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정이가 또 날 때려요!”반현민이 흐느끼자 반우정은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태생적으로 힘이 세서 어렸을 때 힘을 잘 조절하지 못해 실수로 반현민을 몇 번 다치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연진숙은 반우정을 경계했다.반현민도 매번 할머니에게 찾아가 일러바쳤고 연진숙은 언제나 반현민의 편이었다.연진숙이 심술궂은 얼굴로 다가와 반우정의 가슴에 달린 작은 꽃을 떼어내려고 손을 뻗었다.“반우정, 학교에서 사람을 때렸으니 넌 꽃을 받을 자격이 없어! 선생님께 1년 동안 우수 학생으로 선발될 자격을 취소하라고 할 거야!”반현민은 할머니의 다리에 기대 우는 척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고개를 돌려 반우정을 몰래 흘겨보았다.제자리에 서 있던 반우정의 눈앞이 흐릿하게 변해갔다.울고 싶지 않은데 차오르는 눈물이 말을 듣지 않았다.강민아와 함께 만든 한옥은 심하게 변형되어 도저히 복원할 수 없는 상태였다.반우정은 코끝이 시큰거리며 폐허 속에 홀로 버려진 듯 어찌할 바를 몰랐다.문득 날씬한 실루엣이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엄마였다.“회장님, 반현민이 먼저 한옥을 망가뜨려서 우정이가 밀친 거잖아요.”연진숙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강나현을 가리켰다.“네 딸이 오빠한테 손대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까지 넘어뜨렸어!”연진숙은 강나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녀가 다친 걸 이용해 강민아에게 한바탕 쓴소리를 해댔다.강나현도 딴생각이 있었다. 반하준의 관심을 받고 싶지만 나약한 환자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았다.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발차기 한 번에 자신을 넘어뜨렸다는 걸 친구들이 알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나.강민아가 정면으로 맞받아쳤다.“카메라 영상에 강나현이 일부러 우정이 한옥을 망가뜨리려 했던 게 찍혔어요. 우정이가 1등 하면 강나현이 사과하기로 내기한 것도 사람들이 다 들었고요.”강민아가 언성을 높였다.“강나현, 사과 안 해?”강나현은 종아리를 문지르며 말했다.“이젠 반우정이 나한
강당에 있던 다른 학부모들도 모두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에서 들끓고 있는 여론을 확인했다.“우리 학교가 검색어에 올랐어요!”“연 회장님의 정체가 순식간에 드러났네요.”“다들 그래도 보는 눈이 있네요. 반 대표가 이혼한 건 몰라도 강나현이 내연녀인 건 다 알아요.”“나도 강나현 싫어요. 허구한 날 내 남편이랑 시시덕거려요.”“엊그제 밤에 술에 취한 남편을 데리러 갔는데 강나현이 배 대표 무릎 위에 앉아 자기 속옷을 벗어서 서 대표 얼굴에 거는 거예요. 내 남편은 그냥 장난하는 거래요.”학부모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연진숙은 카메라 감독을 질책했다.“당장 생방송 꺼. 반씨 가문 명예를 훼손하면 당신들도 고소할 거야!”감독은 진땀을 흘렸다.“연 회장님, 방송은 이미 껐습니다.”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일이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감독은 서둘러 생방송 카메라를 껐지만 연진숙이 반우정을 퇴학시키겠다는 말은 고스란히 송출되었다.휴대폰이 터질 지경으로 연락을 받은 유영호가 서둘러 달려와 상황을 정리했다.“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어요. 다들 얼른 흩어지세요.”유영호는 학부모들을 강당 밖으로 인도하라는 듯 교사들에게 손짓했다.연진숙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반우정은 친손녀라 그냥 넘어갈 순 있어도 강민아는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정아, 난 네가 아직 반씨 가문을 놓지 못했다는 거 알아.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엄마랑 같이 살래, 아빠랑 살래?”반우정은 또렷한 눈망울로 말했다.“전 엄마랑 살래요.”연진숙은 강민아를 사납게 노려보며 아이에게 가스라이팅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날렸다.“정아, 엄마가 혼자 반씨 가문을 떠나는 게 불쌍해서 같이 가려는 거지?”반하준과 강민아가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진숙은 분노해 집안 물건을 마구 부숴버렸다.그녀는 오늘 특별히 강민아에게 한 수 가르치려고 학교에 찾아온 거다.“아니요.” 반우정은 망설임 없이 부인했다.“엄마 앞에서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연진숙은 지나치게 순진한 손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 따라가면 학비도 못 낼 거야.”연진숙은 반우정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아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았다.“고작 대학만 졸업한 네가 정이를 어떻게 키울지 두고 보겠어. 정이 너는 네 인생이 이미 바닥을 쳤고 민이와 뛰어넘을 수도 없는 간극이 생겼다는 걸 몰라. 아무리 노력해도 정이 넌 민이 수준에 도달할 수 없어!”강민아는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둘 다 내 배 속에서 태어난 아이예요. 민이가 가진 건 정이도 가져야죠. 반씨 가문에서 공평하게 챙겨줄 수 없다면 내가 정이를 데리고 가서 원하는 대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떠나려던 찰나, 서류 가방을 들고 강당으로 들어오는 여러 명의 사람을 보았다.일행의 선두에 선 중년 남자는 단정한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을 마주한 강민아는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청... 청장님?”유영호가 놀라서 탄성을 지르자 사람들은 강당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교육청 청장 백강훈이야.”“대회도 끝났는데 백강훈이 왜 왔지?”유영호와 다른 학교 임원들이 서둘러 달려가 환영 인사를 건넸다.“청장님, 우리 학교에 와주셔서 영광입니다.”유영호는 [환경 지킴이] 강연대회를 생방송으로 진행한 게 대성공을 거둔 것 같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며칠째 영월로 출장을 갔던 교육청 청장까지 얼굴을 비추러 왔으니 말이다.유영호가 백강훈을 상석으로 안내하려던 순간 백강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화를 했는데 안 받아서 내가 직접 왔어.”유영호의 등에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렀다.“죄송합니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상대는 변명을 듣고 싶지 않은 듯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인터넷에 그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유영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아이고, 별일 아닙니다. 학부모들도
백강훈이 유영호에게 말했다.“이 일 처리하려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기로 왔어. 저 여자가 물러나지 않으면 승덕은 신입생이 아니라 지금 다니는 학생들도 남아있지 않을 거야.”유영호가 다급하게 연진숙을 돌아보자 그녀가 눈치를 주었다.“교장 선생님, 저희 부신 그룹이 승덕의 가장 큰 후원자인데...”유영호는 부신 그룹의 재정적 지원을 잃고 싶지 않았고 교육청 사람들에게 밉보이고 싶지도 않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어머니, 그만하세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주위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그렇게 창피를 당하고도 부족하세요?”그는 백강훈에게 말했다.“어머니 이사진 자리는 제가 이어받겠습니다.”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남자의 강렬한 기세가 보였다.백강훈이 반하준과 강민아를 번갈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반 대표님은 모친보다 훌륭하게 해내길 바랍니다.”강민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우정에게 말했다.“우린 가자.”“강민아!”반하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엇, 하준아!”연진숙은 강당을 빠져나가는 강민아의 뒤를 쫓아가는 아들을 보며 서둘러 소리를 질렀다.유영호가 반하준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백강훈을 보며 말했다.“반 대표님은 서경의 훌륭한 인물이죠. 저런 분이 이사진으로 계신다면 승덕은 분명히 한단계 더 비상할 겁니다.”“강민아도 한때 훌륭한 사람이었어.”백강훈이 감탄하듯 말했지만 유영호는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다. 하지만 청장이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할까 봐 감히 묻지 못했다....반하준이 어린이집 주차장으로 갔을 때 강민아가 반우정을 차에 태우고 뒷좌석 문을 닫는 게 보였다.그녀가 앞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타려는데 반하준이 걸어오고 있었다.정장 차림에 긴 다리와 잘록한 허리,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을 지닌 남자는 늘 굳은 표정을 짓고 있어 강민아는 그가 꼭 빚이라도 받으러 다가오는 것 같았다.강민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타 문을 닫으려는 순간 강한 힘을 느꼈다.고개를
강민아가 선물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사파이어 팔찌가 놓여 있었다.그녀는 어두워진 눈동자로 팔찌를 집어 들며 물었다.“사이즈 얼마야?”“14.2.”무심코 뱉는 남자의 말에 웃음이 터진 강민아는 목구멍에서 비릿한 단맛이 느껴졌다.“그건 나현이 사이즈야.”그녀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자 빛에 반짝이는 사파이어 팔찌가 손에서 툭 떨어졌다.반하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까만 동공에 감정의 파도가 요동쳤다.“나현이를 신경 쓰고 질투해서 나랑 싸우겠다는 거지? 나현이랑 나는 2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다면 네가 낄 틈이 있었겠어?”강민아는 반하준의 말에 아득한 기억을 떠올리듯 백미러에 그녀의 버석한 미소가 비쳤다.“기억나? 3년 전 어느 날 밤에 당신이 강나현 찾으러 가면서 나보고 혼자 병원에 가라고 했을 때. 그날 나 열이 39도까지 올랐어. 주치의는 휴가를 냈고 도우미들도 다 퇴근해서 당신이 차로 데려다주기만을 기다렸는데...”강민아의 설명에 반하준은 기억을 떠올렸다.“택시 타고 병원에 가지 않았어?”강민아는 왜 이런 사소한 일까지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병원에 가서 여러 번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나현이가 술에 취해 해변으로 뛰어갔는데 어두워서 찾느라 정신이 없었어.”이렇게 말하며 반하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강민아는 왜 자꾸 강나현에게 신경을 쓰는 건지.여자가 질투를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데 말이다.앞을 응시하던 강민아의 눈앞이 흐려졌다.“반하준, 난 그때 병원에서 당신이 와서 임신중절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길 기다리고 있었어.”예상치 못한 말에 남자는 당황했다.“유산을 했다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어?”강민아는 거울 속 자신의 표정이 보기 싫어 시선을 내린 채 긴 속눈썹을 드리웠다.7년 동안 가슴을 가득 채웠던 사랑은 다 닳아 없어졌고 남은 건 증오뿐이었다.“그때 내가 왜 열이 났는지 기억나?”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장난기 많은 반
“꺄악!”강나현은 반하준의 뒤에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이 뒤를 돌아보니 강나현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머리카락이 흩어진 채 고개를 든 그녀가 빤히 반하준을 바라보았다.“하준 오빠...”남자의 머릿속에는 18살 나이에 생명을 다한 반유하가 불길 속에서 울부짖으며 자신을 부르는 장면이 떠올라 눈앞의 장면과 겹쳤다.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반하준은 강나현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줬다.남자의 차에 탄 강나현은 치솟는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이 팔찌는 어떻게 할 거야?”강나현이 손바닥을 펼치며 물었다.“버려.” 남자의 목소리는 극도로 싸늘했다.“그래!” 강나현은 흔쾌히 답하며 창문을 향해 던지는 동작을 취하고는 손목을 돌려 조용히 팔찌를 주머니에 넣었다....반씨 저택 서재.잘생긴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강민아의 진료 기록을 읽다가 ‘임신중절’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멈칫했다.반하준은 물에 빠진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컴퓨터 화면에는 태아의 다급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문득 그 소리가 멈췄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반하준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듯 통증이 밀려와 허리를 굽히니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기를 집어 드는 손마저 떨려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천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차가운 얼음처럼 그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이혼 서류에 약속했던 돈은 언제 보낼 건지 물어보셨어요.”“지금 보내.”반하준의 목소리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려 전화기 너머로 망설이던 비서가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이혼 서류에는 사모님께 일시불로 120억을 줘야 한다고...”“줘.” 반하준의 말투는 단호했다.별 볼 일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강민아는 단번에 120억을 주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120억은 그녀에게 삼키지 못할 떡이 될 거고, 반하준은 멀지 않아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찾아와 애원할 거라 생각했다....강민아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은행 계좌에 120억이 입
심은호의 기분이 좋다는 걸 눈치챈 진 변호사가 말했다.“큰손 고객인가요?”“응.”진 변호사는 호기심에 캐물었다.“얼마나 대단한 고객인데 그렇게 기뻐하세요?”“이번 사건만 이기면 난 결혼할 거야.”변호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심은호는 서경에서 유명한 싱글남으로 여성에게 ‘알레르기’가 있는 연애 불능자였다.직업 때문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감히 그에게 수작 부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단 그를 건드리는 사람은 누구든 법원이나 경찰서로 직행했으니까.회의실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고객과 사건이면 심은호가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어볼 결심까지 하게 만드는 걸까....얼마 지나지 않아 강민아는 태화 증권의 매니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120억이 있는데 주식에 투자할 생각이에요.”매니저는 경악했다.“120억이요? 그러면 우리 회사로 오셔서 바로 계좌를 개설하시죠.”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태화 증권 건물로 들어가자 반우정은 호기심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매니저 홍민기는 두 사람을 프라이빗 VIP룸으로 데려가 계좌 개설 절차를 도왔다.반우정은 강민아와 홍민기 사이에서 수수료 조율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 번도 본적 없는 강민아의 모습이었다.‘엄마가 독수리처럼 예리하고 매서울 때도 있구나.’홍민기는 결국 강민아에게 커리어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수료를 제안했다.“강민아 씨는 돈을 어떻게 나눌 생각이세요?”강민아는 홍민기에게 포스트잇 한 장을 건넸다.“내일 이 주식 좀 사주세요.”포스트잇을 건네받은 강민기는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훑어보았다. 매일 주식을 다루는 게 일이라 코드만 보고도 주식의 최근 그래프가 눈앞에 그려졌다.그러다 문득 홍민기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120억을 전부 여기에 투자하려고요?”“네.”“다른 건 생각해 보지 않으시겠어요?”“생각 없어요.”홍민기는 한숨을 내쉬었다.“미리 말씀드리지만 지금 시장이 좋지 않아서 일주일 뒤면 120억 중에 20억도 안 남을 거예요.”강민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알았어.”전화를 끊으려던 반하준이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강민아와는 어떻게 연락이 닿았어?”홍민기는 정중하게 답했다.“심 변호사님이 소개해 주셨어요.”고개를 든 반하준의 흑백이 분명한 두 눈에 희미한 안개가 드리워졌다.“심은호?”홍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반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음침하고 차가운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강민아가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도우미는 이미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이혼했으니 부모님께 제대로 말씀드려야 한다.강민아는 먼저 반우정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의 옷을 갈아입힌 뒤 손까지 깨끗이 씻고 나왔을 때쯤 부모님과 마주쳤다.“우리 딸 왔어?”어머니 도민영이 아버지 강성진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다.앳된 얼굴이 30대도 안 돼 보이지만 사실 도민영의 나이는 벌써 마흔여섯이었다.강민아는 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그녀가 외출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도민영은 늘 흰색의 긴 원피스를 입고 아기처럼 강성진의 품에 안겨 있었다.강성진은 쉰이 넘은 나이에도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데다 잘생긴 얼굴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더욱 성숙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아빠, 엄마.”강민아가 어색하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어딜 뻔뻔하게 들어와!”강성진이 굳은 얼굴로 꾸짖자 도민영은 어깨를 움츠리고 고양이처럼 남자의 가슴에 비비적거렸다.“어머, 성진 씨. 나 놀랐잖아.”강성진은 고개를 돌려 도민영에게 시선을 집중했다.도민영을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는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움직여 도민영을... 아기 의자에 내려놓았다.강민아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부엌으로 들어가 반우정과 함께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았다.도민영 앞에는 아기 그릇이 놓여 있었고 그녀는 숟가락을 깨물며 반우정을 바라봤다.“정이는 왜 아기 그릇을 안 써?”반우정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전 키 커야 해서 이젠 아기 그릇으로 부족해요.”도민영이 눈을 깜빡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
심은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하준 저 자식이 강민아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있다.조금 전까지 약에 취했어도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심은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더니, 강민아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경멸하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 대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강나현이 왜 기절했지? 옷은 네가 벗긴 거야?”반하준과 강나현 둘이 짠 계략을 반하준의 입으로 직접 말하길 원했다.그들이 먼저 반하준이 한 짓을 밝히면 오히려 반하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심은호와 강민아는 반하준이 본인이 만든 난장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다.“아니야!”반하준은 곧바로 부인했다.“강나현이 약에 취해 직접 옷을 벗고 여러 번 나를 덮치려고 했어. 난 그저 때려서 기절시킨 것뿐이야!”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아의 눈치를 살폈다.자기 몸이 더럽혀졌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반하준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강나현이 나를 묶어두려고 수갑까지 채웠어!”금속 수갑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반하준이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살갗이 베인 것이다.일부는 살을 파고들어 피와 살이 드러나 끔찍하기까지 했다.손목의 잘린 살점들이 수갑에 뭉쳐있어 하얀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어이쿠!”다친 반하준의 손을 본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충격과 슬픔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반하준을 탓할 수가 없었다.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반하준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강나현을 기절시켰는데 강나현의 능력으로 어떻게 반하준의 손에 수갑을 채우겠나.반하준이 직접 손에 수갑을 찬 게 분명했다.심은호도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단지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려고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었다.서경에서 강나현을 제일 싸고돌았던 그조차 그녀를 버렸다.아마 오늘 밤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강나현이 반하
강민아는 휴게실로 향했다. 반하준의 계획을 파악하자마자 심은호에게 알리고, 그걸 이용해 반하준과 강나현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그녀는 내내 어떻게 두 사람의 계획을 폭로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직접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면 반하준은 오히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며 적반하장으로 굴게 분명하다.이제 심은호가 칼을 건넸으니 그녀는 반하준과 강나현을 폭로하기 위해 휘두르면 그만이다.강민아가 사람을 시켜 열쇠를 가져와 방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콜록!”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뒤로 여러 개의 머리와 크게 뜬 눈이 호기심 가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조심해요!”심은호가 선두로 앞장서자 강민아는 그 뒤를 따랐다.그때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기절한 듯했다.심은호는 역겨운 듯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는 옷을 얇게 입은 강나현의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순간, 어두운 구석에서 반하준이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강민아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구석에 기대어 앉은 반하준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었고 옷깃이 활짝 열린 채 가슴에는 새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젖은 이마에 붙어 있었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그가 홱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강민아를 주시했다. 이젠 이 방을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지금 여기서 나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강민아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그들은 반하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반... 반 대표 맞아?”“하준아, 너 어떻게 강나현이랑... 세상에! 남들이
강민아는 태산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반하준과 강나현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일 거다.반하준은 강나현과 짜고 파티에서 심은호의 스캔들을 폭로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멍청한 상대와 손을 잡았고 강승 테크 내부를 장악한 강민아의 능력을 간과했다. 반하준은 강승 테크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직원과 접선할 때 그들이 강민아에게 반하준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걸 알릴 줄은 몰랐을 거다.강민아는 그들이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반하준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제외하고 남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누구는 휴게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구는 파티에서 심은호에게 술을 건네며, 또 다른 사람은 담당자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방에서 술에 약을 타는 역할을 했다.그 모든 정보가 강민아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반하준이 심은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전부 파악했다.그리고 강나현은 그중 한 직원에게 약물을 건네는 역할이었다.일부러 디퓨저까지 사서 휴게실에 놓는 걸 강민아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강나현과 반하준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디퓨저와 카메라가 있는 방을 바꾸었다.반하준이 심은호의 몸에 와인을 뿌렸을 때 그가 곧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다.강민아는 오늘 초대된 재벌가 거물급 인사들에게 반하준의 비열한 물밑 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민아 씨!!”갑자기 장내에서 심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심은호가 황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심은호의 얼굴은 다소 하얗게 질렸고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심 대표, 왜 그래?”누군가 묻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몰려들었다.심은호는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방금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들어갔더니 반하준과 강나현이...”심은호는 머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