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을 포박당한 강성진은 다리를 들어 강나현의 어깨를 다시 한번 강하게 걷어찼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졌고 이번에는 정말로 온몸이 아팠다.마치 개미가 심장을 갉아 먹는 듯한 통증이 감전된 것처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강성진은 벨트를 손에 쥐고 심호흡을 한 뒤 딸을 가리키며 반하준에게 말했다.“하준아, 걱정하지 마. 내가 이 자식 절대 용서 안 해! 현민이가 손을 다쳤으면 저년 손을 부러뜨릴 거고, 발을 다쳤으면 발을 잘라버릴 거야!”강성진은 민이가 강나현의 오토바이에 타고 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반하준이 아들을 위해 강씨 가문에 복수하기 전에 그가 먼저 반하준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도록 강나현을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경찰은 어이가 없었다.‘여기가 무슨 무법지대인 줄 아나.’“우린 법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경찰이 경고했다.“아무리 강나현 씨 아버지라도 그렇게 때리고 손발을 자르면 안 돼요.”...병원 주차장.정이가 차에서 뛰어내린 뒤 조금 불안한 듯 강민아를 돌아보았다. 사고 전 민이와 강민아의 다툼을 떠올리며 아이가 인상을 찌푸렸다.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자.”두 사람은 병원을 향해 걸어갔고 정이의 심장은 심하게 쿵쾅거렸다.수술실 문 앞에서 강민아를 본 연진숙은 또 다른 화풀이 대상을 찾은 듯 눈을 부라리며 원수처럼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강민아! 넌 엄마 노릇을 어떻게 하는 거야? 네 동생이 내 손자를 죽이게 생겼어!”연진숙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네가 경기장에서 그러지만 않았어도 민이가 화를 냈겠어? 엄마인 네가 애를 일부러 괴롭혀서 민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강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연진숙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반하준의 옷깃을 잡으며 정이에게 말했다.“도와줘.”“네!”정이가 손을 들어 반하준의 넥타이를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반하준은 목에 천근만근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허
연진숙은 그 소리를 듣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정이도 반하준의 넥타이를 잡은 손이 느슨해졌다.아이가 빠르게 달려가 보니 수술실에서 간호사 몇 명이 침대를 밀고 나오는 게 보였다.정이는 그대로 자리에 멈추며 굳어버렸다.동그랗고 검은 눈동자가 침대에 누워 있는 민이를 바라보았다.민이의 눈은 기절한 듯 감겨 있었고, 얼굴은 산소마스크로 대부분 가려져 있었으며, 머리와 팔, 다리에는 거즈가 여러 겹 묶여 있었다.미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이런 민이의 모습은 처음 본다.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정이의 입을 가리고 있는 듯 큰 공포가 밀려와 정이의 작은 몸을 주체할 수 없이 떨게 만들었다.민이의 몸에는 여러 개의 튜브가 삽입되어 있었고 간호사 한 명이 수액 병을 높이 들고 있었다.강민아는 시선을 돌릴 힘조차 없었다.불에 달구어진 바늘이 그녀의 심장을 푹 찔러 피가 지직거리며 하얀 연기로 증발하는 듯 모든 생기와 희망이 몸에서 그대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연진숙은 민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절망적인 통곡을 내뱉었다.수술실에서 여러 명의 의사가 나오는데 강기성도 그중 한 명이었다.민이의 주치의이자 제일 병원에서 거물급 인물이었던 강기성은 반하준을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갔다.“반현민 군의 응급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중환자실에서 48시간 동안 지켜봐야 합니다.”반하준이 물었다.“지금 내 아들의 상태가 정확히 어떻지?”주치의는 솔직히 답했다.“좋지 않습니다. 48시간 후 몸이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도 머리에 심한 외상을 입어 깨어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말하며 의사가 씁쓸하게 한탄했다.“반하준 씨,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의사의 말을 들은 연진숙은 황급히 다가갔다.“의사 선생님! 어떻게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해요? 반드시 우리 손자 살려내요!”주치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이번 수술에 최고의 의사들은 전부 참여했고 저희 모두 최선을 다했습니다.”강성진은 강기성에게 계속해서 눈치를 줬고, 바닥에 주저앉
“꼬마 친구, 안은 무균 병실이라 들어가면 안 돼요.”그러자 정이가 간호사에게 물었다.“민이는 언제 깨어나나요?”간호사는 따뜻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곧 깨어날 거예요.”강민아가 다가가니 중환자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정이가 수채화 연필을 손에 들고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정이는 장명등을 그린 종이를 병실 문에 붙였다.그림을 그린 뒤 아이가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은 채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난 민이가 깨어났으면 좋겠어요. 깨어나야 엄마한테 사과하죠.”강민아는 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민이가 사과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지만 정이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마음이 쓰였다.둘은 쌍둥이라 한때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는데 처음으로 크게 다친 민이를 보고 가족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이는 한동안 두려움에 떨 거다.강민아는 바닥에 꿇고 앉아 정이를 품에 안았다.정이는 강민아의 어깨 위로 엎드려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소리를 내지 않으려 꾹 참으며 강민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정이의 따뜻한 눈물이 강민아의 어깨 천 사이로 순식간에 스며들었다.복도에는 아직 떠나지 않은 경찰 몇 명이 남아서 반하준을 심문하고 있었다.“강민아 씨가 제출한 자료에서 교통경찰 내부의 누군가가 강나현 씨의 상습적인 교통 규칙 위반행위를 은폐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반하준 씨와 반하준 씨 비서 두 분은 저희 조사에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반하준은 굳어진 표정으로 눈가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연진숙은 반하준이 경찰과 함께 나가려는 것을 보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왜 내 아들을 데려가는 거예요? 내 아들은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연진숙이 고래고래 소리쳐서 많은 사람이 이쪽을 돌아보자 반하준은 그저 창피할 뿐이었다.“어머니, 전 그냥 수사에 협조하는 거예요.”연진숙이 너무 큰 소리로 외치니 지나가는 사람들은 반하준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이내 늙은
강민아가 아직 반씨 가문 사모님이었다면 반씨 가문 홍보팀에게 주의를 줬겠지만, 오늘 벌어진 일은 모두 반하준의 잘못이고 부신 그룹이 흔들려도 그녀와 아무 상관 없었다.강민아는 중환자실 입구에 서서 병상에 누워 있는 민이를 유리 너머로 바라보았는데, 기구들과 새하얀 이불에 덮여있는 아이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강민아의 귀에는 민이가 두세 살 때 병원에서 강민아의 허리를 붙잡고 작은 몸을 그녀의 품에 파묻은 채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때만 해도 그녀밖에 모르던 아이였다.어느새 강성진이 강민아 앞에 다가왔고, 강민아는 그의 손에 쥐어진 피 묻은 벨트를 차갑게 바라봤다.“옴 테크의 임원들이 벌써 나한테 연락이 왔어. 네가 강승 테크 대표로 나가서 인수에 대해 상의했으면 좋겠다네.”강성진은 강민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피식 웃었다.“다음 주에 회사로 나와. 부사장 자리를 줄게.”딸이 유명한 카레이서 루나이고, 다국적 거대 자본인 옴 테크의 눈에 들자 강성진은 눈가에 번지는 탐욕을 감추지 못한 채 히죽 웃었다.“역시 내 딸이야!”그가 강민아의 어깨에 손을 대려고 하자 강민아는 곧장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쳐냈다.“건드리지 마요. 역겨우니까.”강민아는 강성진에 대한 역겨움을 숨기지 않았다.“너!”강성진은 욕을 하려다 자기 손가락에 강나현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강민아도 여자라 손에 묻은 피를 보면 무서울 거다.딸이 자신에게 가져다줄 큰 혜택을 생각하며 강성진은 강민아를 보면서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그래그래, 손 씻고 올게. 민아야, 넌 역시 내가 가장 아끼는 딸이야. 우리 우강 그룹의 미래가 너에게 달렸어!”강민아는 속이 메스꺼운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우강 그룹의 미래는 저한테 맡겨요!”...연진숙은 강민아와 정이를 보내고 병원 복도에 앉아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언론사 몇 군데 찾아서 반씨 가문 도련님이 중환자실에 있는데 엄마인 강민아는 곁을 지키지도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연 회장님, 죄송합니다만 상부로부터 여사님에게 칭호를 수여하지 않기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연진숙은 심장이 철렁하며 서둘러 물었다.“누가 날 제보했어요?”설마 강민아가 정말 그녀에게 불리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그녀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강민아가 7년 동안 반씨 가문에 있으면서 첩자 노릇이라도 했던 건 아닐까.“연 회장님, 아드님은 경찰에게 잡혀갔고 인터넷에서는 악덕 시어머니라고 욕하는데 이런 여론 속에서 우리 부녀연합회는 선을 그을 수밖에 없습니다.”“위원장님...”연진숙이 말을 잇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다.연진숙이 다시 전화를 걸려는데 이번엔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적십자사 직원이 걸어온 전화에 연진숙의 마음속에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여보세요.”“연 회장님, 죄송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댓글을 감안해 명예 위원장 명단에서 회장님 이름은 지워야겠습니다.”연진숙의 심장이 쿵쾅거렸다.“어떻게 이럴 수가...”그녀가 말하려는 순간 잇달아 다른 전화가 걸려 와 통화버튼을 누르기 바쁘게 자선단체에서 맡았던 그녀의 직책도 내놓으란다.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비서에게 물었다.“내가 뭘 잘못했는데?”...그날 밤 강나현의 SNS 계정은 폐쇄되었지만 강나현이 5살 아이와 오토바이를 탔다는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강민아는 집에 있던 중 반용화의 전화를 받았다.“석현이가 자기 대신 위로의 말을 전해달래.”눈 덮인 산 정상에서 녹아내리는 맑은 샘물처럼 그의 목소리가 강민아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멀리 울려 퍼지는 그의 말은 다소 내키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강민아가 답했다.“전 괜찮아요.”“경기는 아주 잘했어.”반용화가 덧붙였다.“석현이가 하는 말이야.”강민아는 입술을 말아 올리며 물었다.“반하준이 경찰에 연행돼서 조사받는 걸로 부신 그룹 주가가 흔들릴 텐데, 선생님께도 영향이 있을지 걱정되네요.”그녀는 반용화를 유난히
며칠 후.강민아와 육성민, 윤세현이 승용 건물 꼭대기 층 사무실에 모였다.이곳은 서경의 신흥 개발 지역으로, 66층 통유리창 앞에 서면 멀리 드넓은 부두와 선착장이 보이고 대형 화물선들이 해수면을 지나 천천히 항해하고 있었다.육성민은 의자 뒤편에 정장 재킷을 던져놓고 몸에 꼭 맞는 테일러 셔츠만 입은 채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자연스럽게 옷깃을 풀어 헤쳐 구릿빛 피부와 반듯한 쇄골을 드러냈다.소매를 걷어 올리자 근육이 잘 발달한, 힘 있고 탄탄한 팔이 드러났다.그는 다리를 약간 벌리고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내가 소유한 센트럴 이노베이션이 이미 강승 테크 인수전에 참여했지만, 센트럴이 옴 테크보다 높은 인수 가격을 제시하더라도 강성진이 센트럴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어. 단기간에 강성진이 옴 테크를 버리고 다른 회사에 강승 테크를 팔게 하기는 어려워.”강민아는 3인용 소파에 앉아 손에 쥔 정보를 훑어보았다.“난 강성진이 완전히 믿을만한 사업가가 필요해. 다른 기업에서 강승 테크를 인수해도 강성진에게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믿게 할 사람.”하지만 강민아는 강성진의 모든 인맥을 살펴보고 그가 믿을만한 사람을 찾긴 했어도 마음 놓고 그들에게 일을 맡길 수 없었다.육성민과 윤세현의 경우 두 사람의 이름으로 상장된 회사가 있긴 했지만, 두 사람이나 그 밑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강성진의 경계를 늦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때 방문을 두드리며 비서가 문 앞에 서서 보고했다.“대표님, 심 대표님 오셨습니다.”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강민아를 향해 곧장 걸어왔고, 그가 다가오자 마치 순백의 불빛이 사무실 전체를 환하게 비추는 듯했다.“심은호 씨는 절 보러 오셨어요?”강민아는 육성민이 심은호도 부른 걸 모르고 있었다.남자는 그녀 앞에 서류 하나를 건넸다.“제 명의로 된 페이퍼 컴퍼니인데 강승 테크를 4천억에 인수하려고 합니다.”강민아는 심은호로부터 계획서를 받아 들고 이렇게 말했다.“옴 테크보다 두 배나 높은 가격이지만 이렇게 높으면 오히려 강성진이
“심은호 씨, 나 좋아하죠?”강민아의 물음은 직설적이고 대담했다.남자의 귓불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테이블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인 그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에 살짝 떨림이 느껴졌다.하지만 이미 목구멍에서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네, 좋아해요.”그는 이 말을 하면서 강민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드넓은 은하수처럼 반짝여 강민아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으며 그의 찬란한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심은호는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이 순간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내가 언제 그 쪽한테 끌렸는지 알아요?”강민아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갸웃거렸다.“내가 루나로 출전하는 대회마다 1등을 했을 때요?”심은호가 웃었다.“서경대 단상에 올라가서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였을 때, 트랙에서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던 때, 사랑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던 때,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학교와 반씨 가문을 오가며 바쁜 삶을 살던 때... 민아 씨 삶의 매 순간이 좋아요. 매일, 매년 늘 활기차게 인생을 살아가니까. 반하준한테 법원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차를 몰고 도로를 질주할 때는 더 좋아졌고요.”윤세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은호의 노골적인 고백에 귀를 기울였다.육성민은 온몸이 저기압에 잠식되어 있었다. 강민아의 명령 한 마디면 당장이라도 저 자식을 통유리창 밖으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지금 민아한테 연애하자고 강요하는 겁니까?”육성민의 말투는 불친절했고,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앞의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는 듯 살벌했다.하지만 심은호는 오로지 강민아에게만 집중하며 육성민을 무시했다.“다 큰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연모하는 마음을 숨겨야 하나요? 하지만 내 마음에 대답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쪽을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고, 이런 내 감정에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나니까. 그래도 민아 씨에 대한 내 마음이 불편하고 불쾌함을 안겨줬다면 그건 내가 잘못한 거겠죠. 민아 씨 마음이 편하도록 내가 한발 물러나 있을게요.”강민아는 심은
말하는 순간 심은호는 두 손을 꽉 말아쥐며 심장이 흠칫 떨렸다. 뜨거운 열기가 가슴 속에 퍼져나갔다.너무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닐까.강민아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진 않을까.고개를 숙인 그는 조용히 강민아의 ‘심판’을 기다렸다.오로지 모든 걸 강민아에게 맡겼다.“만약 우리가 정말 연인 사이라면 그걸 미끼로 강성진을 유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강민아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강승 테크를 손에 넣는 날 우리 협업도 끝나는 걸로 하죠. 그때 대외적으로 헤어졌다고 말하고 심은호 씨는 더 이상 제 남자 친구가 아닌 거예요.”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심은호는 목이 바짝 말랐다.“그러면 제가 한 달 동안 민아 씨 남자 친구가 되어줄게요.”강민아가 심은호에게 손을 내밀었다.“그쪽이 말한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감정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꺼이 그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당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게요.”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심은호가 손을 맞잡기를 기다렸다.심은호는 손을 뻗어 강민아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그러다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 이내 다시 손을 거두었다.흥분한 나머지 테이블 위를 마구 굴러다니고 싶었다.귀는 핏빛으로 묽게 물들었고 코끝에서는 뜨거운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심은호는 다시 한번 강민아의 손끝을 매만지며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손을 빼낸 그가 강민아와 맞닿은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듯 빤히 자기 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잘 부탁해요. 여친님.”육성민은 날카로운 눈썹을 들썩이며 튀어나오는 욕설을 간신히 참았다.윤세현은 강민아 옆에 앉더니 강민아의 손가락을 자기 손으로 가져가 만지작거렸다.“저렇게 욕심 없는 사람은 처음 봐.”그녀는 강민아에게 속삭였다.“심은호 씨 때문에 나까지 당황했어.”강민아도 작게 대꾸했다.“나도 처음 봐. 근데 생각해 보면 경험해 봐서 나쁠 건 없는 것 같아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며 강기성이 들어왔다.강성진이 베개로 강나현의 얼굴을 누르는 것을 본 그는 곧바로 달려가 강성진을 몸으로 밀어냈다.얼떨결에 밀려나 침대 옆 탁자에 부딪힌 강성진은 여전히 양손에 베개를 움켜쥐고 있었다.“뭐 하는 거야!”강성진은 강기성을 보고 그가 강나현을 혼내는 것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고함을 질렀다.강기성은 강나현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얼굴이 파래진 채 입을 벌리고 있지만 스스로 숨을 쉬지도 못하는 것을 보았다.강기성은 곧바로 앞으로 다가가 강나현에게 가슴 압박을 했고 그제야 강나현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강성진은 강기성에게 베개를 내리쳤다.“감히 날 밀쳐?”강기성은 돌아서서 낮게 윽박질렀다.“사람 죽일 뻔했어요!”강성진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내 체면만 구긴 게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가 서경에 발붙일 수 없게 만들었어!”강기성은 한 발짝 물러서며 비웃었다.“그럼 죽여요.”본능적으로 사람을 살리긴 했어도 강나현을 구한 뒤 곧바로 후회했다.그가 서둘러 달려오지 않고 강나현이 정말 강성진의 손에 죽었다면 그는 감옥에 갔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나서서 강나현을 구했기 때문에 기회는 사라졌다.강성진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농담이지. 정말 죽이기야 하겠어? 기성아, 네가 나 대신 쟤 다리 좀 부러뜨려! 안 그러면 또 강씨 가문에 민폐를 끼칠 것 같으니까.”강나현은 벌벌 떨었다. 어릴 때부터 강성진을 무서워했는데 조금 전 강성진이 베개로 얼굴을 가렸을 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몇 초만 지나면 정말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두려움에 강나현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고 두 다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침대에 앉아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바지에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강기성과 강성진 모두 고약한 냄새를 맡았고 강성진이 욕설을 내뱉자 강기성이 말했다.“정상적인 생리현상이니까 가서 옷 갈아입어.”강나현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문 너머로 강성진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앙!”민이가 목 놓아 울면서 무기력하게 소리를 질렀다.“난 엄마를 원해요. 아빠, 난 엄마를 원한다고요!”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굳으며 그는 민이를 무시한 채 돌아서서 아이 방을 나갔다.방 문이 닫히자 민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온 반하준은 적막한 방안에서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차가운 기운이 발바닥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긴 다리로 성큼성큼 드레스룸으로 걸어가 모든 서랍을 열어젖히고 넥타이, 손목시계, 브로치 장신구를 모두 꺼냈다.‘이게 강민아가 준 선물이던가? 이게 사준 건가?’전부 잊어버렸다.대체 어떤 게 강민아가 사준 것이고 어떤 게 담당 코디가 매치해 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재계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이 준 선물은 다 기억나는데 뒤늦게 강민아가 줬던 선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그녀가 준 게 어떤 것인지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반하준은 휴대폰을 꺼내 뒤적거리던 액세서리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코디에게 보내 그가 산 게 어느 것인지 구분하도록 했다.깊은 밤, 코디는 서둘러 그에게 답장을 보냈고 반하준은 마침내 강민아가 선물한 넥타이와 브로치를 찾아냈다.그는 손을 뻗어 넥타이의 무늬와 브로치에 반짝이는 보석을 쓰다듬었다.강민아가 그에게 준 건 이렇게 많은데 심은호는 딱 하나만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들을 전용 사물함에 넣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안주인의 침실로 들어가 텅 빈 방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강민아가 살았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옷장을 열자 안에는 강민아의 옷이 가득했다.그에게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 가져가지 않은 걸까.반하준은 강민아가 늘 입던 잠옷 중 하나를 꺼내어 코끝에 대고 천에 밴 은은한 향기를 들이마셨다.‘이게 강민아의 체취였나?’이젠 강민아의 체취가 어땠는지도 잊어버렸다.강민아가 누웠던 침대에 누워 그에겐 다소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몸을 돌려 강민아의 잠옷을 품에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미간은 찡그리고
침대에 누운 민이의 눈동자는 검은 동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흰자위만 조금 남아 희미한 불빛 속에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반하준은 입을 벌렸지만 누군가 자기 목구멍으로 종이 뭉치를 밀어 넣은 듯한 느낌에 목이 메었고, 민이는 갈망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민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이미 이혼했는데...”어떻게 강민아와 재결합하겠나.그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강민아와 이혼 서류에 사인할 땐 돌아와서 애원하는 건 그녀가 될 것이며, 정식으로 이혼하러 갈 땐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다.강민아가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애원해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민이를 위해서 최대한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네 엄마가 다시 만나자고 애원하면 생각해 볼게.”스스로 되뇌듯 말하며 반하준은 주먹을 말아쥐었다.그런데 민이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는 나도, 아빠도 버렸는데 어떻게 아빠한테 와서 다시 만나자고 애원해요?”아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아빠, 엄마한테 가서 빌어요. 네? 용서해 달라고, 돌아오라고 빌어요!”민이의 눈에 반하준은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자신이 강민아를 붙잡지 못해도 반하준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아빠가 용서해달라고 말만 하면 엄마가 재혼해 줄 거예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내가 뭘 잘못했길래 네 엄마한테 용서를 빌어야 해?”민이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엄마는 아빠가 현이 형한테 잘해줘서 떠난 거예요.”반하준은 목구멍으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강나현과 난 아무런 가능성도 없고 선을 넘은 적도 없어. 그 여자가 괜히 날 의심하는 거야!”민이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아빠가 잘못했어요! 엄마 속상하게 했잖아요!”아이가 울부짖었다.“으아앙!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도 듣고 싶고 엄마가 재워줬으면 좋겠어요. 엄마 가고 며칠째 밤에 깨는데 엄마가 날 버린 것만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엄마가
“서경에 소문 다 났어. 네가 우강 그룹에서 강나현이랑 약을 먹고 뒹굴었다고. 이것 봐! 내가 있는 모든 단톡방에서 너랑 강나현 영상과 사진이 퍼지고 있어!”연진숙은 반하준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반하준은 모든 단톡방에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진 사진과 영상이 퍼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문 앞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손님들이 몰래 찍은 것이 분명했다.그들 역시 재계에서 입지가 있는 인물들이라 보낸 사진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다.그리고 지금 사진과 영상이 하도 여러 곳에 퍼져 출처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화면 속 대부분은 강나현이 차지하고 있고 일부 영상에서 반하준의 흐릿한 모습이 포착되었다.반하준은 연진숙에게 전화를 다시 건넸다.“저랑 강나현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밝힐 거예요.”연진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남자 같은 애랑 엮이지 않아서 다행이네. 서경에서 우리 집 며느리가 되겠다는 재벌가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 허, 강씨 가문 사람들은 발바닥도 못 미치지!”반하준은 계단을 향해 걸어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연진숙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어머니, 다시는 강씨 가문 헐뜯지 마세요!”연진숙은 당황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반하준, 너 지금 뭐라고 했어?”반하준은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목의 상처는 이미 꿰매고 의사 선생님이 거즈로 감쌌지만 손에 조금만 힘을 주자 다시 희미하게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반하준이 옷을 갈아입은 탓에 연진숙은 그의 몸에서 희미한 소독수 냄새만 맡았을 뿐 손목을 다쳤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강민아는 민이 엄마예요. 할머니가 돼서 강씨 가문 깎아내리는 소리 다신 귀에 안 들리게 하세요.”말하며 반하준이 탁한 숨을 내쉬었다.“강나현과 강성진은 욕해도 되지만 강씨 가문을 욕하는 건 안 돼요. 그건 강민아를 욕하는 거니까.”연진숙이 불쑥 말했다.“강민아를 욕하는 게 뭐가 문제인데?”그녀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홱 몸을 돌린
“내일부터 정식으로 대시해도 돼요? 언젠간 당당하게 민아 씨 사람이 되고 싶어요.”어둠이 강민아의 표정을 가렸고,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강민아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둠 속에서 밝게 타오르는 심은호의 눈동자가 보였다.심은호는 강민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싫다는 건가?’그녀의 머리 옆에서 지탱하던 손이 조금씩 움츠러들었다.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밝은 빛이 튀어나와 강민아의 얼굴과 심은호의 시야를 환하게 비췄다.그리고 남자는 벽에 기대어 있던 강민아가 입꼬리를 올린 채 눈가에 번진 미소를 볼 수 있었다.심은호의 성격상 절대 먼저 헤어지자고 할 리가 없는데, 역시나 남자는 적극적으로 다가올 생각이었다.계약 커플은 영원히 한 자리에 머무는 관계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심은호는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림자가 힘차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육성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고개를 돌리자 심은호의 팔에 갇힌 강민아의 얼굴이 보였고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이봐!”그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심은호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뭐요? 남친이 여친한테 키스하는 거 안 보여요?”육성민의 눈빛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당장이라도 눈앞의 남자를 베어버릴 기세였다.“당신이랑 민아는 계약 관계일 뿐이잖아!”심은호가 피식 웃었다.“내일부터는 아니거든요.”육성민이 멈칫하는 사이 심은호가 강민아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헤집으며 고개를 숙여 차가운 새틴 같은 머리카락에 진득한 입맞춤을 했다.“잘 자요. 내 여친.”깊은 눈동자가 꼭 바다 같아서 한 번만 봐도 깊숙이 빠져들어 빠져나오기 힘들 것만 같았다.심은호는 한 발짝 물러났다.“형님, 같이 가죠?”육성민은 늦게 귀가하는 강민아를 위해 정이를 챙기느라 이곳에 있었던 거다.게다가 최근 정이의 연습도 도와주면서 두 사람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조금 전 위에서 심은호의 차가 멈춰서는 걸 보고 또 강민
강민아는 황급히 대답했다.“안녕히 주무세요.”전화기 반대편에서 반용화가 전화를 끊자 강민아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심은호를 바라보다가 남자의 볼에 손을 뻗어 꼬집었다.의외로 심은호의 피부가 너무 탱글탱글해서 아무리 시도해도 뺨의 살을 꼬집을 수 없었다.심은호가 얼굴을 뒤로 젖히자 강민아의 손이 그의 턱을 잡게 되었다.꼭 선한 남자를 희롱하는 것 같았다.“내가 무슨 어르신을 학대해요? 그리고 선생님이 그쪽보다 나이가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선생님이 어르신이면 그쪽은 뭔데요?”심은호는 강민아의 가느다란 하얀 손목을 붙잡고 알아서 얼굴을 갖다대 비비적거렸다.“나는 젊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죠. 반용화 씨는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있는데 그게 학대가 아니고 뭐에요?”말을 마친 그가 두 눈을 반짝이나 마치 탐스러운 포도알 같았다.“연구원님이랑 통화하는 거 방해했어요? 미안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그냥 민아 씨랑 대화하고 싶어서...”강민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질투하지 마요. 그냥 선생님일 뿐이니까.”“알겠어요. 여친님!”심은호는 흔쾌히 답했다.“그렇게 할게요.”강민아는 크게 심호흡하며 밀폐된 차 안에서 산소가 부족한 것을 느꼈다.기사가 아파트 건물 아래에 차를 세우고 심은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보니 그녀는 어느새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인 채 좌석 뒤편에 기대어 있었다.“민아 씨, 도착했어요.”차마 강민아를 깨울 수 없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불렀다.“네.”강민아는 어눌하게 답했지만 취기와 졸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탓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내가 데려다줄게요.”심은호는 차 문을 열고 손을 뻗어 강민아가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부축했다.강민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뜨며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지르더니 하품했다.“이제 우강 그룹 일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 잠이나 푹 자고 싶어요.”“네.”강민아는 대답하는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여기까지 데려다주면 돼요.”심은호는 계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