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Penulis: 밀크 라떼
아무리 급한 전갈이라 해도 북방 변경에서 도성까지 닿으려면 보름은 족히 걸렸다.

소은하가 죽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녀의 죽음이 도성에 전해지려면 적어도 보름은 더 걸릴 터였다.

‘그때가 되면... 이건도 조금은 마음 아파할까? 자신을 그렇게 보낸 것을 후회할까?’

두 달 전, 갓 황위에 오른 이건은 제국을 치라는 명을 내렸다.

삼 년 전 화친으로 떠난 나현진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당시 소은하는 물론이고 조정 대신들까지 모두 나서서 그를 만류했다.

선황이 승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황권이 굳건히 자리 잡지 못한 때였다.

하지만 이건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소은하가 끝까지 강하게 반대하자,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그녀에게 군장 서른 대를 내리기까지 했다.

그 뒤로는 조정에서 감히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이건은 그토록 나현진을 연모했다.

힘겹게 손에 넣은 황권이 흔들릴 수도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결국 황명이 내려졌고, 소은하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길에 올랐다.

소은하는 천하에 이름난 여장수였다.

아흔 번이 넘는 전장을 누비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건을 위해 그가 연모하는 여인을 되찾아 주는 싸움이라 해도, 그녀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나현진을 무사히 구해 낸 뒤, 소은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호위 병력을 넉넉히 붙여 먼저 도성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소은하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나현진을 호송할 군사를 떠나보낸 그날 밤, 적군이 기습해 왔다.

소은하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맞섰지만, 병력의 열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 전투에서 그녀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소은하는 허공을 떠돌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나현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건이 어찌하여 저토록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현진은 본디 대주의 절세 미인으로 이름난 여인이었다.

단아한 이마에 고운 눈썹, 아리따운 얼굴을 지녔으며 몸가짐 하나하나에도 명문가 규수다운 기품이 배어 있었다.

저런 여인이라면 세상 어느 사내라도 좋아할 만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소은하는 두 손을 펼쳐 보았다.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빈 탓에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몸에는 늘 갑옷 아니면 검은 옷뿐이었고, 어디를 보아도 무인의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 같은 여인을 어느 사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겠는가?’

소은하는 씁쓸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다 그제야 제 몸에 아직도 피 묻은 화살이 빼곡히 박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죽었으니 고통을 느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가슴만은 저릿하게 아파 왔다.

이건은 나현진을 더없이 귀히 여기며 궁으로 맞아들였다.

혹여 조금이라도 불편할까 염려해 궁녀도 스무 명 넘게 붙여 주었다.

나현진은 전각 안으로 들어서고서야 사방에 걸린 그림들을 발견했다.

모두 자신의 초상이었다.

하나같이 이건이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으로나마 그리움을 달래 온 것이었다.

나현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폐하, 이것들은...”

사실 두 사람이 지금껏 만난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나현진으로서도 이건이 어째서 자신에게 이토록 깊은 마음을 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사내가 자신을 이토록 귀히 여기니,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나현진은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살며시 웃었다.

“폐하께서는 그림 솜씨도 참으로 뛰어나시옵니다.”

그런데 이건은 뜻밖에도 전각 안의 그림을 모두 거두게 했다.

이건은 나현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네가 짐의 곁에 있으니, 이런 것들로 그리움을 달랠 일도 없겠지.”

나현진은 수줍은 듯 귓불을 붉히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 그녀의 처소에는 온갖 진귀한 보물과 비단, 패물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불과 이틀 만에 황궁 안에서 이건이 나현진을 얼마나 총애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교지까지 내렸다.

나현진을 황후로 맞아 보름 뒤 국혼을 치르겠다는 것이었다.

황명이 내려지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나현진은 이미 삼 년 전 제국으로 시집간 몸이었다.

이건이 그녀를 억지로 되찾아 온 것만으로도 논란이 클 터인데, 이미 한 차례 혼인한 여인을 대주의 국모로 세우겠다니, 천하의 금기를 거스르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여 조정의 반대가 거셀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조회.

백발이 성성한 몇몇 원로 대신이 앞으로 나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서 정녕 나현진을 황후로 맞으시겠다면, 차라리 먼저 신을 죽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고서야 훗날 무슨 낯으로 선황을 뵙겠사옵니까!”

“부디 어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윽고 대전에는 반대하는 대신들이 줄지어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건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교지는 이미 내려졌다. 군주가 한 번 내린 말을 어찌 거두겠느냐. 짐의 뜻은 변하지 않는다.”

이건은 완강히 반대하는 대신들과 한참 동안 설전을 벌였다.

그 탓에 조회가 끝난 것도 평소보다 늦었다.

건곤전(乾坤殿)으로 돌아왔을 때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피로가 얼굴에 어려 있었다.

이건은 황리목(黃梨木)으로 만든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 습관처럼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은하야, 머리가 아프구나. 좀 눌러 다오.”

그의 뒤를 떠돌고 있던 소은하가 순간 멈칫했다.

Lanjutkan membaca buku ini secara gratis
Pindai kode untuk mengunduh Aplikasi

Bab terbaru

  •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제36화

    율이가 두 살이 되자, 이목구비가 한층 또렷해졌다. 이건은 포도알처럼 까만 아이의 천진한 눈을 마주한 순간, 온몸이 굳었다.‘이 아이가... 짐의 아들이었다니.’옹왕이 저리도 득의양양했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옹왕이 웃으며 말했다.“황제 자리도 충분히 누렸으니, 이제 친아들에게 물려줄 때가 되지 않았나? 이건, 내가 그리 어리석어 보이느냐. 네놈을 죽여 버리면 내가 어찌 황위에 오르겠느냐? 염려 마라. 네가 죽은 뒤 어린 황제는 내가 잘 돌볼 테니.”저들이 노린 것은 섭정의 자리였다. 이건이 선위 조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율이를 죽이고, 서명한다 해도 이미 황위를 내놓은 태상황이 죽는 일쯤은 큰 파문을 일으키지 못할 터였다.소은하는 그제야 옹왕의 속셈을 깨닫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건을 살피며 차갑게 말했다.“율이는 폐하의 아이가 아닙니다. 허니 선위 조서에 손을 대시면 저들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이건은 손에 든 조서를 내려다보다 소은하를 향해 웃었다.“은하야, 짐의 아이를 낳아 주어 고맙다.”그는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말했다.“서명하겠다. 다만 소은하와 잠시 말을 나누게 해 다오.”사방은 군사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있어, 그들이 다른 수를 쓸 수는 없었다.율이는 억지로 끌려가면서도 울거나 보채지 않았다. 옹왕은 소은하를 이건 곁으로 거칠게 떠밀었다. 그제야 소은하는 이건의 몸에 깊고 얕은 상처가 가득한 것을 보았다.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 그 역시 저항했음이 분명했다.피비린내가 코를 찌르자 소은하는 눈가가 붉어졌다.“이리하신들 저들이 저와 율이를 살려 두겠습니까? 결국 우리도 죽을 것입니다.”이건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소은하는 뿌리치지 않았다.그의 손은 따스했으나 가늘게 떨렸고, 소은하의 손바닥에는 피가 묻어났다.이건이 낮게 말했다.“은하야,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짐은 너를 연모한다. 이런 끝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부처님께서 짐을 가엾게 여기셨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소은하는

  •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제35화

    하늘도 사람 뜻을 다 들어주지는 않는지, 평온하던 날들은 끝내 깨지고 말았다.요 며칠 정윤은 조정에서 돌아올 때마다 근심에 잠긴 얼굴이었다. 이제 몇 마디 말을 할 줄 아는 율이는 늘 잘 돌봐 주던 정윤이 기운 없어 보이자 덩달아 안달이 났다. 아이는 그의 다리에 매달려 안아 달라 보챘다.정윤은 율이를 번쩍 안아 뺨에 입을 맞췄다.“이를 어쩌나. 아저씨는 전쟁에 나가야 하니 한동안 율이를 못 보겠구나.”마침 음식을 들고 나오던 소은하는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무슨 일입니까?”정윤은 한숨을 내쉬었다.“오황자 기억하지? 지금의 옹왕 말이다.”소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예감은 정윤의 다음 말로 확신이 되었다.“그자가 제국의 현 황제, 옛 태자 야율진과 손을 잡았다. 지금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더군.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폐하께서 그자의 서신을 가로채셨으니 저들의 계획은 거의 드러났다.”“지금 폐하를 죽이면, 옹왕만이 황실의 핏줄로 남게 되니 말이다...”율이는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지 못했다. 무거운 기운에 겁을 먹은 아이는 울먹이며 소은하에게 안아 달라 손을 뻗었다.소은하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출전은 승산이 있습니까? 옹왕의 병력은 많습니까?”“많지 않다.”정윤이 고개를 저었다.“저들이 노리는 건 폐하의 목숨이다. 군사는 겨우 천여 명이지만 그마저도 눈속임일 뿐이지.”정윤에게 남은 소가군은 만여 명의 정예뿐이었으나, 그들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소은하는 그 말에 마음을 놓았다.지난 두 해 동안 한결 부드럽고 고와진 소은하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정윤은, 가슴 한편이 쓰려 물었다.“아직도 이건을 연모하느냐?”소은하는 그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뒤에야 나직이 대답했다.“아닙니다. 다만... 폐하께서 좋은 황제이신 것만은 사실입니다.”정윤도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이건이 못마땅하기는 해도, 대주는 그의 치세 아래 밤이면 문을 잠그지 않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주워 가지 않

  •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제34화

    이건의 낯빛이 워낙 좋지 않아 정윤은 한동안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소은하에게 눈을 돌렸다.소은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율이를 안고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제 얼굴을 더 닮은 아이의 얼굴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율이는 부드러운 입술이 뺨에 닿을 때마다 까르르 웃었다.정윤은 한숨을 내쉬며 율이의 상투에 걸린 꽃잎을 떼어 냈다.“됐다. 너 때문에 또 아비 노릇을 하는구나.”소은하가 그를 흘겨보았다.“율이의 아비 노릇이 그리 억울하십니까? 공짜가 싫으면 어서 여인을 하나 만나 아이를 낳으십시오. 우리 율이를 탐내지 말고요.”정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지난 한 해, 두 사람은 가족으로 지낼 때만큼은 더없이 편안했다. 이대로 한평생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도 복이라 여겼으나, 이건을 다시 본 순간 정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이건은 율이가 제 아이라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비록 지금은 감출 수 있다 해도 아이가 더 자란 뒤에는 어찌하겠는가. 이건은 끝내 황후를 맞을 뜻이 없었고, 율이는 훗날 대주의 태자이자 황위를 이을 유일한 계승자가 될 아이였다.율이의 콧날과 입술은 소은하를 빼닮았지만, 두 눈만큼은 이건과 꼭 닮아 있어 조금만 더 자라면 숨길 수 없을 터였다.정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율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어찌 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느냐. 네 못된 아비와는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좋을 텐데.”소은하가 입술을 삐죽였다.“제국 태자는 변덕이 심한 사람입니다. 그때 그와 협상해 제가 대주의 군을 물릴 방도가 있다고 하자, 제게 가짜 탕약을 마시게 해 주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전 제국에 남아 그를 위해 일하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대주도 제국도 모두 위험한 곳이었지만, 적어도 이건은 제 핏줄을 해치지는 않을 터였다. 그에 비하면 제국 태자는 너무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정윤도 그저 입에 담아 본 말이었다.그 역시 소은하가 다시 전장에 나가

  •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제33화

    “이제 그만하거라.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바람을 쐬면 아니 된다. 율아, 이리 오너라. 어미가 힘들어한다.”다정한 목소리 사이로 아이의 옹알이와 소은하의 짐짓 성난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제가 그리 약한 줄 아십니까? 자꾸 이러면 율이를 안겨 주지 않겠습니다.”“아이고, 율이는 일 년에 두어 번 안아 볼까 말까 하면서, 아이는 늘 내가 돌보지 않았느냐? 한마디 추켜세웠더니 아주 기세가 올랐군.”이건은 비틀거리며 물러나 나무 줄기에 몸을 기댄 채 허리를 숙였다. 가슴이 찢기는 듯 아파 숨조차 가쁘고, 눈앞은 눈물에 젖어 흐릿했다.눈물 한 방울이 막 돋아난 풀잎 위로 떨어져서야 이건은 자신이 또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킨 채, 비웃는 목소리 하나만 메아리쳤다.‘은하는 너를 십수 년이나 기다렸는데, 네가 무슨 낯짝으로 더 기다리라 하느냐?’‘그래, 내가 무슨 낯짝으로.’그러다 이건이 무심코 밟은 나뭇가지가 뚝 부러지자 정윤은 곧장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누구냐?”정윤은 율이를 소은하의 품에 넘겨준 뒤 검을 뽑아 들고 다가왔다. 이건은 그대로 돌아서려 했으나, 결국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짐이다.”몹시 잠긴 목소리였다. 그를 바라보던 소은하는 문득, 이건이 병이 든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작 한 해 만에 이건은 몰라보게 쇠약해져 있었다. 야윈 탓에 옷이 헐렁했고, 앙상한 턱선과 높게 선 콧날, 푹 꺼진 눈가에는 병색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품속의 율이는 어른들이 갑자기 입을 다문 까닭을 알지 못한 채, 고사리 같은 손으로 허공의 꽃잎을 잡으려 했다.그 모습을 본 이건은 창백한 입술로 간신히 웃었다.“은하야, 그 아이는 네 아이냐?”소은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이 아이를 보려 다가서자 그녀는 율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한 걸음 물러섰고, 동시에 정윤이 소은하의 앞을 가로막았다.서로를 지키려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오래 함께

  •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제32화

    그해 조정의 압박과 마음속 고통은 이건을 더욱 수척하게 만들었다. 그는 암위를 풀어 소은하를 찾았지만 끝내 흔적조차 얻지 못했다. 정윤을 다그쳐도 오래전부터 소은하와 소식이 끊겼다는 대답만 돌아왔다.적지 않은 대신들이 제 딸을 후궁으로 들이려 안간힘을 썼다.이건은 얼마든지 후궁을 들이고는 방치할 수 있었지만, 날마다 대신들의 간언에 시달리는 한이 있어도 소은하를 저버릴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이건은 여전히 소은하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모르는 어딘가에서 평안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전생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어느덧 또 한 해가 지나, 해마다 돌아오는 예불의 날이 돌아왔다.예전 같았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이건은 이번에는 예부의 상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는 신이나 부처, 귀신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난인사에서 얽힌 전생의 유혼이었다..허공대사는 여전히 부처처럼 인자한 모습이었다. 눈처럼 흰 눈썹과 수염은 온화해 보였지만, 맑고 날카로운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이건은 예불복 차림으로 허공대사에게 두 손을 모았다.“대사님, 오랜만입니다.”허공대사는 웃으며 말했다.“빈승과 폐하께서는 오늘 처음 뵙는 사이인데, 어찌 다시 만났다고 하십니까?”하지만 이건은 대사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고 느꼈다. 그 시선은 곧장 그의 혼백을 들여다보는 듯했다.이건은 더는 황제의 체면을 지킬 수 없었다. 눈가가 붉어진 그는 불전의 방석에는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았으면서, 이름 없는 승려 앞에 무릎을 꿇고 낮게 울먹였다.“대사님, 제게 길을 일러 주십시오.”허공대사는 그의 절을 피하듯 몸을 비키며 한숨을 내쉬었다.“폐하, 지금은 폐하께서 그토록 애쓴 끝에 얻은 가장 나은 결과가 아니십니까?”눈물이 청석 바닥 위로 한 방울씩 떨어졌다. 이건은 다시 몸을 숙여 말했다.“대사님, 부디 제게 나아갈 길을 일러 주십시오.”수많은 밤낮 동안

  •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제31화

    이건의 이번 행차는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예상대로 이번 출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신하들은 소은하를 벌해 본보기로 삼으라며 안팎으로 간언했다.하지만 소은하는 이미 병부를 돌려주고 관직을 버린 채 떠난 뒤였다. 이건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직위를 명목상 종사관으로 낮춰 두고, 정윤에게 장군직을 잠시 맡겼다.이건은 밤낮으로 소은하를 그리워했다. 텅 빈 건곤전에서 그는 등불을 끄지 못했다. 어둠 속에 들면 꼭 한밤중에 악몽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꿈에는 전생에 관 속에서 피에 젖은 옷을 입고 있던 소은하와, 이번 생에 야율진에게 붙들린 채 침상 위에서 피임탕을 들이켜던 소은하, 그리고 형체도 갖추지 못한 채 사라진 아이가 끊임없이 나타났다.소은하는 얼굴이 흐릿한 아이를 안고 울며 말했다.“제가 폐하께 대체 무엇을 더 갚아야 하옵니까? 두 목숨까지 모두 내어 드렸사옵니다. 이젠... 다 갚은 것이 아니옵니까?”이건은 식은땀에 젖어 눈을 떴다.그는 경옥궁에서만 가끔 편히 잠들 수 있었다. 한밤중에 잠을 깨면 곱게 개어 둔 여우털 갖옷을 소은하의 향기롭고 부드러운 몸인 양 품에 끌어안았다.낙엽은 창밖으로 더욱 수북이 쌓였고, 밤나무에는 바람에 휩쓸린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다. 어느새 겨울이었다.정윤은 부하들이 노획한 모피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장군이 되었어도 그는 옛집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 옆집 노인은 그를 보자 웃으며 물었다.“석돌아, 아직 추위도 들지 않았는데 벌써 겨울옷을 지으려는 게냐?”정윤은 뒤통수를 만지며 쑥스럽게 웃었다.“마침 좋은 모피가 생겼습니다. 어르신, 혹 솜씨 좋은 재봉사를 아십니까?”“제법 까다롭게 구는구나. 무슨 옷을 맞추려는 게냐?”정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여인이 입을 옷입니다. 허리께는 넉넉히 내고, 모피에서는 누린내가 나지 않게 해 주었으면 합니다.”노인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이 녀석, 갑자기 장가들 마음이 생겼느냐? 허리를 넉넉히 하라니, 제법 살집 있는 여인인 모양이구나.”

Bab Lainnya
Jelajahi dan baca novel bagus secara gratis
Akses gratis ke berbagai novel bagus di aplikasi GoodNovel. Unduh buku yang kamu suka dan baca di mana saja & kapan saja.
Baca buku gratis di Aplikasi
Pindai kode untuk membaca di Aplikasi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