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아!” 유건은 순간적인 공포에 휩싸이며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병원으로 가자!” 고통이 너무 심해, 시연은 더 이상 유건의 손길을 거부할 힘조차 없었다. 임신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혹시... 아이가 나보다 먼저 결정을 내린 걸까?’ ‘나는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아이의 아버지도 이 아이의 존재조차 모르고, 그 사람이 알게 된다 해도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아이의 엄마인 나는... 너무나도 무력해.’ ‘나 혼자 살아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떠나려는 걸까?’ 갑자기 시연은 유건의 옷깃을 꽉 움켜잡았고, 힘이 들어가 목덜미에 핏줄까지 도드라졌다. “고유건 씨...!” 그녀는 힘겹게 유건의 이름을 불렀다. “말해.” 아마도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져서일까... 그 순간, 시연이 자기 눈앞의 남자가 놀라울 정도로 다정해 보였다. 남자의 눈빛도, 목소리도... “...아기...” 시연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내 아이... 내 아이를 지켜 줘요...” 유건은 여자의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너도, 아이도... 아무 일 없을 거야.” 의사인 시연의 입장을 고려해, 유건은 그녀를 강울대학교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으로 데려갔다. “선생님!” 그는 응급실로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검사실로 데려가 주세요! 산부인과 오현철 과장님도 당장 호출해 주세요!” “네!” 간호사가 유건을 진료실 밖으로 안내하려 하자, 시연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보호자는 안에 계시면 안 됩니다.” 이 원칙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시연이었다. 하지만, 시연도 사람이라 감정이 무너져 원칙을 생각하지 못했다. “고... 유... 건... 고...” 그녀는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
시연은 긴 꿈을 꾸었다. 실은 하나가 아니라 끝도 없이 쭉 이어지는 꿈이었다. 그 모든 꿈이 악몽이었다. 그리고 숨 막힐 듯한 절망. “아...” 시연은 비명이 터지며 눈이 번쩍 떠졌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고, 차가운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시연아.” 낮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 시연은 자신이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는 따뜻하고 단단한 품에 안겨 있었는데,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시연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 자국조차 없이 말라버린 눈동자에는, 어젯밤의 그 연약함은 흔적도 없었다. “시연아.” 유건이 낮게 물었다. “괜찮아? 어디 불편한 데 없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여자의 이마를 만지려 했다. 어젯밤, 시연은 약간의 미열이 있었다. 그러나 시연은 정확하게 고개를 돌려 남자의 손길을 피했다. 유건은 순간 얼어붙었다. 마치 가슴 한가운데에 차가운 물을 들어부은 듯한 감각... 유건 역시 무안해진 손을 거두며, 식어버린 손끝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래. 내가 다치게 했으니까. 화내면서 나를 피하는 것도 당연하지.’ “...미안해.” 유건은 낮게,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날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그땐 내가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다친 건 사실이고... 내 잘못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시연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검고 깊은 눈동자에는 붉은 실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아주 냉정한 목소리. “고 대표님은 여자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신 거죠. 그건 아주 ‘올바른’ 선택이었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말에, 유건의 미간이 깊이 주름지면서 목소리도 단단하게 굳어졌다. “...꼭 그렇게 말해야 해?” 유건의 가슴이 묘하
다음 날 점심, 시연은 임진아와 약속을 잡고 함께 식사했다. 진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잔뜩 화가 나서, 거의 접시가 뚫어져라 젓가락을 찌르고 있었다. “진짜 말도 안 돼! 너한테 이런 일이 안 일어났다면, 세상에 이렇게 역겨운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걸 믿지도 못했을 거야!” 하지만 시연은 그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와서 화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활활 타오르던 분노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어차피 삶은 계속 흘러가야 한다. “진아야.” 시연이 조용히 말했다. “이 일은 너만 알고 있어. 절대 성빈이에게 말하지 마.” 진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성빈이 성격이 너무 직선적이고 다혈질이라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 ‘괜히 또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이네.’ 어쨌든 특별전형 석사 과정은 이미 물 건너갔다. 시연도 더 이상 성빈까지 이 싸움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밤이 되어서야 본가로 돌아온 시연은 번역 원고를 마감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바빴다. 비록 마감일은 모레였지만, 편집장이 내일 직접 오라고 해서 시연도 내일만 시간이 비어 있었다. 다음 날, 시연은 오전 근무를 마친 후, 수술을 끝내고 오후 네 시쯤 편집장을 만나러 갔다. “오, 시연 씨, 앉아요.” 편집장이 반갑게 웃으며 물 한 잔을 건넸다. “오늘 부른 건 두 가지 때문이에요. 하나는 앞으로 맡을 수 있는 원고 범위를 확인하려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고료 정산 때문이고.” “감사합니다, 편집장님.”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눈 후, 편집장은 시연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며 말했다. “앞으로 시연 씨에게 더 많은 원고를 맡길 생각이에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연은 기쁘게 고개를 숙였다. 편집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처음엔 지인 추천이라 걱정했어요. 근데 실력 있는 사람은 역시 다르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연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노은범...?” 강수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걸까?’ ‘우리 아들이랑 나란히 걸어가는 여자가... 지시연?’ 망설일 틈도 없이, 강수희는 곧장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 디저트 카페에 도착하자, 은범은 시연에게 초콜릿 브라우니와 생과일 오렌지 주스를 주문해 주었다. “괜찮아?” “응, 좋아.”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괜찮지. 은범이는 내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맛있어?” 시연은 천천히 초콜릿 브라우니를 스푼으로 떠먹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응, 맛있네.” “그러면 다행이고.” 은범은 가볍게 웃으며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던 중, 시연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은범아.” “네 여자 친구는?” 은범의 손이 순간 굳었다. “너희... 잘 만나고 있어?” “...” 은범은 급히 고개를 들고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었다. ‘...뭐?’ “잘 만나고 있어.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야?” 시연의 질문에 은범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시연은 디저트 스푼을 내려놓고, 잠시 은범을 바라보았다. 은범의 눈빛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시연의 눈가에 희미한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은범아.”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애초에... 여자 친구 같은 건 없지?” 은범은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알았지?’ 시연은 은범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은범은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상,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시연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의 정곡을 찔리자, 은범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안 거야?”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단단한 눈빛으로 은범의 시선을 정면으
시연은 손에 쥔 가방끈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안 돼... 이 정도로 흔들리면 안 돼.’ “사모님,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시연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 순간, 시연이 뒤에서 은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아!” “노은범!” 그러나 은범이는 강수희에게 팔을 세게 잡혀 그대로 멈춰 섰다. “어디 가려고? 설마... 저 애를 쫓아가겠다는 건 아니지?” 그제야 은범은 자신의 눈앞에 어머니가 있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어머니, 여기엔 어떻게...?” 순간적인 당혹감이 있었지만, 바로 이어진 건, 은범의 격한 분노였다. “혹시 시연이한테 뭐라고 했어요? 설마 또 엉뚱한 소리 한 거예요?” 강수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와 경멸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내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그러니?” 그녀는 혀를 차며, 기가 막힌다는 듯한 눈빛으로 아들을 쏘아봤다. “노은범, 넌 도대체 언제쯤 정신 차릴래? 저 여자 동생, 자폐잖아. 너 진짜 그 여자랑 엮이겠다고? 혹시라도 결혼이라도 해서 애 낳으면 어쩌려고? 자폐 유전되는 거 몰라?” ‘또 그 얘기야...’ ‘그 말투, 그 시선, 그 논리... 3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 “어머니!” 은범은 미칠 것 같았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우주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선천적인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무조건 유전된다는 보장도 없어요!” 순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그게 그렇게 걱정되면, 난 아이 없이 살면 돼요.” “너... 뭐라고?” 강수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이 번뜩 들렸다. 그리고... 짝! 매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수희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지 알고나 있어?” 그러나 은범은 한 치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유건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고상훈이 시연에게 반찬을 집어 주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먹었다. 반찬이 다 떨어지면, 반찬은 쳐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밥만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뭘 봐?” 손자가 찌푸린 얼굴로 시연을 바라보자, 고상훈이 못마땅하게 말했다. “네 마누라랑 애 좀 잘 챙겨!” 유건은 눈썹을 살짝 들었다가, 못 들은 척 넘겼다. 밤이 되어 방으로 돌아온 유건은 곧장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으려던 순간, 거울 앞에 선 시연이 조용히 아랫배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여자는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쓰다듬고 있었다.이제 곧 석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시연의 배는 여전히 평평했다. 유건은 그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시연이가 입을 열었다. “곧 석 달이네.” ‘...응?’ 유건은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뭐?” 하지만 시연은 다시 말하지 않고, 그저 유건의 깊은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아이, 지우는 게 맞을까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유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문제를, 왜 나한테 묻는 거지?’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유건이 대답을 망설이자, 시연은 마치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듯 담담하게 웃었다. “내 동생, 자폐 스펙트럼 장애예요. 당신도 본 적 있죠?” 유건이 눈썹을 올렸다. “그래서?” 시연은 몇 초간 침묵했다. 여자의 눈빛엔 이전보다 더 깊은 고민이 서려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유전적 요인이 있어요. 물론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우리 우주는 후천적 가능성이 크다고 했지만...” 그때, 우주는 겨우 돌이었다. 하지만 시연과 우주는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새어머니의 학대와 폭력을 견뎌야 했다. 시연은 애써 동생을 보호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주는 점점 말수가 줄었고, 점점 다른 아이들과 달라졌다. 시연은 눈
깊은 밤. 유건은 집을 나서기 전, 무심코 침실 문 앞을 지나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멈췄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듯, 그는 조용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유건의 시선은 어둠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익숙한 듯 침대 쪽으로 걸어가 멈춰 섰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시연은 조용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유건은 시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눈으로 여자의 이목구비를 천천히 그려 나갔다. ‘왜...? 왜 오늘 밤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한 거지?’ ‘설마 노은범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힘들어하는 거야?’ 갑자기 남자의 가슴 한구석이 거칠게 긁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건은 흠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바로 등을 돌려, 침실을 나섰다. ‘그건... 둘만의 문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점심. 시연은 임진아와 함께 식사 중이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입안 가득 음식을 넣은 진아가 말했다. “나 인턴 끝나면 학교로 돌아가려고. 석사 준비해야지. 너는?” “나?” 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진아와 시연은 상황이 달랐다. 진아의 집이 엄청난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학업을 이어가는 데 무리가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난 아마... 먼저 일부터 구해야 할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진아가 바로 반대했다. “학사 졸업장이 뭐 얼마나 큰 도움이 된다고?” 시연의 실력은 인정할 만했지만, 학벌이 중요한 건 현실이었다. 현재 의료계에서 학사 출신이 대학병원에 정규직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석사는 기본이고, 전문의를 따고도 펠로우 과정까지 거쳐야 겨우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아마 시연의 성적과 실력이라면 종합병원이나, 운이 좋다면 대학병원의 계약직 정도는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진짜 재미있는 광경이네. 아직 끝난 게 아니군.'유건은 조용히 지동성과 시연을 바라보며,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때, 지동성이 갑자기 지갑을 꺼냈다. 요즘은 다들 카드만 쓰지만, 그는 여전히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세대였다. 그는 지갑에서 두툼한 지폐 뭉치를 꺼내더니, 시연에게 내밀었다. “돈이 부족해서 그러니? 아빠가 줄게. 우선 이거라도 받아 둬. 더 필요하면, 그때 또 주마.” ‘...뭐지?’ 시연은 계속 가만히 서 있었다.‘갑자기 왜 이러지?’ ‘여덟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나를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이제 와서 나한테 돈을 주겠다니?’ 시연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지동성은 직접 그녀의 손을 잡아 직접 돈을 쥐여 주려 했다. “자, 받아.” 그러나 시연은 얼굴을 굳힌 채, 손을 홱 뿌리쳤다. ‘이유가 뭐든 상관없어. 이 사람의 관심은... 전혀 받을 생각 없어.’ “필요 없어요. 가져가세요.” 그녀는 딱 잘라 말하고, 바로 몸을 돌렸다. “시연아, 가지 마!” 지동성이 시연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가 거부하자, 이번에는 강제로 돈을 손에 쥐여 주려고 했다. “이건 아빠가 주는 거야. 받아, 받아 둬.” ‘진짜 성가시네.’ 시연은 짜증이 밀려와, 힘껏 팔을 뿌리쳤다. “싫다고 했잖아요!” 휙-그 순간, 지폐 뭉치가 허공으로 흩날렸다. 오만 원권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마치 눈처럼 바닥에 쏟아졌다. “시연아, 너...” 지동성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 돈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시연은 차갑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빛은 점점 싸늘해졌고,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 순간... “지시연!” 장미리와 장소미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둘의 표정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 살벌했다. ‘이제야 등장하네.’ “야, 이년아!” 장미리는 다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유건의 말에 시연은 멍해졌다. ‘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장소미 때문에 애쓸 필요 없다고...” “장소미 때문이 아니야!” 유건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장소미 얘기 좀 그만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은 너야. 근데 넌 계속 장소미 얘기만 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날 포기하게 하려고?” ‘포기...?’ ‘무슨 포기?’ 순간 얼어붙은 시연의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시연은 급하게 말을 끊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손목이 따뜻한 손에 붙잡혔다. 유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날 벌주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인 줄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설마... 아니겠지.’ “좋아해.” 짧은 세 글자가 공기 속에 맴돌며 터졌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시연은 입술을 벌린 채,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겹쳤다. 유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시연. 나 너 좋아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지시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마음을 너만을 향한다고.”27년 인생, 유건에게 고백이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볼 안쪽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떨릴 일이야...?’ ‘이런 게 고백이라는 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고유건 대표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연애 초
그날 갑자기 셋이 자리를 뜰 때, 성빈한테는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나왔다. ‘좀 미안하긴 했는데...’ “아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평일이잖아. 성빈이 일하는 날이야. 우리처럼 백수들이랑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시연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을 위해 산모 요가 클래스에 함께 들어갔다. 영화는 그냥 그랬다. 극장을 나오자 둘 다 하품만 연발.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G시. “으, 춥다...” 진아는 시연의 팔짱을 끼고, 발을 구르며 입김을 불었다. “우리 샤부샤부 먹자! 얼큰한 걸로!” “평소 가던 데로 가자.” “좋아!” 마침 그 식당은 클럽 근처에 있었다. 클럽 쪽으로 들어서자, 진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시연은 고개를 돌려 진아가 보는 쪽을 따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안에서 나오는 성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곁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빈은 여자의 어깨에 여성용 외투를 살포시 걸쳐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인 그 눈빛은... 분명히 다정했다. “진아야.” 시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진아는 시선을 거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봐봐, 오늘 성빈 안 부르길 잘했지. 바쁘잖아, 저렇게.”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빈이... 연애 안 한다더니. 그럼 저 여자는 뭐지?’ ‘이건 좀 아니잖아?’ 뭔가 기분이 상한 시연은 진아를 살짝 당겼다. “가서 인사나 할까?” “야야...” 진아는 손을 급히 잡아당기며 막았다.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우리가 가면 민폐지.” “진아야...” “가자니까!” 진아는 배를 가볍게 감싸며 투정을 부렸다.“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너는 안 배고파? 얼른! 밥 먹자고.” 결국 시연은 한숨을 쉬며
시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동성이 그런 걸 물어올 줄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이게 걱정이라고? 참...’ 시연은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죽을 날 다 돼가니까, 양심이라도 생긴 건가? 완전 새사람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시연아... 고 대표 좋아하니?” 시연이 침묵하자, 지동성은 조급해졌다. 장미리가 약을 가지러 갔던 참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안 좋아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과거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얘길 굳이 이 사람한테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지동성이 쥐고 있는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까요?” “응, 그래.” 지동성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시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 멀리서 장미리가 약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국 줄이 엄청 길더라고요.” 장미리는 다가와 지동성을 부축했다. “다 받아왔어요. 이만 가요.”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딸 장소미에게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지동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리에게 이끌려 외과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시연의 말만이 맴돌았다. ‘안 좋아해요...’ ...병실 안, 장소미는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소미야, 오늘은 좀 어때?” 장소미가 약 봉투를 내려놓으며 병상 옆에 앉았다. “뭐가 어때요?” 소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맨날 약 바르고, 주사 맞고, 치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거즈로 감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데 봐봐요. 그렇게 해도 맨날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 얘야!” 장미리는 깜짝 놀라 급히 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상처 다시 터지면 어떡해? 조심 좀 해.” 지동성도 진정시키듯 말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