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심은호는 예쁜 눈을 가늘게 뜬 채 핏줄마저 튀어나온 반하준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반하준, 왜 안 웃어? 원래 잘 안 웃나?”강민아는 자신의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 눈앞에 반하준의 몸이 떨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닌지 의아했다.전남편은 적잖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육성민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라 오히려 침착하게 한 손에는 심은호의 진료기록을, 다른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검색하고 있었다.[구슬 넣는 좋은 점]‘아, 거기에 구슬을 넣는 거구나! 이게 가능해?’이미 모든 면에서 태생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심은호도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니!검색을 마친 육성민은 심은호를 감탄하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저런 근면 성실함은 따라 배워야 한다.그때 육성민의 귀에 반하준의 욕설이 들렸다.“천박하긴!”반하준은 심은호를 경멸했다.“태산 그룹의 후계자가 업소 제비처럼 고작 여자의 마음이나 얻으려고 구슬을 넣을 줄이야.”반하준의 욕설에도 심은호는 더더욱 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질투 나서 욕하는 거야? 넌 민아 씨한테 잘 보일 자격도 없잖아.”반하준의 심장이 철렁하며 거대한 충격에 폭탄이 몸속에서 터진 듯 영혼까지 송두리째 파괴당한 것 같았다.그의 눈에 심은호의 미소는 그토록 비열해 보여 목구멍에서부터 차가운 경멸의 비웃음이 흘러나왔다.“내가 이혼만 안 했어도 네가 나설 자리는 없었어.”심은호는 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더욱 얄밉게 웃었다.“이제 내 차례가 됐네. 반하준, 고마워.”반하준의 얼음장 속에 갇힌 것 같았다.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다.그가 강민아에게 소홀히 하고 그녀의 감정까지 전부 차갑게 식게 만들었다.반하준은 자신이 강민아를 밀어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히 알았다.육성민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구슬 넣으려고 비뇨기과에 온 겁
강민아가 심은호와 함께 떠나는 것을 보는 순간 반하준은 밀려오는 상실감에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강민아!”반하준은 고함을 질렀다. 주위의 공기가 끈적끈적하고 무거워져 숨쉬기가 힘들었다. 가슴이 심하게 들썩거리며 얼굴마저 점차 창백한 종잇장처럼 변해갔다.“다시 한번 모든 걸 되돌릴 기회를 줄게. 넌 여전히 내 아내고 민이의 엄마야. 강승에 투자해서 계속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도와줄게. 난 그냥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가면 돼.”반하준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그가 말할 때마다 몸의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여전히 오만하고 고고한 태도였지만 눈가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말로는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는 데 몸은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있었다.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강민아의 두 눈에는 무심함과 냉정함, 짜증 섞인 혐오만 가득했다.“반하준, 후회돼?”그녀의 말에 허를 찔린 남자는 입술만 달싹였고 강민아는 말을 이어갔다.“난 당신 아내가 된 것도, 민이의 엄마가 된 것도, 모든 걸 버리고 떠난 것도 후회하지 않아. 난 이제 더 이상 당신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니까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심은호가 손을 내밀어 길고 힘 있는 손가락으로 강민아와 깍지를 꼈다.맞물린 두 손을 본 반하준의 동공이 급격히 움츠러들었다.지금 이 순간 다른 남자와 두 손을 맞잡는 게 반하준에겐 치명타가 될 거다.강민아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반하준을 불렀다.보이지 않는 실이 남자의 심장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강민아의 말에 그가 황급히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한때 당신에게 수없이 실망한 후 혼자서 되뇌던 말이 있는데 이젠 그걸 당신에게 해야 할 것 같네. 열리지 않는 문을 자꾸 두드리는 건 무례한 짓이야.”강민아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고 심은호는 뒤를 돌아보며 가만히 서 있는 반하준과 육성민을 향해 승리자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반하준이 그렇게 못난 표정
“반하준은 절대 그쪽 진료기록을 공개하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사람들이 태산 그룹에서 강승 테크를 인수하는 것에 주목하고 본인에게 좋을 게 없으니까. 하지만 그쪽 진료기록을 훔쳐 간 사실에 대해선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저 사람이 질책받고 억울해도 할 말이 없게 만들 거예요.”강민아는 냉정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반하준을 바라보다가 심은호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남자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린 채 한쪽 팔꿈치를 핸들에 얹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매혹적이고 예쁜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보는 모습에 강민아는 초조한 듯 물었다.“그쪽 생각은 어때요?”반하준을 골탕 먹일 생각이지만 심은호의 사생활과도 관련이 있었다.남자가 얇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난 민아 씨의 이런 모습이 좋아요.”갑작스러운 고백에 강민아의 볼은 금세 뜨거워졌다. 그는 늘 몇 마디 말로 쉽게 그녀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반하준이 날 괴롭히지 못하게 지켜주고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건, 내가 민아 씨 편이고 민아 씨에게 내가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겠죠?”공기가 통하지 않는 밀폐된 차 안에서 둘만 앉아 있으니 강민아는 약간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무의식중에 소매 사이로 살짝 비치는 구슬 팔찌를 본 순간, 강민아는 목이 타면서 가슴 속에 수천마리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 같았다.“그쪽처럼 노골적으로 저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강민아는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허리와 배 쪽으로 시선이 갔다.하얀 손목에 차고 있던 구슬 팔찌가 달군 돌처럼 뜨겁게 느껴지며 강민아는 마음속으로 아우성쳤다.‘보지 말자!’그녀는 황급히 얼굴을 돌려 차창 밖을 흘끔거렸다.“왜 갑자기 그런 수술을 하게 된 거예요?”“저 개자식이 그쪽으로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민아 씨도 경험이 있으니까 당연히 비교하게 되잖아요. 정말로 언젠가 민아 씨가 원하면 어떤 남자한테도 지고 싶지 않았어요.”심은호의 시선이 육성민을 스쳐 지나가며 말을 이어갔다.“태생적으로 타고난 사람들과 비교가 되진
정이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책가방 끈을 배배 꼬았다.“엄마!”강민아를 향해 걸어가는 아이의 양쪽으로 땋은 머리가 이미 잔뜩 흐트러져 걸을 때마다 흔들리고 있었다.강민아를 보자마자 아이의 눈빛이 환해지며 통통한 볼이 살짝 올라가더니 축 처진 입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정이는 강민아를 향해 달려갈 때쯤 느슨하게 묶여있던 머리가 완전히 풀려버렸다.강민아는 쪼그리고 앉아 끝에 겨우 매달려 있는 머리끈을 가져가서 다시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오늘 체육 수업 있었어?”그녀가 기억하기론 오늘 체육 수업이 없는데 왜 머리가 엉망이 됐을까.“오후에 축제에 할 공연 연습했어요.”말하면서 정이는 볼을 살짝 부풀리더니 반짝이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민아야!”저 멀리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와 강민아가 고개를 들어보니 반진경이 반연주의 손을 잡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저 여자가 나타나면 좋은 일이 없었다.반연주의 얼굴이 백지장보다 더 창백했고 가까이 다가왔을 땐 눈가에 검푸른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었다.“민아 이모.”강민아에게 인사를 건네는 아이의 입술은 마치 얇은 꽃잎처럼 핏기가 조금도 없었다.강민아는 가방을 뒤져 늘 구비하고 다니는 과일 사탕을 꺼냈다. “너 저혈당 왔어?”사탕을 건네자 반연주가 까만 눈동자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손을 뻗으려는 순간 반진경이 강민아의 손을 쳐냈다.“뭐 하는 거야! 과일 사탕이 얼마나 몸에 안 좋은데! 연주한테 주면 안 돼.”“저혈당인 것 같아요. 입술에 핏기가 없잖아요.”“연주는 원래 이래. 핏기 없는 입술이 사람의 연민을 불러오는 거지. 네가 뭘 알아?”반진경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자 강민아는 말을 섞기 싫어 손에 든 과일 사탕을 정이에게 건넸다.정이는 반진경의 시선을 피해 반연주 쪽으로 가더니 과일 사탕을 반연주의 주머니에 몰래 집어넣었다.반연주도 정이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치마 주머니를 살며시 움켜쥐었다. 반진경이 워낙 엄하게 굴어 언제 그녀 몰래 과일 사탕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반
짜악!강민아가 손을 들어 반진경의 얼굴을 가볍게 때리자 반진경의 목소리가 바로 멈췄다.“너!”반진경이 화를 냈다.“반진경 씨, 그쪽이 뿌린 향수에 벌레가 왜 이렇게 꼬여요? 머리 위에 온통 검은색 벌레들만 가득하네요.”강민아가 말하며 반진경의 머리를 툭툭 때렸다.“머리에 벌레들이 막 기어다녀요. 너무 징그럽네요.”강민아의 말에 반진경은 두피가 가려워져 덩달아 자기 머리를 두드리며 반연주에게 물었다.“내 머리에 벌레가 있어?”정이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싫었던 반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네.”“꺄아악! 빨리 가, 빨리!”반진경은 소리를 지르며 반연주의 손을 잡고 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강민아는 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가자.”정이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선생님께서 공연복 주면서 다이어트해야 한대요.”강민아는 정이의 통통하고 말랑한 손을 잡았다.“전에 엄마가 헬스장에서 체지방 측정했을 때 넌 체지방이 적고 전부 근육이라 코치님도 아주 건강하다고 했어. 운동에 타고난 체질이라고. 정아, 넌 뚱뚱하지 않아. 매일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면 다른 여자애들보다 훨씬 훌륭한 몸을 가질 수 있어.”정이는 한 손으로 책가방 끈을 당기며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하지만 난 이러면 남들과 다르잖아요. 연습할 때도 나만 어울리지 못했어요.”강민아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그러니까 무대 위에서 네가 제일 특별하고 눈에 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강민아의 말을 듣던 정이의 발걸음이 멈췄고, 아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초승달처럼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바라보던 강민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이건 너한테 공연복을 준 선생님이 잘못했어. 널 다르게 차별하면 안 됐어. 저녁에 엄마가 담임 선생님께 전화해서 제대로 물어볼게. 만약 백조의 호수 추는 게 싫으면 안 해도 돼. 넌 포기할 권리가 있지만 남의 눈치를 보느라 널 바꿀 필요는 없어. 정아, 널 믿어. 넌 어디서든 반짝반짝 빛날 수 있어...”정이의 눈시울
우경아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옆에 누워 있던 또 다른 근육질의 남자가 가운을 가져와 그녀에게 덮어주었다.휴대폰을 들고 있던 남자는 여전히 휴대폰을 우경아의 귀에 대고 있었다.풍성한 브라운 웨이브 머릿결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태생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은 화장하지 않아도 매혹적이었다.“그럴 리가 없어. 전에는 그 여자가 제시한 모델 프레임이 최적이라며?”“강민아가 너무 최신형으로 작성해서 8천 개의 그래픽 카드가 동시에 돌아가는데 어느 단계부터 조정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 망가진 데이터가 돌아가면서 메모리를 소모하고 있는데, 전체 프레임이 효과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데이터를 선별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물적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에요.”우경아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알아듣게 얘기해.”통화 상대가 말했다.“저희는 강민아가 제시한 대형 모델 프레임을 운행할 수가 없어요. 오늘 10시 전에 멜트다운 메커니즘을 가동하고 대체 프레임을 선택하면 200억 정도 손해를 봐요. 강민아가 제시한 프레임으로 하면 개발자가 실시간으로 조치하고 리드하지 않아 최소 손해비용만 천억이에요. 어느 쪽이든 다음 달에 저희가 윗선에 투자 금액을 돌려줄 수가 없다는 뜻이죠.”우경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불쾌함을 잔뜩 내비쳤다.이미 강민아를 아웃시켰는데 어떻게 다시 데려와 개발에 참여하게 한단 말인가.우경아가 말했다.“옴 테크 전문가들에게 가서 한번 봐달라고 해. 강민아가 준 데이터 프레임을 디버깅할 수 있을 거야.”전화기 너머 상대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우경아가 옴 테크의 전문가를 언급하자 대답만 했다.“알겠어요.”우경아는 부하직원의 전화 한 통으로 이른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휴대폰을 들고 있던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우 대표님, 정 등을 돌릴 생각이라면 다시 돌아와 저한테 손 내밀 일이 없길 바라셔야 할 거예요.]강민아가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우경아는 프로젝트의 성과를 혼자 독식할 목적으로 이런 수작을 부린 게 처음도 아니었기에 경멸에
민설윤의 어머니도 이를 알고 있었다.“선생님이 초등부까지 가서 도움을 청하려 했어요.”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를 뽑아 리프트를 시켜도 동작이 예뻐야 하기에 손이 떨리지 않을 때까지 연습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민설윤의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결국 보다 못한 따님이 반 애들과 자주 하는 동작이라고 나섰어요. 연주를 들고 몇 바퀴를 돌아도 지치지 않더라고요.”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민설윤의 어머니 정고은은 한때 서경 극단에서 수석 무용수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전문가였지만 업계에서 정고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었다.그래서 햇님반 아이들이 춤 연습을 할 때면 선생님은 정고은을 불러 따로 지도를 부탁했다.강민아가 물었다.“윤정이한테 연주를 드는 동작을 맡긴 게 그쪽이에요?”보통 남자가 하는 동작인데 춤 선생님의 태도로 봤을 때 정이가 쉽게 반연주를 들어 올려도 무대에서 저런 동작을 시키진 않았을 것 같았다.정고은이 강민아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따님 재능이 있어요. 계속 지켜봐요.”강민아는 정이가 발끝을 세우고 공중에서 열두 바퀴나 도는 모습을 보았다. 크리스털이 박힌 스커트는 조명 아래에서 얼음 회오리를 만들어냈다.연이어 멈추지 않고 동작을 이어가니 발이 나무 바닥에 부딪히며 딱딱 소리를 냈다.열두번의 회전과 세 번의 큰 점프가 이어지며 정이의 뒷다리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몇 미터 밖에서도 들렸다.객석에 있던 부모들은 충격에 감탄을 질렀고 반진경은 얼굴이 확 일그러지며 소리를 질렀다.“왜 강윤정한테 저렇게 많은 고난도 동작을 시켜요? 우리 연주가 센터인데!”보다 못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고은에게 다가갔다.“이봐요! 그쪽이 강윤정한테 저런 동작 시켰죠? 전에 연습할 때랑 다르잖아요!”정고은은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윤정이가 워낙 재능이 많고 뭐든지 빨리 배워요. 능력이 있으니 고난도 동작을 맡기
춤 선생님의 이름은 허시연, 며칠 전 강민아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그녀의 연락처를 받아 정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아이들에게 신체적인 모욕을 주지 말라고 명확하게 말했지만 상대는 그저 건성건성 대답할 뿐이었다.나중에 이번 공연의 보조 교사를 맡은 정고은에게 연락해서 정이가 아주 잘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강민아는 어느 정도 안심했다.하지만 지금 허시연이 이렇게 말하자 정이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숙이고 통통한 손으로 강민아의 옷자락만 만졌다.강민아는 딸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허 선생님, 이번 무대 사고는 나무 바닥이 갈라진 탓이에요. 무대를 지은 지 20년이 넘었고 구멍이 생겼다는 건 안에 벌레가 먹었다는 뜻이죠. 지금은 같은 사고가 벌어지지 않게 사람을 불러 바닥을 수리하는 게 먼저인 것 같은데요.”강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시연이 대꾸했다.“윤정이 엄마로서 아이가 무리에 어울리지 못한다는 생각은 안 하겠죠. 강윤정은 몸이 우둔해서 발레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설윤 어머님께도 턴을 시키지 말라고 말씀드렸는데, 열두번이나 빙빙 돌면 그게 뚱뚱한 팽이와 다를 게 뭐가 있어요?”허시연이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어이없다는 듯 얼굴에 드리운 한 가닥의 머리카락을 불어넘기자 정이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허 선생님이 저 싫어하는 거 알아요.”허시연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러운 얼굴로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윤정아, 선생님이 왜 널 싫어해? 네가 춤에 있어서 타고난 조건이 부족한 거야. 체형이 안 좋은 건 엄마한테 왜 다이어트를 시키지 않았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은 모두를 생각해서 너 하나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공연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정고은이 다가왔다.“제가 볼 땐 강윤정이 이 공연의 가장 큰 하이라이트인데요. 얘가 있으니 햇님반은 이번 축제에서 3등 안에 들 거예요.”허시연의 눈가에 경멸의 비웃음이 스쳤다.“설윤 어머님, 서경 극단의 에이스였지만 햇님반 아이들의 보조 교사를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