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회장님, 오랜만입니다.”두 집안 어른들은 인사를 하며 자연스레 성유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무언의 협박을 하듯 저를 보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결국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여긴 제 딸아이 성유리라고 합니다.”“따님이 예쁘네요.”조재원이 웃으며 제 아들에게도 눈짓하자 그제야 옆에 있던 남자가 인사를 건네왔다.“안녕하세요, 조경우입니다.”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던 남자는 그리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어 유난히 더 단정해 보였다.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와 달리 성유리는 여전히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자자, 다 앉으시죠!”성시원의 말에 다들 자리에 앉았고 성시원은 바로 조재원과 백화점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 분위기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아버지의 의도를 정확히 몰랐다면 정말 그냥 양가의 식사 자리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성유리의 맞은편에 앉은 조경우는 아까의 인사 이후로는 성유리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주지 않고 이따금 진중하게 어른들의 대화에 동참하며 얘기를 나눴다.그때 가만히 있던 조재원의 아내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가씬 올해 스물넷이라고 했죠?”“네.”“우리 사실 전에 봤었는데.”“작년에 로즈 호텔에서.”한혜진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그날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첫 결혼기념일 파티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등장한 성유리는 그날 파티의 중심이 되었고 또 아직 결혼을 안 한 금성 재벌 집 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하지만 그날 박한빈이 나타나지 않아서 성유리는 그런 모습을 하고서도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김서영이 나서서 해명했지만 모두들 박한빈이 제 아내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하지만 원체 해명 따윈 하지 않는 박한빈 때문에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그가 그날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본인도 잊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혜진이
다행히 식사 자리는 무사히 끝이 났고 성유리는 보는 눈이 있어 성시원과 같이 차를 타긴 했지만 그 집에는 들어가기 싫었기에 기사더러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그에 성시원의 눈치를 보던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성시원에 깜빡이를 켜고 방향을 틀었다.성시원과는 말조차 섞기 싫어진 성유리가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려왔다.성유리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성시원이 경고하듯 말했다.“조씨 집안 아들이 보낸 것 같은데.”그 말에 성유리는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들어봤고 역시나 조경우가 보낸 문자였디.[오늘 성유리 씨라는 분을 알게 돼서 너무 영광이에요.][혹시 오페라 좋아하세요? 티켓이 두 장 생겼는데 내일 같이 갈래요?][시간 없으시면 같이 안 가도 되니까 부담 갖지는 마세요.]당돌하진 않지만 목적성이 명확한 요청에 입술을 말아 물며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승낙하고 답장을 보냈다.[좋아요.]문자를 보내고 난 성유리는 핸드폰을 성시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이제 만족해요?]아무 대답도 없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그 얼굴을 보기도 싫어졌는지 기사를 보며 말했다.“옆에 차 세워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하지만 기사는 성시원의 명령이 아니라 차를 세우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그에 성유리가 성시원을 쳐다보자 성시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세워.”성유리가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성시원이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조경우 씨 사람 좋아. 다리가 불편하긴 해도 그 정도면 아주 좋은 조건이야. 알지?”그 말에 성유리는 웃으며 답했다.“조건이 그렇게 좋으면 성유정더러 결혼하라고 하지 그래요?”성유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성시원은 답을 하지 못했고 성유리 역시 그 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9시가 금방 넘은 지금은 거리의 불빛들이 찬란해지고 사람들의 밤 생활이 막 시작된 시각이었다.길가에 널린 차들이며 온통 사람들로 붐비는 영업장이며 모두 생기가 가득했지만 성유리는 이곳은 자신이 있
그래서 식탁에는 박한빈과 김서영 둘만이 마주 앉게 되었다.“집에는 언제 들어올 거니?”수프를 마시며 묻는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는 유리랑 같이 사니까 여기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나가라고 한 거였어. 이젠 이혼도 했으니 들어와야지.”“괜찮아요.”“도연제가 더 편해요.”“뭐가 편한데? 새 여자친구 데려가는 게 편해?”말투는 평온했지만 단어마다에 조롱이 가득 배어있는 문장을 들은 박한빈은 수저를 내려놓고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의 시선을 못 느낀 척 계속 말했다.“나 진지해. 네 아버지가 시킨 결혼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혼하고 새로운 여자 만나겠다면 난 반대 안 한다.”“하지만 성유정은 안돼. 걔는 절대 우리 집에 못 들여.”“왜요?”박한빈의 질문에 김서영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너 정말 그 아이랑 결혼할 생각이었니?”“그냥 어머니가 왜 유정이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궁금한 것뿐이에요.김서영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사람 싫어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니?”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대꾸를 못 하자 김서영은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성유정 그 아이만 아니면 다 괜찮아.”“저는 어머니 눈에는...”말을 하다말고 멈칫하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저한테 골라주신 그 사람밖에 안 보이는 줄 알았어요.”성유리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박한빈에 김서영은 웃으며 말했다.“유리?”“그래, 유리 좋아하지. 그런데 뭐 어쩌겠니, 너흰 이미 이혼을 했고 유리는 앞으로 나아가야지. 벌써 선보고 있던데.”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선이요?”“그래, 오늘 오페라 보러 갔다가 만났어. 조경우 씨랑 같이 있더라.”“조경우면 그 절름발이 말하는 거예요?”“네.”“성씨 집안에서 많이 급하긴 했나 보네요.”그 말에 김서영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 너도 반성이란 걸 좀 해봐야 하지 않겠니? 왜 유리가 절름발이에게 가면서까지 너랑 이혼했겠니?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으며 그 입가에 핀 미소는 사람 자체가 한없이 온화해 보이게 했다.조경우가 뭐라고 했는지 성유리는 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조경우를 바라보았다.웃을 때마다 반짝이는 눈은 하나의 호수를 연상케 했다.성유리를 재미없고 조용한 사람이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던 박한빈은 처음 보는 환한 미소였다.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문득 성유리가 스케치북을 뺏으려 하던 그 날 밤이 떠올랐다.그날은 성유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키스한 날이었다.박한빈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조경우는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어갔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에게 또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고개를 저었고 결국 조경우 혼자 차에 탄 뒤 성유리는 밖에 가만히 서 있었다.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누른 성유리는 다른 손을 들어 조경우를 향해 흔들어주었다.그렇게 조경우의 차가 떠나자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성유리는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도 지우고 고개를 떨궜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액셀을 밟아 성유리에게로 다가갔다.성유리는 제 앞으로 다가오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검은색 맥세라티에 처음에는 두 눈을 의심했었다.하지만 창문이 내려지고 차분하다 못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 성유리는 제가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신했다.“타.”“괜찮아요.”잠시 벙쪄있던 성유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난 지하철 타고 가면 돼.”말을 마친 성유리가 박한빈 차 뒤로 돌아가려고 하자 박한빈은 차를 뒤로하며 성유리의 길을 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의도는 명확했다.그에 성유리는 입술을 말아 물더니 치마를 잡았다 놓으며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만 성유리는 조수석에 타지 않고 뒷좌석에 올라타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하실 말씀 있으세요, 박 대표님?”박한빈은 말없이 강하게 액셀을 밟았고 그 반동에 방심하고 있던 성유리는 앞 좌석에 머리까지 박을 뻔했다.그에
그걸 다 알면서 저도 모르게 농담을 뱉고 또 예상했던 혐오 가득한 말을 듣다니, 참 자학과 다름이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다.“알겠어요.”“박 대표님 할 말 다 하셨으면 저 이만 내려도 될까요?”박한빈은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옆에 멈춰 섰다.그에 바로 차에서 내리려고 하던 성유리의 귀에 다시금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문고리에 올린 손을 가만히 두었지만 굳이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박한빈은 운전대를 매만지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가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으니까... 성씨 집안에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말해도 좋아.”“이런 방식으로 나 역겹게 하지 말고.”마지막 말을 들은 성유리는 문고리를 꽉 쥐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박 대표님 호의는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말을 마친 성유리는 차에서 내린 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갔고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성유리의 인영이 사라져가는 걸 지켜봤다.하지만 성씨 저택 근처에 지하철역 같은 건 없었기에 박한빈은 성유리가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갈지 궁금해졌다.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아까 성유리의 그런 대답을 듣고 난 뒤 박한빈은 성유리가 진무열과 보란 듯이 함께 있고 이번에는 조경우까지 만나는 게 다 자신에게 손을 벌리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박한빈이 이런 가십거리에 엮이는 걸 제일 싫어한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성유리였기 때문이다.정말 성유리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써먹는 사람인 것 같았다....성유리는 빠르게 아파트로 돌아갔고 마침 조경우가 몇 분 전에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오늘같이 얘기 나눈 거 너무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같이 밥 먹고 얘기할 기회가 있을까요?”조경우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뜻은 꽤나 직접적이었다.다들 성인이고 어차피 나와서 맞선까지 본 사이니 굳이 돌려 말할 필요도 없긴 했다.그리고 성유리도 조경우가
성유리는 밤이 깊어 가도록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었다.눈을 감으면 멈추지 않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습기 가득한 방과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 그리고 유난히 더러운 옷과 도둑이 지나간 자리마냥 사정없이 뒤져진 서랍.마지막으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남자의 얼굴까지.8년 동안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 악몽에서 헤여나온 적이 없었다.그런데 성유리에게 그런 지옥을 남겨준 남자가 오늘 교도소에서 나온 것이다.성유리의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오는 남자도 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도 모두 너무나 익숙했다.아무리 도망쳐도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숨이 막혀왔다.금방 잡은 이 집도 안전하진 않은 것 같았다.한 쌍의 눈이 자신을 지켜보다가 금방이라도 덮쳐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에 성유리는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하지만 집에서 나가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오승희가 자신에게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단 걸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성유리에게 뭔가를 알려줄 수도 없는 상태의 사람이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뭔가 든든해지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병원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금성에 온 그 남자가 제일 먼저 찾아갈 곳은 당연히 성씨 집안일 텐데 성씨 집안과 성유리의 관계로 보아 그들이 병원 주소를 알려줄 가능성이 충분했기에 이곳도 안전하진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간호사에게 당부 몇 마디를 남기고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 들어 항공권을 끊었다.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도 계약을 한 상태로 간단히 필요한 것만 챙긴 성유리는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성유리는 가장 빠른 비행기로 예약을 하고 생전 처음 보는 도시에 도착해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공항에 내려 핸드폰을 켜보니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는데 전부 성시원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성유리는 일단 택시를 잡아 예약해둔 호텔로 향했고 호텔 방에 들어오고 나서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
성유리는 홀로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그때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고 역시나 아까의 그 번호였다.딱 한 번 본 번호였지만 이미 성유리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버린 그 번호에 성유리는 핸드폰을 냅다 바닥에 내리꽂았다.한편 도연제에서는 숙자 아주머니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한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누구라고요?”“전 지석민이고요, 서연이... 아니, 성유리 아빠예요.”남자는 노래진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유리 여기 있는 거 아니까 한 번만 나와 보라고 전해 주세요.”성씨 집안에서 성유리를 잃어버린 뒤 성유리가 시골에서 자랐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에 숙자 아주머니도 남자의 행색을 보고 단번에 그의 말을 이해했다.숙자 아주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말했다.“유리 아가씨는 이미 집으로 돌아가셨어요.”“집으로 갔다고요? 왜요? 이 집...”“우리 도련님이랑 이미 이혼하셨어요.”숙자 아주머니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그러니까 아가씨 찾으려면 성씨 집안에나 가봐요. 얼른 나가요.”“이혼이라고요?”성유리의 이혼은 지석민이 미처 예상 못 한 일이었다.뉴스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의 결혼 소식을 보고 성유리가 박한빈 같은 재계 1위 재벌한테 시집갔다고 좋아했는데 이혼이라니!“네, 진작에 이혼했으니까 빨리 나가요. 안 그러면 경호원 부를 거예요!”숙자 아주머니는 눈앞의 남자를 아주 더럽게 여기며 마지막까지 눈을 흘기다가 문을 걸어 잠갔다.숙자 아주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 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박한빈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밖에 누구예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을 잘 못 찾은 사람이에요.”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바라봤다.물론 박한빈이 커가는 걸 같이 지켜보기도 하고 나이도 박한빈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숙자 아주머니였지만 박한빈의 그 날카로운 눈빛만 보면 심장이 철렁하곤 했다.그래서 아주머니는 사실 그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
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박한빈에게 자신의 생일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해주었다.차에 올라탄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지니고 다니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검은색과 금색으로 된 라이터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밑부분에 박한빈의 이름이 새겨진 게 전부였다.이 작은 라이터가 결혼 기간 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었다.다음 해에는 박한빈이 말도 안 하고 결혼기념일에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성유리는 이런 보여주기식 선물조차도 준비하지 않았었다.올해 역시...박한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라이터를 다시 넣어두고 눈앞의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그런데 그때 기사가 갑자기 급정거를 한 탓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치켜뜬 채 기사를 바라봤다.그 눈빛에 기사는 다급히 해명하기 시작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앞에...”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앞을 가로막았던 남자는 어느새 박한빈이 앉아있는 자리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오십은 넘어 보이는 남자는 유난히 짧은 머리에 노란 이빨을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원래 이런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는 박한빈이었지만 숙자 아주머니가 아침에 한 말이 생각나 이번에는 창문을 내려보았다.“박 대표님이시죠?”“안녕하세요! 역시 대표님 인물 하나는 끝내주시네, 신문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긴 것 같아요!”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는 지석민에도 박한빈은 차분하게 대꾸했다.“누구시죠?”“저요? 저는 서연이, 아니 유리 아빠죠! 제가 금방 금성에 와서 유리부터 만나려고 했는데 사람을 못 찾았거든요. 근데 이렇게 대표님 먼저 만나다니 정말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무슨 일이시죠?”“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랫동안 못 봐서 잘 지내나 하고 와 봤는데 이 년... 아, 애가 연락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표님 찾아온 겁니다. 근데 우리 유리는...”“어딨는지는 저도 모릅니다.”박한빈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진짜 이혼하셨어요?”“네.”“아니, 무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