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세자가 시험을 통과하고 내게 청혼하던 날, 여빈족에서 온 화친 사절단이 난입하면서 그 자리를 가로막았다. 여빈족은 변경의 10년 평화를 대가로 내 여동생을 6번째 첩으로 들이길 원했다. 전하께서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더니 그 자리에서 여동생을 양녀로 삼으셨다. 여동생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통곡하면서, 내가 90살이나 된 늙은 족장과 내통했다고 모함했다. 그러자 격노한 세자는 검을 뽑아서 당장이라도 여동생을 베려고 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막으려던 순간, 눈앞에 난데없이 글귀가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 저까짓 잔꾀로는 남주를 속일 수 없어!] [증거는 바로 저 여자 몸에 있어!] 나는 글귀가 알려 준 대로 증거를 찾아냈다. 그날 밤, 여동생은 입이 틀어막힌 채 윤경 밖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나는 동궁에서 일찍이 마련해 둔 운반 대열만 무려 10리에 이르는 혼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혼례 당일,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전해졌다. 여동생이 윤경을 벗어나자마자 자객의 습격을 받아서, 시신조차 온전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숨이 끊어지기 전 혈서를 남긴 여동생은 세자를 향한 연심을 절절하게 토로했다. 이튿날부터 윤경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 입막음을 하려고 사람까지 죽였다는 것이었다. 세자는 지체 없이 그 말을 퍼뜨린 자들의 혀를 베어 버리며 나를 믿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여동생을 닮은 여인들을 하나 둘 들이면서, 세자빈인 나를 허수아비 취급했다. 급기야 보위에 오른 뒤에는 중전이 된 나를 별궁으로 내쫓았고, 밤낮으로 여동생의 위패 앞에 무릎 꿇고 속죄하라고 했다. 죽는 날까지 다시는 나와 마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 내 목숨이 다해 갈 무렵, 왕은 내게 독주 한 병을 내려서 삶을 끝내게 했다. 탁하게 흐려진 두 눈에는 반평생 한 번도 본 적 없던 다정함이 피어올랐다. “부인, 이승에서 부인의 죗값은 다 치렀소.” “다음 생이 있다면, 맹세코 부인을 아끼고 잘 대해 주지.” 독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식도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여동생이 나를 모함하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자는 검을 휘둘러 증거를 박살냈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글귀도, 피가 흐르는 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는 죄를 청했다. “소인, 감히 세자 저하를 넘보지 않겠습니다.”
View More약을 막 다 마셨을 때, 조세율이 내게 말했다.먼 곳에서 온 귀한 손님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그러나 그 사람이 앙상하게 야윈 이백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저하, 이곳은 대윤국이 아닙니다.”“떠나지 않겠다면 오늘 밤 내 시신이나 거둘 준비를 하시오.”나는 하지언 일가 세 사람의 눈에 어린 애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대로 걸음을 옮겨서 떠나려고 하자, 하태석의 늙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남경아, 이 아비가 잘못했다. 내가 눈이 멀어서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말았구나.”하지언은 그저 냉소했다.“이미 다른 사내의 여인이 된 주제에, 어찌 세자 저하의 아이를 밴 세자빈인 나와 견주려 드는 겁니까?”이백헌은 순간 크게 당황했지만 내 눈에는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이백헌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서 사람을 시켜서 하지언에게 탕약 한 사발을 억지로 먹였다.하지언은 곧바로 하혈을 했고 뱃속에 있던 아이도 유산되었다.이백헌이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대윤국에서 밀서가 전해졌다.왕의 병세가 위중한데, 이안대군이 병사를 동원해 궁궐을 포위하려고 하니 이백헌이 바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이백헌은 그날 밤 자신의 가슴을 갈라 심장 가까이에서 피를 한 사발이나 받아 냈다.그리고 신의에게 명하여 그 피를 약에 넣도록 했다.“남경아, 나를 미워해도 좋다. 나를 만나지 않아도 좋다. 허나 살아 있어야 나에게 복수할 수 있지 않겠느냐.”이튿날, 하태석은 영안골로 보내져서 광산에서 광물을 캐게 되었다.그리고 하지언과 심형단은 변경의 관기들이 머무는 곳에 던져졌다.나중에 들으니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둘 다 미쳐 버렸다고 했다.내 몸은 줄곧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고,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렸다.내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것을 본 조세율은 급기야 이백헌의 피를 섞은 약을 억지로 먹였다.그 뒤 보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조세율이 말없이 침묵하자 나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멀리 여빈족 촌 족장의 천막 안에서, 나는 온몸을 파고드는 극심한 통증 속에 눈을 떴다.낯선 사내 하나가 내 손을 잡고 있자, 놀란 나는 연달아 뒤로 물러났다.사내는 즉시 내 손을 놓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아가씨,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는 여빈족의 새로운 족장 조세율이라 합니다.”“그대를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대윤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상처가 다 나은 뒤 사람을 붙여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습니다.”나는 의심과 놀라움이 뒤섞인 눈으로 조세율을 바라보았다.“유모는 어디 있습니까?”조세율은 한숨을 내쉰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모가 눈시울을 붉히면서 안으로 뛰어들어왔다.“아씨, 깨어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유모는 내 온몸의 상처를 꼼꼼히 살펴본 뒤에야 자신이 알아본 소식을 차근차근 들려주었다.알고 보니 앞선 늙은 족장은 정통성이 없는 자였고, 지금의 새 족장이야말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늙은 족장은 당시 제 욕심을 채우려다 후환을 뿌리 뽑지 못했다.뜻밖에도 새 족장의 일파가 불과 10년 만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늙은 족장의 목을 베어 천막 앞에 높이 내걸었다.그러나 나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허나 어찌하여 저를 구한 것입니까? 이를 빌미로 대윤국을 겁박하려는 게 아닙니까?”그때 조세율이 천막 자락을 걷고 다시 들어왔다.“5년 전, 나는 여빈족 사신을 따라 대윤국에 조공을 바치러 갔었습니다.”“그러나 마음대로 죽여도 되는 사졸로 여겨져 비무대에 올랐고, 하마터면 난장에 버려져 죽을 뻔했습니다.”“그때 지나가던 그대가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의원을 불러 주었습니다. 덕분에 내가 오늘까지 살아남았고, 마침내 내 것이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눈앞의 장대한 사내와 그해 여위고 중상을 입었던 아이가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그래도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조세율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든, 지금의 나는 그 호
그러나 하지언은 나직이 중얼거리듯 물었다.“제가 바란 것은 처음부터 지위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원한 것은 저하였습니다, 세자 저하.”“어찌하여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두 하남경 그 천한 것만 바라보는 것입니까? 저하마저도 어찌 그러시는 것입니까?”“저는 하지언입니다. 정식으로 예를 갖춰서 저하께서 맞은 세자빈이란 말입니다. 그런 여자 따위는 감히 저와 견줄 수도 없단 말입니다.”그러나 하지언에게 돌아온 것은 정신이 흐릿한 이백헌의 목소리였다.몇 번이고 남경의 이름을 부르면서 계속 미안하다고 빌었다.그리고 몇 번이고 약조했다.“내 이승에서는 오직 너 하나만을 연모하마. 다른 여인은 결코 두지 않겠다.”그 약조는 날카로운 검이 되어 하지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가슴이 너무도 아파서 하지언도 끝내 흐느끼고 말았다.“남경아, 어찌 이리 일찍 일어났느냐?”이백헌이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지언은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은 찬 서리에 허리가 꺾어진 한 송이 흰 꽃과도 같았다.이백헌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창밖에서 햇살이 스며들면서 하지언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그 모습에서 어렴풋이나마 이백헌이 가장 사랑했던 이의 모습이 비쳤다.“됐다. 일어나거라.”그 말을 들은 하지언은 울음을 거두고 웃었다.용기를 내서 이백헌에게 친정으로 함께 가 줄 수 있냐고 물었다.이백헌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하지언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언니의 유품을 오늘 모두 태운다고 합니다. 저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그제야 이백헌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더니,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 뒷모습에 하지언의 눈시울이 새빨갛게 물들었다.이백헌은 하지언을 기다려 줄 마음조차 없이, 혼자 말을 몰아서 하씨 가문 저택으로 들이닥쳤다.심형단은 마침 집사에게 명해서 하남경이
대전 안은 온통 죽은 듯 고요했다.이미 몇몇 대신은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용상에 앉은 왕에게 조금이라도 불경한 기색을 들킬까 두려워서였다.그러나 이백헌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하지언을 가볍게 피했다.“네 언니가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다. 더 늦으면 때를 놓치고 말 것이다.”바로 다음 순간, 공간 전체를 왕실 호위무사들이 에워쌌다. 이백헌의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몸을 돌리고 무릎을 꿇었다.“소자를 보내 주시옵소서!”“돌아온 뒤에는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그러나 왕은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모든 사람을 물렸다. 그런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보좌 아래로 내려왔다.왕은 손을 들어 평생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아들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세자빈이 목숨을 걸고 과인에게 고하지 않았더라면, 내 아들이 감히 남몰래 사람을 바꿔치기하려고 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네가 정녕 정신이 나갔구나! 감히 과인의 가장 정예 병사를 움직여서, 여빈족으로 화친을 보내는 한낱 바둑알 따위를 네 동궁으로 빼돌리려고 하다니!”이백헌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하지언이 이 일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왕에게 곧장 고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그러나 이백헌에게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고개를 든 이백헌의 목구멍에서 비통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아바마마, 제발 소자를 보내 주시옵소서!”“소자가 모든 것을 이미 마련해 두었습니다. 결코 여빈족에게 들키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왕은 차디찬 눈으로 이백헌을 바라볼 뿐이었다.대전 안의 호위무사들 역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경계하고 있었다.양쪽이 맞선 끝에 이백헌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던 절규는 끝내 울먹임으로 변했다.“하남경이 어찌 고작 바둑알이란 말씀입니까?”“하남경은 소자가 이 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소자가 어찌 두 눈을 빤히 뜨고 하남경이 죽으러 가는 것을 보고만 있겠습니까!”그러나 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눈빛은 더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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