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강연이 끝나고 연설문을 전부 외운 반우정이 의심할 여지 없이 1등을 차지했다.교장 유영호가 반우정에게 직접 꽃을 달아주었고 반현민은 아래에서 무대 위에 상을 받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태어나 처음으로 어린이집 행사에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 채 웃음거리만 되었다.눈물이 핑 돌던 반현민은 사람들 틈에서 강민아를 찾았다.“우리 착한 손자!” 연진숙이 다가와 반현민을 품에 안았다.“할머니!” 반현민이 울음을 터뜨리자 연진숙은 따뜻하고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울지 마. 내 사랑하는 손자, 할머니 마음속에 넌 언제나 1등이야!”반현민이 코를 훌쩍거렸다.“하지만 정이에겐 꽃이 있잖아요... 할머니, 빨리 엄마한테 돌아와서 내 숙제 도와달라고 해요. 아니면 나도 엄마처럼 집 나갈 거예요!”할머니가 자신을 편애하기에 이런 협박이 잘 먹힌다는 걸 아이는 알고 있었다.연진숙이 문득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집 나가면 학교에서 올스타 상을 못 받아.”연진숙은 휴지를 꺼내 반현민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입학한 이래 학기마다 전교 최고 명예는 반현민의 몫이었다.반우정도 모든 성적이 그와 견줄만했지만 학기마다 주는 올스타 상은 오직 반현민만 받았다.연진숙이 이렇게 말했다.“넌 반씨 가문 도련님이니까 올스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거야. 양심 없는 네 엄마 따라 반씨 가문을 떠날 거야?”반현민은 입술을 깨물며 연진숙의 품에 안겼다.아이는 엄마가 도와주지 않아도 전교 최고의 영예는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다.무대에서 내려온 반우정이 강나현 앞으로 찾아와 도도한 얼굴을 치켜들었다.“나한테 사과해요.”강나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오히려 반우정을 조롱했다.“여자애가 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사랑스럽지 않아.”반우정은 어디서 그런 말투를 배웠는지 말끝을 길게 늘렸다.“이모, 남자답게 쿨할 수는 없어요?”강나현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정이 너, 그런 말버릇은 어디서 배웠어!”반우정은 작품을 손에 든 채 목소리를 높였다.“내 한옥에 사
“할머니, 정이가 또 날 때려요!”반현민이 흐느끼자 반우정은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태생적으로 힘이 세서 어렸을 때 힘을 잘 조절하지 못해 실수로 반현민을 몇 번 다치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연진숙은 반우정을 경계했다.반현민도 매번 할머니에게 찾아가 일러바쳤고 연진숙은 언제나 반현민의 편이었다.연진숙이 심술궂은 얼굴로 다가와 반우정의 가슴에 달린 작은 꽃을 떼어내려고 손을 뻗었다.“반우정, 학교에서 사람을 때렸으니 넌 꽃을 받을 자격이 없어! 선생님께 1년 동안 우수 학생으로 선발될 자격을 취소하라고 할 거야!”반현민은 할머니의 다리에 기대 우는 척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고개를 돌려 반우정을 몰래 흘겨보았다.제자리에 서 있던 반우정의 눈앞이 흐릿하게 변해갔다.울고 싶지 않은데 차오르는 눈물이 말을 듣지 않았다.강민아와 함께 만든 한옥은 심하게 변형되어 도저히 복원할 수 없는 상태였다.반우정은 코끝이 시큰거리며 폐허 속에 홀로 버려진 듯 어찌할 바를 몰랐다.문득 날씬한 실루엣이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엄마였다.“회장님, 반현민이 먼저 한옥을 망가뜨려서 우정이가 밀친 거잖아요.”연진숙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강나현을 가리켰다.“네 딸이 오빠한테 손대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까지 넘어뜨렸어!”연진숙은 강나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녀가 다친 걸 이용해 강민아에게 한바탕 쓴소리를 해댔다.강나현도 딴생각이 있었다. 반하준의 관심을 받고 싶지만 나약한 환자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았다.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발차기 한 번에 자신을 넘어뜨렸다는 걸 친구들이 알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나.강민아가 정면으로 맞받아쳤다.“카메라 영상에 강나현이 일부러 우정이 한옥을 망가뜨리려 했던 게 찍혔어요. 우정이가 1등 하면 강나현이 사과하기로 내기한 것도 사람들이 다 들었고요.”강민아가 언성을 높였다.“강나현, 사과 안 해?”강나현은 종아리를 문지르며 말했다.“이젠 반우정이 나한
강당에 있던 다른 학부모들도 모두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에서 들끓고 있는 여론을 확인했다.“우리 학교가 검색어에 올랐어요!”“연 회장님의 정체가 순식간에 드러났네요.”“다들 그래도 보는 눈이 있네요. 반 대표가 이혼한 건 몰라도 강나현이 내연녀인 건 다 알아요.”“나도 강나현 싫어요. 허구한 날 내 남편이랑 시시덕거려요.”“엊그제 밤에 술에 취한 남편을 데리러 갔는데 강나현이 배 대표 무릎 위에 앉아 자기 속옷을 벗어서 서 대표 얼굴에 거는 거예요. 내 남편은 그냥 장난하는 거래요.”학부모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연진숙은 카메라 감독을 질책했다.“당장 생방송 꺼. 반씨 가문 명예를 훼손하면 당신들도 고소할 거야!”감독은 진땀을 흘렸다.“연 회장님, 방송은 이미 껐습니다.”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일이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감독은 서둘러 생방송 카메라를 껐지만 연진숙이 반우정을 퇴학시키겠다는 말은 고스란히 송출되었다.휴대폰이 터질 지경으로 연락을 받은 유영호가 서둘러 달려와 상황을 정리했다.“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어요. 다들 얼른 흩어지세요.”유영호는 학부모들을 강당 밖으로 인도하라는 듯 교사들에게 손짓했다.연진숙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반우정은 친손녀라 그냥 넘어갈 순 있어도 강민아는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정아, 난 네가 아직 반씨 가문을 놓지 못했다는 거 알아.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엄마랑 같이 살래, 아빠랑 살래?”반우정은 또렷한 눈망울로 말했다.“전 엄마랑 살래요.”연진숙은 강민아를 사납게 노려보며 아이에게 가스라이팅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날렸다.“정아, 엄마가 혼자 반씨 가문을 떠나는 게 불쌍해서 같이 가려는 거지?”반하준과 강민아가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진숙은 분노해 집안 물건을 마구 부숴버렸다.그녀는 오늘 특별히 강민아에게 한 수 가르치려고 학교에 찾아온 거다.“아니요.” 반우정은 망설임 없이 부인했다.“엄마 앞에서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연진숙은 지나치게 순진한 손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 따라가면 학비도 못 낼 거야.”연진숙은 반우정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아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았다.“고작 대학만 졸업한 네가 정이를 어떻게 키울지 두고 보겠어. 정이 너는 네 인생이 이미 바닥을 쳤고 민이와 뛰어넘을 수도 없는 간극이 생겼다는 걸 몰라. 아무리 노력해도 정이 넌 민이 수준에 도달할 수 없어!”강민아는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둘 다 내 배 속에서 태어난 아이예요. 민이가 가진 건 정이도 가져야죠. 반씨 가문에서 공평하게 챙겨줄 수 없다면 내가 정이를 데리고 가서 원하는 대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떠나려던 찰나, 서류 가방을 들고 강당으로 들어오는 여러 명의 사람을 보았다.일행의 선두에 선 중년 남자는 단정한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을 마주한 강민아는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청... 청장님?”유영호가 놀라서 탄성을 지르자 사람들은 강당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교육청 청장 백강훈이야.”“대회도 끝났는데 백강훈이 왜 왔지?”유영호와 다른 학교 임원들이 서둘러 달려가 환영 인사를 건넸다.“청장님, 우리 학교에 와주셔서 영광입니다.”유영호는 [환경 지킴이] 강연대회를 생방송으로 진행한 게 대성공을 거둔 것 같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며칠째 영월로 출장을 갔던 교육청 청장까지 얼굴을 비추러 왔으니 말이다.유영호가 백강훈을 상석으로 안내하려던 순간 백강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화를 했는데 안 받아서 내가 직접 왔어.”유영호의 등에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렀다.“죄송합니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상대는 변명을 듣고 싶지 않은 듯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인터넷에 그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유영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아이고, 별일 아닙니다. 학부모들도
백강훈이 유영호에게 말했다.“이 일 처리하려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기로 왔어. 저 여자가 물러나지 않으면 승덕은 신입생이 아니라 지금 다니는 학생들도 남아있지 않을 거야.”유영호가 다급하게 연진숙을 돌아보자 그녀가 눈치를 주었다.“교장 선생님, 저희 부신 그룹이 승덕의 가장 큰 후원자인데...”유영호는 부신 그룹의 재정적 지원을 잃고 싶지 않았고 교육청 사람들에게 밉보이고 싶지도 않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어머니, 그만하세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주위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그렇게 창피를 당하고도 부족하세요?”그는 백강훈에게 말했다.“어머니 이사진 자리는 제가 이어받겠습니다.”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남자의 강렬한 기세가 보였다.백강훈이 반하준과 강민아를 번갈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반 대표님은 모친보다 훌륭하게 해내길 바랍니다.”강민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우정에게 말했다.“우린 가자.”“강민아!”반하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엇, 하준아!”연진숙은 강당을 빠져나가는 강민아의 뒤를 쫓아가는 아들을 보며 서둘러 소리를 질렀다.유영호가 반하준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백강훈을 보며 말했다.“반 대표님은 서경의 훌륭한 인물이죠. 저런 분이 이사진으로 계신다면 승덕은 분명히 한단계 더 비상할 겁니다.”“강민아도 한때 훌륭한 사람이었어.”백강훈이 감탄하듯 말했지만 유영호는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다. 하지만 청장이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할까 봐 감히 묻지 못했다....반하준이 어린이집 주차장으로 갔을 때 강민아가 반우정을 차에 태우고 뒷좌석 문을 닫는 게 보였다.그녀가 앞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타려는데 반하준이 걸어오고 있었다.정장 차림에 긴 다리와 잘록한 허리,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을 지닌 남자는 늘 굳은 표정을 짓고 있어 강민아는 그가 꼭 빚이라도 받으러 다가오는 것 같았다.강민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타 문을 닫으려는 순간 강한 힘을 느꼈다.고개를
강민아가 선물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사파이어 팔찌가 놓여 있었다.그녀는 어두워진 눈동자로 팔찌를 집어 들며 물었다.“사이즈 얼마야?”“14.2.”무심코 뱉는 남자의 말에 웃음이 터진 강민아는 목구멍에서 비릿한 단맛이 느껴졌다.“그건 나현이 사이즈야.”그녀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자 빛에 반짝이는 사파이어 팔찌가 손에서 툭 떨어졌다.반하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까만 동공에 감정의 파도가 요동쳤다.“나현이를 신경 쓰고 질투해서 나랑 싸우겠다는 거지? 나현이랑 나는 2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다면 네가 낄 틈이 있었겠어?”강민아는 반하준의 말에 아득한 기억을 떠올리듯 백미러에 그녀의 버석한 미소가 비쳤다.“기억나? 3년 전 어느 날 밤에 당신이 강나현 찾으러 가면서 나보고 혼자 병원에 가라고 했을 때. 그날 나 열이 39도까지 올랐어. 주치의는 휴가를 냈고 도우미들도 다 퇴근해서 당신이 차로 데려다주기만을 기다렸는데...”강민아의 설명에 반하준은 기억을 떠올렸다.“택시 타고 병원에 가지 않았어?”강민아는 왜 이런 사소한 일까지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병원에 가서 여러 번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나현이가 술에 취해 해변으로 뛰어갔는데 어두워서 찾느라 정신이 없었어.”이렇게 말하며 반하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강민아는 왜 자꾸 강나현에게 신경을 쓰는 건지.여자가 질투를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데 말이다.앞을 응시하던 강민아의 눈앞이 흐려졌다.“반하준, 난 그때 병원에서 당신이 와서 임신중절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길 기다리고 있었어.”예상치 못한 말에 남자는 당황했다.“유산을 했다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어?”강민아는 거울 속 자신의 표정이 보기 싫어 시선을 내린 채 긴 속눈썹을 드리웠다.7년 동안 가슴을 가득 채웠던 사랑은 다 닳아 없어졌고 남은 건 증오뿐이었다.“그때 내가 왜 열이 났는지 기억나?”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장난기 많은 반
“꺄악!”강나현은 반하준의 뒤에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이 뒤를 돌아보니 강나현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머리카락이 흩어진 채 고개를 든 그녀가 빤히 반하준을 바라보았다.“하준 오빠...”남자의 머릿속에는 18살 나이에 생명을 다한 반유하가 불길 속에서 울부짖으며 자신을 부르는 장면이 떠올라 눈앞의 장면과 겹쳤다.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반하준은 강나현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줬다.남자의 차에 탄 강나현은 치솟는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이 팔찌는 어떻게 할 거야?”강나현이 손바닥을 펼치며 물었다.“버려.” 남자의 목소리는 극도로 싸늘했다.“그래!” 강나현은 흔쾌히 답하며 창문을 향해 던지는 동작을 취하고는 손목을 돌려 조용히 팔찌를 주머니에 넣었다....반씨 저택 서재.잘생긴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강민아의 진료 기록을 읽다가 ‘임신중절’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멈칫했다.반하준은 물에 빠진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컴퓨터 화면에는 태아의 다급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문득 그 소리가 멈췄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반하준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듯 통증이 밀려와 허리를 굽히니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기를 집어 드는 손마저 떨려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천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차가운 얼음처럼 그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이혼 서류에 약속했던 돈은 언제 보낼 건지 물어보셨어요.”“지금 보내.”반하준의 목소리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려 전화기 너머로 망설이던 비서가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이혼 서류에는 사모님께 일시불로 120억을 줘야 한다고...”“줘.” 반하준의 말투는 단호했다.별 볼 일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강민아는 단번에 120억을 주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120억은 그녀에게 삼키지 못할 떡이 될 거고, 반하준은 멀지 않아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찾아와 애원할 거라 생각했다....강민아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은행 계좌에 120억이 입
심은호의 기분이 좋다는 걸 눈치챈 진 변호사가 말했다.“큰손 고객인가요?”“응.”진 변호사는 호기심에 캐물었다.“얼마나 대단한 고객인데 그렇게 기뻐하세요?”“이번 사건만 이기면 난 결혼할 거야.”변호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심은호는 서경에서 유명한 싱글남으로 여성에게 ‘알레르기’가 있는 연애 불능자였다.직업 때문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감히 그에게 수작 부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단 그를 건드리는 사람은 누구든 법원이나 경찰서로 직행했으니까.회의실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고객과 사건이면 심은호가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어볼 결심까지 하게 만드는 걸까....얼마 지나지 않아 강민아는 태화 증권의 매니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120억이 있는데 주식에 투자할 생각이에요.”매니저는 경악했다.“120억이요? 그러면 우리 회사로 오셔서 바로 계좌를 개설하시죠.”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태화 증권 건물로 들어가자 반우정은 호기심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매니저 홍민기는 두 사람을 프라이빗 VIP룸으로 데려가 계좌 개설 절차를 도왔다.반우정은 강민아와 홍민기 사이에서 수수료 조율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 번도 본적 없는 강민아의 모습이었다.‘엄마가 독수리처럼 예리하고 매서울 때도 있구나.’홍민기는 결국 강민아에게 커리어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수료를 제안했다.“강민아 씨는 돈을 어떻게 나눌 생각이세요?”강민아는 홍민기에게 포스트잇 한 장을 건넸다.“내일 이 주식 좀 사주세요.”포스트잇을 건네받은 강민기는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훑어보았다. 매일 주식을 다루는 게 일이라 코드만 보고도 주식의 최근 그래프가 눈앞에 그려졌다.그러다 문득 홍민기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120억을 전부 여기에 투자하려고요?”“네.”“다른 건 생각해 보지 않으시겠어요?”“생각 없어요.”홍민기는 한숨을 내쉬었다.“미리 말씀드리지만 지금 시장이 좋지 않아서 일주일 뒤면 120억 중에 20억도 안 남을 거예요.”강민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