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민은 지금 조심스러운 도베르만 같았다.강민아는 차에 올라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석현아, 내가 안아줄까?”잠결에 비몽사몽이던 반석현이 그대로 강민아에게 기대었다.아이가 품에 안기자 강민아는 곧장 아이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반석현은 강민아의 어깨에 엎드려 그녀의 부드럽고 달큰한 체취를 맡으며 반쯤 눈을 감았다. 유난히 강민아의 따뜻함에 애착을 보이는 아이가 팔을 뻗어 먼저 강민아의 목을 안았다.손님을 맞이하러 나왔던 도우미들이 강민아가 반석현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누구와도 신체적 접촉을 하지 않는 반석현이 제일 가깝게 지내는 게 반용화지만, 가끔은 그의 말도 무시할 때가 있었다.지금 강민아에게 안겨있다는 건 혹시 자폐증이 호전되기 시작한 걸까?“도련님께서 잠드셨어요? 제가 안을까요?”도우미가 앞으로 다가가 묻자 강민아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석현이가 정신은 차렸는데 몸이 아직 잠에서 덜 깬 것뿐이에요.”그녀는 반석현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저한테 기대게 놔두세요.”정이는 육성민에게 안긴 채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하품하며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강민아는 반석현을 소파에 내려놓고 물티슈 몇 장을 뽑아 아이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었다.허리를 굽히자 그녀의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이 드리우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끝과 손바닥은 무척 따뜻했다.예쁜 반석현의 눈매 속 흑진주 같은 검은 눈동자가 눈의 4분의 3을 차지했고 흰색은 얼마 되지 않았다.아이는 강민아를 빤히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강민아의 머리카락을 만지려 했다.“선생님 오셨어요.”도우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반석현은 꿈에서 깨어난 듯 휙 손을 거두었다.강민아가 고개를 돌리자 반용화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그는 베이지색 캐주얼 정장을 입었는데 반듯한 옷차림에 콧등에 무테안경을 걸고 안경 렌즈가 서늘한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강민아는 반용화에게 흰색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마치
반용화의 시선은 이미 육성민의 얼굴에서 멀어진 뒤였다.“그러세요.”그는 덤덤하고 여유로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았다.“석현이 구해줘서 고마워.”강민아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석현이가 절 구해줬어요.”반석현은 강민아의 손을 잡고 자기 가슴을 두드리더니 워치를 가리켰다.강민아는 반석현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자신이 있는 한 강민아를 지켜주겠다는 말이었다.강민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칭찬했다.“오늘 석현이 아주 용감했어.”“석현아, 뽀뽀해도 돼?”반석현을 안은 정이는 그가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자 볼에 쪽 입을 맞췄다.강민아도 몸을 숙여 반석현의 머리에 부드럽게 입맞춤했다.반석현의 볼이 불그스레 물들고 검은 눈동자엔 무수히 많은 별이 담긴 듯 반짝였다.조금 전 캠프로 돌아갈 때 강민아는 정이에게 반석현과 버섯을 채취하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정이는 그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민이를 찾아가 따질 기세였지만, 민이가 비탈 아래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말에 학교로 돌아가 자기 주먹을 보여주며 차분하게 얘기해 보기로 했다.육성민은 강민아와 반석현을 바라보던 반용화가 차가운 렌즈 속 깊은 눈동자에 따뜻한 온기를 머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연구원님, 혹시 아드님에게 엄마를 찾아줄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육성민이 입을 열자 부엌에서 음식을 나르던 도우미가 대신 답했다.“도련님은 강민아 씨를 무척 따르는데 강민아 씨가 도련님 엄마가 되어주면 좋겠네요.”반용화의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들도 강민아가 한때 반용화의 조카며느리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들은 반씨 가문 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이들은 강민아가 반용화의 서재에 들어갈 수 있고, 반석현이 강민아와의 친밀한 접촉도 거부하지 않는 것을 보며 강민아가 그들 부자에게 남다른 존재라는 걸 알았다.그런데 도우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반석현이 크게 반응했다.그를 안고 있던 정이는 아이가 불편한 듯 꿈틀거리자 얼른 손을 놓았다.반석현은 뒤로 두발짝 물러나 붉게 물든 눈으로 강민아를
그림 속 왕비의 표정은 슬펐다.반석현이 또 다른 그림을 내밀었다.크레파스로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왕비가 딸의 손을 잡고 성을 떠나는 모습을 그렸는데, 왕비는 얼굴에 밝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강민아는 반석현이 건네준 세 번째 그림을 받았다.그림 속엔 왕비가 어린 소녀를 데리고 또 다른 국왕을 만나는데 국왕 옆에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왕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고 왕비에게 청혼하고 있다.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반석현은 다섯 번째 그림을 문틈으로 내밀었다.그림 속 여자아이와 함께 새 국왕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린 왕비는 멍한 표정이었다.그림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반석현은 그저 간단히 슥슥 그리기만 해도 인물의 표정까지 생동하게 표현했다.강민아는 바닥에 앉아 방문에 기대었다.그녀는 반석현이 그린 다섯 장의 그림과 쪽지를 손에 들었다.[우리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강민아의 눈시울이 뜨거워 나며 순식간에 눈가가 촉촉해졌다.[당신이 내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다시 가정에 얽매이고 다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엄마로서의 무게를 짊어지는 게 싫어요.]하지만 그토록 많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반석현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너무 좋아하니까 조금이라도 상처 주기 싫은 거다.반석현은 자신도 강민아에게 괴로움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고 제일 먼저 멀어지는 걸 선택했다.자신을 방에 가두면 또다시 강민아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강민아가 고개를 돌리니 반용화가 한 손을 휠체어 팔걸이에 올려놓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왜 바닥에 앉아있어?”남자가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묻자 강민아는 받은 그림을 그에게 보여주었다.“석현이는 똑똑하지만 안쓰러운 아이예요.”반용화는 반석현이 그린 그림을 보았다.“좋다고 꼭 소유해야 하는 건 아니지.”그러고는 강민아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말했다.“한때는 나도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어. 넌 내가 만난 학생 중 최고였지만 여자이기에 온실에
강민아가 반석현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석현아, 우리 모두의 결말은 각자의 손에 달려있어. 난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고 나에 대한 네 마음도 저버리지 않을 거야.”반석현은 조금 머뭇거리며 망설였지만 강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가득했다.아이는 강민아의 품에 뛰어들어 가느다란 팔로 강민아의 목을 감쌌다.그는 강민아가 자신의 엄마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강민아가 자유로워지길 바랐다.강민아가 고개를 돌려 반용화에게 말했다.“선생님의 애정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진심으로 사랑하면 상대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고 다치는 게 싫어진다.자신의 좋아하는 마음을 감춰서라도 상대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도록 내버려둔다.상대가 잘 지내면, 수많은 별과 함께 빛나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니까.강민아는 반석현의 손을 잡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정이는 반석현이 식탁에서 밥을 먹으려는 것을 보고 직접 반석현에게 음식을 건넸다.저녁 식사가 끝나고 반용화가 물었다.“나랑 한 내기 기억해? 이제 3주도 안 남았어. 강승 테크엔 언제 손을 쓸 거야?”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잠시 생각했다.“흠... 한두 주 지나고 보죠.”반용화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강민아에게 나름의 계획과 생각이 있을 거다. 게다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니 강승 테크는 진작 그녀가 손에 넣은 먹잇감 같았다.하지만 그녀와 강성진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으니 강성진은 절대 먼저 강승 테크를 강민아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다.“2주 뒤에 강승 테크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겠어?”강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그녀는 화면을 흘끗 보고는 그대로 반용화에게 보여주었다.발신자는 장기명이었다.전화를 받은 강민아가 스피커 모드로 돌리자 장기명의 흥분한 목소리가 사람들 귀에 들려왔다.“강민아 씨, 지금 어디 있어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강민아가 대답했다.“지금 반 연구원님 집에 있는데 무슨
장기명은 고작 대학교수이고 옴 테크를 도와주는 학자 중 한 명에 불과한데 옴 테크 임원 앞에서 이렇게 큰 입김을 자랑한다고?반용화는 휴대전화를 들고 조용히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장기명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해.”장기명은 전화기 너머로 강민아에게 히죽거리며 말했다.“정 고마우면 밥이나 한 끼 사요.”“일 끝나면 제대로 감사 인사드릴게요. 지금은 불필요한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 접촉을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장기명은 전화기 너머로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물론이죠. 강민아 씨가 인수 책임자라는 소식이 알려지면 반 대표도 주시할 텐데 조심하세요.”그러면서 그녀 대신 욕설을 퍼부었다.“반하준은 사람도 아니에요. 민이 그 자식도 마찬가지고. 두 부자가 강민아 씨에게 그랬다는 걸 듣고 정말 달려가서 주먹을 날리고 싶었어요.”“그럼 가서 구름 목장 지키세요.”반용화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의 목소리를 들은 장기명은 고양이를 본 쥐가 되어 황급히 목을 어깨 쪽으로 움츠렸다.조금 전 강민아가 반용화 집에 있다고 했으니 불쑥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그들 부자와 강나현이 비탈길 위로 올라오려고 하면 가서 주먹을 날리세요.”장기명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강민아 앞에서 큰소리 한번 친 것뿐인데...정말 반하준을 만나면 그 앞에서 감히 방귀도 뀌지 못했다.“반... 반 연구원님, 저는 오늘 밤에 정리해야 할 중요한 자료가 있어서...”전화기 너머로 장기명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구름 목장에 가서 하세요. 사람 보내서 모셔다드리죠.”“하, 하지만...”반용화의 살얼음 같은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대답만 하세요.”분명 휴대폰으로 통화만 하고 있는데도 장기명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자기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결국 그는 순순히 반용화의 말에 답했다.“네...”강민아는 장기명의 사색이 된 얼굴을 상상했다.반용화가 경고 차원에서
강민아는 식사를 마친 후 서둘러 반용화의 서재로 들어갔다.반용화의 서재는 개인 서재보다 도서관에 더 가까웠다.그의 거처에는 3층짜리 서재가 있었는데, 소장하고 있는 책 대부분이 절판된 책이었고, 자료들은 기밀에 속해 유수의 대학교수들도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강민아는 지식의 바다에 푹 빠졌고 정이와 육성민은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시간 넘게 책을 읽고도 그녀는 미련 가득한 채로 서재를 나섰다....구름 목장, 언덕 아래 차가운 산바람이 휘젓고 지나갔다.“아빠, 오줌 마려워요! 못 참겠어요!”민이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반씨 가문에서 애지중지 키운 도련님인데 이렇듯 궁색한 처지에 놓였다.민이는 비탈길에 기댄 채 두 손은 양옆에 묶여있어 화장실이 아니라 스스로 바지 벗을 능력도 없었다.그런 민이 옆에 누워 있던 반하준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지만, 날이 춥고 안개가 자욱한 산속에서 기온이 떨어지는 데 장시간 움직이지 않으니 몸의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온몸이 뻣뻣하고 팔다리가 저린 상태였다.반하준은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으로는 이 또한 반용화가 그에게 주는 퀘스트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민이가 자꾸 귓가에서 칭얼거리니 반하준은 상당히 짜증이 났다.그는 평소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드물었고 민이는 정말 철이 없었다.‘대체 5년 동안 강민아가 어떻게 가르친 건지.’조금 전 반하준은 비탈길 위에 있는 사람을 부르려고 했지만 애초에 거기를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시간이 늦어질수록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작아졌다.그래서 우선 민이를 붙잡아 데리고 나간 뒤 사람을 불러 강나현을 구할 생각이었다.강나현은 발을 삐끗하고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다쳤기에 그 혼자 어리고 약한 두 사람을 데리고 떠나기엔 무척 성가셨다.반하준은 늘 약자를 싫어했다.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비탈길을 막 올라갔을 때 어두운 숲에 여러 개의 손전등 불빛이 보이자 반하준은 급히 몸을 숙여 경사
“하...”그녀는 자기 목을 빙빙 돌며 움직이는 가느다란 생명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그런데 눈을 크게 떠도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숨막히는 공포에 강나현은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헉!”강나현은 두 다리가 풀리며 곧바로 기절했다.그들이 있는 곳 위쪽 경사면에는 감시용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반하준은 잠시 생각한 뒤 민이를 데리고 다시 경사면 아래로 내려갔다....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반하준이 민이와 강나현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비탈길 아래쪽에는 벌레가 유난히 많아 반하준은 얼굴과 목에 여러 방 쏘였고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어 가슴 쪽을 문 벌레도 있었다.민이 역시 온몸에 붉은 발진이 생겼다.강나현은 더더욱 엉망진창이었는데 비탈길에서 기절한 후 벌레에게 물려 눈꺼풀이 부어올랐고 정신을 차렸지만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강나현은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는지 반하준과 민이의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침대에 엎드린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약을 발라주던 간호사는 쉬지 않고 아우성치는 그녀 때문에 몇 번이나 눈을 흘겼다.“강나현 씨?”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강나현은 고개를 돌렸다. 눈꺼풀에 연고를 발라 눈을 뜨지 못해서 자신을 보러 온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아, 네. 누구세요?”“저희는 운학구 지구대에서 온 경찰입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했고 폭행 미수에 대한 증거도 있으니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며칠 후 서경 국제공항.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고 출구 쪽 난간 뒤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엄마, 윤세현이란 사람은 어떻게 생겼어요?”“사람 중에 제일 잘생기고 매력 있는 사람이 엄마 절친이야.”육성민과 심은호는 그들 모녀 뒤에 서 있었다. 심은호는 하품했다. 현재 시각 아침 7시, 윤세현을 데리러 오기 위해 그는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났다.그곳에 지나가던 여행객들은 저도 모르게 두 남자를 돌아보곤 했다.마스크를 쓴 육성민은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어했지만 훤칠하고
심은호는 경멸 섞인 야유를 내뱉었다.“허, 누구 심장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네요.”그가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오만하게 비아냥거린 뒤 육성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육성민의 표정도 굳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볼 뿐, 깊고 어두운 눈가엔 흐뭇한 감정까지 담겨 있었다.‘나만 한심한 놈이야?’부서진다는 심장은 심은호 것이었나보다.‘역시 육 소위, 흐트러짐이 없네.’사실은 그도 당장 달려가 윤세현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지만 강민아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게 분명하다.심은호는 깊게 심호흡하며 육성민을 따라 배우기로 했다. ‘이 정도 아량도 없이 어떻게 첩 노릇을 해?’“나도 뽀뽀할래요!”윤세현에게 다정하게 입 맞추는 강민아를 본 정이도 기회가 오자마자 달려들었다.강민아가 정이를 안아들자 정이는 윤세현의 볼에 여러 번 뽀뽀했다.윤세현의 눈가는 촉촉했고 목까지 빨개진 그녀가 수줍게 말했다.“네 딸이야?”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이름은 강윤정, 그냥 정이라고 불러.”윤세현은 다정하게 정이를 안아주었고 강민아는 그녀와 정이를 동시에 품에 가두었다.심은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옛말에 하늘에서 떨어져 다친 학처럼 잘생긴 얼굴이 창백해졌다.“그쪽은 왜 안 가요?”심은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내가 왜 가요?”육성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쪽이 죽이고 시체는 내가 처리할게요.”심은호는 육성민의 감옥생활까지 생각해 둔 상태였다.한꺼번에 두 라이벌을 제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육성민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윤세현에 대한 심은호의 적대감을 알아차리고 경고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방해하지 마세요.”심은호는 경악했다.“오빠가 돼서 둘이 공공장소에서 뽀뽀하고 껴안는 걸 그냥 놔둘 거예요?”육성민은 크게 이상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그게 뭐 어때서요? 민아가 얼마 만에 윤세현을 만난 건데요.”심은호는 다시 봤다는 눈빛으로 육성민을 바라보았다.“육 소위님은 진작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