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호 씨, 하준 씨한테 어떤 차를 세차하게 할까요?”강민아의 목소리에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심은호가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심은호가 스태프에게 말했다.“반하준이 세차할 차를 가져와요.”잠시 후 쓰레기차 한 대가 덜컹거리며 들어왔다.관중석에서 몇몇 사람들만 자리를 떴을 뿐 대부분은 여전히 앉아서 루나가 있는 방향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루나가 가기 전에 그들도 갈 생각이 없었다.더러운 쓰레기차가 들어오는 걸 본 관중들은 모두 목을 길게 빼 들고 구경하기 시작했다.그때 조정실의 스태프가 쪽지를 건네받고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루나 씨가 우승을 차지했으니 약속대로 반 대표님께서 루나 씨한테 차 세 대를 선물하는 것 외에도 직접 세차 서비스까지 제공할 예정입니다.”스태프의 목소리가 수십억짜리 스피커를 통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오늘 밤 반 대표님께서 루나 씨를 위해 현장에서 직접 쓰레기차를 세차합니다. 자, 모두 반 대표님께 힘찬 박수를 보내드립시다.”말을 마친 스태프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사실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심씨 가문은 서경시의 오랜 명문가이고 반씨 가문 또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이렇게 기도할 뿐이었다.‘문제가 생기면 당사자를 찾아야 할 텐데. 반 대표님께서 부디 심은호 씨를 찾아가셨으면 좋겠어. 나 같은 월급쟁이를 괴롭히지 말고.’스태프가 분위기를 띄우자 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쳐댔다.결국 반하준은 꼼짝없이 그대로 해야만 했다. 관중석의 대형 스크린이 꺼지지 않았고 카메라 감독과 피디 모두 반하준이 쓰레기차를 세차하는 전 과정을 생중계할 태세였다.그때 강나현은 아직도 오토바이를 밀면서 결승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민 게 약간 후회되었다. 뛰었더라면 20분이면 결승선에 도착했을 텐데.하지만 지금은 오토바이를 밀고 걸어가고 있다. 게다가 두꺼운 라이딩 복을 입고 있어 걸음걸이도 점점 더 보기 흉해졌다.“
순간 반하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젠장.”반하준은 교양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이 거친 말을 내뱉고는 도망치듯 침대에서 내려 욕실로 달려갔다.쏟아지는 물소리가 간신히 진정된 그의 숨소리를 덮었다.그는 더 이상 혈기왕성한 어린애가 아니었고 가슴이 설렐 나이도 지났다. 아들이 벌써 훌쩍 자랐는데 이불에 지도를 그리는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두 눈을 감자 물줄기가 반하준의 긴장한 얼굴을 씻어내렸다.꿈속의 장면이 기괴하고 낯설어서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여자가 고팠나? 루나를 꿈에서 봤는데 민아의 얼굴이라니.’반하준이 코웃음을 쳤다.‘어이가 없어서, 원.’...어느덧 ALI 수학 경시대회 결승전 날이 밝았다.ALI 그룹은 서경대학교에 작은 시험장을 마련하고 시험 과정을 온라인으로 생중계하기로 했다.네티즌들이 ALI 수학 경시대회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니 무엇이 공정하고 공평한 건지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하여 ALI 그룹도 생중계의 열기를 빌려 수학 경시대회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강민아가 육성민의 SUV에서 내렸다. 조금 전 정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 또 그녀를 서경대학교에 데려다주었다.웅장하고 화려한 서경대학교의 대리석 문패가 눈앞에 펼쳐진 순간 강민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학교를 떠날 때 다시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여기까지만 데려다주면 돼.”강민아는 뒤돌아 육성민에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돌아서서 심호흡했다.‘이혼하길 정말 잘했어.’그녀는 서경대학교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육성민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강민아의 씩씩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오늘 베이지색 롱코트에 블랙 롱스커트를 입었고 앵클 부츠를 신었다. 거기에 울 머플러를 어깨에 둘러 매치했고 머리에는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노트북 가방을 들고 다른 서경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걸으니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육성민은 옅은 회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팔짱을 끼고 서 있었는데 추위 따위 전혀 타지 않는 것
장기명이 잠깐 멈칫하다가 또 말했다.“정말 대단해요. 학교를 떠난 지 5년이나 되었는데 전국 최고 수준의 대회에 참가할 용기를 내다니.”강민아는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당신도 정말 대단해요. 5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승승장구해서 원장 후보 자리까지 올랐잖아요.”그러자 장기명이 겸손하게 손을 내저었다.“아니에요. 난 원장 자리에 욕심이 없어요. 후보 명단에 오른 것도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서예요.”강민아가 한마디 귀띔했다.“장기명 씨의 앞날이 왠지 이제부턴 그리 순탄치 않을 것 같네요.”그녀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훔쳐 간 범인 앞에서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언젠가 반드시 법 앞에서 장기명의 것이 아닌 걸 하나하나 지워나가게 만들 것이다.장기명은 강민아를 보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평소에도 늘 이런 표정으로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의 순수함과 무해함을 드러내려 했다.강민아에게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강민아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녀는 날카롭고 예리한 칼날 같아서 사람들이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장기명은 고개를 돌려 두꺼운 안경렌즈 너머로 강민아의 가냘픈 몸집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 검지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정말 요염해. 당장 저 치마를 벗기고 계단에 눕혀버리고 싶어. 비명이 복도 전체에 울려 퍼지게 말이야.”그와 함께 서 있던 혈기왕성한 남학생 10여 명은 장기명의 말을 듣고는 순식간에 상상에 빠졌다.그때 방연석이 코웃음을 쳤다.“강민아 예쁘긴 한데 애를 둘이나 낳았어요. 헐렁해서 손 전체가 다 들어갈 정도일걸요?”“하하하하.”다른 남학생들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서경시 최고의 명문대학교에 다니는 그들은 각자의 고향에서 인정받은 인물들이자 거의 천재로 손꼽혔고 머리도 평범한 사람보다 똑똑해서 더 원대한 미래를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부신 그룹 대표 사무실.엄규민은 반하준에게 업무 보고를 마친 후 아이패드를 옆구리에 끼고 여러 번 망설인 끝에 결국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은 사모... 오늘이 ALI 그룹 수학 경시대회 결승전 날입니다.”사무실 의자에 앉아 막 서류에 사인을 마친 반하준은 수억 원짜리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빙빙 돌렸다.윤곽이 뚜렷한 그의 얼굴은 흔들림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내 전 와이프한테 관심이 많은가 봐?”그가 입을 열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압박감에 엄규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매회 ALI 수학 경시대회가 끝나면 부신 그룹에서는 결승에서 20위 안에 든 참가자들한테 러브콜을 보냅니다. 만약 강민아 씨가 20위 안에 든다면...”엄규민은 강민아와 반하준이 함께 일하는 모습이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만약 강민아가 정말 부신 그룹에 들어온다면 엄규민은 미리 부신 그룹의 모든 직원들에게 강민아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주의를 줘야 했다.반하준이 덤덤하게 말했다.“20위 안에 든다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말이겠지. 그럼 오퍼를 보내. 부신 그룹에 순조롭게 들어올 수 있을지는... 내 기분에 달려있어.”비웃는 듯한 기색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그와 이혼 소동을 벌일 때 강민아는 ALI 수학 경시대회에 신청서를 냈다. 이는 그녀가 반하준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걸 의미했다.반하준에게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어 했고 남편과 아들이 계속 사랑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 생각에 반하준의 두 눈에 잔혹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강민아의 사모님 신분을 박탈한 순간 강민아가 아무리 존재감을 드러내려 애써도 뒤돌아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연진숙의 전화인 걸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연진숙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하준아, 너한테 보낸 재벌가 딸들 자료 다 봤니? 마음에 드는 사람 있어? 주말에 선자리 마련해줄게. 한번 만
아들이 지금까지 한 여자의 편을 이렇게 들어준 적이 없었다. 연진숙이 노발대발했다.“어떻게 어머니한테 그딴 식으로 말할 수 있어? 루나 그 여우 같은 년이 아주 널 제대로 홀렸구나. 어머니도 못 알아보게 만든 거 보면.”연진숙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반하준은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휴대폰을 테이블에 휙 던졌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그녀가 루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루나라는 이름만 들으면 마음속에 의심스러운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전에 정수산에서 반하준은 루나에게 사흘 안에 반씨 가문으로 와서 차를 가져가라고 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루나는 오지 않았다. 심은호 외에 루나와 연락이 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반하준은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내 차고에 있는 부가티 라 부아튀르 누아르랑 애스턴 마틴 발키리를 팔아버려.”엄규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왜 갑자기 차를 팔려고 하시는 겁니까?”게다가 두 대 모두 한정판 최고급 스포츠카였다. 엄규민은 차고에서 그 두 대의 스포츠카를 보기만 해도 압도당해 넋이 나갔었다.반하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이렇게 하는 이유를 엄규민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그리고 내가 그 두 대를 팔려고 한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이게 다 루나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루나가 계속 나타나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 두 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서경대학교.점심 12시, 결승전 종료까지 다섯 시간 반이 남았다.강민아는 컴퓨터로 답안 제출 버튼을 클릭한 후 감독관에게 손을 들고 말했다.“제출했어요.”그 순간 시험장의 모든 참가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감독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 정말 제출했어요?”강민아가 대답했다.“문제 다 풀었어요.”전에 그녀는 예선전이 끝나는 순간에 답안을 제출했었다. 그땐 반하준 때문에 시간을 지체했었고 또 5년 만에 다시 참가한 수학 경시대회라 반응 속도가 다소 느려졌기 때문이었다.결
그 기자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기자들의 반응이 더 컸다.“추적 818 대단한데요? 강민아 씨 아들까지 인터뷰하다니.”“강민아 씨한테 아들이 있었어요? 딸만 있는 줄 알았는데.”그러자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던 기자가 악의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강민아 씨한테 아들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전남편의 신분까지 알아냈어요. 강민아 씨의 전남편이 부신 그룹 대표 반하준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그 순간 다른 기자들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대박. 정말이에요?”“반하준요? 서경 3대 태자 중 한 명인 부신 그룹 대표 반하준 말인가요?”상상도 못 한 사실에 강민아를 바라보는 눈빛마저 달라졌다.“강민아 씨, 정말 반하준 씨와 이혼하신 건가요? 어떻게 재벌가 사모님 자리를 버릴 수 있죠?”“이혼한 이유가 대체 뭡니까?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대표님께 내쫓긴 거죠?”“재벌들은 쉽게 이혼하지 않는데. 도대체 뭘 하셨기에 재벌가에서 쫓겨난 거예요?”지금 이 순간 강민아는 기자들의 먹잇감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강민아에게서 재벌가의 뒷이야기를 캐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그리고 놀라운 건 모두 강민아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그녀가 강씨 가문의 딸이긴 했지만 18살이 되어서야 강씨 가문에 돌아왔다는 걸 기자들은 알고 있었다.하여 분명히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기에 반씨 가문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생각했다.추적 818 프로그램 기자가 녹음 펜을 꺼내더니 이젠 진실을 밝힐 때가 됐다는 생각에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지금까지 강민아 씨한테 속고 계신 것 같으니까 강민아 씨의 친아들이 어머니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들어보시죠.”기자가 녹음 펜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전 반현민이고 올해 다섯 살입니다. 반우정은 제 여동생인데 지금은 강윤정으로 이름을 바꿨어요.”아이의 앳된 목소리가 들린 순간 몇몇 기자들은 녹음 펜에 마이크를 들이댔다.“강민아는 더 이상 제 엄마가 아니에요. 아빠랑 이혼
녹음 펜에서 반현민에게 묻는 기자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현민 어린이는 어머니가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하는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나요?”반현민의 목소리가 울렸다.“유명해지고 싶어서요. 돈도 갖고 싶고 아빠한테서 저를 빼앗고 싶어 해요. 저를 빼앗아가면 앞으로 아빠를 협박해서 더 많을 돈을 받아낼 수 있거든요.”아이의 순진하고 앳된 목소리는 마치 수천 개의 바늘처럼 강민아의 몸에 박혀 말 못 할 고통이 밀려왔다.그 순간 강민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한때 그녀의 아들이었고 아킬레스건이었으며 그녀와 심장 박동을 공유했던 아이였다.뭐라 해도 결국에는 그녀의 친아들이라 반현민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강민아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고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강민아의 얼굴이 핏기없이 창백해졌고 눈동자에도 빛이라곤 없이 어두웠다.기자가 또 물었다.“현민 어린이, 네티즌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여러분, 이 여자한테 속지 마세요.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나쁜 여자예요. 전 친아들이라 어떤 엄마인지 제일 잘 알아요.”반현민의 목소리가 끊겼고 기자는 녹음 펜을 든 채 강민아를 보며 웃었다.수많은 카메라가 강민아의 얼굴을 찍고 있었다. 강민아의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기자들은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마이크를 강민아의 얼굴에 거의 들이밀다시피 했다.“강민아 씨, 아들이 한 말이 다 사실인가요?”“강민아 씨, 일부러 아들을 버린 건가요?”강민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을 들자 관절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뚜두둑 났다.그녀는 손바닥으로 마이크를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마이크가 얼굴을 찌를 것 같았다.추적 818 기자는 흥분한 나머지 콧구멍까지 벌름거리면서 말했다.“다섯 살짜리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강민아는 입술을 적시고 싸늘하게 웃었다.“하지만 아이는 헛소리를 할 수 있죠.”얼굴이 납작한 누런 이 기자가 침을 튀기면서 그녀를 비난했다.“당신 아들이 당신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는 자격 없는 엄마이기 때문입니
강민아는 경호원 십여 명의 호위를 받고서야 겨우 강의동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한여름의 모기처럼 끝까지 쫓아왔다.“당신들은 누구십니까?”“누가 보냈습니까?”기자들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면서 마이크를 무표정한 경호원들의 얼굴에 들이댔다.그 바람에 많은 학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민아 쪽을 쳐다보았다.맨 뒤에 걷던 한 경호원이 귀찮게 달라붙는 기자들에게 증을 보여줬다.기자들은 증에 적힌 대통령실이라는 네 글자를 본 순간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그 경호원이 기자들에게 경고했다.“무엇을 보도할 수 있고 보도할 수 없는지 잘 알고 있겠죠? 보도해서는 안 될 것을 보도하면 결과는 알아서 감당해야 할 겁니다.”웅성거리던 기자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몇몇 눈치 빠른 카메라맨들은 어깨에 멘 카메라를 내려놓고 카메라 렌즈를 덮개로 덮었다.그들이 대통령실 소속 경호원이라는 걸 알게 된 기자들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검은색 현대 제네시스 한 대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서경대학교에서는 학교 지도부의 차조차도 캠퍼스 내에서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장엄한 모습의 제네시스는 캠퍼스 안으로 들어왔다.차 문이 열리자 넓은 뒷좌석에 훤칠한 키의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차량 내부가 어두컴컴하여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곽이 뛰어난 건 알아볼 수 있었다.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을 길게 빼 들고 눈을 크게 떴다.“혹시 반하준 대표님이에요? 좀 닮았는데.”“강민아 씨랑 이혼했다고 하지 않았어요?”“반 대표님이 대통령실의 경호원을 동원할 수 있어요? 불가능할 텐데.”기자들은 훈련이 잘된 경호원들에게 2, 3m 떨어진 곳에서 가로막혔다.강민아는 차 문 쪽으로 걸어가 차 안에 있는 남자를 보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작은아버지.”무심코 불렀다가 문득 그 호칭이 적절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차 안의 분위기도 숨 막힐 듯 무거워졌다.이젠 반하준과 이혼했으니 더 이상 반용화를 작은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
심은호의 말을 들은 반하준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과 갈비뼈가 아팠다.지금 강민아에게 온몸을 맡기듯 기대어 있는 저 남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다.그런데 지금 오염된 브로치를 손에 들고 강민아에게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해도 해도 너무했다.“강민아, 저놈한테 속지 마!”참을 수 없어 소리를 내지른 반하준은 입안에 온통 피 맛만 감돌았다.그는 복부를 감싼 채 개미 수만 마리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고 있었다.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바라보며 강민아의 동공은 이미 싸늘해졌다.“심은호 씨 몸에 묻은 레드 와인, 당신이 쏟았지?”묻는 게 아닌 반하준의 짓을 단정하는 어투였다.반하준은 입술을 달싹이며 목구멍에서 진동하는 피 맛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실수로 그런 거야.”심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약한 꽃으로 둔갑했다.“그래요. 반하준은 실수로 그런 거니까 나 때문에 화내지 마요.”반하준은 심은호의 그런 모습에 이가 갈렸다.‘저 개자식은 연기를 왜 저렇게 잘해?’남들 몰래 연기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민아야, 저 자식이 일부러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아까 날 때리는 거 못 봤지? 내 갈비뼈와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어! 콜록콜록.”반하준의 가슴속에는 차마 내뱉지 못한 뜨거운 열기가 여러 가닥으로 뭉쳐서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기침할 때마다 온몸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뼈가 다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있는 공작새 모양의 브로치를 바라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살짝 붉게 물든 코끝으로 훌쩍이며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그러더니 자신의 소매로 브로치 표면을 살살 닦으며 브로치에 묻은 와인 얼룩을 닦아내려 애썼다.반하준은 감시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봤다.젠장!그는 심은호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강나현에게 감시카메라를 끄라고 시켰다.카메라가 켜져 있었다면 강민아가 심은호의 본색
“삼촌, 다 됐어요?”육성민은 체육관 밖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 막대기로 타서 재가 돼버린 낙엽을 헤집고 있었다.그는 단열 장갑을 끼고 호일로 감싼 고구마를 불에서 꺼냈다.육성민이 호일을 뜯어내자 뿜어져 나오는 꿀고구마 향에 정이의 입안에는 금세 군침이 돌았다.“빨리 줘요!”정이가 손을 뻗어 가져가려는데 육성민이 말했다.“뜨거워.”그는 쌓아놓은 벽돌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숟가락을 생수로 헹군 뒤 정이에게 건넸다.정이는 숟가락으로 고구마를 파서 호호 불었다.서둘러 한입 베어 물던 아이의 두 눈이 휘어지며 통통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정이가 유난히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육성민의 눈가에도 흐뭇함이 가득했다....강승 테크. 인수식이 끝나고 뒤풀이가 진행될 때, 심은호가 화장실에서 막 나오려던 순간 마주 오던 반하준과 부딪혔다.반하준은 한발 물러서고, 심은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장이 와인으로 얼룩진 게 보였다.장밋빛 붉은 액체가 강민아가 조금 전 선물한 공작 브로치 위로 쏟아졌다.반하준은 자신의 걸작에 감탄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눈이 없어? 자꾸 안하무인으로 굴면 다음에 더러워지는 건 옷뿐만이 아닐 거야.”반하준은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을 휙 돌려 잔을 아래로 뒤집었다. 남은 레드 와인이 전부 심은호의 신발 끝으로 쏟아졌다.그는 비웃으며 말했다.“복도 카메라는 고장 났지만 민아한테 찾아가 울면서 일러바쳐도 돼. 너 연약한 척 잘하잖아. 어디 계속해 봐. 미리 말하는데 민아는 단순히 호기심에 널 갖고 노는 거야. 하루 종일 자기 뒤에 숨어서 징징거리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반하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심은호는 주먹을 휘둘렀다!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반하준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자기 손을 쓸 줄 몰랐던 반하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손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그대로 심은호의 주먹에 맞고 말았다.그 탓에 반하준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조각
심은호의 공개 고백에 사람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반하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번개와 천둥이 몰아칠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심은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옆모습은 부드러운 얼굴선과 높은 콧대, 깊은 눈매를 자랑하며 마치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천장에서 비추는 조명이 그의 눈가를 비추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이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바라보았다.남자가 강민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순간, 호수처럼 맑은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강민아를 향해 쌓아온 감정이 가득했다.강민아의 숨결 하나하나가 뜨거웠고, 남자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파도가 밀려와 그녀를 감쌌다.마치 용암이 발밑에 흐르듯 빠르게 위로 올라오는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꽉 쥐었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긴장하지 마요.”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강민아를 달랬다.“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미안해요.” 심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말했다.“계속 말해요. 듣기 좋으니까.”강민아의 칭찬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심은호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두 눈이 반짝이며 마음을 다잡은 그가 마이크를 마주한 채 아래에 있는 반하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심은호에게만 있었고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민아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 겁니다. 결혼하든, 누군가를 떠나든 무엇을 하든지 늘 뒤에서 지키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나타날 겁니다. 전 앞으로도 여전히 민아 씨의 모든 결정을 지지합니다. 태산 그룹에서 정식으로 강승 테크를 인수했으니 두 회사는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할 겁니다.”반하준은 입가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며 손등에는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갑자기 뚜껑이 열린 탄산음료처럼 동시에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마치 그의
“설마 심은호가 부사장이 반씨 가문 사모님일 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겠지?”“왜 그렇게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나 했더니, 남의 아내를 탐낸 거였어?”가십거리에 사람들은 흥분하며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설마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어쩐지 둘이 그렇게 빨리 만나더라니.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시그널 주고받은 거 아니야?”“설마 반 대표가 바람피우는 걸 알고 강민아와 이혼한 건가? 세상에!”다들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파격적인 소문에 재벌가 인사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반하준의 어두운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심은호가 그의 평판을 망칠 작정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심은호를 끌고 갈 것이다!‘심은호, 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감히 내 여자를 노렸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봐.’지유빈은 반하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강민아 씨 말로는 대표님께서 적극 이혼을 원했다고 하던데요. 왜 이혼하고 나서는 강민아 씨가 누굴 만나는지 이렇게 신경 쓰는 거죠?”강민아는 반하준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고, 반하준은 지유빈을 우습게 여겼다.“기자로서 아직도 모르겠어? 심은호가 내 아내를 오랫동안 탐냈다고! 5년 전부터 내 아내를 지켜봤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왜 계속 아내라고 말하는 거죠? 그 결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대표님 혼자인 것 같은데요.”거대한 스피커가 반하준의 몸속에서 울려 퍼지듯 그의 심장을 뒤흔들고 오장육부에 고통을 선사했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잘 안다. 강민아가 이혼한 뒤 지유빈은 기자로서 업무 때문에 줄곧 강민아를 지켜봤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 사람의 가십거리에 집중하는 동안 지유빈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반하준의 눈동자를 보며 남자가 단순히 강민아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무시하고 싶었지만 지유빈의 말에 궁지로 몰린 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가 구세주처럼
심은호가 헤어지겠다는 말에 반하준은 악랄한 눈빛을 드러냈다.비록 연기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해놓고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심은호, 이미 말했으면 지켜야지.”반하준은 심은호에게 강민아와 헤어지라고 강요할 생각이었다.“난 심은호 씨랑 헤어질 생각 없어.”강민아가 말하며 심은호의 큰 손을 감싸더니 반하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당신이 우리 사이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심은호 씨와 안 헤어져.”반하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심장이 저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듯했다.“민아 씨...”심은호가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자 강민아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두 집안 인수식에서 소란을 피운 건 이 사람이에요. 나가도 그쪽이 아니라 반하준이 나가야 한다고요!”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렸고, 반하준은 누군가 몽둥이로 세게 내리치듯 심장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심은호는 강민아의 말에 위로받았는지 두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민아 씨는 나한테 참 잘해주네요.”강민아의 단호한 말 한마디면 그는 만족할 것 같았다.강민아가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내 남자 친구니까요.”“강민아!”보다 못한 반하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여기 있는데!’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강민아와 심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이 끈적했다.“민아 씨, 아직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요.”심은호는 큰 결심을 한 듯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예쁜 두 눈에는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반하준이 우리 둘을 헤어지게 하려고 병원 시스템을 해킹해 내 진료기록을 훔쳐 갔어요. 내가 병원에 다니는 걸 알고 병이라도 있을까 봐 내 진료기록으로 나한테 헤어지라고 협박했어요!”강민아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가 먼저 심은호에게 반하준이 한 어리석은 짓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지금 심은호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십거리를 직감한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심은호의
강나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나 저 사람 알아! 강승 직원이야!”그녀는 연설문이 바뀐 것이 반하준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그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연설문을 바꾼 사람이 복도에서 반하준과 단둘이 만나는 게 보였다.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강나현은 표정이 확 바뀌며 말문이 막힌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반하준을 돌아보았다.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게 정말 반하준과 관련이 있을 줄이야.하지만 반하준이 했다기엔 너무 저급한 수작이 아닌가.강승의 직원을 시켜서 연설문을 바꾼 것도 모자라 감히 회사 안에서 직원과 따로 만나다니.그런 짓을 하면서도 반하준은 카메라를 피할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강나현은 놀란 표정으로 반하준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다 들키고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마치 대형 스크린에서 강승 직원과 공모한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강민아는 시치미를 떼는 반하준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그럼 저 직원에게 반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보죠.”카메라에 찍힌 직원은 당황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에 띄게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부사장님, 반 대표님이 저한테 시켰어요! 저한테 2천만원 줬는데 이 돈 다 드릴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경악하며 말했다.“정말 반하준이 한 짓이야? 심은호를 노리는 건가?”“심은호와 강민아가 만나니까 전남편이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 근데 너무 비열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폭로 당한 반하준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너한테 들킬 줄 알았어. 그냥 네가 어떻게 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걸 알고도 아무 말 안 하길래 난 네가...”반하준은 말을 꺼내며 입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그는 수치심도 모르는 듯 이렇게 물었다.“그래, 내가 시켰어. 그게 뭐? 강민아, 심은호 때문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