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루나가 일부러 자신을 꼬드긴다고 생각했다.여자들이 이런 식으로 밀고 당기는 걸 수없이 봐왔으니까.하지만 루나가 원하는 스포츠카를 경매에 부쳤는데도 루나가 나타나도록 유인하는 데 실패했다.이에 반하준은 종주산에서의 레이스가 빠르고 격정적인 하룻밤 단꿈이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그런데 이번에 루나가 다시 나타난다는 말에 반하준은 엄규민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국제 레이싱 대회에서 루나가 나타나면 잘 지켜봐!”그는 루나의 헬멧을 벗기고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들었다....검은색 드림이 도로 위를 달리고 조수석에 윤세현이 앉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강민아를 바라보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마치 5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5년 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만났어도 마치 서로의 마음이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발동기가 소음이 좀 심하네. 오늘 밤에 정비소로 보내서 제대로 고쳐야겠어.”강민아가 대답했다.“그래, 같이 가자.”그녀와 단둘이 있으니 윤세현은 부쩍 말수가 늘었다.“내가 돌아와서 시범경기에 참여하는 거야?”강민아는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로 앞만 주시했다.“세현아, 난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다시 레이서의 길을 걷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너야.”그녀의 말에 윤세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다시 레이서의 길을 가려고?”“응.”강민아는 핸들을 꽉 잡았다.“이번에는 더 이상 루나라는 이름에 숨지 않고 전 세계에 루나의 본명이 강민아라는 걸 알릴 거야.”육성민이 운전하는 SUV 뒷좌석엔 심은호와 정이가 앉아 있었다.심은호는 두 손을 운전석과 조수석 뒤편에 올려놓은 채 시선은 줄곧 이미 차들 사이로 사라진 드림을 노려보고 있었다.“쫓아가요. 바짝 붙어요. 기사님, 제 아내와 바람난 남자가 저 차 안에 있어요!”육성민의 이마가 들썩이며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당장 차 밖으로
“...”할 말이 없다....저녁이 되자 강민아는 한 상 가득 차렸고 윤세현은 전부 자신이 좋아하던 음식인 것을 보고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그녀는 강민아 옆에 앉아 혀까지 삼켜버릴 기세로 고기찜을 먹기 시작했다.정신없이 허겁지겁 먹는 그녀를 정이가 빤히 바라보자 윤세현은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정아, 미안해.”정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엄마 요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네요. 현이 씨, 많이 먹어요!”과거 반씨 가문에서 연진숙은 강민아에게 반하준과 아이들의 하루 세 끼를 책임지라고 했는데, 강민아가 요리할 때마다 반하준과 민이는 늘 트집을 잡았다.매번 강민아가 하는 요리만 먹으면서도 민이는 그녀가 한 요리를 마지못해 먹는다며 둘러대곤 했다.“민아, 그렇게 먹기 싫으면 먹지 마.”정이가 말해봤지만 민이는 이렇게 대꾸했다.“엄마 체면 때문에 먹어주는 거야!”할머니에게 배운 버릇이라는 걸 안다. 반씨 가문 미래 후계자로서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절대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으니까.그것도 모자라 강민아에게 더 훌륭한 재벌가 사모님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했다.하지만 사람 마음에 가시가 박히면 그 가시를 빼버려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설령 엄마가 정말 부족한 게 있어도 정이는 강민아가 속상해하는 게 싫었다.게다가 정이 눈에 매일 엄마가 해준 요리를 먹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다.강민아는 맛있게 먹는 윤세현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요리를 잘했지만 반씨 가문에서 7년 동안 지내면서 점차 자신의 요리 솜씨에 자신감을 잃어갔다.윤세현은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또 한 그릇을 떠 왔다.강민아가 반찬 네 가지와 국물을 끓였는데 접시가 전부 텅텅 비어버렸다.세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윤세현과 정이는 설거지를 도맡았다. 아이는 윤세현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물 쓰레기도 척척 버렸다.강민아가 따뜻한 물 석 잔을 따라 주방에서 나왔을 때 윤세현은 캐리어에서 접힌 서류를 꺼내 테이블
그런 그녀를 끌어당겨 서경으로 데려간 건 강민아였다.강민아에 비하면 그녀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윤세현이 서경에 온 첫해에 강민아가 장학금으로 그녀를 먹여 살렸다.문라이트 클럽에 영입된 그녀가 매니저에게 윤세현을 소개해 그녀의 내비게이터가 된 것이었다.빈센트와 다른 멤버들은 거금을 들여 데려온 해외 엔지니어라 처음에는 윤세현과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강민아가 그녀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릴 수 있게 도왔다.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됐을 때 강민아는 거의 전 재산을 털어 윤세현이 유학하는 데 보태주었다.[14살 때 반 선생님은 날 서경으로 데려와 가장 비싼 옷을 입히고, 가장 비싼 수입 문구류를 쓰게 하고, 차를 배정해 주고, 개인 아파트에 살게 해줬어. 나를 타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과중한 노동과 불필요한 사교 활동을 멀리하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거야. 이제 스무 살이 된 나는 너에게도 같은 삶을 주고 싶어. 뉴욕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에 살고, 제일 좋은 학교에 다니고, 의식주 모두 최고급으로 마련해주고 싶어.세현아, 난 네가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과거 강민아가 한 말을 윤세현은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윤세현은 강민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네 말대로 여러 학과를 공부하다가 연구와는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미술, 디자인, 감상을 전공하게 됐어. 네가 내 비싼 학비를 지원해 주고 내가 용감하게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본과 뒷심이 되어주었어. 민아야, 내가 만든 패션 브랜드는 밀란 패션쇼에 올랐고, 내가 디자인한 주얼리는 헐리워드에서 서로 뺏느라 바빠. 네 도움이 없었다면 난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거야. 네가 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어. 이젠 내가 돌아왔으니까 나도 널 돕고 싶어. 더 나은 네가 될 수 있게!”윤세현은 귓불이 붉게 물들면서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했던 말을 용기 내어 강민아에게 전했다.강민아는 가슴에 뜨거운 열기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연분홍빛
심은호는 소파 주위를 두 번 돌아다니다가 육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육성민이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는데 다급하면서도 우렁찬 심은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삼촌이 빨리 가서 정이 데려와요. 민아 씨가 힘들게 오랜만에 옛사랑과 재회하는데 아무도 방해하면 안 되죠! 다음 주에 민아 씨 시범경기에 참가하니까 난 건강만 신경 쓸 거예요. 윤세현과 하룻밤 보내고 나면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고요!”말하면서 심은호는 심장이 거듭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전화기 너머 헬스장에 있던 육성민은 짙은 파란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도 고슴도치 가시처럼 하나씩 솟아 있었다.육성민은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 가슴이 들썩이면서 젖은 옷 아래에 감춰진 근육이 이따금 굴곡진 선을 자랑했다.그는 한 손에는 휴대폰을, 다른 한 손에는 20㎏짜리 아령을 들고 있었다.지금 당장 심은호가 앞에 서 있다면 육성민은 아령을 손에 들고 거침없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을 것이다.“누가 그쪽 삼촌입니까?”육성민이 욕설을 퍼부으려는데 심은호가 진지하게 물었다.“내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거슬리죠? 낯설어서 그래요. 내가 몇 번 부르면 익숙해질 거예요.”육성민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죽고 싶습니까?”전화기 너머 심은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그쪽이 정이 안 데려가면 내가 가요. 하지만 내 주먹을 통제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네요. 윤세현을 감옥에 보내고 싶지만 민아 씨가 슬퍼할 테니 그러진 못하겠죠.”육성민은 심은호의 슬픈 독백을 들으며 머릿속에서 지끈거리는 통증만 느꼈다.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솔직하게 다 얘기했다.“윤세현 씨는 여자고 민아 절친이에요. 당신 바보예요? 그쪽 클럽과 계약까지 했는데 아랫도리가 달려있는지 아닌지도 몰라요?”육성민의 꾸지람이 귀를 찔렀고, 심은호의 가느다란 속눈썹이 위로 쭉 뻗으며 2초 동안 머릿속이 하얘졌다.정신을 차린 그가 전화기 너머로 물었다.“윤세현이 여자라고요?”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팻말을 확인했다.번호가 맞다. 강민아가 정이와 함께 세를 얻어 사는 그 아파트였다.윤세현은 무채색 계열의 회색 체크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고, 잠옷 위에는 헐렁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이제 막 스킨케어를 시작하려던 그녀는 스포츠 헤어밴드로 앞머리를 올린 상태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욱 앳된 10대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반하준.”윤세현은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반하준과 정식으로 만난 적도 없었고, 5년 전 우연히 만난 몇 번의 만남에서도 윤세현은 그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하지만 나중에 반하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강민아의 이혼 소식을 알게 된 후 반하준의 사진은 윤세현의 다트판이 되었다.어두운 시선으로 윤세현의 얼굴을 살펴보는 반하준에게서 갑갑한 압박감이 뿜어져 나왔다.“윤세현 씨?”남자는 군림하는 황제라도 되는 듯 오만하게 명령했다.“죽고 싶지 않으면 꺼지세요.”그러자 반하준을 뒤따르던 두 경찰이 동시에 헛기침했다.“반 대표님, 진정하세요!”경찰은 안중에도 없는 행위였다.“세현아.”강민아의 목소리가 욕실 유리문 너머로 들려왔다.“새 바디로션 가져오는 걸 깜빡했어.”윤세현이 곧장 답했다.“내가 갖다줄게!”조금 전 욕실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초인종 소리를 감췄다.강민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됐어. 나가면 그냥 네가 발라줘.”“민아야, 아직 나오지 마.”욕실에서 강민아는 의아한 듯 멈춰 섰다.윤세현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원수라도 되는 듯 반하준을 노려보고 있었다.“꺼져야 할 사람은 그쪽이죠.”7년 동안 반하준을 향해 쌓아왔던 분노가 이 순간 완전히 폭발했다.원수를 만났는데 눈이 뒤집힐 수밖에.엄규민이 공항에서 강민아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사진을 반하준에게 보냈을 때 그는 매우 불쾌했다.그러다 지금 두 눈으로 직접 낯선 남자가 잠옷 차림으로 강민아의 집에 나타난 것을 보았고, 게다가 강민아는 이 남자에게 바디로션을 발라달라고 한다.뜨거운 용암이 그의 이성을 집어삼키기
반하준의 조롱하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강민아는 방금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릴 겨를도 없이 서둘러 욕실을 빠져나왔다.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의 옷감을 적시고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가느다란 목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희고 투명한 피부에 쇄골은 옷깃 위로 깊게 패 있었다.반하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두 경찰이 의미심장하게 반하준을 돌아보자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강민아, 일부러 나 열받게 하는 거야? 나랑 나현이가 너랑 이 자식과 같아?”“반 대표님, 손부터 놓으세요.”한 경찰이 반하준을 다그쳤다.“이러면 일만 커집니다.”강민아는 손에 들고 있던 대걸레를 내려놓았고 반하준은 윤세현의 옷깃을 풀어주었다.강민아는 곧바로 윤세현의 손을 잡고 윤세현을 자신의 뒤로 보내 보호했다.윤세현의 얼굴은 창백했다. 조금 전 반하준이 옷깃을 잡자 오래전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덩달아 튀어나왔다.반하준은 한사코 윤세현을 싸고도는 강민아의 모습에 경멸하며 콧방귀를 뀌었다.“나랑 세현이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서 늘 가깝게 지냈어. 하지만 그냥 순수한 친구야.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으면 7년 전에 내가 당신을 만났겠어?”해명이 아닌 조롱이었다.[나현이랑 나는 2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다면 널 만났겠어?]“반하준, 당신은 결혼생활 내내 강나현을 친구라고 곁에 뒀지만 난 당신과 결혼하고 몇 년 동안 한 번도 친구에게 연락한 적 없어. 난 당당한데 당신은 나한테 떳떳해?”반하준의 표정이 굳어지며 턱이 굳게 다물렸다.“세현이가 당신 전처 집에서 하룻밤 보내는 게 뭐가 문제야? 당신은 강나현이랑 호텔까지 가서 성인 남녀 단둘이 하룻밤을 보냈잖아. 안 그래?”반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나랑 나현이는 결백해!”강미나가 콧방귀를 뀌며 윤세현의 팔짱을 꼈다.“그래, 당신과 강나현은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지. 그 더러운 속내로 나와 세현이 사이 모욕하지 마.
강민아가 직접 서명한 합의서를 받아내고 말 거다.강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내가 합의서에 사인할 것 같아?”남자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딱 한 번 기회 줄게.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반하준은 바로 백지 수표를 직접 건네주었고 강민아는 수표를 받아 들고 입꼬리를 올렸다.“펜.”제 발로 찾아온 돈인데 마다할 리가 없다.반하준은 변호사를 힐끗 쳐다봤고, 변호사는 곧바로 펜을 건넸다.강민아는 흔쾌히 수표에 숫자를 적고 반하준에게 다시 건넸다.“당신부터 사인해.”반하준은 강민아가 수표에 적은 숫자를 보며 숨이 턱 멎었다.“200억?”남자의 동공에 어두운 기운이 먹물처럼 퍼져나가며 그가 경멸 섞인 조롱을 뱉었다.“이건 사기지.”강민아가 대꾸했다.“형사님, 보시다시피 반하준이 먼저 백지 수표를 건네면서 적으라고 했어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사기라고 모함하네요? 일부러 법을 무시하는 행위 아닌가요?”두 경찰과 변호사는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두 번이나 했다.경찰이 조언했다.“반 대표님께서 금액을 말씀하시고 강민아 씨 의사를 묻는 게 어떻습니까?”변호사도 말렸다.“네, 저희는 진심으로 합의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니까요.”“2억.”반하준의 말에 강민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당신한테는 강나현이 고작 2억밖에 안 돼?”남자의 호흡이 흐트러지며 강민아에게 경고를 날렸다.“넌 고작 보상금 2억밖에 못 받는다는 뜻이야.”강민아의 부드러운 눈매가 가늘어졌다.“반 대표님께서는 합의하러 온 게 아닌 것 같네요. 이만 가세요.”강민아가 문을 닫으려 하자 반하준의 큰 손이 문을 단단히 잡았다.“6억.”강민아는 반하준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를 내며 말했다.“여기가 시장도 아니고 왜 흥정을 하지? 반하준, 잘 들어. 기회는 딱 한 번 줄게.”반하준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200억,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00이야. 안 줄 거면 꺼져.”이내 강미아가 덧붙였다.“그 200억은 강나현 계좌에서 가져와.”
강민아가 휴대폰의 스톱워치를 누른 뒤 반하준에게 밝은 화면을 보여주었다.쉴 새 없이 바뀌는 타이머 숫자를 보니 반하준의 가슴에 총알이 박히는 것 같았다.한때 그도 강민아를 이런 식으로 대했다.그리고 지금,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부신 그룹 대표가 시한폭탄에 묶여 있었다.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강민아 씨가 아주 좋은 제안을 했어요. 반 대표님, 강나현 씨가 사과 영상을 찍도록 설득해 주세요. SNS에서 좋아요 999개를 모으면 저희도 그 영상으로 윗선에 보고하기 편하니까요.”반하준은 처음으로 불판 위에 올라가 구워지는 느낌을 받았다.그 느낌은 무척이나 불쾌했다.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휴대전화를 꺼냈고, 강민아가 켜놓은 타이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언젠가 그가 강민아의 협박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하지만 강민아에게 이토록 짓밟히면서도 반하준은 오히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강나현은 현재 구치소에 수감되어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반하준은 강나현의 곁을 지킬 변호사를 불렀다.변호사는 전화를 받은 후 반하준의 지시에 따라 스피커 모드로 돌려 양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금속 의자에 앉아있는 강나현이 반하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나현아, 지금 당장 경찰의 지시에 따라 사과 영상을 찍고 그 영상을 SNS에 올려서 좋아요 999개를 받아.”강나현은 어리둥절했다.“하준 씨,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벌거벗고 사람들 앞에서 돌아다니며 망신을 당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좋아요 999개를 받아야 네가 풀려나.”강나현은 울기 직전이었다.“싫어! 그건 너무 창피해!”강민아는 손톱으로 휴대폰 화면 속 시간을 살며시 두드렸다.반하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며 하품하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3분이 지나도 강나현이 영상을 녹화하지 않으면 난 절대 합의서에 사인 안 해.”강민아의 목소리를 들은 강나현은 불이 달린 폭죽처럼 발끈했다.“강민아, 또 네가 꾸며낸 수작이지?”강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
심은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하준 저 자식이 강민아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있다.조금 전까지 약에 취했어도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심은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더니, 강민아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경멸하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 대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강나현이 왜 기절했지? 옷은 네가 벗긴 거야?”반하준과 강나현 둘이 짠 계략을 반하준의 입으로 직접 말하길 원했다.그들이 먼저 반하준이 한 짓을 밝히면 오히려 반하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심은호와 강민아는 반하준이 본인이 만든 난장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다.“아니야!”반하준은 곧바로 부인했다.“강나현이 약에 취해 직접 옷을 벗고 여러 번 나를 덮치려고 했어. 난 그저 때려서 기절시킨 것뿐이야!”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아의 눈치를 살폈다.자기 몸이 더럽혀졌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반하준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강나현이 나를 묶어두려고 수갑까지 채웠어!”금속 수갑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반하준이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살갗이 베인 것이다.일부는 살을 파고들어 피와 살이 드러나 끔찍하기까지 했다.손목의 잘린 살점들이 수갑에 뭉쳐있어 하얀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어이쿠!”다친 반하준의 손을 본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충격과 슬픔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반하준을 탓할 수가 없었다.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반하준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강나현을 기절시켰는데 강나현의 능력으로 어떻게 반하준의 손에 수갑을 채우겠나.반하준이 직접 손에 수갑을 찬 게 분명했다.심은호도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단지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려고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었다.서경에서 강나현을 제일 싸고돌았던 그조차 그녀를 버렸다.아마 오늘 밤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강나현이 반하
강민아는 휴게실로 향했다. 반하준의 계획을 파악하자마자 심은호에게 알리고, 그걸 이용해 반하준과 강나현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그녀는 내내 어떻게 두 사람의 계획을 폭로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직접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면 반하준은 오히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며 적반하장으로 굴게 분명하다.이제 심은호가 칼을 건넸으니 그녀는 반하준과 강나현을 폭로하기 위해 휘두르면 그만이다.강민아가 사람을 시켜 열쇠를 가져와 방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콜록!”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뒤로 여러 개의 머리와 크게 뜬 눈이 호기심 가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조심해요!”심은호가 선두로 앞장서자 강민아는 그 뒤를 따랐다.그때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기절한 듯했다.심은호는 역겨운 듯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는 옷을 얇게 입은 강나현의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순간, 어두운 구석에서 반하준이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강민아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구석에 기대어 앉은 반하준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었고 옷깃이 활짝 열린 채 가슴에는 새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젖은 이마에 붙어 있었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그가 홱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강민아를 주시했다. 이젠 이 방을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지금 여기서 나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강민아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그들은 반하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반... 반 대표 맞아?”“하준아, 너 어떻게 강나현이랑... 세상에! 남들이
강민아는 태산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반하준과 강나현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일 거다.반하준은 강나현과 짜고 파티에서 심은호의 스캔들을 폭로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멍청한 상대와 손을 잡았고 강승 테크 내부를 장악한 강민아의 능력을 간과했다. 반하준은 강승 테크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직원과 접선할 때 그들이 강민아에게 반하준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걸 알릴 줄은 몰랐을 거다.강민아는 그들이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반하준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제외하고 남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누구는 휴게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구는 파티에서 심은호에게 술을 건네며, 또 다른 사람은 담당자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방에서 술에 약을 타는 역할을 했다.그 모든 정보가 강민아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반하준이 심은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전부 파악했다.그리고 강나현은 그중 한 직원에게 약물을 건네는 역할이었다.일부러 디퓨저까지 사서 휴게실에 놓는 걸 강민아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강나현과 반하준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디퓨저와 카메라가 있는 방을 바꾸었다.반하준이 심은호의 몸에 와인을 뿌렸을 때 그가 곧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다.강민아는 오늘 초대된 재벌가 거물급 인사들에게 반하준의 비열한 물밑 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민아 씨!!”갑자기 장내에서 심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심은호가 황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심은호의 얼굴은 다소 하얗게 질렸고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심 대표, 왜 그래?”누군가 묻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몰려들었다.심은호는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방금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들어갔더니 반하준과 강나현이...”심은호는 머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