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 아까 잘못한 거예요? 테이블 엎으면 안 됐어요?”아직 어린 반우정은 자기가 테이블을 엎어서 강씨 가문에서 쫓겨난 거로 생각했다.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되물었다.“만약 다시 기회가 온다면 또 테이블을 엎을 거야?”반우정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를 지키고 싶었어요.”강민아는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우정이는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니 엄마의 영웅이야.”“엄마야말로 우정이의 영웅이에요!”반우정은 강민아 품을 파고들었다.엄마의 칭찬을 들은 반우정은 눈을 반짝이며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힘을 너무 세게 썼어요. 이러면 여자애 같지 않죠?”“우정이는 원래 여자아이야. 여자아이라도 여러 가지 모습이 될 수 있어. 정해진 모습이라는 건 없어.”강민아는 반우정을 부드럽게 안았다.“우정아, 너는 타고난 힘을 가지고 있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란다. 엄마는 네가 그걸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해. 여자아이가 너무 약하면 결국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하거든. 하지만 엄마는 네가 절대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부정하길 원하지 않아.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넌 항상 엄마의 예쁜 딸이야.”반우정은 강민아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엄마, 예전부터 복싱 배우고 싶었어요. 더 강해지고 싶어요.”반씨 가문에 있을 때 그녀는 반현민과 함께 축구, 격투 수업을 듣고 싶었지만 연진숙이 여자아이는 밖에서 뛰어다니며 소리치는 게 아니라고 강하게 반대했다.“잘됐네. 삼촌이 헬스장을 운영하거든. 엄마가 삼촌한테 얘기해서 좋은 복싱 선생님을 구해달라고 할게.”“엄마, 최고예요!”반우정은 강민아의 품에 기댔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로 가요?”강민아는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시그니엘로 가고 있단다.”그녀는 반하준과 이혼하면서 현금 외에도 집과 상가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았다.그녀가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었다.물론 지금도 새집을 알아보고 있었다.강민아는 주식 투자로 충분한 돈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욕조에 몸을 담그고 뜨거운 물을 견뎌냈다.그는 가정부에게 물 온도는 40.3도로 맞춰달라고 여러 번 당부했었다.욕실의 향은 그가 들어오기 10분 전에 피워야 한다고도 했었다.욕조 가장자리에 있는 가죽 쿠션에 기댄 반하준은 내부 조명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쯧.”‘강민아는 7년 동안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데.’반하준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조금만 참으면 돼. 강민아는 곧 돌아올 거야.’...다음 날 아침 핸드폰을 집어 든 강민아는 홍민기가 보낸 문자를 발견했다.[강민아 씨, 정말로 120억 모두 주식에 투자하시겠습니까?][네. 확실합니다. 개장하면 바로 전량 매수해 주세요.][알겠습니다.]홍민기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후회하시면 안 됩니다.]강민아는 컴퓨터를 켜고 자신이 직접 만든 주식 시세 분석 프로그램을 실행했다.그녀가 만든 프로그램은 주식 시장이 바닥을 치고 다시 반등할 때라고 알려주고 있었다.주식 시장이 개장하자 강민아가 홍민기에게 매수하라고 한 주식의 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강민아가 컴퓨터를 끄자마자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모르는 번호였다.최근 이력서를 내고 있었기에 그녀는 인사팀의 연락을 놓치지 않으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사모님. 저예요.”전화기 너머에서 오소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 도련님 빨간색 커프스단추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오소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는 전화를 끊었다.‘커프스단추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 게 뭐야!’강민아는 아이 방으로 가서 반우정의 숙제를 확인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의 유선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벨 소리가 넓은 거실에 울려 퍼지자 조금 섬뜩했다.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선 전화의 선을 뽑아버렸다.그녀가 방에 돌아가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연 그녀의 앞에는 단지 관리자가 서 있었다.그는 강민아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넸다.강민아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고 그녀의 귓가에는 빙하처럼 차가운
“하준 오빠?”강나현은 반하준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했다.그건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언니가 뭐라고 한 거야?”반하준은 한참을 뜸 들이다가 답했다.“아직도 나한테 화내고 있어.”그는 방금 자신을 향해 쏟아낸 말들이 정말로 강민아의 입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언니 혹시 갱년기 아니야? 애 낳은 여자는 확 늙는다더라.”한바탕 화를 낸 강민아는 전화를 끊고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아파트 관리자에게 내밀었다.관리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그녀가 손을 까닥이자 관리자는 그제야 황급히 핸드폰을 받아 들고 도망치듯 뛰어갔다.시그니엘을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다가가 물었다.“엄마랑 같이 엄마 선생님 보러 갈까?”“좋아요!”심씨 가문으로 출발하기 전 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미리 연락을 넣었다.그녀는 꽃집에 들러 꽃을 사고 취보헌에 들러 심한기가 평소 즐겨 쓰던 선지를 골랐다.그렇게 준비를 마친 뒤 강민아는 심씨 가문 저택 앞에 도착했다.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것은 심은호가 아닌 심씨 가문의 가정부였다.저택으로 들어가는 길에 그녀는 응접실에 세워진 화이트보드를 보았다.그 위에는 복잡한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다.그녀는 가정부의 안내를 받아 복도에서 대기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부는 난처한 표정으로 심한기의 방에서 나왔다.“어르신께서 방금 약을 드셔서 컨디션이 좋지 않으십니다.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강민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날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구나.’“알겠습니다.”그녀는 조용히 대답하고 응접실로 향했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한참을 앉아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화이트보드로 향했다.그리고 10분 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 마커를 집어 들고 계산을 시작했다.순간 그녀는 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창밖으로 더운 바람이 불어왔고 오동 나뭇잎이 사각거렸다.복도에서 학생들의 발소리까지 들려오자 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이 강민아의 목을 조르는 듯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심한기는 네이비 리넨 홈웨어를 입고 있었고 몸은 마르고 허약해 보였다.그의 머리는 온통 희었고 등은 굽어 있었다.강민아는 본능적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려 했지만 자신은 이미 그럴 자격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순간 그녀의 시야가 흐려졌다.“할아버지, 안녕하세요!”반우정의 어린 목소리가 봄비처럼 상쾌하게 들려왔다.“할아버지가 우리 엄마가 그렇게 자랑하시던 학식이 풍부하고 재능이 뛰어나신 교육자이자 뛰어난 수학자 심한기 할아버지 맞으세요?”심한기는 통통하고 사랑스러운 반우정을 바라보며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네 딸이냐?”강민아는 급히 답했다.“네. 반우정이에요.”옆에 있던 누군가가 흥분하며 말했다.“교수님, 교수님께서 내신 문제 이분이 푸셨어요.”잠시 멈칫하던 심한기가 응접실로 향했다.강민아는 심한기의 걸음걸이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심은호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심한기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강민아가 쓴 풀이 공식을 보다가 마른 어깨를 떨었다.“내가 가르친 걸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그녀가 기억하고 있을수록 심한기는 서글펐고 강민아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강민아가 화이트보드를 보며 말했다.“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화이트보드 앞에 서니 예전에 배웠던 공식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정말 교수님의 제자였어?”옆에 서 있던 남학생들이 속삭였다.“아니다!”심한기는 완고하게 부정했다.강민아가 박사 학위를 포기하기로 한 날 그는 강민아에게 누군가 대학에서 지도교수가 누구였는지 물어보면 자신의 이름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선언했었다.그렇게 강민아는 학사 학위만을 취득하고 학교를 떠났고 두 사람의 사제지간은 완전히 끊어졌다.학생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고 심한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들어와서 얘기하자.”그는 학생들 앞에서 강민아
심한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패륜이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왜 그 꼴인 거야?”심은호는 분명 옷을 입고 있었지만 차라리 안 입은 것보다 더 요염해 보였다.심한기의 짙은 눈썹이 격렬하게 떨렸다.“비를 맞았어요.”심은호는 무심하게 답하며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강민아의 각도에서 보면 그의 옆모습은 완벽한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었다.오뚝한 콧날은 미끄럼틀처럼 매끈했고 한쪽 볼의 깊게 팬 보조개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심한기는 심은호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저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가렸다.아들의 존재감이 너무나 눈부셔 선글라스가 필요했다.“아버지, 침대에 누워 쉬셔야 해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내가 뭘 무리한다는 거냐?”‘무리하는 건 너잖아! 색기 넘치는 공작새가 되어버려서는...’심한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심은호는 그를 침대에 눕혀 버렸다.심은호가 베개를 몇 번 두드리자 먼지가 흩날리며 심한기가 기침하기 시작했다.강민아는 급히 물을 따랐다.“교수님, 물 좀 드세요.”그녀는 물컵을 들고 와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심한기를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운 넘치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기침을 멈추지 못하다니.’심한기는 기침하면서도 강민아에게 말하려 했으나 심은호가 그의 손을 눌러 제지하고 강민아의 손에서 물컵을 받아 들었다.차가운 손끝이 스치는 순간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스치는 봄바람처럼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아버지, 지금은 물 마시면 안 돼요.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말을 마친 심은호는 강민아가 직접 따라준 따뜻한 물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을 본 심한기는 말문이 턱 막혔다.심은호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강민아의 시야를 가렸다.덕분에 강민아는 심한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심은호는 심한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알긴 뭘
“아버지, 살살 좀 하세요.”심은호는 피하지 않고 심한기가 휘두른 지팡이를 맞았다.심한기는 지팡이 끝으로 심은호의 허리에 달라붙은 옷을 툭툭 쳤다.“좀 점잖게 굴 수 없어? 완전히 체면을 구기는구나. 여우한테 홀린 거야, 뭐야? 너! 너! 너! 도대체 왜 사람을 유혹하고 다녀?”“쉿! 목소리 좀 낮추세요.”심은호가 황급히 타이르며 말했다.“조용히 하라고? 이게 자랑스러운 일이냐?”심한기는 아들의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러나 심은호는 태연하게 말했다.“계속 유혹해야 하는데 들리면 안 되죠.”심은호를 향해 눈을 흘긴 심한기는 기가 막혔다.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만화책 몇 권을 가져다주고 가정부에게 종이와 색연필도 빌려왔다.반우정은 집중력이 좋아 조용히 앉아 몇 시간 동안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안녕하세요. 교수님께서 새로 출제하신 문제 좀 풀어보라고 하셔서요.”반우정에게 놀만한 것들을 쥐여준 뒤 강민아는 심한기의 학생에게 문제지를 한 장 달라고 했다.“서경 대학 학생이세요?”남학생은 다섯 살짜리 반우정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아니요. 저는 고연 대학 졸업했어요.”남학생이 다시 물었다.“석사생인가요? 아니면 박사생이세요?”강민아는 웃으며 답했다.“학부 졸업 후 공부를 계속하진 않았어요.”테이블 주변에 앉아 있던 몇몇 학생들이 고개를 들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문제지를 건넨 남학생이 말했다.“그럼 이 문제 못 푸실 텐데요. 심 교수님이 내주신 문제는 최소 석사 2년 차 정도는 되어야 풀 수 있어요.”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학생이 조소하며 중얼거렸다.“학부생이 올림피아드 문제를 푼다고?”“아이도 저렇게 큰데 올림피아드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다른 학생이 팔꿈치로 그를 살짝 밀며 말했다.“하지만 교수님이 화이트보드에 적은 문제를 풀었잖아. 우리는 일주일 동안 연구했는데도 못 풀어서 교수님한테 엄청나게 혼났거든...”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학생은 강민아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말
심한기의 학생들이 모두 몰려들었고 그들은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흥, 봐봐. 이거 완전 엉망진창이야.”배진영이 문제 아래 적힌 공식을 보며 하나하나 조롱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계속 스캔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이... 이게 증명이 됐다고?”강민아의 풀이는 그가 풀었던 방법보다 훨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웠다.배진영은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난 왜 이런 풀이법은 생각해 내지 못했지?’“말도 안 돼! 썼다고 해서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잖아.”다른 학생이 그의 손에서 문제지를 낚아채 갔다.주변 학생들도 목을 길게 빼고 증명 과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침묵했다.강민아는 단순히 빠른 속도로 문제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기가 낸 모든 문제를 증명해 낸 것이었다.강민아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변했다.“선... 선배님. 너무 빠르신 거 아니에요?”“저 이거 이틀 동안 잡고 있었는데 선배님이 한 시간 만에 푼 것보다 못해요.”학생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강민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올림피아드 문제라면 대회 시간 안에 풀어야죠.”“그렇다고 해도 모두가 선배님처럼 빨리 풀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강민아는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늘 가장 먼저 답지를 제출하곤 했다.그녀는 대회 스타일에 특화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심한기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부분이었다.“선배님, 정말 학부만 졸업하신 건가요?”“예전에 몇 번 대회를 나간 적이 있어서 문제 풀이에는 익숙해요.”학생들은 그녀가 단순한 학부 졸업생이 아니라 올림피아드 전문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선배님, 혹시 이 문제 풀이 과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그 순간 무심코 고개를 돌린 반우정은 강민아가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서경대 학생들에게 풀이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와아...”반우정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평소 강민아는 그녀와 반현민 옆에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숙제를 도와주곤 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선배님, 대회에서 만날 날을 기대할게요.”“꼴등 하면 재밌겠네.”배진영이 비웃듯 말했다.“ALI 수학 경시대회는 일반인도 참가할 수 있어서 매년 백지로 제출하는 사람도 많아요. 순위표에는 항상 0점이 가득하고 참가자의 이름과 신분도 공개되죠. 선배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세요.”강민아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만약 제 순위가 더 높으면 나는 ALI 경시 대회 성적이 강민아보다 낮다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 일주일 동안 입는 거 어때요?”이는 엘리트 학생들에게 가장 큰 모욕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수치스러운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서경대 캠퍼스에서 생활해야 할 테니 말이다.강민아의 도발에 배진영도 의지를 불태웠다.“좋아요. 저보다 잘하란 말은 안 해요. 하지만 200등 밖으로 밀려나면 교수님 댁에 와서 저희랑 같이 공부할 자격이 없으니 그만 오세요.”“진영아, 그래도 한 시간 만에 세 문제나 풀었어.”옆에서 다른 학생들이 그를 말렸다.“시험지 푸는 게 뭐 대수야? 대회에서는 LaTex로 답을 작성해야 해. 대학 때 배우기나 했겠어?”다른 학생들이 앞다투어 그를 달렸고 배진영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중얼거렸다.“가정주부가 수학 경시대회에 나간다고? 이건 사회적 자원 낭비야.”강민아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험지를 계속 풀었다.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은 그녀를 상처입히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힘든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이 길을 걸어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고 그녀는 단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려고 할 뿐이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큰 문제를 하나 해결한 그녀의 마음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든 순간 그녀는 잠든 반우정을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심은호를 발견했다.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심은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제가 데리고 들어갈게요.”강민아는 심은호가 심한기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심한기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
심은호의 말을 들은 반하준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과 갈비뼈가 아팠다.지금 강민아에게 온몸을 맡기듯 기대어 있는 저 남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다.그런데 지금 오염된 브로치를 손에 들고 강민아에게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해도 해도 너무했다.“강민아, 저놈한테 속지 마!”참을 수 없어 소리를 내지른 반하준은 입안에 온통 피 맛만 감돌았다.그는 복부를 감싼 채 개미 수만 마리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고 있었다.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바라보며 강민아의 동공은 이미 싸늘해졌다.“심은호 씨 몸에 묻은 레드 와인, 당신이 쏟았지?”묻는 게 아닌 반하준의 짓을 단정하는 어투였다.반하준은 입술을 달싹이며 목구멍에서 진동하는 피 맛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실수로 그런 거야.”심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약한 꽃으로 둔갑했다.“그래요. 반하준은 실수로 그런 거니까 나 때문에 화내지 마요.”반하준은 심은호의 그런 모습에 이가 갈렸다.‘저 개자식은 연기를 왜 저렇게 잘해?’남들 몰래 연기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민아야, 저 자식이 일부러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아까 날 때리는 거 못 봤지? 내 갈비뼈와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어! 콜록콜록.”반하준의 가슴속에는 차마 내뱉지 못한 뜨거운 열기가 여러 가닥으로 뭉쳐서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기침할 때마다 온몸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뼈가 다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있는 공작새 모양의 브로치를 바라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살짝 붉게 물든 코끝으로 훌쩍이며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그러더니 자신의 소매로 브로치 표면을 살살 닦으며 브로치에 묻은 와인 얼룩을 닦아내려 애썼다.반하준은 감시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봤다.젠장!그는 심은호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강나현에게 감시카메라를 끄라고 시켰다.카메라가 켜져 있었다면 강민아가 심은호의 본색
“삼촌, 다 됐어요?”육성민은 체육관 밖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 막대기로 타서 재가 돼버린 낙엽을 헤집고 있었다.그는 단열 장갑을 끼고 호일로 감싼 고구마를 불에서 꺼냈다.육성민이 호일을 뜯어내자 뿜어져 나오는 꿀고구마 향에 정이의 입안에는 금세 군침이 돌았다.“빨리 줘요!”정이가 손을 뻗어 가져가려는데 육성민이 말했다.“뜨거워.”그는 쌓아놓은 벽돌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숟가락을 생수로 헹군 뒤 정이에게 건넸다.정이는 숟가락으로 고구마를 파서 호호 불었다.서둘러 한입 베어 물던 아이의 두 눈이 휘어지며 통통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정이가 유난히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육성민의 눈가에도 흐뭇함이 가득했다....강승 테크. 인수식이 끝나고 뒤풀이가 진행될 때, 심은호가 화장실에서 막 나오려던 순간 마주 오던 반하준과 부딪혔다.반하준은 한발 물러서고, 심은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장이 와인으로 얼룩진 게 보였다.장밋빛 붉은 액체가 강민아가 조금 전 선물한 공작 브로치 위로 쏟아졌다.반하준은 자신의 걸작에 감탄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눈이 없어? 자꾸 안하무인으로 굴면 다음에 더러워지는 건 옷뿐만이 아닐 거야.”반하준은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을 휙 돌려 잔을 아래로 뒤집었다. 남은 레드 와인이 전부 심은호의 신발 끝으로 쏟아졌다.그는 비웃으며 말했다.“복도 카메라는 고장 났지만 민아한테 찾아가 울면서 일러바쳐도 돼. 너 연약한 척 잘하잖아. 어디 계속해 봐. 미리 말하는데 민아는 단순히 호기심에 널 갖고 노는 거야. 하루 종일 자기 뒤에 숨어서 징징거리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반하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심은호는 주먹을 휘둘렀다!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반하준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자기 손을 쓸 줄 몰랐던 반하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손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그대로 심은호의 주먹에 맞고 말았다.그 탓에 반하준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조각
심은호의 공개 고백에 사람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반하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번개와 천둥이 몰아칠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심은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옆모습은 부드러운 얼굴선과 높은 콧대, 깊은 눈매를 자랑하며 마치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천장에서 비추는 조명이 그의 눈가를 비추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이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바라보았다.남자가 강민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순간, 호수처럼 맑은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강민아를 향해 쌓아온 감정이 가득했다.강민아의 숨결 하나하나가 뜨거웠고, 남자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파도가 밀려와 그녀를 감쌌다.마치 용암이 발밑에 흐르듯 빠르게 위로 올라오는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꽉 쥐었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긴장하지 마요.”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강민아를 달랬다.“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미안해요.” 심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말했다.“계속 말해요. 듣기 좋으니까.”강민아의 칭찬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심은호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두 눈이 반짝이며 마음을 다잡은 그가 마이크를 마주한 채 아래에 있는 반하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심은호에게만 있었고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민아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 겁니다. 결혼하든, 누군가를 떠나든 무엇을 하든지 늘 뒤에서 지키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나타날 겁니다. 전 앞으로도 여전히 민아 씨의 모든 결정을 지지합니다. 태산 그룹에서 정식으로 강승 테크를 인수했으니 두 회사는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할 겁니다.”반하준은 입가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며 손등에는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갑자기 뚜껑이 열린 탄산음료처럼 동시에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마치 그의
“설마 심은호가 부사장이 반씨 가문 사모님일 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겠지?”“왜 그렇게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나 했더니, 남의 아내를 탐낸 거였어?”가십거리에 사람들은 흥분하며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설마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어쩐지 둘이 그렇게 빨리 만나더라니.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시그널 주고받은 거 아니야?”“설마 반 대표가 바람피우는 걸 알고 강민아와 이혼한 건가? 세상에!”다들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파격적인 소문에 재벌가 인사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반하준의 어두운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심은호가 그의 평판을 망칠 작정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심은호를 끌고 갈 것이다!‘심은호, 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감히 내 여자를 노렸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봐.’지유빈은 반하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강민아 씨 말로는 대표님께서 적극 이혼을 원했다고 하던데요. 왜 이혼하고 나서는 강민아 씨가 누굴 만나는지 이렇게 신경 쓰는 거죠?”강민아는 반하준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고, 반하준은 지유빈을 우습게 여겼다.“기자로서 아직도 모르겠어? 심은호가 내 아내를 오랫동안 탐냈다고! 5년 전부터 내 아내를 지켜봤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왜 계속 아내라고 말하는 거죠? 그 결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대표님 혼자인 것 같은데요.”거대한 스피커가 반하준의 몸속에서 울려 퍼지듯 그의 심장을 뒤흔들고 오장육부에 고통을 선사했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잘 안다. 강민아가 이혼한 뒤 지유빈은 기자로서 업무 때문에 줄곧 강민아를 지켜봤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 사람의 가십거리에 집중하는 동안 지유빈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반하준의 눈동자를 보며 남자가 단순히 강민아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무시하고 싶었지만 지유빈의 말에 궁지로 몰린 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가 구세주처럼
심은호가 헤어지겠다는 말에 반하준은 악랄한 눈빛을 드러냈다.비록 연기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해놓고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심은호, 이미 말했으면 지켜야지.”반하준은 심은호에게 강민아와 헤어지라고 강요할 생각이었다.“난 심은호 씨랑 헤어질 생각 없어.”강민아가 말하며 심은호의 큰 손을 감싸더니 반하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당신이 우리 사이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심은호 씨와 안 헤어져.”반하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심장이 저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듯했다.“민아 씨...”심은호가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자 강민아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두 집안 인수식에서 소란을 피운 건 이 사람이에요. 나가도 그쪽이 아니라 반하준이 나가야 한다고요!”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렸고, 반하준은 누군가 몽둥이로 세게 내리치듯 심장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심은호는 강민아의 말에 위로받았는지 두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민아 씨는 나한테 참 잘해주네요.”강민아의 단호한 말 한마디면 그는 만족할 것 같았다.강민아가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내 남자 친구니까요.”“강민아!”보다 못한 반하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여기 있는데!’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강민아와 심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이 끈적했다.“민아 씨, 아직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요.”심은호는 큰 결심을 한 듯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예쁜 두 눈에는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반하준이 우리 둘을 헤어지게 하려고 병원 시스템을 해킹해 내 진료기록을 훔쳐 갔어요. 내가 병원에 다니는 걸 알고 병이라도 있을까 봐 내 진료기록으로 나한테 헤어지라고 협박했어요!”강민아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가 먼저 심은호에게 반하준이 한 어리석은 짓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지금 심은호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십거리를 직감한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심은호의
강나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나 저 사람 알아! 강승 직원이야!”그녀는 연설문이 바뀐 것이 반하준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그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연설문을 바꾼 사람이 복도에서 반하준과 단둘이 만나는 게 보였다.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강나현은 표정이 확 바뀌며 말문이 막힌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반하준을 돌아보았다.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게 정말 반하준과 관련이 있을 줄이야.하지만 반하준이 했다기엔 너무 저급한 수작이 아닌가.강승의 직원을 시켜서 연설문을 바꾼 것도 모자라 감히 회사 안에서 직원과 따로 만나다니.그런 짓을 하면서도 반하준은 카메라를 피할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강나현은 놀란 표정으로 반하준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다 들키고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마치 대형 스크린에서 강승 직원과 공모한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강민아는 시치미를 떼는 반하준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그럼 저 직원에게 반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보죠.”카메라에 찍힌 직원은 당황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에 띄게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부사장님, 반 대표님이 저한테 시켰어요! 저한테 2천만원 줬는데 이 돈 다 드릴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경악하며 말했다.“정말 반하준이 한 짓이야? 심은호를 노리는 건가?”“심은호와 강민아가 만나니까 전남편이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 근데 너무 비열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폭로 당한 반하준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너한테 들킬 줄 알았어. 그냥 네가 어떻게 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걸 알고도 아무 말 안 하길래 난 네가...”반하준은 말을 꺼내며 입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그는 수치심도 모르는 듯 이렇게 물었다.“그래, 내가 시켰어. 그게 뭐? 강민아, 심은호 때문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