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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Author: 고독한포켓

1화: 억울하겠지만 빙의로 2회차 시작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8 14:11:15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

그것이 내 45년 인생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2025년 대한민국.

철강 제조 중소기업 부장 강철민의 삶은 참으로 볼품없이 막을 내렸다.

거래처 접대, 위에서 쪼아대고 아래에서 치받는 샌드위치 신세, 그리고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미결재 서류들.

그날도 가족들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회사 모니터에 머리를 박은 채 숨이 끊어졌다.

사인은 과로사.

뉴스 사회면 한구석에 한 줄 나올까 말까 한 흔한 죽음이었다. 죽어가는 순간 뇌리를 스친 건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도 아니었다.

​지독한 피로감.

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구나 하는 비겁한 안도감뿐.

​그렇게 영원한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고 생각했는데.

​"으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시야에 들어온 건 익숙한 사무실 형광등 불빛이 아니었다. 누렇게 뜬 짚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흙천장.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메주 냄새와 묵은 먼지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병원인가? 아니면 쓰러진 나를 누가 시골 요양원에라도 버려두고 간 건가.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평소라면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왔을 텐데, 몸의 반응이 이상했다.

​묵직했다.

마치 납덩이를 전신에 두른 것처럼, 아니 근육 자체가 고밀도로 압축된 강철이 된 것처럼 기이한 중량감이 느껴졌다.

​반면 움직임은 폭발적이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상체가 용수철처럼 튕겨져 올라왔다.

​우득. 우드득.

​척추 마디마디가 맞춰지는 소리가 흡사 기왓장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이게... 뭐지?"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낯설었다.

​걸걸하고 깊은 저음. 동굴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울음소리 같았다. 나는 황급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솥뚜껑.

그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굳은살이 촘촘히 박힌 거대한 손바닥. 손가락 마디마디가 웬만한 성인 남자 손목만큼이나 굵었다.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이건 내 손이 아니었다. 사무직으로 20년을 구르며 볼펜이나 굴리던, 가늘고 하얀 그 손이 아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거칠거칠한 수염. 각진 턱선.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촉이 마치 잘 무두질한 가죽 소파처럼 질기고 단단했다.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덕령아! 일어났느냐!"

​덕령이?

누굴 부르는 거야.

​드르륵.

​낡은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고 웬 상투 튼 사내가 들어왔다. 깐깐하게 생긴 눈매에 하얀 도포를 입은 꼴이 영락없는 사극 배우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잠이나 자다니. 형으로서 참으로 민망하구나. 어젯밤에 또 술을 퍼마시고 들어온 게냐?"

​형?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마치 누군가 뇌 속에 억지로 USB를 꽂고 대용량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처럼,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전라도 담양. 석두촌.

내 이름은 김덕령.

그리고 눈앞의 저 잔소리꾼은 형 김덕홍.

​"윽..."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밀려드는 기억의 편린 속에서 내 정체가 선명해졌다.

​김덕령(金德齡).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억울하게 역모 누명을 쓰고 옥사한 비운의 장수. 교과서에서, 아니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조선왕조실록에서 수도 없이 읽었던 그 이름.

​"미치겠네."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꿈이 아니다. 이건 너무나 생생한 현실이다. 엉덩이에 닿는 까칠한 돗자리의 감촉, 방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그리고 눈앞에서 잔소리를 퍼붓는 저 양반의 침 튀기는 모습까지.

​나는 45세 강철민의 기억을 가진 채, 조선 시대 김덕령의 몸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야근 피해서 도망쳤더니, 하필이면 헬조선, 그것도 전쟁 직전의 조선이라니."

​기가 찼다.

​지금이 몇 년도지? 기억을 더듬었다. 신묘년. 서기 1591년이다.

내년이면 임진왜란이 터진다.

​온 국토가 불바다가 되고, 백성들이 도륙당하며, 왕이란 작자는 의주로 도망을 치는 그 지옥도가 펼쳐지기 딱 1년 전.

​그리고 나는 전쟁 영웅이 되었다가, 그 도망친 왕에게 의심받아 정강이뼈가 부러질 때까지 고문당하고 죽을 운명이었다.

​"싫은데."

​단호하게 뱉었다. 김덕홍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가 싫다는 게냐?"

​"아닙니다. 형님. 잠시 헛소리가 나왔습니다."

​나는 일단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20년 직장 생활로 다져진 처세술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김덕홍은 내 공손한 태도에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쯧. 덩치만 컸지 철이 없어서야. 어서 세수하고 나오거라."

​김덕홍이 나가자마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락 말락 했다. 키가 거의 190cm는 되어 보였다. 조선 시대 평균 신장을 생각하면 이건 거인을 넘어선 괴물 수준이다.

​방구석에 놓인 청동 거울을 집어 들었다. 희미하게 비친 얼굴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부리부리한 눈매, 짙은 눈썹. 호랑이 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맹장의 관상.

​"잘생기긴 했네. 무식하게 생겨서 문제지."

​거울을 내려놓으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아귀에 잡히는 공기가 터져 나갈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온몸에 힘이 넘쳤다. 그냥 넘치는 수준이 아니라, 몸 안의 피가 끓는 용광로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이게 역사서에 기록된 김덕령의 신력(神力)인가.

​실록에 따르면 김덕령은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씨름하다가 황소를 들어 울타리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했다. 과장이 섞인 야사인 줄 알았는데, 지금 내 몸 상태를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스트가 필요해."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따스한 봄 햇살이 마당에 내리쬐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골 풍경. 닭들이 모이를 쪼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 평화가 시한부로 보였다. 1년 뒤면 이곳은 왜군들에게 짓밟힐 테니까.

​가족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다가 과로사한 전생의 기억이 스쳤다. 그렇게 죽도록 일해봤자 남는 건 없었다. 회사는 나를 대체할 부품을 금방 찾았을 것이고, 남겨진 가족들은...

​"젠장."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번 생은 달라야 한다. 개죽음은 한 번으로 족하다. 억울하게 누명 쓰고 죽는 엔딩? 절대 사절이다.

​나는 마당 한구석에 놓인 다듬이돌을 바라보았다. 족히 쌀 두 가마니 무게는 나갈 법한 큼지막한 화강암 덩어리였다.

​저걸 들어볼까.

아니, 드는 걸로는 부족하다.

​나는 다듬이돌 앞으로 다가갔다. 심호흡을 했다.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흡!"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쾅-!

​둔탁한 타격음이 고막을 때렸다. 동시에 하얀 돌가루가 폭죽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내 주먹과 다듬이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듬이돌 한가운데가 옴폭 파여 있었다. 마치 찰흙에 주먹을 박아 넣은 것처럼 선명한 자국. 그런데 내 주먹은?

​멀쩡했다.

​까진 곳 하나 없이, 붉게 달아오르지도 않았다. 통증? 모기에 물린 것보다도 덜했다. 오히려 시원했다.

​"금강불괴(金剛不壞)."

​무협지에서나 보던 그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이 몸, 생각보다 물건이다.

단순히 힘만 센 게 아니다. 피부와 뼈 자체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이 정도 내구도라면 조총 탄환도 튕겨낼 수 있을지 모른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전생의 강철민은 힘없는 월급쟁이였지만, 현생의 김덕령은 조선 최강의 피지컬 몬스터다. 게다가 내 머릿속에는 앞으로 벌어질 역사의 모든 데이터가 들어있다.

​이건 해볼 만한 게임이다.

​"이순신 장군님."

​나는 허공을 향해 주먹을 쥐었다.

​"당신은 바다만 지키쇼. 육지의 쓰레기들은 내가 다 청소해 줄 테니까."

​꼬르륵.

​비장한 다짐을 하기가 무섭게 뱃속에서 소리가 났다. 엄청난 허기였다. 이 거대한 몸뚱이를 유지하려면 연비가 장난이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밥심이 있어야 역사를 바꾸든 말든 하지."

​나는 부엌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발을 디딜 때마다 마당의 흙바닥이 움푹움푹 패였다.

​부엌문을 열자 구수한 된장 냄새가 훅 끼쳐왔다.

​부엌 안에는 형수님이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솥뚜껑을 닫았다. 김덕령이라는 놈이 평소에 얼마나 사고를 치고 다녔는지, 형수님의 눈빛에 미묘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형수님. 배가... 고픕니다요."

최대한 점잖게 말했다.

21세기 직장인의 매너를 장착한 목소리. 그리고.

꼬르르르륵-!!!

그렇지 못한 비매너적인 천둥소리가 부엌 안을 무참히 울렸다.

주인 닮아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배꼽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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