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는 7년 만에 다시 드림의 운전석에 앉았다.혈관 속의 수많은 세포들이 되살아나는 듯 엔진 소리에 맞춰 활발하게 움직였다.강민아는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고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지금 이 순간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심은호는 조수석에 앉아 스피드와 강렬한 충격을 즐겼다.오늘의 드림은 예전과 달랐다. 강민아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났다.“과속 딱지 끊기면 내 걸로 하면 돼요.”강민아는 흥분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아니에요. 과속으로 찍히면 내가 벌점 받을게요.”드림이 도로를 질주하면서 내는 굉음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방금 뭐가 지나가지 않았어?”“제비인가? 휙 하고 내 앞을 지나갔어.”“이 계절에 무슨 제비야. 귀신을 본 거겠지.”길 양쪽의 행인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강민아는 도로에서 강나현과 어울려 다니던 부잣집 도련님들을 다시 만났다. 그들의 튜닝 차량, 크게 틀어 놓은 음악, 번쩍이는 네온사인 불빛이 어두운 도로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드림은 교통 법규를 무시한 혼란스러운 차량들 속에서도 마음껏 누비고 다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부잣집 도련님들을 추월했다.“젠장. 뭐야, 저게?”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때 누군가가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하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대박. 드림이야. 살아있는 드림을 봤어. 국내 최초로 국제 랠리 대회에서 3위 안에 든 여성 레이서의 레이싱카가 바로 드림이야.”벌써 흥분해서 전화하는 사람도 있었다.“지금 당장 도로 CCTV를 알아봐. 드림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해.”“드림의 원래 차주가 오래전에 차를 팔았다던데. 7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드림을 1400억에 낙찰받았다고 들었어.”“방금 속도는 프로 레이서가 낸 속도겠지? 일반인이었다면 벌써 사고 났을 거야.”“드림의 차주를 꼭 만나야겠어. 차체라도 만져보면 한이 없겠다.”“여보세요? 나현아, 나 드림을 봤어. 진짜라니까.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블랙박스에 찍
교실 문 앞,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육성민을 에워쌌고 반하준은 계단 아래에 서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육성민을 쳐다보는 눈빛은 마치 높은 곳에 있는 신이 보잘것없는 개미 새끼 한 마리를 보는 듯했다.“정아, 이리 와. 아빠랑 집에 가자.”반하준의 말투는 무척이나 강압적이었다. 반우정이 육성민에게 다가가는 걸 본 순간 이미 딸에게 인내심을 잃어버린 상태였다.반우정이 반하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난 외삼촌이랑 집에 갈래요.”그러자 반하준이 차갑게 웃었다.“저 사람이 널 어디 데려갈 수 있는데? 집이나 있대? 정아, 저 사람을 따라가면 길바닥에서 자야 해.”“우정아.”그때 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우정은 강민아를 보자마자 신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하지만 반하준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강민아의 옆으로 갈 수 없었다.“엄마.”강민아는 안쓰러우면서도 미안했다.“엄마가 일이 있어서 늦었어. 정아, 미안해. 엄마가 약속할게. 앞으로 절대 너 혼자 어린이집에서 기다리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반우정은 그런 그녀를 이해했다.“알아요. 엄마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 그 일은 엄마의 인생을 바꿀 수 있잖아요. 우정이는 엄마한테 짐이 되지 않을 거예요.”반하준은 그 말을 왜곡해서 들은 듯했다.‘딸을 데리러 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 딸을 떼어놔야만 할 수 있는 일인 건가? 게다가 강민아의 인생까지 바꿀 수 있다고?’반하준의 시선이 강민아의 뒤에 있는 사람에게 멈췄다.‘심은호는 왜 온 거야?’반하준의 두 눈에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심은호가 강민아를 데려간 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두 사람이 허둥지둥 유치원에 달려왔다는 건...“강민아, 우리 아직 이혼 도장 안 찍었어.”반하준의 가슴속에 분노가 들끓었다.“어떻게 그새를 못 참고.”“난 당신이 하루빨리 내 삶에서 꺼져버렸으면 좋겠어. 반하준 씨, 우린 이미 이혼했어. 제발 좀 조용히 지낼 수 없어?”이 남자 때문에 하마터면 수학 경시대회에
“심은호 씨!”깜짝 놀란 강민아가 소리를 질렀다.심은호의 품에 안긴 반우정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정아, 다친 데 없지?”반우정이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바닥에서 일어나서야 심은호의 등에 금속 화살이 꽂힌 걸 보았다.반우정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반현민이 기계식 석궁을 뒤로 숨기는 걸 보았다.‘저 화살은 나현 이모가 현민이한테 준 건데.’반현민이 이런 짓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반하준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들이 사람을 다치게 한 것보다 심은호의 몸을 사리지 않는 행동이 더 신경이 쓰였다.반하준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반현민, 너 이리 와.”겁에 질린 반현민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아빠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정이 말을 안 들어서.”반현민을 쳐다보던 반우정은 순간 움찔했다. 지금의 반현민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반하준은 반현민이 들고 있는 기계식 석궁을 빼앗아 바닥에 내팽개쳤다.“어떻게 정이한테 화살을 쏠 수 있어? 이런 거 다시는 만지지도 마.”고개를 들자 강민아가 심은호를 부축하고 있었고 키가 훤칠한 심은호는 가냘픈 몸의 강민아에게 기대어 있었다.“심은호 씨, 괜찮아요? 구급차 부를게요.”“괜찮아요. 걸을 수 있으니까 병원에 데려다줘요.”육성민이 성큼성큼 다가와 강민아에게 말했다.“내가 부축할게.”그러자 심은호가 말했다.“민아 씨가 나보다 키가 작아서 기대고 있으면 등에 있는 상처가 땅기지 않아서요.”심은호가 반우정을 지키려다가 다친 것이었기에 강민아는 육성민에게 이렇게 말했다.“내가 부축할게.”반우정은 심은호의 옆에 바싹 붙어 다른 손을 잡았다.“아저씨,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심은호가 다정하게 말했다.“정이가 손을 잡아주니까 하나도 안 아파.”반우정은 심은호의 손을 꽉 잡고 한시도 놓지 않았다.그때 굉음이 들리더니 강나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심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구급차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피가 다 말라버리겠어. 날 죽게 내버려 두겠다는 거야?”급박한 상황이라 강민아는 더 이상 강나현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내려. 우물쭈물하지 말고 쓸데없는 소리도 그만해.”“혹시 사고라도 나면...”강나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보이지 않는 압력이 그녀의 온몸을 덮치는 것 같았다. 강민아와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름이 돋아 오토바이에 앉아 있다가 하마터면 중심을 잃을 뻔했다.강민아에게서 이렇게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나현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불안했다.“언니, 무리하면 안 돼.”“왜 이렇게 우물쭈물해? 너답지 않은데?”강나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그렇게 죽고 싶다면 말릴 이유가 없지. 차라리 얼굴부터 땅에 처박아서 콧대랑 이가 싹 다 부서져 버려.’강나현이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강민아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키 줘.”강민아는 그녀가 아무렇게나 던진 키를 안정적으로 받고는 육성민에게 말했다.“오빠, 정이를 호텔에 데려다줘.”반우정이 말했다.“나도 병원에 가고 싶어요. 아저씨가 걱정된단 말이에요. 별로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심은호가 다정하게 말했다.“정이만 아저씨 옆에 있으면 아저씨는 하나도 안 아파.”강민아가 육성민에게 말했다.“그럼 정이를 서경 병원으로 데리고 와.”육성민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반우정을 데리고 자신의 SUV로 향했다.“반우정.”반하준이 아이를 불러 세웠다.“아빠한테 와.”반우정은 무서운 눈빛으로 반하준을 쏘아보면서 잔뜩 경계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아빠, 내가 어떻게 해야 아빠한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반하준은 마치 자이로드롭을 타고 있는 듯 중력이 그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정아, 왜 그런 소리를 해?”반우정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심은호는 반우정을 구하려다가 다쳤고 화살을 쏜 사람은 또 반우정과 피를 나눈 반현민이었다.수많은 감정들이 덮쳐왔지만 아직
반하준의 무서운 기운에 겁에 질린 반현민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 모습을 본 강나현이 서둘러 달랬다.“민이는 정이랑 친남매라서 정이가 무조건 용서해줄 거야.”그러고는 또 반하준을 보면서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말했다.“심은호가 생긴 건 친근하게 생겼어도 성격이 오빠보다 차갑잖아. 그런 심은호가 자기 몸까지 희생하면서 사람을 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그녀는 말끝을 길게 늘이다가 이어 말했다.“아까 민아 언니가 심은호 차에서 내리던데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하준 오빠, 잠깐만.”반하준이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휙 가버리는 걸 보고는 재빨리 쫓아갔다....병원, 심은호는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수술대에 엎드려 주치의에게 말했다.“수술비에 0을 두 개 더 붙여줘. 반하준한테 청구해야 하거든.”심은호와 아는 사이인 주치의는 수술칼로 그의 옷을 찢으면서 농담을 건넸다.“그럼 네가 심하게 다쳤다고 말해줄까? 널 병원에 데려온 그 여자가 아주 엉엉 울게?”심은호는 두 손을 포개어 턱을 손등에 괴었다.“그럴 필요까진 없어. 눈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안해하는 것도 싫어.”“세상에나. 입에 꿀 발랐어? 독사의 피가 어떤지 좀 만져보자. 뭐야? 뜨겁잖아.”심은호는 고개를 돌리고 실눈을 뜬 채 주치의에게 경고했다.“고발당하고 싶어? 의사 면허 정지 3년이랑 과실 전체 정비, 둘 중에 뭐 고를래?”그러자 주치의가 콧방귀를 뀌었다.“조심해. 화살 구멍을 똥구멍처럼 꿰매버릴 수 있어.”그 시각 강민아는 수술실 밖에 서 있었다. 반우정은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쳐다보았다. 아이는 강민아의 손을 잡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강민아가 딸을 위로하려던 그때 반하준이 반현민을 데리고 다가왔다. 반하준은 뒤에 숨어 있는 아들에게 명령했다.“정이한테 사과해.”하지만 반현민은 뒤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사과해서 무슨 소용이야? 엄마는 또 날 꾸짖고 기계식 석궁을 압수할 뿐만 아니라 엉
반우정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고 여린 마음이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말았다.‘내가 잘못했다고? 아빠랑 얌전히 반씨 가문으로 돌아갔다면 은호 아저씨도 다치지 않았을 거야. 근데 나한테 화살을 쏜 건 나의 쌍둥이 오빠야. 우리 한때 사이가 얼마나 좋았었는데.’점점 체격 차이가 나기 시작하면서 반우정을 대하는 반현민의 태도도 나빠졌다. 그리고 반씨 가문에서 엄마만 반현민과 반우정을 차별 없이 대했고 아빠조차도 반현민을 더욱 예뻐한다는 걸 깨달았다.“반현민, 네가 나한테 사과해도 난 널 용서하지 않아.”반우정이 소리를 지르고는 반하준에게 물었다.“아빠, 이제부터 아빠 딸 안 하면 안 돼요? 내가 어떻게 해야 반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데요?”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다. 그 순간 반하준의 얼굴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반우정, 넌 반 씨야. 영원히 내 딸이고 반씨 가문 핏줄이라고.”“그럼 성을 바꾸면 안 돼요?”반우정이 계속하여 말했다.“엄마 성을 따를래요.”어두운 그림자가 반하준의 몸 전체를 감쌌다. 강나현이 팔짱을 낀 채 피식 비웃었다.“언니가 딸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봐봐. 반씨 가문마저 배신하려 하다니. 어떻게 친아빠도 버릴 수 있어?”그러고는 다리에 매달린 반현민에게 말했다.“현민아, 넌 절대 우정이처럼 저러면 안 돼.”강민아는 반우정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힘을 실어주었다.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이동식 들것에 엎드려 있는 심은호를 밀고 나왔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상의를 입지 않아 넓은 등 근육과 뚜렷한 근육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 편안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데도 허리에 군살 하나 없었다.“아저씨, 괜찮아요?”반우정은 심은호를 무척이나 걱정했다. 심은호는 반우정을 돌아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움푹 팬 보조개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환자 가족분 계십니까? 수술 후 관리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강민아는 심은호가 다친 사실을 심한기에게 알렸다. 심
“심은호 너...”그 자리에 있던 강나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눈을 굴리면서 웃으며 물었다.“우리 언니한테 관심이 있는 거야, 아니면 하준 오빠의 아내한테 관심이 있는 거야? 언니랑 오빠 아직 이혼 중이야. 이런 때 부도덕한 짓을 하면 많은 비난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강나현은 심은호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그 순간 병실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반하준이 내뿜는 위압감에 반현민은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심은호의 매력적인 두 눈에도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상상력이 아주 풍부하네.”강나현이 말을 잇지 못했다.“난...”“어떻게 자기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 있지?”순간 당황한 강나현이 창백한 얼굴로 반박했다.“너야말로 그렇겠지.”“그건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심은호는 웃으면서 반하준을 보았다.“어쩜 맨날 이런 꼴통이랑 붙어 다녀? 이러니까 민아 씨가 너랑 이혼하겠다고 하지.”심은호가 계속하여 말했다.“두 사람은 아예 다른 세상 사람이야. 넌 민아 씨한테 어울리지 않아.”반하준이 두 눈을 부릅뜨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그가 강민아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워했다. 반하준 정도라면 국내 유명 대기업의 딸과 정략결혼 할 수도 있었는데 강씨 가문의 딸과 결혼했으니 말이다.강씨 가문도 부유하긴 했지만 최고의 명문가는 아니었다. 다들 강민아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기에 좋은 집안에 시집을 간 것이라고 했고 반하준이 인정을 베푼 것이라고 했다.게다가 강민아는 18살이 되어서야 강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연진숙은 강민아를 재벌가 며느리로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그런데 심은호는 반하준이 강민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이보다 더 가소로운 일은 없었다.‘의사가 주사를 잘못 놔줬나?’“콩깍지가 아주 제대로 씌었구나.”“네가 남이 버린 헌신짝을 좋아할 줄은 몰랐어.”반하준은 돌아서자마자 병실 문 앞에 서 있는
“네가 남이 버린 헌신짝을 좋아할 줄은 몰랐어.”반하준에게 있어서 강민아는 버려진 헌신짝일 뿐이었다. 그녀는 심은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남자한테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성적 매력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한테 27살인데도 여전히 원하는 남자가 있다는 걸 자랑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내 가치를 남자가 있느냐 없느냐로 증명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강민아는 웃으면서 이어 말했다.“자신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한테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자든 여자든 상대가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거예요.”그녀는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고 남자 뒤에서 숨죽이는 여자로 살지 않을 것이다.반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야 했다. 아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이다. 반하준조차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강민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심은호가 뜨거운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심은호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군요.”그가 좋아했던 강민아는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네?”침대에 엎드려 웅얼거린 탓에 강민아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심은호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현민이가 어린이집에서 위험한 도구를 사용한 거 말이에요. 민아 씨가 나서기 곤란하면 내가 해결할게요. 어쨌든 내가 피해자니까요.”강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피해자니까 반씨 가문과 어린이집에 보상과 사과를 요구할 정당한 권리가 있어요.”그녀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어른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지만 아이는 그럴 수 없었다.반우정과 반현민을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게 하면 또다시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반우정이 반을 옮긴다고 해도 여전히 마주칠 게 분명했다.“정이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원래는 두 아이를 승덕 명문 학교 초등부로 보내려고 했거든요. 근데 정이를 다른 학교에 보내고 싶어요. 서경시에서 교사진이 가장 좋은 초등학교는 승덕 외에...”“이창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