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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은 수소문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가람의 행방을 알아냈다.가람이 머무는 아파트 앞에 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말레이시아의 저녁노을이 하늘을 짙은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낡은 아파트의 잿빛 외벽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풍경이었다.가람은 부모에게 이끌려 밤중에 호강시를 빠져나온 뒤 여러 곳을 전전했고, 결국 말레이시아 외곽의 작은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아파트라고는 했지만 오래된 임대주택에 가까웠다. 복도의 조명은 깜빡거렸고 벽의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공기 속에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까지 배어 있었다.차에서 내린 정인의 미간이 단단히 일그러졌다.“정말 여기 사는 거야?”“네, 아가씨.” 곁에 있던 경호원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정인은 더 말하지 않고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안으로 들어갔다.경호원들이 곧바로 뒤따랐다. 한 명은 앞에서 길을 살폈고, 다른 이들은 주변을 경계했다.계단의 센서등도 고장 나 있어서 경호원들은 휴대전화 손전등까지 켜야 했다.치맛자락이 먼지 쌓인 난간에 닿자, 정인은 질색하며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표정은 갈수록 굳어졌다.‘내가 어쩌다 이런 곳까지 직접 찾아오게 된 거지?’하지만 이재의 결혼식은 이달 말이었다. 그 전에 반드시 ‘원지민’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정인이 오랫동안 ‘원지민’의 뒷조사를 했지만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신상 자료를 통째로 막아 둔 것처럼 아무 흔적도 없었다.가람이 유일한 실마리인데, 정인은 어렵게 가람과 연락이 닿았다.그래서 직접 이곳까지 온 것이다.마음속으로는 죽어도 오기 싫었지만.4층 복도 끝.경호원이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낮은 욕설이 들렸다.“누구세요?”“문 여세요.”문이 살짝 열리며 시트 마스크를 붙인 얼굴 반쪽이 드러났다.마스크 구멍 사이로 눈을 내민 가람은 문밖의 정인을 알아보자 그대로 굳어졌다.“하... 하정인 씨?”정인은 말없이 가람을 내려다봤다. 눈빛에는 싫다는 기색이 숨김없
이재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은근히 사람을 홀리는 기색이 묻어났다.“내가 그것도 따줄게.”슬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너무 다정한 말이었다.진심이라고 믿어 버릴 만큼.슬비는 눈을 내리깔고 가슴속에서 뒤엉키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괜한 생각 하지 마.’‘우린 서로 필요한 걸 얻기 위해서 결혼을 약속했을 뿐이야.’‘일 년만 지나면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거야.’‘저런 말도 그냥 장난치는 거겠지...’‘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안 돼.’슬비가 한참 말이 없자 이재가 낮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해?”슬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이재는 잠시 슬비를 바라보다 허리를 숙였다. 한 팔로 무릎 뒤를 받치고 다른 팔로 허리를 감더니 그대로 번쩍 안아 올렸다.슬비는 놀라 반사적으로 이재의 목을 끌어안았다.“뭐 하는 거예요?”“위에 올라가서 자려고.” 이재는 슬비를 안은 채 침대 쪽으로 걸었다.“놔... 놔줘요.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이재가 슬비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눈가에도 옅은 웃음이 번졌다. “안 돼. 음악감독 하고 싶다며? 그럼 이따 침대에서 제대로 한번 부탁해 봐.”슬비의 뺨이 또 달아올랐다.“장난치지 마요... 저 지금 그날이라 불편해요.”“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야?”이재는 슬비를 침대에 내려놓고 위로 몸을 기울였다. 코끝이 맞닿을 듯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숨결이 섞였다. “안 건드려.”목소리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잔뜩 잠겨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에 끝까지 눌러 참는 절제가 배어 있었다.“키스하고 안아 주는 정도는 괜찮잖아?”슬비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재의 입술이 내려앉았다.전처럼 빼앗듯 거친 키스가 아니었다. 물 위를 스치는 깃털처럼, 꽃잎을 훑고 가는 봄바람처럼 아주 가볍고 부드러웠다.입가에서 뺨으로, 코끝에서 이마로 옮겨 갔다가 다시 입술로 돌아왔다.입맞춤에 슬비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근 것처럼 온몸의 힘이 풀렸다.“
같은 시각, 이재의 집.슬비는 현관 신발장에 한 손을 짚고 신발을 갈아 신다가 말을 멈췄다. 그제야 이재가 통화 중인 걸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재는 무표정하게 통화를 끊었다.슬비가 조금 미안한 듯 웃었다. “내가 방해했어요?”“아니. 스팸 전화였어.”슬비는 별생각 없이 몸을 숙이고 현관 바닥에 떨어진 머리끈을 주웠다.어느새 가까이 온 이재가 자연스럽게 슬비의 허리를 감쌌다. 손바닥을 아랫배에 대고 부드럽게 문질렀다.“배 아직 아파?”따뜻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니트 천을 지나 천천히 스며들었다. 묵직하게 부풀어 있던 아랫배가 조금씩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슬비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 아파서 그런 게 아니었다.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챙겨 주는 감각이 너무 낯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낯설었다.“이제 안 아파요.”이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손도 떼지 않았다.한 팔로 슬비를 안은 채 손바닥을 아랫배에 댔다. 엄지로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힘을 주면서 천천히 원을 그렸다.슬비의 얼굴이 조금씩 뜨거워졌다.이재는 빨갛게 달아오른 슬비의 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자자.”“나... 먼저 씻고 올게요.”슬비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이재가 가느다란 허리를 감아서 다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슬비의 등이 단단하고 따뜻한 가슴에 닿았다.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스치자 가느다란 떨림이 온몸으로 번졌다.“지금도 충분히 향기로워.”슬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슬비는 얼른 몸을 돌리면서 이재의 가슴을 손으로 밀었다. 셔츠 아래의 단단한 근육이 손바닥에 닿자 뜨거운 느낌에 바로 손을 빼고 싶어졌다.“장난치지 마요.”“장난 아닌데. 진짜 향기로워서 그래.”이재가 다시 가까이 오려고 하자, 슬비는 급히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화제를 바꿨다. “저기... 저, 물어볼 게 있어요.”이재는 나지막하게 웃으면서 슬비의 손을 잡고 식탁 쪽으로 데려갔다. 슬비를 앉힌
성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충혈된 눈으로 우찬을 노려봤다.“뭐라고?”그 눈빛에 우찬은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끝까지 말을 이어 갔다.“슬비는 지금 하이재랑 결혼했어. 대신 들어간 결혼이든 억지로 한 결혼이든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네가 계속 찾아가면 너한테도 슬비한테도 좋을 게 없어. 게다가 하이재라는 사람은...”“그만해!”벌떡 일어난 성준이 우찬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우찬은 비틀거리며 뒤로 밀렸다. 입꼬리가 찢어져서 피가 턱을 타고 떨어졌다.우찬은 한쪽 얼굴을 감싼 채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성준을 바라봤다.“나보고 그만하라고? 슬비랑 2년을 만났어. 2년이야. 그런데 지금 나보고 그냥 포기하라고?”“성준아...”성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거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날이 서 있었다.“슬비는 오랫동안 나만 좋아했어! 그런 마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뀌겠어?” “억지로 결혼한 게 분명해. 부모님이 강요했을 거야! 내가 제대로 설명만 하면 슬비는 다시 돌아와!”우찬은 입가를 누른 채 눈앞의 성준을 바라봤다. 너무 낯설었다.우찬이 알던 성준은 언제나 냉정하고 자기 통제가 철저했다. 아무리 큰 일이 닥쳐도 중심을 잃지 않았고 차분하게 대처했다.그런데 지금은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이성도 판단력도 전부 다 놓아 버린 모습이었다.“성준아, 좀 진정해...”“진정 못 해!”성준은 몸을 돌려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단단한 원목 벽면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손등이 바로 터져서 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어두운 카펫 위에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며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성준의 몸 전체가 떨렸다. 어깨도, 팔도,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까지 흔들렸다.“슬비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목소리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긁혀 나온 것처럼 잔뜩 갈라져 있었다. 울음을 겨우 억누르는 소리와도 비슷했다.“슬비가 어떻게...”우찬은 그 자리에 선 채 허리를 굽히고 있는 성준을 바라봤다. 성준은 이마를 벽에 기댄 채 어깨를 들
그제야 주경도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소파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더니 성준이 들고 있는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무릎이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히면서 차가 쏟아졌지만 신경 쓸 틈도 없었다.“강 대표, 미쳤어?! 지금 뭘 하는 건지 알아? 상대가 하이재야! 거기다 음성 통화를 걸다니, 나까지 죽일 셈이야?!”주경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이재와 톡 친구가 되기까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평소에는 괜히 방해가 될까 봐 먼저 인사 한마디 보내는 것도 조심했다.그런데 북명시에서 온 성준이 갑자기 이재에게 음성 통화를 걸어 버렸다.‘하이재가 기분이라도 상해서 나를 차단하면 어쩌려고?’‘괜히 나에게까지 화가 미치면 또 어떻게 할 건데?’“핸드폰 돌려줘!”하지만 성준은 주경보다 반 머리쯤 컸다. 팔을 위로 들자 주경의 손이 닿지 않았다.그때 통화가 연결됐다.수화기 너머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세 사람의 움직임이 한꺼번에 멎었다.주경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성준이 굳어 있는 틈을 타서 핸드폰을 재빨리 낚아챘다.옆에 있던 우찬도 곧바로 성준을 눌러서 소파에 앉혔다. 한 손으로는 성준의 입까지 단단히 막았다.“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주경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지더니,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 그거 좀 가져다줘요.]슬비의 목소리였다.성준의 온몸이 굳어졌다. 곧이어 몸부림이 더 거세졌다.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지면서 우찬을 통째로 밀어낼 기세였다.이재는 수화기 너머의 소란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일이야?]주경은 서둘러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별일은 아니고요. 회장님 언제 시간이 괜찮으신지 여쭤보려고요. 제가 식사라도 한 번 모시려고...”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통화 종료음이 들렸다.통화가 끊어졌다.주경은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그대로 굳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이었다.고개를 숙여 화면을 확인했다.음성
우찬은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곁눈질로 성준의 표정을 살폈다.성준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 앉아 있었다.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차분해 보이기까지 했다.하지만 우찬은 찻잔을 쥔 성준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걸 똑똑히 봤다. 손등의 푸른 핏줄이 선명하게 솟을 정도로.주경은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내가 듣기로 원씨 집안 큰아가씨는 민혜숙 여사님이 직접 고르셨다더라. 하이재 회장하고 사주 궁합도 제일 잘 맞고 집안 운도 받쳐 준다고 했다나 봐.”“지난달에 혼인신고까지 마쳤고 이달 말에 결혼식을 한다던데. 호강시 재계에선 다들 그 얘기뿐이야.”이달 말 결혼식.그 말은 달궈진 쇠붙이처럼 성준의 가슴을 거세게 지졌다.성준의 손가락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손안의 찻잔이 금이라도 갈 듯 작은 마찰음마저 났다.우찬은 불안하게 지켜보다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형님, 정말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죠? 사진 속 사람이 원지민이 맞아요?”“내가 어떻게 잘못 봐. 하이재 회장이 SNS에도 올렸어.”주경은 핸드폰을 꺼내 몇 번 화면을 넘긴 뒤 내밀었다.“봐. 이거야. 나도 처음 봤을 땐 눈을 의심했다니까.”우찬이 무심코 손을 내밀었지만 성준이 먼저 핸드폰을 가져갔다.화면에는 이재의 SNS 피드가 떠 있었다. 글은 없고 사진 한 장만 올라와 있었다.슬비가 쪼그려 앉아 검은 셰퍼드를 쓰다듬고 있었다. 노을에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고, 치맛자락은 바람에 살짝 들려서 마치 막 날개를 펴려는 나비처럼 보였다.설명도 없고 이모티콘도 없었고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그런데 사진을 찍은 사람의 기분만큼은 화면 밖으로 넘칠 듯 선명했다. 보는 사람의 눈이 아릴 정도로 진한 애정이 사진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성준은 아래로 화면을 넘겼다.이번에는 혼인관계증명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사진 아래 적힌 문구는 짧았다.[내 사람.]성준은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옆에서 우찬이 걱정스러운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