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먼저 온 사람이 우선 아닌가요?”임정우가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로 물었지만 박한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알죠, 하지만 선택은 이 숙녀분이 하셔야 할 것 같아요.”그의 말은 상대를 말문이 막히게 했고 박한빈도 더 이상 임정우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성유리만 올곧게 쳐다보았다.늘 호수처럼 잔잔하던 그 눈동자가 지금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요동치며 흐르는 게 보였다.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드리운 손을 꽉 말아쥐었다.잠시 후, 그녀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임정우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초대에 응했다.박한빈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갔고 내밀었던 손도 꽉 움켜쥐었다.그가 다시 성유리를 바라봤을 때 성유리는 이미 남자를 따라 돌아선 뒤였다.박한빈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조금 더 악물었다.그때 진무혁이 다가왔다.“박 대표님.”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참석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아직 축하 인사를 못 드렸네요. G국에서 협상 아주 잘 끝냈다고 들었어요.”“감사합니다.”박한빈은 형식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대충 답했고 시종일관 고개를 돌려 진무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박 대표님께서는 오늘 성유리 때문에 오신 건가요?”진무혁이 덧붙이자 박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박 대표님하고 성유리가 이혼한 게 안타까워서요. 참 매력적인 여자 아닌가요?”말하며 진무혁의 시선도 다시 성유리에게 향했다.이때 이미 성유리와 임정우의 춤은 반쯤 진행된 상태였고 두 사람의 동작은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호흡이 아주 잘 맞아 서로 밀고 당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왜요, 좋아해요?”진무혁의 시선을 따라가던 박한빈이 다그치듯 물었다.“저런 여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겠죠.” “아, 그런데 진 대표님은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 몸이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행복을
성유리와 임정우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노래가 끝나도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두 번째 춤을 추기 시작했다.“아직도 그쪽 이름을 모르네요?”임정우가 참지 못하고 묻자 성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면무도회인데 이름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그런데 그쪽은 날 알잖아요. 그건 나한테 불공평한 것 아닌가?”“여기서 임정우 씨를 아는 사람은 많죠. 그렇게 유명하시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성유리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력감이 묻어났지만 임정우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오늘 밤이 지나면 그쪽이랑 식사 한 번도 같이 할 기회가 없다는 말 아닌가요?”“아뇨, 기회는 있어요.” 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은 아버님과 함께, 전 진 대표와 같이 만나서 식사하면 더 좋지 않아요?”“그러니까 결국엔 진무혁 부하직원이다? 비서인가? 아니면 비서 실장? 그것도 아니면 회사 소속 연예인?”임정우는 하나하나 추측을 해보았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되묻기만 했다.“그럼 식사하는 건 동의하세요?”“그쪽이 온다면 난 무조건 동의죠.”“좋아요.”성유리는 흔쾌히 동의했고 한참을 쳐다보던 임정우가 말했다.“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미리 말하는데 나 오늘 당신 제대로 기억했어요. 진무혁이 다른 사람을 대신 데려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요.”성유리는 미소만 지었다.“뭐에요, 나 못 믿어요?”“믿어요.”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임정우 씨 관심은 감사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간다고 했으면 전 꼭 갈 거니까. 알아보는 건 임정우 씨 눈썰미에 달렸죠.”“그렇게 말하니까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임정우가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스텝을 빌미로 성유리에게 성큼 다가갔다.성유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갑자기 옆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임정우의 발등을 밟았다.“누구야!”임정우는 순간 화가 나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위에 매달려 있던 크리스털 조명이 깜박
그제야 성유리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계속해서 걷어차려던 다리를 거두었다.그의 가면은 여전히 얼굴에 제대로 붙어 있었고 시리도록 차가운 두 눈은 성유리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당... 당신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요?”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와 두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왜, 즐거운 시간 방해해서 싫어?”박한빈의 얼굴은 점점 더 험악해졌고 그의 손은 성유리의 턱을 꽉 쥐었다.아까 춤추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것과 조금 전 차였던 발길질에 대한 복수심이 차오른 듯 성유리의 뼈를 분질러 버리려는 듯한 힘이었다.성유리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는데 박한빈이 그녀의 두 손을 낚아챈 뒤 무릎을 위로 들어 그녀의 두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성유리 씨 인기가 참 많네.”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교계의 꽃이 될 자질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과거 그녀는 늘 얌전하고 조용했으며 딱 어떠한 순간에만 그토록 유혹적인 모습을 드러냈었고 박한빈은 그런 모습을 자신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은 마치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아니, 속았다기보다... 자신을 갖고 노는 것 같았다.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박 대표님 눈에는 누가 다른 사람과 춤 두 번 추면 사교계의 꽃이 되나 봐요?”“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넌 신분이 다르잖아. 다른 남자한테 그렇게 웃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내 신분은 뭐가 다른데요?”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가 말을 뱉는 동시에 무언가 떠올라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이 반응은 그녀의 생각이 맞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신분이 뭐가 다른데? 결국 다른 사람에게 험한 짓 당할뻔했다는 거잖아.지석민이 잡혀간 후 성유리는 그녀가 조심하지 않아 이런 일을 당했다는 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
“뭐 하는 거예요?”성유리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이거 놔요! 박한빈 씨, 이거 놓으라고!”쉬지 않고 발을 버둥거리자 하이힐이 벗겨졌고 카펫이 깔린 호텔 복도에는 신발이 떨어져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는 성유리를 내려놓았다.하지만 이내 성유리를 구석으로 몰아 가둬놓고 그녀가 가려고 하자 단번에 턱을 그러쥐고 입을 맞췄다.그는 성유리가 망설이거나 저항할 틈도 주지 않았고 입술을 대자마자 잇새를 가르고 혀끝을 밀어 넣었다.거침없이 헤집는 움직임에 성유리는 숨이 막혔지만 두 손마저 그에게 잡혀 있어 밀어낼 기회조차 없었다.이윽고 박한빈의 무릎이 재빨리 그녀의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누구보다 성유리의 몸에 익숙했던 그의 거친 움직임은 성유리를 마치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가 된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눈을 훤히 뜬 채 칼날이 떨어지면서 그녀의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성유리를 더욱 굴욕적으로 만든 것은 이 와중에도 그녀의 몸이 반응한다는 사실이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리며 허리 쪽에 힘이 풀렸다.당연히 이 반응을 박한빈도 감지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나 싶더니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성유리의 어깨끈이 그의 손에 의해 내려가고 엘리베이터로 전해오는 에어컨 바람이 목선 사이로 파고들어 성유리의 몸은 더욱 떨렸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띵-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갑자기 열리며 재빨리 반응한 박한빈이 문이 열리는 순간 재킷을 벗어 성유리의 몸을 덮은 뒤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그 본인은 아직 가면을 쓰고 있었다.문밖에 있던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박한빈은 그들이 반응을 보이거나 자세히 볼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성유리는 내내 움직이지 않고 그의 품에 바짝 붙어 있었고 그 얌전한 모습이 박한빈은 마음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나쁜 놈.” 성유리가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의 목을 물어뜯으려던 남자는 그 말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이윽고 시선을 들어보니 성유리의 립스틱은 다 번져 있었고 흘리는 눈물로 아이라인도 살짝 번져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져 볼품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속눈썹에 맺힌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박한빈의 심장이 철렁하며 곧 천천히 움직임을 늦추더니 팔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고 그대로 키스했다.전보다 한결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에 성유리도 아까처럼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박한빈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성유리의 태도가 한풀 꺾이는 듯해 보이자 박한빈도 이성을 되찾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제대로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그의 입술을 세게 콱 깨물었다!...“대표님.”벌써 하루가 지났고, 서훈은 말하면서도 이따금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박한빈의 뺨에 남은 손바닥 자국도 눈에 띄었지만 입술에 남은 피멍보다는 아니었다.단순한 손바닥 자국이었으면 사람들이 박씨 집안에 내부 갈등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겠지만 입술에 남긴 흔적이라면 말이 달라진다.이 두 가지 흔적을 동시에 남길만한 사람은 여자밖에 없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이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런 흔적을 남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무슨 일이야?”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사모님께서 오셨어요.”“무슨 일로 왔대?”“대표님께 전해줄 게 있다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만날 시간 없어. 난...”“뭐가 바빠서 날 볼 시간도 없어?”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의 이마가 찡그려졌다.서훈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사모님, 대표님께서...”“얼굴이 왜 그래?”김서영은 이내 그의 몰골을 보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너 연애하니?”“아니요.”“그럼 얼굴에 난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실수로 부딪혔어요.”박한빈은 무심하
날이 어두워지고 밖은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저녁 러시아워의 붉은 불빛이 어우러져 번잡하고 차가운 이 도시를 대표하는 하나의 모습을 만들어냈다.지화그룹 건물은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통유리창은 액자처럼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박한빈은 그 자리에 서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라이터를 손에 쥐고 거듭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파란 불꽃이 튀어나왔다가 사그라들었다.한번 또 한 번...박한빈은 이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지금 떠오르는 건 그저 웃지 않던 얼굴과 자신에게 엄격했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 있던 모습뿐이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박한빈은 겨우 열두 살이었다.부자의 유대감은 별로 없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그는 적어도 평범한 아버지였고 어머니와는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였다.그게 아니고서야 어머니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켰을까.처음 그에게 성유리와 결혼하라고 한 것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는 자신이 거짓말투성이인 세상 속에서 살아온 것 같았다.마지막으로 라이터 스위치를 똑딱이던 박한빈은 라이터를 책상 쪽으로 던지고는 뒤돌아 걸어 나갔다.오 기사는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박한빈이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정중하게 다가갔지만 박한빈은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운전석으로 향했다.오 기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액셀을 밟았고 곧바로 시월 파크에 도착했다.하지만 박한빈이 안으로 들어서자 칠흑 같은 공허함만이 그를 반길 뿐이었다.불을 켜고 보니 성유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어젯밤 성유리가 자신을 물었기에 그는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마지막은 욕실에서 끝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울면서 고개를 흔들며 놓아달라고 애원하면서도 그의 요구대로 숱한 말들을 뱉었던 게 선명하게 떠올랐다.적어도 여
박한빈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유혹을 받아왔고 눈앞에 있는 여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하수였다.그래서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은 들리는데 받는 사람이 없자 박한빈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둡게 일그러졌다.그의 뒤에 서 있던 여자는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박한빈의 차와 한눈에 봐도 돈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의 옷을 보며 여자는 결국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다가갔다.“성유리 씨랑은 무슨 관계예요? 친구? 근데 지금 그쪽 전화 받을 시간이 있겠어요? 이 시간까지 집에 안 들어왔다는 건 남자랑 데이트하러 간 것 같은데? 미리 알려주는데 그 여자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뒤에서 얼마나 방탕하게 노는데, 내가 아침에 글쎄...”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고 차갑고 매서운 눈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여자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 그녀는 뒷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그녀도 나름 많은 사람을 만나봤다고 자부하며 지독하게 싸우는 양아치들도 본 적이 있지만 눈빛 하나로 이토록 강한 위압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마치 그녀가 한 마디만 더하면 그가 정말로 죽일 것 같았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시선을 거둔 뒤 곧바로 열쇠 전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기사가 와서 집주인이나 임대인인 걸 증명할 서류를 보여줘야 문을 열 수 있지만 그가 도착하고 박한빈은 별말 없이 지니고 있던 모든 현금을 던져준 뒤 덤덤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열어.”기사는 이곳의 집 몇 채나 살 수 있는 그의 시계를 슬쩍 보고는 얼른 돈을 받고 문을 열었다.지난번에 성유리에게 잠금장치를 바꾸라고 충고했는데 그녀는 듣지 않은 것 같았다.느슨해진 열쇠 구멍은 기사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열 수 있었고 박한빈의 성의가 있으니 특별히 도어락으로 바꿔주기까지 했다.박한빈은 내내 아무 말도 없었고 그가 일을 마치자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그대로 닫아버렸다.문밖에 있던
박한빈은 휴대폰 화면을 먼저 흘깃 쳐다본 뒤 이렇게 물었다.“어디 갔었어?”성유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왜 멋대로 열쇠를 바꿔요?”“대답부터 해.”박한빈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와 끝까지 따지고 들려다 한참을 그와 눈을 마주친 뒤 마침내 말을 꺼냈다.“병원에요.”박한빈의 표정이 살짝 변하며 그의 시선이 그녀를 훑어보았다.성유리는 그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오늘 오후에 엄마가 깨어났다고 하던데 내가 갔을 때는 다시 잠들어 있어서 다시 깨어나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기다렸어요.”나지막한 성유리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얼음장 같던 박한빈의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이내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그럼 전화는 왜 안 받아?”“무음으로 해놔서 못 봤어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물었다.“이제 들어가도 돼요?”그제야 박한빈은 몸을 옆으로 돌려 성유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성유리는 허리를 굽혀 신발을 갈아 신은 뒤 들고 있던 에코백을 내려놓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래서 당신은 여기서 뭐 하는 건데요?”박한빈도 모른다.그저 시월 파크에 혼자 있기 싫고 도연제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한참을 차를 몰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나 배고파.” 박한빈이 갑자기 말했다.“네?”“뭐 좀 먹고 싶어.”그 말과 함께 박한빈은 식탁 바로 옆에 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비좁은 성유리 집에 고작 60센티미터 남짓한 식탁 앞에 앉으니 그는 다리조차 제대로 뻗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성유리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왜 아직도 먹을 것을 준비해 주지 않냐고 다그치는 눈빛이었다.성유리는 도우미가 음식을 다 준비해 주는 도연제로 돌아가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쯤 되니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그와 다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뭐 먹고 싶어요? 배달시킬게요.”“배달 얼마나 걸리는데? 난 지금 바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