평생을 지내온 한창 나이의 청년에게 있어 농익은 여인의 자태란 쉽사리 눈을 뗄 수 없는, 물씬한 자극이었다.
천우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두 기생이 동시에 천우와 눈을 마주쳤다.
“호호…….”
기생들이 자기들끼리 얼굴을 맞대고 수군거리며 킬킬 웃어댔다.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가느다란 웃음소리는 그들이 서로를 지나쳐 갈 때까지 끊이질 않았다.
“후…….”
기생들이 사라지자 천우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왔건만, 여인을 발견하고 두근대고 있다니. 부친을 찾겠다는 결심이 무뎌져서는 아니 되었다.
빨리 한성부를 찾아야했다. 마용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이제 곧 이정표가 될 자모전가(子母錢家:고리대금업자)의 가옥이 나올 것이다.
서둘러야 했다.
천우가 지팡이 끝을 오른발 옆에 툭 내려놓던 때였다.
“아악!”
등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들치기다!”
화들짝 놀란 천우가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비렁뱅이 복장을 한 사내가 쏜살같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내의 손에는 아낙네가 차고 다닐만한 복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비명을 지른 것은 아까 천우를 비웃던 기생들이었다.
한 기생이 땅에 주저앉아 있고, 다른 한명은 이쪽을 보며 고함을 치고 있는데, 필시 아까 그 비렁뱅이가 복주머니를 낚아 채간 것이었다.
“나으리!”
소리치던 기생이 갑자기 천우를 보고 꽥꽥됐다.
천우가 남은 손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나 말인가?”
“여기 나으리 말고 누가 계십니까!”
“무, 무슨…….”
“저놈 좀 잡아 주시어요! 저희 목숨이 달렸습니다!”
“아니, 내가 왜…….”
“부디 도와주시어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기생이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릴 듯 그렁거리는데 제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되돌아봄직했다.
부탁? 부탁이라고 했다.
천우는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부터, 이미 몸이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성격이랄까? 아니면 천성이 그러했던 것일까. 천우는 예전부터 남을 돕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심신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것일지. 돕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었다.
탓-
다음 순간, 천우는 어느새 사내를 쫓고 있었다.
발이 빠르기는 하나,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여럿 사람 놀라게 할 정도로 몸놀림이 기민한 천우였다.
저런 소매치기 한놈 잡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 틈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비렁뱅이가 대로를 벗어나더니 후미진 뒷골목으로 숨어드는 것이 보였다.
천우 또한 놈이 들어간 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갔다. 문 닫은 가게며 인적 드문 창고 따위가 성곽처럼 늘어서 있어 대낮에도 그림자가 지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비렁뱅이의 그림자가 저쪽 폐쇄된 참점(站店)쪽으로 사라졌다.
이를 발견한 천우가 얼른 그 뒤를 쫓았다. 막다른 곳처럼 보이는데, 굳이 저 길로 도망치는 것이 수상했다.
이곳 지리를 잘 모르는 풋내기이거나, 아니면…….
‘함정?’
퍼뜩 그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천우가 멈추어 서자마자 담벼락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패거리가 튀어나왔다. 모두 여섯 명이었고, 손에 조악한 칼이며 녹슨 낫 따위를 거머쥔 채였다.
패거리가 앞뒤로 천우를 포위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도가 즉위한지 26년째 되던 해였다.추수가 끝나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 높게 떠 있는 어느 낮이었다.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 한 점 없는데 햇살마저 포근한 그런 날이었다.늦은 사냥에 나선 잠자리 몇 마리가 부산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떨어진 낱알 주워 먹으러 산속에서 내려온 사슴 가족도 귀를 팔랑대며 가을날의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팍-인기척을 느낀 사슴들이 줄행랑을 쳤다.두 사람이 텅 빈 전답(田畓)의 고랑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였다.서로 거리를 조금 둔 채로 걷는 것이, 연인이거나 부부 사이는 아닌 듯했다.척-남자 쪽이 먼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한마디 말없이 한적한 들판을 쭉- 눈으로 훑는데, 그 얼굴에 옅은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잠시 후, 여자 쪽도 남자가 서 있던 곳으로 다가왔다.여자 또한 남자가 보는 곳을 따라 눈을 돌렸다.두 사람은 아무런 소리도 내질 않고 한동안 그렇게 고요히 있었다.“편안하십니까?”여자가 물었다.“네.”남자 쪽이 대답했다.“어떠십니까?”이번에는 남자 쪽이 되물었다.“이리 바뀐 세상을 보니 말입니다.”“사람은 늘 방법을 찾아내는 종족이지요.”여자 쪽이 대답했다.건조한 목소리였으나 딱히 악의는 들어있지 않았다.“그렇지요.”남자 쪽이 맞장구를 쳤다.“결국에는 이 땅에 맞는 역법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배포하였지요. 그래서 쌀과 보리도 이렇게 풍성하게 난 것이 아니겠습니까.”“밥맛도 더 좋아졌다 하더군요.”“한 끼 먹어보고 갈 수 있겠습니까?”“돌아갈 시각이 지척입니다. 참으시지요.”“그건 아쉽군.”남자가 혀를 쯧- 찼다.“나들이 할 수 있는 때는 또 올 겁니다.”여자가 달래듯이 중얼거렸다.“그러니 미련을 버리고 조용히 돌아가시지요.”“그럴 참입니다.”남자가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며 대답했다.“다만.”“네?”“여기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 역법서. 아마 칠정산(七政算)이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오. 한번은 보고 갈 수 있었으면 했는데
“갑자기 세상에 나와 너만 남겨두고 숨을 거두었을 때, 그냥 아무런 생각도 안 나더구나. 몸은 여기 있는데 영혼은 어딘가로 떠나버린 기분. 그래. 그랬었다.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지.”“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조금도 나질 않습니다.”“그럴 수밖에. 네가 젖을 떼자마자 가버렸으니.”“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아름다웠다.”백사성이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현명하고 헌신적이며, 또 누구라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예뻤지. 사람이 아닌 미르조차 그 미색(美色)에 반해버렸으니 말이다.”“아버님께서도……. 혹시 사모하셨습니까?”“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왜 기우사를 떠나 용의 알을 밴 사람을 따라갔겠느냐?”백사성의 얼굴에 시원섭섭한 빛이 어렸다.“그래도 좋았다.”백사성이 말을 이었다.“내 몸 하나 바쳐 사모하는 여인을, 그리고 조선의 하늘을 수호할 물빛미르를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그것이 사람이다. 어리석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기 뜻하는 대로 살아가는 생물이지. 어찌 보면 붉빛미르는 사람을 증오하면서도 더욱 사람과 가까운 존재였는지도 모른다.”백사성이 거기까지 말하곤 술 한 잔을 홀짝 비웠다.천우가 얼른 부친의 빈 잔을 채워넣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이도가 못내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옆에 함께 서 있던 백사성, 지운도 눈을 반짝이며 답을 채근하고 있었다.“그렇게 안고 난 뒤에 말입니다.”이도가 조바심을 냈다.“그렇게 그냥 끝났습니까? 붉빛미르가 그냥 끝을 냈습니까?”“그러하였습니다. 전하.”천우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붉빛미르는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포옹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말입니다.”“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껴안고 있던 중에 붉빛미르가 사라졌습니다.”“물빛께서 안고 계시던 품에서 말입니까?”“네. 마치 연기처럼.”천우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웅얼거렸다.“이 팔에 안겨있던 감촉이 여전히 남아있거늘…….”아쉬운 것인지, 꿈을 걷는 것 같은 몽롱함에서 벗어나려는 것인지는 몰랐다.그러나 품안 가득 다가왔던 온기, 촉감, 부드러움은 방금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천우 네 말은.”잠자코 듣고 있던 백사성이 나서 말했다.“붉빛미르가 나타났고, 하늘로 돌아가겠다며 작별을 고했고,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달라고 했고
붉빛미르가 이어 말했다.“우리 두 미르는 사람들의 지혜가 늘어나 천문을 읽게 되는 순간, 더 이상의 쓸모가 없어 하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알고 있소.”“저는 그것이 싫어 불로 저항했던 것입니다. 왜 사람의 행보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요. 하지만 물빛미르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만을 바라보셨지요. 사람과 섞여 사셨고요.”머리칼을 가만히 넘기는 기척이었다.“저 또한 그것이 어떤 삶일지 궁금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여인의 모습으로 지내보기도 하였습니다만……. 여전히 저는 사람보다는 미르에 가까운 넋이었습니다. 더욱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사람은 여전히 어리석고 폭력적인 생물이지요. 그렇지만 미르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생명이기도 하고요.”“…….”“물빛미르와 여러 번 싸우면서 겨우 깨달았습니다. 나와 같은 미르가, 이토록 사력을 다해 사람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미르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 붉빛미르가 일으킨 사단은 항상 울음소리와 피만을 불러왔지요.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언제부턴가 의심이 들더군요. 그래도 인정 못하고 마지막 발악으로 내가 당신을 가장 미워하던 때로 시간을 돌려 싸워보기도 하였고요.”“이포교를 숙주로 삼았을 때의 말이로군.”“네. 그리고 결국 물빛께서 저와 대등하게 맞서셨지요. 그리고 천지신명께서도 직접 답을 주셨고요.”붉빛미르의 고개가 올라갔다.
“역시 당신이었군.”천우가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붉빛미르 쪽에서 어둠 속에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보였다.“언젠간 찾아올 것이라고 짐작했소.”천우의 칼 쥔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당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생각했지.”“똑똑하시네요.”“이렇게 나타나주어 고맙소. 마음 졸이며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끝을 내는 것이 나을 것이오. 나한테든, 당신에게든.”천우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산속에 잠든 물 전체가 우르릉- 대는 소리와 함께 진동했다.천우의 명에 맞추어 움직이겠다며 한껏 예기(銳氣)를 다듬는 듯했다.붉빛미르는 가만히 이쪽을 살피기만 할뿐, 손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불길이라도 내밀 줄 알았는데, 별일이었다.“어떠셨습니까?”불쑥, 붉빛미르가 그리 물었다.“뭐를 말이오?”천우가 되물었다.“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지금의 조선 땅 말입니다. 물빛께서 보시기에는 이쪽의 삶이 만족스러우십니까?”“갑자기 무슨…….”“이쪽의 삶은, 시간은, 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 천지신명의 뜻을 받든 붉빛미르가 세상을 침범하지 않고, 천문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놔두기로 결심한 세계.
지운이 물었다.“서촌 말씀이십니까?”“이왕 여기까지 나온 김에 그동안 하늘 보는 거 어디까지 되었나 살펴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학사들 은자(銀子)라도 좀 챙겨줘야 닭백숙이라도 고아 먹으면서 일하지 않겠습니까?”“전하의 은덕이 하해와 같으십니다.”그렇게 4명의 사내는 순식간에 다음 행보를 정하고는 곧바로 서촌으로 옮겨갔다.“저, 전하!”어김없이 장영실이 나와 맞이했다.지난 기억보다 조금 더 피곤하지만, 눈의 생기만큼은 곱절은 더한 장영실이었다.장영실뿐 아니라, 다른 학사들도 여럿이 한자리에 있었다.밤중에 오직 장영실 혼자만 일하던 기억 때문일까. 학사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이 오히려 낯설게 보였다.“어, 어인 일로 옥체를 직접 행차하셨습니까?”“잠깐 볼일이 있어 암행을 나왔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한번 와 보았다. 자, 일단 이것들 좀 받고.”이도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옆에 있던 학사에게로 건넸다.천문 연구에 지친 사기(士氣)를 채워줄 묵직한 은자 덩어리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은자를 받아든 학사가 전원이 허리를 굽히며 감사했다.장영실이 그 학사를 가만히 불렀다.“이여립. 자네는 얼른 그것을 가지고 장터에 나가 좋은 술과 포(脯)를 사오게.”“
“정녕 저를 막을 작정이십니까?”여자가 물었다.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에 쥐고 있던 환도(環刀)를 천천히 뽑을 뿐이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듯.그들은 서로를 바라봤다.시간이 멈춘 듯했다.바람이, 대지가, 마음이.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정지한 채로 살피고 있는 듯했다.이렇게 될 줄 알았던가.이렇게 될 줄 몰랐던가.어느 쪽이라도 상관 없었다. 결국 일은 저질러졌다. 결코 섞여서도, 결코 섞일수도 없는 둘이 이렇게 마주했으니 남은 것이라곤 이제 한쪽이 지고, 한쪽이 일어나는 일일 뿐
“이보슈, 나그네 양반.”패거리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천우를 불렀다. 얼굴 반쪽이 곰보로 뒤덮여 남 보기에 흉측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거 보아하니, 과거 치르기 전에 미리 올라와 숙식하려는 서생이신거 같은데 여기서 붓 한번 못 잡아보고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소?”천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굴리며 패거리의 위치, 무기, 그리고 퇴로를 확인할 뿐이었다.“골방에 박혀 책만 뒤적이던 분이라 너무 순진하셨소.”곰보가 이어 말했다.“계집년들 분냄새에 아랫도리가 뜨끈뜨끈하시던가? 겁도 없이 들치기 하는 놈을
청년이 여전히 공손하게 물었다.“맞습니다요.”그런 청년 앞에서 노비들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한양 좌포청에서 나왔습니다요.”“그렇다면 혹시 금화도감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금화도감(禁火都監)이라면 도성의 화재에 대응하기 위해 2년 전에 설치된 관청이자 여기 모인 사내들이 한낮에 우물 파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갑자기 나타난 청년이 난데없이 금화도감을 찾으니 노비들로서도 황망하기 그지없었다.“물론입죠.”마용이 대답했다.“저희가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걸요.”“그렇습니까?
세종 10년 7월, 여름.유난히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이었다.“아이구구…….”사람 죽는 소리가 들렸다. 흙더미가 봉분(封墳)처럼 볼록 솟아 오른 주변은 일꾼들이 내뿜는 숨소리와 열기로 가득했다.삽날이 땅바닥을 찍어 나르는 소음이 공허하게 울렸다.3시진이 넘는 시각 동안, 이들은 구덩이를 파고 또 팠다. 못해도 여덟 자는 파고 들어갔을 것이다.“안 돼, 안 돼, 이거…….”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던 일꾼이 삽을 내던지며 내뱉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구덩이 주위에 모여 있던 일꾼들이 모두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