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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Penulis: 밀크 라떼
그 사실을 깨닫자 이건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온몸을 집어삼킬 듯 치솟았다.

터뜨릴 곳 없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그는 옥패를 챙겨 들고 소매를 떨치며 경옥궁을 나섰다.

침전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남지 않았던 잠기운마저 말끔히 달아난 뒤였다.

이건은 손에 든 옥패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보면 볼수록 속이 뒤틀렸다.

평생 이 옥패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겠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고작 시녀 하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주다니!

끝내 이건은 옥패를 힘껏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옥패가 산산조각 났다.

소은하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미 이건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고, 그가 그토록 원하던 나현진까지 되찾아 주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더 이상 이용할 가치조차 없을 터였다.

‘헌데 어째서 고작 옥패 하나 때문에 저리도 노여워하는 것일까?’

“소은하, 그래. 아주 좋구나! 기어이 짐과 연을 끊고 싶다 이거지? 좋다. 네 뜻대로 해 주마!”

이건은 이를 악문 채 방 안을 서성였다. 이윽고 전각 밖을 향해 버럭 외쳤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어서 붓과 먹을 가져오너라!”

궁인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 붓과 먹을 들고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이건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교지를 써 내려갔다.

붓을 놓자마자 그는 교지를 집어들어, 이를 전할 태감에게 던져 주었다.

“소은하가 도성으로 돌아오면 이 교지를 전하거라.”

교지에 적힌 것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대장군 소은하가 성심을 거슬렀으니, 평생 변경에 주둔하라. 또한 별도의 명이 있기 전에는 도성으로 돌아올 수 없느니라!]

태감은 내용을 훑어보자마자 안색이 변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용기를 내어 간언했다.

“폐하, 소 장군은 그간 수많은 전공을 세웠사옵니다. 오랫동안 폐하께 충성을 다해 왔으며, 이번에도 적군을 크게 무찌르고 현진 아씨를 무사히 구해 냈사옵니다. 헌데 이런 교지를 내리시면 조정 대신들의 마음마저 돌아설까 염려되옵나이다.”

이건은 서늘한 눈빛으로 태감을 내려다보았다.

“짐의 결정을 못마땅히 여기는 것이냐?”

태감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다만 폐하를 모시는 동안 소 장군께서 어떤 마음으로 폐하 곁을 지켜 왔는지 직접 보았기에 감히 한 말씀 올리는 것이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삼 년 전 폐하께서 고열로 사경을 헤매실 때, 소 장군께서는 눈밭에 누워 온몸을 얼음장처럼 식힌 뒤 돌아와 폐하를 끌어안아 열을 내려 드렸사옵니다. 이 년 전 봄 사냥터에서 미쳐 날뛰던 표범이 폐하의 팔을 물어뜯으려 했을 때도, 장군님께서는 몸을 던져 막으셨고, 일 년 전, 칠황자가 자객을 보내 폐하를 시해하려 했을 때도 소 장군이 대신 칼을 맞았습니다.”

“소 장군께서는 폐하께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분이옵니다. 게다가 그 오랜 세월 폐하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오셨사옵니다. 부디 한 번만 더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는 이건을 가장 오래 모셔 온 태감이었기에 그나마 이런 말까지 올릴 수 있었다.

지난 일들이 하나둘 씩 떠오르자, 이건의 검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시선이 바닥에 산산이 부서진 옥패로 향했다.

이건의 눈빛이 다시 차갑게 식었다.

“은하가 예전에 짐의 처소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현진이가 알게 된다면, 괜한 오해를 할 것이다. 해서 짐과 소은하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다시 볼 일 없을 것이다!”

곁에 떠 있던 소은하가 그 말을 듣고 소리 없이 웃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다시 볼 일이 없다니...’

‘이건, 그대의 말대로 앞으로의 우리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느니라...’

그 뒤로 이건은 조회가 끝나기만 하면 가장 먼저 나현진의 처소를 찾았다.

나현진에게만큼은 끝도 없는 인내심을 가진 사람처럼 굴었다.

평소 그토록 냉담하던 이가 혼례에 쓸 봉관과 예복을 함께 골라 주고, 마주 앉아 수라를 들었으며, 심지어 그녀가 절에 가서 복을 빌고 싶다고 하자 기꺼이 동행하기까지 했다.

그날도 이건은 일부러 정사까지 미뤄 두고 나현진과 함께 궁을 나섰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도성에서 가장 이름난 난인사(蘭因寺)였다.

황제와 장차 황후가 될 여인을 맞이하기 위해 절에서는 미리 다른 향객들을 모두 물렸다.

주지스님은 여러 승려를 거느리고 나와 두 사람을 맞았다.

난인사에는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가지에 소원을 적은 비단띠를 매달면 연인은 평생 해로하고, 가난한 이는 부귀를 누리며, 선비는 과거에 급제해 장원에 오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건은 본디 이런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현진이 가고 싶다 하자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비단띠를 받아 소원을 적었다.

이건은 나현진의 손을 감싸 쥐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와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하고, 해마다 오늘처럼 기쁜 날만 이어지기를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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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의 이번 행차는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예상대로 이번 출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신하들은 소은하를 벌해 본보기로 삼으라며 안팎으로 간언했다.하지만 소은하는 이미 병부를 돌려주고 관직을 버린 채 떠난 뒤였다. 이건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직위를 명목상 종사관으로 낮춰 두고, 정윤에게 장군직을 잠시 맡겼다.이건은 밤낮으로 소은하를 그리워했다. 텅 빈 건곤전에서 그는 등불을 끄지 못했다. 어둠 속에 들면 꼭 한밤중에 악몽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꿈에는 전생에 관 속에서 피에 젖은 옷을 입고 있던 소은하와, 이번 생에 야율진에게 붙들린 채 침상 위에서 피임탕을 들이켜던 소은하, 그리고 형체도 갖추지 못한 채 사라진 아이가 끊임없이 나타났다.소은하는 얼굴이 흐릿한 아이를 안고 울며 말했다.“제가 폐하께 대체 무엇을 더 갚아야 하옵니까? 두 목숨까지 모두 내어 드렸사옵니다. 이젠... 다 갚은 것이 아니옵니까?”이건은 식은땀에 젖어 눈을 떴다.그는 경옥궁에서만 가끔 편히 잠들 수 있었다. 한밤중에 잠을 깨면 곱게 개어 둔 여우털 갖옷을 소은하의 향기롭고 부드러운 몸인 양 품에 끌어안았다.낙엽은 창밖으로 더욱 수북이 쌓였고, 밤나무에는 바람에 휩쓸린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다. 어느새 겨울이었다.정윤은 부하들이 노획한 모피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장군이 되었어도 그는 옛집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 옆집 노인은 그를 보자 웃으며 물었다.“석돌아, 아직 추위도 들지 않았는데 벌써 겨울옷을 지으려는 게냐?”정윤은 뒤통수를 만지며 쑥스럽게 웃었다.“마침 좋은 모피가 생겼습니다. 어르신, 혹 솜씨 좋은 재봉사를 아십니까?”“제법 까다롭게 구는구나. 무슨 옷을 맞추려는 게냐?”정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여인이 입을 옷입니다. 허리께는 넉넉히 내고, 모피에서는 누린내가 나지 않게 해 주었으면 합니다.”노인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이 녀석, 갑자기 장가들 마음이 생겼느냐? 허리를 넉넉히 하라니, 제법 살집 있는 여인인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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