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보이지 않는 ‘뭔가’가 공기 중에 번진 듯, 주변 온도가 조금씩 올라갔다.이재의 시선이 슬비의 얼굴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섬세한 쇄골을 지나 웨딩드레스 네크라인에 박힌 작은 다이아몬드 장식에 멈췄다가, 그보다 조금 아래로 향했다.바로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이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목젖을 한 번 움직이더니 방금보다 더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잠깐 전화 받고 올게”슬비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귓불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이재의 시선이 그 붉은 귓불에 잠깐 머무르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밖으로 나가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밖에서 대기하던 도우를 보고 말했다.“잘 보고 있어.”도우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예, 회장님.”이재는 전화를 받으며 복도 끝의 VIP 휴게실 문을 열었다. 전화 너머로 지혁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오늘 그 원씨 집안 큰딸 데리고 웨딩드레스 보러 갔다며?]이재는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응.”그는 긴 다리를 느슨하게 포개고 소파에 앉았다. 손가락 사이에는 담배들 들고 있었지만 불은 붙이지 않은 상태였다.[진심이야?]지혁이 혀를 찼다. [예전엔 네가 그렇게 그런 것을 믿는 줄 몰랐는데. 액막이 결혼 같은 걸 정말 믿어? 게다가 너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며.]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만지작거리던 이재가 느긋하게 말을 잘랐다.“용건 없으면 끊는다.”[잠깐, 잠깐! 있어.]지혁이 급히 말했다. [아까 스타엔터 달라고 한 거, 진짜였어?]“그럼 장난으로 들었어?”[알았어.]지혁은 의외로 시원하게 답했다. [그럼 바로 내 비서 시켜서 스타엔터를 네 명의로 넘기라고 할게.]이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고맙다.”[우리 사이에 뭘...] 지혁은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참, 도혁이 스타엔터에 가수 이름을 걸고 있거든. 맨날 일도 제대로 안 하고 돌아다녀. 헛짓거리하면 네 마음대로 내보내. 내 눈치 보지 말고.]“알았어
‘디자이너 베라?’슬비는 멈칫했다.‘전 세계 상류층이 찾는다는 그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그녀는 본능적으로 이재를 돌아보고 목소리를 낮췄다.“계약 결혼이잖아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이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번거롭지 않아. 드레스 몇 벌밖에 안 돼. 다 네 치수에 맞춰서 미리 주문해 둔 거야. 가볍게 입어 보기만 하면 돼.”말을 마친 이재는 베라를 보았다.“다 준비됐어요?”“네. 사모님 치수에 맞춰 메인 드레스 12벌, 피로연 드레스와 이브닝드레스 24벌을 준비했습니다. 전부 안쪽에 있습니다.”슬비는 좀 놀랬다.‘이게... 몇 벌뿐이라고?’베라의 미소가 더 환해졌다.“사모님께서 먼저 보신 뒤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현장에서 바로 조정해 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베라는 커튼을 열었다.슬비는 숨을 멈춰야 했다. 특수 제작된 옷걸이마다 웨딩드레스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한 벌 한 벌이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그중 가운데 놓인 드레스가 가장 눈에 띄었다. 매끈한 새틴 머메이드 라인에, 네크라인과 소매 끝에는 아주 작은 진주와 다이아몬드 장식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조명 아래 은은하게 빛났고, 층층이 이어지는 긴 드레스 자락이 물결처럼 바닥 위로 흘렀다.“이 드레스는 회장님께서 사모님을 위해 따로 주문하신 디자인입니다.”슬비는 소파 쪽에 앉은 이재를 돌아봤다.이재는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이재가 슬비의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들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그런 게 아니라...” 슬비는 잠시 말을 고른 뒤 살짝 말했다. “너무 과해서요.”‘우리는 계약 결혼이잖아.’‘1년이 기한이고, 서로 필요한 걸 가져가는 사이.’‘이런 드레스를 입고 형식만 차린다는 게...’‘나 자신도 너무 아까우니까...’이재가 눈썹을 살짝 세웠다. 먹빛 눈이 곧장 그녀에게 향했다.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목소리는 평온했다.“과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우리 와이프가 좋으면 돼.”
같은 시간, 주차장 반대편.성준이 굳은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걸 보자, 우찬은 손에 든 담배를 급히 끄고 빠르게 다가갔다.“어떻게 됐어?”성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차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표정은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어두웠다.우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협의 안 됐어?”“권지혁이 다른 사람에게 넘겼어.” 성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뭐?” 우찬이 멈칫했다. “누구한테?”“몰라.” 성준은 눈을 감았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권지혁은 얼굴도 안 보이고, 비서 하나만 보내서 날 돌려보냈어.”우찬은 입을 벌린 채 말을 잃었다.강씨 집안은 북명시에서 최고라고까지는 못 해도, 이름 있는 집안이었다.성준이 직접 호강시까지 와서 매각 협상을 하겠다고 했고 약속도 미리 잡혀 있었다. 그런데 한 시간 넘게 기다리게 해 놓고, 정작 본인은 보지도 않은 채 돌려보냈다니?체면을 심하게 구긴 셈이었다.“너무 마음에 담아 두진 마.” 우찬은 말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달랬다. “호강시는 워낙 복잡하잖아. 우리도 막 왔으니 모르는 규칙이 있을 수 있고...”성준은 어두운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때 검은 세단이 두 사람의 차 옆을 스쳐 지나갔다.앞 번호판의 ‘H’ 글자를 본 우찬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또 하이재 회장 차네.”성준은 차 안에서 핸드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무심하게 대답하기만 했고,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우찬만 혼자 중얼거렸다.“어제 경찰서 앞에서도 봤는데, 오늘도 또 보네. 우연치고는 너무 우연 아니야?”하지만 성준은 별 반응이 없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슬비와의 메신저 대화창이 떠 있었고, 마지막 메시지 앞에는 여전히 빨간 느낌표가 붙어 있었다.우찬이 눈썹을 세우면서 혀를 찼다.“권지혁이 하이재 회장이랑 친하다던데, 설마 스타엔터 산 사람이 하 회장인가?”그렇게 말하며 시선도 무심코 창밖으로 향했다.뒷좌석의 창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아서 좁은 틈이 남아 있었다.그 틈 사이로 우찬은 여자
도우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려던 슬비는 멀리서 차 앞에 기댄 큰 키의 남자를 보았다.이재가 긴 다리를 느슨하게 포개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는 반쯤 탄 담배가 끼워져 있었고, 시선은 낮게 내려가 있었다. 담배 연기가 얇게 피어올랐다.슬비의 시선을 느낀 듯, 이재가 눈을 들었다.다음 순간 맨손으로 담배를 꺼 버린 이재가 그녀를 향해 곧바로 걸어왔다.슬비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잠깐 반응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하 회장이? 여기엔 왜 온 거지?’“면접 어땠어?”슬비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잘 봤어요. 내일부터 출근해도 된대요.”이재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잘됐네.”그는 자연스럽게 슬비의 손에 든 가방을 받아 들었다.“가자. 웨딩드레스랑 예복 도착했어. 온 김에 한번 입어 보자.”‘웨딩드레스를... 입어 본다고?’슬비는 이해가 안 됐다.몸을 돌려 차 쪽으로 걸어가던 이재가 곧바로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뭐 해? 안 오고.”“아... 네.” 슬비는 입술을 다물고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도우가 이미 차문을 연 채 공손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슬비가 차에 오르자, 이재도 뒤따라 앉았다.문이 닫히자, 호강시 오후의 습한 열기가 곧바로 차단됐다.차 안의 에어컨은 빵빵했다. 시더 향기와 옅은 담배 냄새가 공기 안에 섞였다.슬비는 시트에 기댄 채 이재를 살폈다.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차창 밖 빛이 옆모습을 가르며 지나가면서, 긴 속눈썹이 눈 밑에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었다.상태는 좋아 보였지만, 눈 밑의 다크서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지난밤의 키스를 떠올린 슬비는 괜히 뺨이 달아올라서 시선을 돌렸다.‘엄마 말이 맞나 봐. 하이재는 그 방면에서 정말 안 되는 모양이야.’‘이렇게 되는 게 차라리 다행이야. 안 그러면 내가 감당이 안 되니까.’‘남자라는 게... 정말 체면치레 하려다가 자기만 고생이지.’이재가 자신도 남자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슬비도 자신이 친밀 불안 장애 증상이 다시 생길까 봐 걱정했
같은 시각.슬비는 면접 테이블 앞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면접관은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화장은 정교했고 말은 빠르고, 일 처리도 날카로운 사람처럼 보였다.“예술경영 전공?”면접관은 이력서를 넘기다 슬비를 올려다봤다. 평가하는 눈빛이었다.“지원한 직무는 음악감독 어시스턴트인데, 전공이 딱 맞지는 않네요.”“음악을 조금 압니다.”슬비는 침착하게 답했다. 지민의 신분을 쓰고 있었기에, 음악대 수석 졸업이라는 자신의 학력을 꺼낼 수 없었다.“피아노를 잠깐 써도 될까요?”면접관은 고개를 끄덕였다.슬비는 일어나 피아노 앞에 앉았다. 손끝이 건반 위에 내려앉자, 즉흥적으로 편곡한 한 구절이 봇물처럼 쏟아졌다.면접실 안은 곧 조용해졌다.연주가 끝난 뒤에야 면접관은 정신을 차린 듯 파일을 덮었다.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떠 있었다.“이게 조금 안다는 수준이에요?”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다만 음악감독 어시스턴트 자리는 이미 충원이 됐어요. 괜찮다면 매니저 포지션으로 먼저 입사하는 건 어떨까요?”“평소에는 가수 일정을 따라다니고, 시간이 날 때 음악팀 일을 도우면 됩니다. 실력이 확인되면 내부 이동도 가능하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슬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매니저?’음악감독 어시스턴트와는 거리가 꽤 멀었다. 하지만 결국 실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어시스턴트가 아니라, 예전에는 음악감독 업무도 해 본 적 있었다.이 업계로 돌아가는 건 시간문제였다.슬비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좋습니다.”“그럼 준비해서 내일 오전 9시에 인사팀으로 오세요.”...회의실에 있다가 기다림에 지친 성준이 복도로 나와서 바람을 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시야에 익숙한 뒷모습이 스쳤다.‘슬비?’‘슬비가 왜 여기 있지?’‘잘못 본 건가?’성준은 거의 본능적으로 따라가서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지혁의 여비서가 성준의 앞을 막았다.“부회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정말
“부... 부회장님?”성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조용히 말했다.“선불폰 하나 개통해 와. 지금 당장.”비서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뛰어나갔다.성준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슬비가 이번에는 생각보다 오래 버티고 있었다.전에도 토라진 적은 있었다. 하지만 길어야 하루였다. 언제나 슬비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벌써 나흘째였다.성준은 눈을 뜨고 창밖 거리를 바라봤다. 초조함이 점점 짙어졌다.뭔가 자신의 손아귀 밖으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성준이 숨을 고른 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성준아, 바쁘냐?]전화 속 목소리는 유명 주얼리 디자이너인 친구였다.[전에 네가 부탁한 디자인 수정안, 메일로 보냈어. 시간 날 때 봐.]“알았어.”[참, 너랑 슬비 결혼식은 언제야? 축의금 준비해야지.]성준은 멈칫했다.“무슨 결혼식?”[또 모른 척하네?]상대가 웃었다. [슬비가 얼마 전에 나한테 반지 주문했잖아. 어때, 마음에 들었어?]순간 흠칫하면서 성준의 손이 그대로 굳어졌다.‘반지?’“무슨 반지?”[남자 반지.]디자이너 친구는 의아한 듯 말했다. [슬비가 직접 디자인을 맡겼어. 프러포즈할 거라고. 뭐야, 아직도 안 줬어? 아이고, 내가 서프라이즈 망친 건가?]성준은 대답하지 않았다.상대는 계속 떠들었다.[그 반지 거의 한 달이나 걸려서 만들었어. 지난주에 보내 줬고. 성준아, 너 진짜 능력 좋다. 슬비처럼 예쁜 아가씨가 그렇게까지 진심이라니...]두 사람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전화를 끊은 뒤, 성준은 핸드폰 화면을 보다가 문득 웃었다. 며칠 동안 팽팽하게 조여 있던 긴장감이 단번에 풀렸다.‘역시... 슬비는 나를 놓지 못한 거야!’‘슬비는 늘 나에게 완전히 마음을 바치고 있지.’‘청력을 잃기 전에도 슬비는 자기 인맥을 모두 끌어다가 새별엔터 확장에 힘을 보탰잖아.’‘그때 슬비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