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학부모는 자리에 앉아 그들의 논쟁에 끼어들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방금 찍은 영상을 살짝 편집해서 인터넷에 올렸다.“강윤정이 그만두지 않는다면 무대에서 망신당하게 놔두죠.”“사람들도 보는 눈이 있는데 우리 딸 공연을 망치면 인터넷에서 엄청난 물매를 맞을 거예요.”자리에 앉은 몇 명의 학부모들이 속삭이고 있었다.“엄마.”정이가 나지막이 부르자 강민아는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을 감쌌다.아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 손으로 가슴 앞에 달린 크리스털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두 눈에는 물기를 머금어 투명한 빛이 반짝였다.“저... 그만할래요.”정이는 결심했다. 공연 의상을 입을 때 다른 애들이 몰래 웃어서 물어보니 아이들은 뚱뚱해서 웃었다고 했다.뚱뚱하지 않고 아주 좋은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대에서 실수하니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강민아가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정아, 정말 그러고 싶어?”“네.”정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강민아는 늘 아이의 결정을 존중했다.정이는 손을 들어 머리에서 하얀 깃털 머리띠를 벗었다.긴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지자 강민아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뻗어 빗겨주었다.“비웃음당하고 싶지 않아요. 무대에서 춤을 출 때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 불편해요.”그렇게 말하며 정이는 허시연을 바라보았다.“선생님, 제가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세요. 괜히 여우짓 하지 마시고요. 전 고작 다섯살이라 그런 거 모르거든요.”허시연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하얀 얼굴이 일그러졌다.“무슨 소리야? 그런 말은 누구한테 배웠어?”정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아저씨가 가르쳐줬어요. 남을 해치진 않아도 당하고만 살지는 말라고. 여우짓도 배워둬야 저같이 나라의 미래가 될 어린이들을 해치는 사람들을 상대한다고요.”강민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정이를 바라보았다.“정아, 포기하는 법과 남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배웠네. 하지만 그만두는 것과 물러서는 건 달라. 엄마가 학교 측에 네 단독 무대를 신청하고 싶은데 한번 해볼래?”강민아의 말에
강민아는 반진경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았기에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허공에 불꽃이 튀며 타는 냄새가 났다.반씨 가문에서도 반진경은 강민아에게 그다지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고, 그땐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강민아도 의식적으로 반진경을 피했다.그런데 여전히 자신을 저격하는 그녀의 모습에 강민아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편견이란 게 한번 자리 잡으면 사라지기 어렵고 재벌일수록 원래 외부인을 경멸하는 경향이 강하다.반진경 역시 반하준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진심으로 경멸했다.강민아가 반씨 가문으로 시집온 순간부터 반진경은 그녀가 쫓겨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민아야, 얼른 학교 측 담당자한테 가봐. 늦게 가면 공연 순서가 확정돼서 정이 이름을 넣을 수 없을 테니까.”반진경은 싸늘한 눈동자로 입꼬리만 피식 올렸다. 그때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이렇게 덧붙였다.“그런데 너와 백 청장님 친분이면 공연이 확정되어도 네가 말만 하면 네 딸 공연을 준비해 줄 거야. 안 그래?”반진경의 말에 다른 학부모들의 표정이 달라졌다.허시연의 젊은 얼굴에는 분노의 표정이 역력했고 그녀는 강민아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역겨웠다!반진경으로부터 강민아와 백강훈 사이가 두텁다는 걸 전해 들었다. 백강훈이 강민아를 이렇게 싸고도는 걸 보니 고연대에 있을 때 진작 침대에서 뒹굴었나 보다.고연대에 다닐 때 강민아는 고작 몇살이었던가. 졸업한 그해에 그녀는 겨우 성인이었다.허시연은 가슴속에 분노가 치밀었다. 강민아는 백강훈과의 관계를 믿고 축제에서 딸의 단독 무대를 계획했던 거다.“그게 무슨 말이지?”화려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우경아는 굽이 얇은 하이힐을 신고 꼿꼿한 등을 드러낸 채 마치 고문 기구 위를 걷는 것처럼 반듯하게 걸어왔다.걸을 때마다 부드러운 곱슬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화장은 화려하고 도자기 같은 피부엔 서늘한 광이 뿜어져 나왔다.반진경은 우선 그녀의 옷차림을 살폈다. 그녀의 시선이 우경아의 몸에 걸친 딱
무대에 있던 강민아도 순간 멈칫했다.반진경은 떨리는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감싸며 눈을 크게 떴다.부은 뺨을 만지자 머리카락보다 가는 수백만 개의 바늘이 혈관을 뚫고 피부를 찢는 것만 같았다.반진경은 그제야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왜 날 때려요?”반진경이 빽 소리를 지르자 우경아는 그저 웃었다.눈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풍성한 속눈썹은 눈가에 내려앉은 나비가 날갯짓하듯 펄럭거렸다.“때리는 거로는 부족하지. 머리에 구멍을 뚫어 구정물을 다 내보내야 하니까.”우경아가 키 172에 15센티 하이힐까지 신으니 그녀 앞에 있는 반진경은 난쟁이처럼 보였다.그녀가 손으로 반진경의 머리를 가리키자 반진경은 또 뺨을 맞을까 봐 황급히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머릿속에 더러운 것만 가득 찬 걸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고 누가 모를 줄 알아? 누구는 헛소리할 줄 몰라서 가만히 있나? 감히 강민아와 교육청 백 청장님을 엮어? 반씨 가문은 이 바닥에서 사업 계속할 생각이 없나 봐.”“아니야!”반진경이 빽 소리를 지르자 우경아는 곧바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아악!”그녀가 비명을 지르면 우경아는 반대쪽 뺨을 때렸다.하도 매섭게 때려 반진경의 두 뺨이 대칭을 이루며 부풀어 올랐다.“당신 누구야? 난 강민아한테 말한 건데 왜 날 때려?”반진경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면서 우경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혹시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백 청장님의 아내인가?’그건 아니다.그녀는 백강훈의 아내를 본 적이 있다.“그만해요!”옆에 있던 다른 학부모들이 말렸고 허시연이 서둘러 무대에서 내려왔다.“사람이 왜 그렇게 무례해요? 어떻게 바로 손을 댈 수가 있죠?”반진경은 반씨 가문 사람이니 지금 그녀를 감싸준다면 바로 반진경의 은인이 될 수 있었다.허시연은 그 생각에 반진경을 뒤로 보내며 감쌌다.짜악!우경아가 뺨을 때리자 허시연은 머릿속이 윙윙거렸다.무대에 있던 강민아는 조용히 손을 뻗어 정이의 눈을 가렸다.우경아의 전투력은 실로 대단했다.“당신이
반진경이 우경아를 보고 단번에 떠오른 생각은 예쁜 여자라는 거다. 큰 키에 작고 섬세한 얼굴,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처럼 얼굴 하나만으로 큰 임팩트를 주는 사람이 드물었다.“어느 학생 학부모든 감히 선생님을 때렸으니 학교 측에 알릴 거예요!”허시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우씨 성이 흔한 것도 아닌데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는 없었다.우경아와 강민아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살펴보니, 우경아가 지나치게 젊지만 않았어도 강민아의 엄마라고 해도 믿을 만큼 둘은 닮았다.반진경은 퉁퉁 부은 얼굴을 감싼 채 우경아를 향해 아부 섞인 미소를 지었다. 마치 볼에 견과류를 가득 채운 다람쥐처럼 보였다.“우 대표님, 전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우경아의 매서운 눈동자가 싸늘해지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더니 스스로 본인 뺨을 때렸다.“제가 잘못했어요. 홧김에 말실수했네요. 우 대표님,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허시연은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 빠르게 변하는 반진경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우경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반진경에게 물었다.“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인가요?”반진경은 꽉 깨문 잇새로 작게 말했다.“당신 월급을 주는 은행이 우씨 가문 거야.”이 한마디에 허시연은 얼굴 전체가 창백해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국내 5대 은행 중 하나가 우씨 가문 소유라면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부신 그룹보다 더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가 아닌가.순간 허시연의 이마에서 굵직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왜 나한테 사과하지?”우경아는 반진경에게 이렇게 말하며 강민아를 돌아보았다.반진경은 입가에 비릿한 피 맛과 함께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강민아가 반씨 가문으로 시집온 순간부터 강민아의 신분을 우습게 여긴 그녀였다. 강성진의 비열하고 역겨운 얼굴과 도민영의 멍청한 모습, 남자 무리에 섞인 강나현의 우스운 꼴을 봤었다. 게다가 강민아가 오랜 시간 시골 마을에 살면서 부신 그룹의 후원을 받아 겨우 대학을
정이가 두 손으로 강민아의 손을 잡더니 씩씩거리며 말했다.“엄마한테 사과문 써요!”“어림도 없어!”반진경이 매서운 눈빛으로 말을 내뱉자 정이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용감하게 나섰다.“축제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우리 엄마한테 쓴 사과문을 읽어요!”반진경은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웃다가 심호흡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소롭다는 어투로 정이에게 말했다.“그래, 내가 축제 무대에 올라 사람들 앞에서 사과문을 읽게 하려면 네가 1등을 해야 할 거야. 네가 무대에서 상을 받아야만 날 무대로 부를 자격이 있지 않겠어?”분노와 조롱이 뒤섞인 반진경의 머릿속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우경아가 때리는 뺨은 맞을 수 있어도 사과문을 쓰라는 건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고만 느꼈다.이런 수치심을 잠자코 견딜 리 없었던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강민아에게 말했다.“강윤정이 축제에서 1등 하면 너희 모녀가 대단한 걸 인정하고 기꺼이 사과도 할게. 강민아, 사과문은 쓰겠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읽는 건 네 능력에 달렸어.”정이 혼자 축제에서 1등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렇듯 오만하게 말할 수 있었다.아이가 혼자 진행하는 공연이 무대에 오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니까.반진경은 하늘이 뒤집혀도 그럴 일은 없다는 생각에 오만방자하게 거들먹거리고 있었다.강민아도 그녀의 꿍꿍이를 알아차렸다. 사과문은커녕 반진경이 높게 쳐든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사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정이가 강민아보다 먼저 말을 꺼냈다.“전 축제에 참여할 거예요. 축제에서 공연할 거라고요!”아이는 속으로 반드시 1등을 할 거라고 다짐했다.이번에는 엄마를 위해서 신념과 의지를 불태우련다.강민아의 손이 정이의 어깨를 살며시 누르며 반진경에게 말했다.“사과문 내용이 무척 기대되네요.”반진경의 호흡이 가빠졌다. 반씨 가문에서도 강민아는 늘 고고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출신이 비천한 게 날개를 달았다고 감
그녀가 우경아에게 손짓하자 둘은 강당의 한적한 구석에 앉았다.반진경은 빨갛게 부어오르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싼 채 강민아와 우경아가 있는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허시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우 대표라는 사람 대단한 분인가요?”반진경이 콧방귀를 뀌었다.“너 같은 건 벌레보다 더 쉽게 죽이는 사람이야.”허시연은 찬 공기를 훅 들이키며 동공마저 흔들렸다. 자신이 우경아에게 실례를 범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허시연은 두 다리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놀라서 반진경의 팔을 붙잡는 그는 온몸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져 내렸다.“사모님... 우 대표님께 말씀 좀 잘해줄 수 있나요? 저같이 비천한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데 무례를 범했어요.”반진경은 싫은 기색을 내비치며 자기 팔을 잡은 허시연의 손을 뿌리치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쏘아붙였다.“내 코가 석 자인데 널 어떻게 도와줘?”멍청한 허시연의 모습에 반진경은 역겨운 눈빛을 보냈다. 하찮은 평민은 우경아 앞에서 떠도는 하루살이와 다름없었다.강민아도 허시연처럼 반씨 가문 사람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기어야 하는데, 정작 그녀는 반진경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반진경은 차갑게 지시를 내렸다.“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우리 연주가 무대에서 돋보이게 하는 거야. 연주를 센터에 세웠는데도 상을 못 받으면...”반진경이 아니꼽게 허시연을 흘겨보자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살갑게 말했다.“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연주는 춤에 재능이 있어요. 꼭 무대 위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게 할게요.”반진경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허시연에게 햇님반 아이들의 연습을 계속하라고 말했다.강민아 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둘이 어쩌다 가까워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반진경은 휴대폰을 꺼내 장기명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는 그녀의 전화를 끊어버렸다.혀를 차며 또다시 전화를 걸어 한참 동안 기다려서야 연락이 닿았다.“여보세요. 나 바빠!”“우영 그룹 우 대표가 강민아를 만나러 승덕까지 왔어.”‘우 대
강민아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너무 일찍 저에게 등 돌린 걸 후회하고 계시네요.”“강민아 씨, 우리한테 넘겨준 데이터를 조작한 거죠?”우경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빛에는 극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그녀에게서 음산한 냉기가 퍼져나갔지만 옆에 앉아 있던 강민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제가 왜 조작해요? 우 대표님 밑에 일하는 직원의 능력이 부족한 거죠. 섣불리 사람을 배신하니까 벌써 200억 정도 손해를 보셨죠?”팔짱을 낀 우경아의 정성껏 관리한 손톱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강민아의 말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그녀는 진작 자신이 없으면 우영 그룹의 양자 테크에서 억대 손해를 볼 것을 예상하였던 걸까?심지어 수백억을 손해 볼 때 우경아가 자신을 찾아올 거란 것도 예상했다.그 생각에 우경아는 살짝 놀랐다.조금 전 자신이 나타났을 때 강민아가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걸 떠올리며 우경아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여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민아 씨는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내가 그쪽을 오해했어요. 7년 동안 집안에만 갇혀 지낸 여자가 아무리 성적이 뛰어나도 별 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공부를 잘하는 건 아무 쓸데가 없어요. 날고 기는 천재도 이론만 빠삭하고 실전에는 멍청이니까. 확실히 그쪽은 날 놀라게 하네요.”강민아를 바라보는 우경아의 두 눈엔 그녀를 손에 쥐고 싶은 충동이 타올랐다.“강민아 씨, 우리 계속 같이 일합시다. 전에 일은 내가 미안했어요. 나는 지금 진심으로 협업을 제안하는 겁니다. 협업 말고도 여러 가지 도와줄 수 있어요. 예를 들면...”앞을 돌아보니 그녀에게 맞아서 얼굴이 부어오른 반진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무대 위에서 발레하는 반연주에게 시선이 향했다.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나랑 같이 일하면 그쪽 딸 센터로 만들어 줄게요.”“그건 됐어요.”강민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어른들 싸움에 아이들까지
우경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강민아에게 40억을 주고 쫓아냈는데 이제 그녀를 다시 데려오려니 상대가 4천억을 원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강민아가 4천억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다.우경아의 목구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사업을 하면서 피를 말리는 협력자나 경쟁자를 만나본 적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여전히 강민아 앞에서 여유로웠다. “강민아 씨, 이 바닥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당신에게 수익의 70%를 줄 수는 있어요. 투자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프로젝트 전체를 나한테 주지 않으면 전 그쪽이랑 일 안 해요.”“말도 안 되는 소리!”우경아가 낮게 윽박질렀다. 한 번도 그녀에게서 먹잇감을 통째로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다.강민아는 여전히 사람 좋은 표정으로 부드럽게 한숨을 쉬었다.“전 우 대표님이 무서워서 시작부터 많은 걸 바라는 거예요. 이미 한번 절 아웃시켜서 아직 마음이 불안하거든요. 저한테 큰 조각을 넘기기 싫고 수익의 100%를 넘기지 않는다면 전 그쪽이랑 일 안 해요. 세상은 저 없이 잘만 돌아가고 우 대표님은 저 말고 다른 사람 알아봐도 되니까요.”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경아를 지나쳐갔다.우경아는 자신이 소유한 양자 테크나 옴 테크에서 데려온 전문가들이 강민아가 건넨 대형 모델을 사흘 밤낮으로 연구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강민아!”그녀가 소리쳐 부르자 강민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우경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강성진과 도민영 사이에서 당신 같은 딸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강민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우 대표님, 칭찬 감사합니다.” 우경아의 목구멍에서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강민아를 만나러 직접 승덕까지 찾아오고 반씨 가문 사람과 무례한 교사까지 혼내줬으니 강민아가 은혜를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면 그녀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강민아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줄이야.우경아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