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현은 강성진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상황을 뒤집을 희망이라도 본 듯 서서히 안도했다.‘그래, 이제 강민아가 맞아서 이빨이 뽑힐 차례야!’강성진은 강나현의 휴대폰 앨범 속 강민아와 관련된 영상을 지우고 숨을 고르더니 손을 들어 또다시 강나현의 뺨을 때렸다.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강나현의 얼굴을 강타했다.강나현의 입에 머금었던 솜뭉치가 끈적끈적한 피와 섞여 바닥에 튀어나왔다.“강나현, 이 망할 것! 날 해친 것도 모자라 민아까지 해치려고 들어? 강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가 오늘 너 때려죽인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에요!”강나현이 피를 뱉자 혀끝에는 온통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설명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강성진은 왜 그녀를 믿지 않는 걸까.휴대폰을 강나현에게 던진 뒤 강성진은 벨트를 풀었다.강나현은 강성진이 벨트로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드러냈다.그 순간 강성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벨트로 강나현을 한 대 세게 내려친 뒤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여보세요.”강성진은 발신자를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들어와요.”강승 테크의 주요 주주 몇 명이 들어왔고 맨 앞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성진, 지금 여론이 자네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옴 쪽에서는 입찰에서 빠지려고까지 해!”강성진은 그 말에 덩달아 조바심을 냈다.“네? 어떻게 멋대로 발을 뺀다는 거죠? 지금 당장 옴 테크 쪽 임원에게 연락해 봐야겠어요!”또 다른 주주가 강성진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지금 어디든 자네가 나서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다는 걸 몰라?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고 싶어?”“난...”주주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우린 고심 끝에 만장일치로 자네가 먼저 대표 사임 발표를 하길 바라네. 그래야 자네나 회사에 대한 불리한 여론이 잠잠해질 거야.”“어떻게 강승
강나현은 다급한 어조로 강민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이 모든 게 강민아가 우리를 해치려고 짠 계획이에요!”그런데 얼굴 전체가 돼지처럼 부어올라 말을 해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목소리가 어눌하게 들렸다.그런 그녀의 말에 강성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벨트를 반으로 접은 뒤 강나현의 콧대를 조준해 휘둘렀다.“민아랑 내 부녀 사이 이간질할 생각 마!”강나현은 당황했다. 강성진이 왜 갑자기 강민아 편을 드는 걸까.“아빠가 키운 자식은 저예요! 강민아랑 무슨 감정이 있다고 그래요? 애초에 데려올 생각도 없었잖아요!”“닥쳐!”강성진은 화가 났다. 그의 평판은 무너졌지만 강민아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앞으로 그녀에게 의지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강나현이 대놓고 헛소리하는 걸 그냥 둘 리가 없었다.강성진이 소리를 질렀다.“테이프 가져와!”작고 하얀 손이 검은 테이프를 건넸다.강기성은 강성진에게 테이프를 건네는 김예나를 보고 날카로운 눈썹을 들썩였다.강성진이 테이프를 찢자 강나현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아빠, 뭐 하는 거예요?”강성진이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네 망할 입을 막으려는 거지!”강성진은 본인과 강민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강민아가 강씨 가문에 돌아온 지 9년이 지났어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건 손에 꼽힐 정도였다.게다가 둘은 한때 팽팽하게 맞서 싸운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강성진은 강민아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아빠! 하지 마요!”강나현이 비명을 질렀지만 강성진의 행동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강성진이 곧장 테이프로 그녀의 입을 감자 김예나는 한쪽에 서서 진흙탕처럼 혼탁한 눈빛으로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비슷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한때 강나현은 그녀를 화장실에 가두고 테이프를 붕대 삼아 눈과 머리, 입, 코를 감아 숨도 못 쉬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힘조차 없게 만들었다.그렇게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잠식되어 갈 때 가위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주부에게 이런 야망이 있다니 제법 놀라웠다.강민아가 심은호와 손을 잡고 연인관계라는 사실을 공개한 건, 심은호 명의로 된 회사를 이용해 우강 그룹을 완전히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이제 강민아가 임시 대표직을 맡았으니 분명 강승 테크의 인수를 서둘러 진행할 거고, 머지않은 시일 내에 정식으로 인수 계약을 진행할 거다.이런 생각을 하며 우경아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일단 먹잇감을 포착했으면 절대 그녀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었다.강승 테크를 인수하는 것 따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강민아라는 주제넘은 주부를 만나게 되었다.강민아가 독단적으로 태산 그룹과 인수 프로젝트를 끝내려 한다면 그녀도 손을 쓸 수밖에.우경아는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들고 강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가 전화를 받자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민아 씨, 우리 둘이 협업하고 있는 새로운 기술 프로젝트는 중단해야겠어요.”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 대표님,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 아웃이란 뜻이에요.” 우경아의 목소리에 놀리는 듯한 웃음이 번지자 강민아가 말했다.“우 대표님, 제가 직접 개발한 독점 알고리즘을 드렸는데 저를 쫓아낸다고요?”“그렇죠.” 우경아가 가볍게 말했다.“민아 씨, 우리 팀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줘서 고마워요. 그쪽이 없어도 우리 팀이 이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니 이제 그쪽은 필요가 없죠.”강민아가 미소를 지었다.“우 대표님, 그냥 솔직하게 말하세요. 저한테서 원하는 게 뭔데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죠?”우경아가 말했다.“나랑 계속 일하고 싶으면 강승을 나한테 팔아요. 지금 그쪽이 강승의 결정권을 쥐고 있잖아요.”강민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우 대표님께선 얼마에 강승을 인수할 생각인데요?”우경아가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이미 40억 줬을 텐데요.”강민아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재계 마녀라고 불리는 우경아의 수법을 지금 그녀가 직접 겪고 있다.우경아가 재계에서 아무런 불이익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반하준이 열이 나는 것 같습니다.”“약은 먹였어요?” 강민아의 목소리는 무심했고 경호원이 그녀에게 답했다.“먹지 않겠다는 걸 억지로 먹였더니 제 동료의 손을 물었어요.”그가 덧붙였다.“기어코 강민아 씨를 만나겠답니다.”반하준을 감금한 다음 날 음식을 가져다준 것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그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강민아는 남자를 아무리 때려도 아무런 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앞서 우경아가 장기명을 무참히 짓밟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누군가를 때리는 것이 정말 그렇게 즐거운 일인지 의아해했다.분명 분이 풀리니까 강성진도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겠지.하지만 강민아는 반하준을 아무리 때려도 별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상대를 짓밟고 괴롭히는 것에서 쾌감이나 만족감을 얻지는 못했다.반하준이 지금 갇혀 있어도 그를 보러 가기 싫었고 심지어 그의 몸에서 나는 악취가 그녀에게 옮는 것 같아 역겨웠다.경호원이 말했다.“지난 며칠 동안 음식을 가져다주었는데도 먹지 않고 그날 가져다준 죽만 달라고 아우성칩니다.”신이 정성 들여 만들어도 저렇게까지 미친놈으로 만들진 못할 거다.강민아는 마음속으로 저주했다.“몸에 난 상처는 다 나았죠?”“네.”“어떠한 흔적도 보이지 않나요?”강민아가 다시 한번 확인했다.“네, 의학적인 방법으로도 더 이상 몸에 있는 상처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강민아는 며칠 동안 반하준의 몸에 있던 상처가 최대한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경호원들에게 반하준의 손목을 묶고 있던 수갑을 조금 풀어주라고 했다.경호원들은 수갑을 풀면 반하준이 도망칠까 봐 걱정되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순찰을 강화했다.하지만 며칠 동안 순찰을 하여도 반하준이 수갑을 풀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경호원들은 반하준이 너무 배가 고파서 탈출을 시도할 힘도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다.강미아가 그들에게 지시했다.“기절시킨 다음 주사를 놓고 병을 매달아 풀어주세요.”경호원이 정중하게 답했다.“네...”...질퍽한 땀방울이 반하준의 이마를 타고
오소정은 반하준의 질문에 어리둥절했다.“대표님 출장 다녀오셨잖아요.”이번엔 반하준이 당황할 차례였다.그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누가 그러던가요?”반하준의 질문에 그녀는 형언할 수 없이 이상하고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네? 저는 며칠 전에 출장 갔다고 전해 들었는데요.”반하준은 그제야 반용화가 둘러댄 핑계라는 걸 알아차렸다.그가 수감된 7일 동안 반씨 가문 안팎에서는 아무도 그가 실종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모두 그가 출장을 갔다고만 생각했다.반하준은 서재에 들어섰다.반씨 가문 대문에 설치된 CCTV를 확인한 그는 어젯밤 새벽에 기사 이기훈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했다.오소정과 다른 도우미들이 그를 맞이하러 나왔지만 그들은 반하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이기훈에게 물었지만 그는 어젯밤 반하준의 연락을 받고 11시 20분에 라이언 클럽에 데리러 왔단다. 그곳에서 반하준은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반하준이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상태를 보고 그도 놀랐지만 고용주에게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이기훈이 자리를 뜬 후 반하준은 업무 스케줄을 확인했다.업무 일정표에는 그가 비즈니스 차 리조트에 가는데 비밀 일정이라고 표기되어 다들 리조트에서 일주일을 보낸 줄로만 알고 있다.그는 휴대폰을 꺼냈다.방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 머리맡에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반하준이 휴대폰 기록을 살펴보자 갇혀 있는 동안에도 휴대폰은 정상적으로 전화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기록이 남아 있었다.이메일을 클릭하니 누군가 그를 대신해 메일로 업무를 독촉했는데 말투나 사용하는 단어가 평소 그가 쓰는 것과 똑같았다.그는 통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통신사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내 반하준은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로 누군가 여러 기업의 대표나 그의 지인들과 대화하는 목소리를 들었다.상대는 그의 업무와 사생활을 완벽하게 장악했다.그만 알고 있는 사업 비밀도 그를 대신해 전화를 받고 연기한 사람이 전부 알고
이것 역시 그의 실종과 복귀를 반용화가 조종하고 있다는 의미였다.식당으로 들어선 반하준은 익숙한 음식을 바라보며 문득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하준아, 너 왔구나.”오랜만에 아들을 본 연진숙이 안으로 들어섰다.“어머니.”반하준이 무심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자리에 앉아 아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포크를 든 반하준은 즐겨 먹는 서양식 아침 식사를 앞에 두고도 전혀 입맛이 없었다.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지만 강민아가 가져다준 죽이 먹고 싶다는 충동이 더더욱 강하게 밀려왔다.“닭죽 좀 끓여주세요.”반하준의 지시에 오소정은 머뭇거렸다.“네? 그걸 끓이려면 최소 30분은 걸릴 텐데...”오소정이 연진숙을 힐끗 돌아보자 그녀가 경악하며 물었다.“왜 갑자기 그게 먹고 싶어? 죽은 배도 안 부르고 양식이 한식보다 영양가가 더 높지!”반하준은 오소정에게 말했다.“끓이세요.”“네네, 사모님께서 남겨둔 메모 확인해 볼게요.”‘사모님’이라는 말에 반하준의 가슴이 설레며 그가 오소정에게 물었다.“강민아가 뭘 남겼나요?”오소정이 걸음을 멈추었다.“사...”“지금 뭐라고 했어?”연진숙이 노려보자 오소정은 당황한 듯 말을 바꿨다.“강민아 씨가 전에 대표님과 도련님의 생활 습관과 식습관을 기록한 메모를 남겼어요.”반하준은 강민아가 오소정에게 메모를 남겼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갖고 와요.”오소정이 반하준에게 휴대폰을 넘겼다.“파일로 된 것 말고도 직접 프린트 해서 다른 도우미들에게 나눠주라고 했어요.”강민아가 남긴 메모 덕분에 도우미들은 그녀가 떠난 후에도 반하준과 민이를 챙길 수 있었다.반하준은 자신과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강민아의 메모를 살펴봤다.강민아는 그와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그렇게 사랑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애정이 식어버릴 수가 있나.반하준이 오소정에게 말했다.“이 메모 저한테도 하나 보내줘요.”오소정이 휴대폰을 가져가며 답했다.“네.”“그걸로 뭐 하려고?”연진숙이 묻자 반하준은 싸늘하게
연진숙도 조금 놀랐다. 평소 같으면 반하준은 그 이름을 거론하지도 않았을 거다.“하준아, 요즘 강민아와 만난 적 있니?”반하준의 얼굴이 다소 어색하게 바뀌며 서늘하고 무심한 표정이 잘생긴 얼굴 위로 드리웠다. 어머니 앞에서도 그는 여전히 차가운 모습을 보였다.“아니요.”연진숙 역시 아들이 강민아와 다시 엮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걔는 어쩌다 운 좋게 강승의 임시 대표가 됐어.”연진숙은 누가 봐도 조롱 섞인 어투로 말하며 강민아가 강승의 임시 대표가 된 것을 못마땅해했다.“우리 집에 있을 때 집안 살림도 못하던 애가 무슨 회사를 경영한다고, 허!”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 비웃던 연진숙은 반하준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어차피 강승 테크는 곧 팔릴 거니까 며칠 대표 노릇이나 해보라고 해.”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강민아에 대한 악의에 반하준은 불쾌함을 느꼈다.“어머니, 스프링 가든에 간 적 있어요?”반하준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찾으러 스프링 가든에 간 건 아닌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가 출장을 갔다고 생각했기에 연진숙도 속았을지 모른다.아들이 스프링 가든을 언급하자 연진숙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날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렸다.출장을 갔던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그 일에 관해 묻는 걸 보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아들의 눈을 피해 갈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연진숙은 반하준이 자신을 걱정한다고 생각했다.“난 괜찮아. 강민아가 사는 동네가 어찌나 후진지 엘리베이터도 고장이 나더라.”연진숙의 반응을 보며 반하준은 그녀가 자신이 스프링 가든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확신했다. 그게 아니면 이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반하준이 물었다.“거기서 뭐 했어요?”“너한테 문자 보냈는데 못 봤어? 민이가 망할 계집애가 가져온 걸 먹고 토했어.”평소 반하준은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고 회사 일로 바쁘기 때문에 연진숙이 아이 문제로 귀찮게 구는 경우는 드물었다.보통
“근데 걔가 다른 건물로 가더라? 친구 만나러 갔겠지. 그러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얼마 안 돼서 고장이 난 거야. 나랑 경호원들이 밤새 엘리베이터에서...”연진숙은 얼굴을 감싼 채 자신이 겪은 끔찍한 일을 아들에게 털어놓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고 연진숙은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바지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반씨 가문으로 돌아온 연진숙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갇혀 있던 경호원들을 전부 해고했다.그들을 볼 때마다 스프링 가든에서의 굴욕적인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오소정이 닭죽을 끓여서 가져오자 반하준은 한 입 먹어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강민아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요리했어요?”반하준이 묻자 오소정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강민아 씨가 알려준 재료들을 1그램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췄어요.”하지만 반씨 가문 도우미들이 아무리 강민아가 적어준 대로 죽을 끓여도 반하준의 기억 속 그 맛을 살리지는 못했다.그래도 그는 숟가락을 내려놓는 대신 천천히 죽을 먹기 시작했다.연진숙은 복잡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이른 아침부터 닭죽을 먹는 건 연진숙의 눈에 공공장소에서 돼지 밥을 먹는 것과 다름없었다.“하준아, 왜 갑자기 죽을 먹어?”남자는 죽이 담긴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오늘부터 우리 집의 모든 음식은 강민아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만드세요.”연진숙이 입을 벙긋했다.“너 왜...”“그 여자가 만든 음식을 먹는 게 익숙해요.”반하준은 조금도 상의할 여지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연진숙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꼭 아들이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반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도 연진숙은 몇초간 식탁 앞에 멍하니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믿을만한 사설 탐정에게 연락했다.“우리 아들이 요즘 강민아와 만난 적이 있는지 알아봐요.”...깊은 밤, 한 클럽 룸 안에서 반하준은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비워진 잔을 테이블 위에 무겁게 내려놓았다.“따라!”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
심은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하준 저 자식이 강민아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있다.조금 전까지 약에 취했어도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심은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더니, 강민아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경멸하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 대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강나현이 왜 기절했지? 옷은 네가 벗긴 거야?”반하준과 강나현 둘이 짠 계략을 반하준의 입으로 직접 말하길 원했다.그들이 먼저 반하준이 한 짓을 밝히면 오히려 반하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심은호와 강민아는 반하준이 본인이 만든 난장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다.“아니야!”반하준은 곧바로 부인했다.“강나현이 약에 취해 직접 옷을 벗고 여러 번 나를 덮치려고 했어. 난 그저 때려서 기절시킨 것뿐이야!”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아의 눈치를 살폈다.자기 몸이 더럽혀졌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반하준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강나현이 나를 묶어두려고 수갑까지 채웠어!”금속 수갑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반하준이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살갗이 베인 것이다.일부는 살을 파고들어 피와 살이 드러나 끔찍하기까지 했다.손목의 잘린 살점들이 수갑에 뭉쳐있어 하얀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어이쿠!”다친 반하준의 손을 본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충격과 슬픔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반하준을 탓할 수가 없었다.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반하준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강나현을 기절시켰는데 강나현의 능력으로 어떻게 반하준의 손에 수갑을 채우겠나.반하준이 직접 손에 수갑을 찬 게 분명했다.심은호도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단지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려고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었다.서경에서 강나현을 제일 싸고돌았던 그조차 그녀를 버렸다.아마 오늘 밤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강나현이 반하
강민아는 휴게실로 향했다. 반하준의 계획을 파악하자마자 심은호에게 알리고, 그걸 이용해 반하준과 강나현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그녀는 내내 어떻게 두 사람의 계획을 폭로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직접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면 반하준은 오히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며 적반하장으로 굴게 분명하다.이제 심은호가 칼을 건넸으니 그녀는 반하준과 강나현을 폭로하기 위해 휘두르면 그만이다.강민아가 사람을 시켜 열쇠를 가져와 방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콜록!”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뒤로 여러 개의 머리와 크게 뜬 눈이 호기심 가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조심해요!”심은호가 선두로 앞장서자 강민아는 그 뒤를 따랐다.그때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기절한 듯했다.심은호는 역겨운 듯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는 옷을 얇게 입은 강나현의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순간, 어두운 구석에서 반하준이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강민아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구석에 기대어 앉은 반하준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었고 옷깃이 활짝 열린 채 가슴에는 새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젖은 이마에 붙어 있었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그가 홱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강민아를 주시했다. 이젠 이 방을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지금 여기서 나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강민아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그들은 반하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반... 반 대표 맞아?”“하준아, 너 어떻게 강나현이랑... 세상에! 남들이
강민아는 태산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반하준과 강나현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일 거다.반하준은 강나현과 짜고 파티에서 심은호의 스캔들을 폭로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멍청한 상대와 손을 잡았고 강승 테크 내부를 장악한 강민아의 능력을 간과했다. 반하준은 강승 테크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직원과 접선할 때 그들이 강민아에게 반하준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걸 알릴 줄은 몰랐을 거다.강민아는 그들이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반하준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제외하고 남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누구는 휴게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구는 파티에서 심은호에게 술을 건네며, 또 다른 사람은 담당자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방에서 술에 약을 타는 역할을 했다.그 모든 정보가 강민아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반하준이 심은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전부 파악했다.그리고 강나현은 그중 한 직원에게 약물을 건네는 역할이었다.일부러 디퓨저까지 사서 휴게실에 놓는 걸 강민아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강나현과 반하준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디퓨저와 카메라가 있는 방을 바꾸었다.반하준이 심은호의 몸에 와인을 뿌렸을 때 그가 곧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다.강민아는 오늘 초대된 재벌가 거물급 인사들에게 반하준의 비열한 물밑 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민아 씨!!”갑자기 장내에서 심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심은호가 황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심은호의 얼굴은 다소 하얗게 질렸고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심 대표, 왜 그래?”누군가 묻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몰려들었다.심은호는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방금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들어갔더니 반하준과 강나현이...”심은호는 머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