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시선을 내려서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을 바라봤다.통제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증상이 한 번 크게 올라오면 며칠 동안은 완전히 눌러 버리기 어려웠다.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자기 몸을 혹사하거나.혹은... 본능적인 욕구를 다른 방식으로 소진해야 했다.도우는 이재의 옆얼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다.이재는 이성 관계에 유난일 정도로 선을 분명히 했다. 슬비 외의 다른 여자를 건드릴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유희천 선생님께 연락해서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는 건 어떻습니까?”이재가 비웃듯 짧게 숨을 뱉었다. “그 인간한테 무슨 방법이 있는데?”희천은 아직도 최면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재는 의식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최면까지 걸리면, 가장 먼저 희천의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도우는 입술을 축인 뒤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회장님, 그럼... 사모님께 도움을 받으시는 건 어떻습니까?”이재가 고개를 돌려 도우를 봤다.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시선이었는데도 도우의 등에 식은땀이 번졌다.“회장님, 그냥 가능성만 말씀드린 겁니다.”이재는 시선을 거두고 링 줄에 걸어 둔 셔츠를 집었다. 천천히 팔을 끼우며 옷을 입었다.아래쪽 단추부터 하나씩 채우는 손길은 급하지 않았다.“집사람한테 말해. 며칠 동안 집에 안 들어간다고.”“알겠습니다, 회장님.”...그날 밤, 운서원.슬비는 소파에 앉아 따뜻한 차를 두 손으로 감싼 채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봤다.화면에 무슨 프로그램이 나오는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뒤엉켜 있었다.슬비는 어제 자신이 벌인 일이 이재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였다고 생각했다.속에 있던 말을 꽤 많이 꺼냈고 먼저 입까지 맞췄다.이재가 되받아 입맞출 때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삼켜 버릴 듯 거칠었지만, 결국 그 이상으로 억지로 밀어붙인 것도 아니었다.오히려 밤새 품에 안은 채 같이 잠들었다.그렇다면 적어도 지금은 자신
도우는 곧바로 뒤를 따랐다.진서는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앞뒤로 복도 끝에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고개를 갸웃하던 진서의 머릿속에 황당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우리 회장님이... 설마 희천 오빠한테 화풀이하러 가는 건 아니겠지?’‘아니지. 회장님은 남자한테 관심 없는데.’‘아, 아깝네...’‘저 얼굴로 남녀 안 가리고 다 홀리면 진짜 볼 만할 텐데.’진서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면서 머릿속의 엉뚱한 상상을 털어 냈다. 이내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갔다.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 들고 하빈 곁에 쪼그려 앉았다. 단검 손잡이와 칼날 주변을 꼼꼼히 닦아서 지문을 없앤 뒤, 자신의 손으로 쥐게 해서 흔적을 남겼다.그런 뒤 채찍에 맞아 피가 배어 나온 다리의 자국을 내려다봤다. 누가 봐도 충분히 심각해 보이는지 상처를 확인한 뒤, 하빈의 핸드폰으로 신고 번호를 눌렀다.연결음이 끝나자 진서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졌다.차갑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고 입술은 가늘게 떨렸다. 목소리도 울먹이며 부드럽게 변해서, 마치 겁에 질린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저... 112죠?”진서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신고하려고요... 여기에 불법으로 감금된 사람들이 있어요. 저 말고도 여러 명이에요.” “다 끌려온 사람들이고, 성폭력 피해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저를 해치려던 사람을 칼로 찔렀어요...”수화기 너머 경찰의 목소리가 바로 다급해졌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말씀하세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진서는 한 번 흐느낀 뒤 별장 주소를 말했다. 말은 계속 끊겼고 울음을 억누르는 사람처럼 숨도 고르지 못했다.“제발... 빨리 와 주세요. 너무 무서워요...”전화를 끊은 진서는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눈물 자국은 뺨에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눈빛은 벌써 원래의 냉정함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질색한 표정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아, 진짜.’‘이런 연기는 영 체질이 아니야.’‘온몸이 간지럽네.’...
이재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깎아 둔 사과를 그대로 하빈의 벌어진 입 안에 밀어 넣었다.하빈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고 통증 탓에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입을 막은 사과 때문에 비명은 목구멍 안에서 뭉개졌다.짙은 피가 두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면서 바닥과 침구를 적셨다.이재가 몸을 숙이면서 하빈의 귀 가까이 입을 댔다.“형, 내가 어떤 상황에서 발작하는지 그렇게 알아내려고 했지?”목소리는 정말 조용했다. 차갑게 벼린 칼날처럼 한 글자씩 귀를 파고들었다.“축하해. 제대로 건드렸네.”말을 끝낸 이재가 손잡이를 잡고 단검을 빼냈다.상처에서 피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하빈의 몸이 경직되더니, 고개가 옆으로 꺾이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이재는 단검을 바닥에 던지고 오진서를 바라봤다. “이제 신고해.”진서는 침대 위에 한쪽 발을 올린 채, 채찍에 맞아 피가 배어 나온 다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앳되고 순한 얼굴과 달리 태도는 거칠기 짝이 없어서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네.”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숙여 하빈의 주머니를 뒤져서 금방 핸드폰을 찾아냈다.신고 전화를 걸려던 진서는 곁눈질로 이재의 붉게 충혈된 눈을 발견했다.“회장님, 상태가...” 진서가 말을 고르며 드물게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굉장히 돌려 말한 표현이었다.단순히 ‘안 좋아 보이는’ 수준이 아니었다.이재는 증상이 심해지면 피를 보고서야 겨우 흥분이 조금 가라앉는 경우가 있었다.예전에는 약으로 어느 정도 눌렀지만, 오늘은 이미 약이 제대로 듣지 않는 상태였다.희천은 여러 번 설명했다. 이재가 발작하면 아드레날린과 각종 호르몬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몸 전체가 과부하 상태로 된다고.그 상태로 끝까지 버티면 몸이 먼저 망가지거나 다른 사람을 크게 다치게 만든다.사실상 둘 중 하나에 가까웠다.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하빈을 발끝으로 건드렸다. 숨이 붙어 있는 걸 확인한 뒤에야 이재를 향해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회장님,
“이 미친 새끼, 감히 사람을 채찍으로 때려? 죽고 싶어?”여자는 입을 열자마자 거친 욕을 쏟아 냈다. 하빈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하빈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매듭은 더 조여들 뿐이었다. 가죽끈이 손목 살을 파고들자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졌다.“너 대체 누구야!”여자는 대꾸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서 하빈을 내려다봤다.표정은 무감정했고 눈빛은 차가웠다. 조금 전 공포에 질려 떨던 사람과 같은 인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하빈은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우스울 만큼 처참한 꼴이었다.셔츠는 풀어 헤쳐서 가슴이 드러났고 이마 위로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얼굴에는 억누르지 못한 광기가 일렁였다.“아무도 없어? 당장 들어와!”하빈이 문밖을 향해 고함쳤다.곧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하빈의 눈이 번뜩이면서 몸부림도 더 거세졌다.“빨리 와! 이 년부터 잡아서...”말이 끝나기 전에 문이 밖에서 열렸다.키 큰 남자가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왔다.짙은 회색의 실크 셔츠에 소매는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 창백한 손목뼈 근처에는 아주 옅은 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날카롭게 빚은 듯한 이목구비와 깊은 눈매, 높은 콧대, 굳게 다문 입술. 전체적으로 고급스럽고 차가운 분위기가 짙었다.문가에 기댄 이재는 한쪽 다리를 느슨하게 세운 채, 바닥에 무릎을 꿇은 하빈을 웃는 듯 아닌 듯이 바라봤다.“형, 내가 보낸 선물 마음에 들어?”하빈의 동공이 순식간에 작아졌다.“하이재?!”이재는 그대로 문가에 기대고 있었다. 하빈을 위아래로 한 번 훑은 뒤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인테리어에 돈은 꽤 썼네. 취향이 영 별로라 그렇지. 색도 과하고 촌스러워.”하빈의 표정이 거칠게 굳어졌다. 입술이 떨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이재는 몸을 일으키며 느긋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여자는 바로 옆으로 물러나더니 구석에서 의자를 하나 끌어다 방 중앙에 놓았다. 소매로 앉는 자리까지
하빈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방은 상당히 넓었다. 짙은 벨벳 커튼과 크리스털 샹들리에, 화려한 조각 장식 가구로 꾸민 고전 유럽풍 공간이었다. 바닥에는 두꺼운 페르시안 러그가 깔려 발소리조차 거의 나지 않았다.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원형 침대가 놓여 있었다. 금빛 기둥에 짙은 적색의 벨벳 캐노피가 겹겹이 늘어져 있어서 침대 안쪽은 희미하게만 보였다.침대 주변에는 온갖 도구가 갖춰져 있었다.채찍, 수갑, 밧줄, 깃털, 양초...모두 침대 옆 협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빈은 도구들을 훑어본 뒤, 입꼬리를 올리면서 침대 위의 여자를 바라봤다.정확히는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묶여 있는 상태였다.여자는 스무 살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희고 창백한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 긴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흐트러져 있어서 안색이 더 하얗게 보였다.손목과 발목에는 질긴 가죽끈이 묶인 채 침대 기둥에 고정돼 있었다. 옷도 심하게 흐트러진 상태라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인기척을 들은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눈동자에는 공포가 가득했고 입술도 가늘게 떨렸다. 막다른 곳에 몰린 짐승처럼 도망치려 해도 달아날 곳이 없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읍... 읍읍...”입에는 테이프가 붙어 있어서 제대로 된 말 대신 막힌 신음만 새어 나왔다.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베개를 적셨다.하빈은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더 깊게 끌어올렸다.침대 곁에 다가선 하빈은 내려다보듯 여자를 훑었다. 얼굴에서 목, 쇄골 쪽으로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마치 값비싼 수집품을 감상하는 사람 같았다.실은 하빈에게는 수집품보다도 이쪽이 더 자극적이었다.물건은 겁을 먹지도, 떨지도, 자신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달랐다.여자가 보이는 공포와 반응 하나하나가 하빈에게는 비정상적인 만족감을 줬다.“겁먹지 마.”하빈은 말 안 듣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잘 들으면 목숨 정도는 남
매트리스가 살짝 가라앉았다.슬비는 인기척이라도 느낀 듯 몸을 돌리더니 곧장 이재의 품속으로 굴러 들어왔다. 얼굴을 남자의 가슴에 붙이고 팔로 허리를 감은 채 다리까지 올렸다.말 그대로 온몸으로 이재를 꽉 붙잡은 꼴이었다.이재의 몸이 순간 굳어졌지만 곧 천천히 힘을 주면서 풀었다.슬비의 허리를 감싸안고 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턱은 정수리에 가볍게 댄 채 눈을 감았다.창밖의 달빛이 잔잔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약간 덜 닫힌 창틈으로 들어온 밤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 침대 밑 바닥에 서로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이상할 만큼 평온한 풍경이었다....“사모님, 일어나셨어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회장님이 숙취에 드시라고 미리 준비해 두신 차예요.”슬비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가사도우미가 따뜻한 숙취차 한 잔을 내왔다.“고마워요.” 슬비는 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속이 계속 울렁거리던 게 조금 가라앉고 난 뒤에야 물었다. “회장님은요?”“외출하셨어요.”슬비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가사도우미에게 쉬어도 된다는 뜻으로 손짓했다.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머릿속의 묵직한 통증과 어지럼증을 달랬다. 어제 이재를 속이려고 독한 술을 반 병 가까이나 마신 탓에 아직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세세한 기억은 대부분 흐릿했다.분명하게 떠오르는 건 이재의 입맞춤이 지나치게 거칠었다는 것뿐이었다.애초에 슬비는 이재와 정말 무슨 일을 벌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이재가 그쪽으로 문제가 있다고 믿고 있었기에, 적당히 마음을 흔들어서 경계심을 풀게 하고 관심을 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칫 자신이 만든 함정에 자신이 빠질 뻔했다.어제 이재의 손길이 떠오르자 슬비의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하이재, 어제 대체 왜 그런 거야?’‘키스 한 번에 사람을 잡아먹을 듯 굴잖아.’엉망이었던 어젯밤을 떠올리니 두통이 더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자신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하지만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