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은 아주 화냈다는데, 좋은 분위기의 데이트가 시작부터 꼬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직원을 꾸짖고 싶었지만, 시연이 손을 살짝 올려 그를 막았다.“됐어요. 별일도 아닌데요.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주문해요.”‘이 여자, 진짜 화 안 난 걸까?’유건은 믿을 수 없었다.‘질투는 여자의 본능일 텐데.’“여기, 장소미랑 같이 온 적이 있어.”이미 말이 나온 김에,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때는 우리가...”말을 흐리는 유건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굳이 설명 안 해도 돼요.”시연이 유건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다 알고 있어요.”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진짜 화난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알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시연이 아무렇지 않게 메뉴를 고르자, 유건은 더욱 답답했다.메뉴가 나오고, 시연은 잘 익은 양갈비 한 조각을 잘라 유건의 입 앞에 내밀었다.“한 번 먹어봐요. 아...”여자의 행동에 기분이 풀린 유건은 입을 열었다.‘정말 대범한 건가... 아니면, 신경을 안 쓰는 건가.’유건은 한숨을 삼키고, 소매를 걷어 올려 직접 새우껍질을 벗기더니 소스를 묻혀 시연의 접시에 올렸다.“밥 먹고 나서, 하고 싶은 거 있어?”“네?”시연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뭘 하려고요?”그녀는 밥만 먹고 돌아갈 줄 알았기에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유건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정하지 않으면, 내가 정할 건데? 영화 보러 갈래?”‘식사 후 영화라니, 연인들의 평범한 데이트 코스인데?’‘고유건은 확실히 좋은 남자야. 이 남자가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품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시연은 속으로 답답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어차피 이혼이 무산된 이상, 우리 같이 살아야 해.’‘나도 최대한으로 노력해 봐야지.’유건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보고 싶은 영화 있어?”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요즘 어떤 영화가 개봉했는지도 잘 몰라요.”“그럼 네가
잠시 후, 하늘에서 천둥이 울렸고, 곧이어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시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빨리 가요. 비가 더 심해지면 사람을 찾기 더 어려워질 거예요.”‘이 여자, 화나지 않았구나. 오히려 나를 걱정하고 있어.’그 순간, 유건은 기뻐해야 할지, 서운해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까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으면 소화 안 돼.”“알겠어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리고 기환이 널 데려다 줄 거야.”유건의 곁에는 항상 그를 보호하는 부하가 있었고, 시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비록 유건이 직접 운전할 때도, 그가 믿는 부하들은 항상 그림자처럼 뒤따랐다.시연은 양갈비를 입에 물고 있었기에 대답 대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았어요.”“집에 도착하면 전화해.”“네.”시연은 웃으며 말했다.“인제 그만 가봐요. 난 애가 아니잖아요.”“간다.”필요한 말을 다 한 유건은 몸을 돌려 걸어 나가려 했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뒤돌아보았다.시연은 남자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조용히 국을 마시고 있었다.알 수 없는 기분이 든 유건이 갑자기 물었다.“여보, 나한테 가라고 한 거, 진심이야?”“네?”시연은 유건이가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나?’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야죠. 사람이 없어졌다면서요...”여자의 태도는 너무도 담담했다.갑자기 유건은 짜증이 밀려왔고, 묘하게 속이 뒤틀렸다.“알겠어.”그는 짧게 말하고 이번엔 진짜로 떠났다.문이 닫히는 순간, 시연은 제자리에 멍하니 선 채, 손을 가슴에 얹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시연은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고, 먹어도 목구멍이 막힌 듯했다.사실, 유건이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시연은 입맛이 사라졌었다.그녀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숨을 돌렸고, 입을 닦고서야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연은 머리를 닦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이었는데, 전부 다 유건에게서 온 것이었다. 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내가 다시 전화해 줘야 할까? ‘아니야, 그냥 두자.’ ‘어차피 장소미 찾느라 바쁠 거야. 정말 급한 일이면 다시 걸겠지.’시연은 잠시 기다리는 듯했으나, 유건이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머리를 말린 뒤 침대에 누웠다. 임신한 탓일까? 시연은 요즘 깊이 잠드는 편이었다. 시연은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핸드폰 벨소리에 깨어났다. 잠결에 짜증이 난 시연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예보세요?” [형수님! 저예요, 지한이요.] ‘...지한 씨?’ 그 순간, 시연은 잠이 확 깼다. 주지한이 이렇게 한밤중에 전화를 건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그녀가 묻기도 전에, 지한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형님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이미 병원으로 옮겨졌다고요!] “뭐라고요...?” 순간 여자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연은 입술이 덜덜 떨리며 겨우 말을 뗐다. “많이 다쳤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저는 의사가 아니잖아요... 근데, 형님 온몸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눈으로 본 그대로를 전하는 지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형수님, 제가 민환을 보냈으니까 준비하고 계세요. 곧 도착할 거예요!] “...알았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시연은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다리가 휘청거리고 머릿속이 잠시 새하얘졌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손이 계속 떨렸다. ...새벽 3시. 시연은 아무도 깨우지 않고 조용히 대문으로 향했다. “형수님.” 이미 도착해 있던 정민환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고,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유건은 막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옮겨지는 중이었다.
“다행이네요.” 시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유건 씨의 교통사고도... 나름 값어치는 한 셈이니까요.” 뭔가 이상한 말이었기에, 지한이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형수님,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하죠?” 여자의 눈은 한없이 담담하고 깨끗했다. “내가 한 말이, 틀리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단 한마디였지만, 지한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형님은 절대 형수님이 이렇게 생각하길 바라지 않으실 텐데...’그럼에도 지한은 유건을 어떻게 변호해야 할지 몰랐고, 괜히 말실수라도 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형수님.” 지한이 화제를 돌렸다. “배 안 고프세요? 뭐라도 사 올까요?”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아침은 기환이 사 왔는데, 다들 유건 걱정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연만은 예외였다. 시연이 하얀 쌀죽에 작은 만두를 곁들여 조용히 식사하자, 기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수님... 유건 형님이 걱정도 안 되세요?” “쉿!” 지한이 그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헛소리 좀 하지 마! 형수님은 임신 중이시잖아. 아기를 생각해서 그러시는 거라고.” “아, 그래?” 기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럴까?’ 오전 7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수술은 끝이 났다.유건은 VIP 병실로 옮겨졌는데, 지한이 모든 절차를 맡았기에 시연은 나설 필요가 없었다. 절차가 마무리된 후, 지한은 병실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시연을 발견했다. 여자의 얼굴은 아주 지쳐 보였다. “형수님, 피곤하시죠?” “네.” 시연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한밤중에 불려 나와 지금까지 기다렸으니, 당연히 피곤할 만했다.지한이 바로 말했다. “형님 상태는 괜찮으니까, 민환이랑 댁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댁에 가서 좀 쉬세요.” “그래요.” 시연은
발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잠결에 얼굴을 스치는 가느다란 실루엣. 유건은 무겁게 뜬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남자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시연이 아닌 장소미였다. 유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뭔가 찝찝해.’ 남자의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늘하게 스쳤다. “유건 씨!” 유건의 깨어난 모습을 본 소미가 반가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좀 들어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요?” “난 괜찮아. 그런데 너...” 소미의 얼굴엔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오른쪽 팔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심지어 붕대 사이로 핏자국이 배어 나오고 있었는데, 유건의 시선이 그곳에 닿았다. “상처, 많이 심한 거야?” “아니에요. 괜찮아요.” 소미는 가볍게 웃으며 관자놀이 쪽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냥 가벼운 찰과상이에요.” 유건은 이내 그녀가 실종됐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는 당연히 묻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조애린 말로는, 네가 갑자기 사라졌다던데. 무슨 일이야?” “아...” 소미가 순간 머뭇거리며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애린 언니가 좀 깊이 생각한 거예요.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촬영 끝나고 혼자 좀 걷고 싶었는데, 너무 외진 곳이라 길을 잃었어요. 핸드폰도 안 들고 나갔고...” 묘하게 표정이 굳은 유건은 소미가 왜 기분이 나빴는지 묻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괜히 걱정 끼쳐서...” 소미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꼬아 쥐었다. “아냐.” 유건은 피곤한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터는 어딜 가든 핸드폰을 꼭 챙겨.” “네, 다시는 이러지 그럴게요...”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유건아! 정신이 들었다며?” 시끄러운 목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부지하, 주정빈, 유강석. 유건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남자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가 곧바로 그 빛이 사라졌다. 부지하 일행도 병실 안에 소미
소미의 말에 유건은 다시금 떠올렸다. ‘맞네. 그 여자... 지금 임신 중이잖아.’ ‘이런 무리한 밤샘을 견뎌낼 몸 상태가 아니잖아.’ 순간, 남자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지한은 재빨리 맞장구쳤다. “형수님은 어젯밤 소식 듣자마자 달려오셨어요. 걱정도 정말 많이 하셨죠. 형님 상태 보고 안심하긴 했지만, 제가 일부러 쉬라고 돌려보냈어요. 아마 곧 올 거예요.” “맞아요.” 소미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맞장구쳤다. “응.” 유건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몇 시지?” 지한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곧 6시요.” 시연이 떠난 지 벌써 하루가 다 되어 간다. 지한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형님, 형수님께 전화라도 한 통 넣을까요?” 그는 이미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있었지만, 유건이 단호하게 막았다. “아니야.” “재촉하지 마.” 유건은 자기가 시연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하는 것과, 시연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언제쯤 오는지 한 번 보자고.’ 똑똑-마침, 병실 문이 두드려졌고, 유건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병실 안의 모든 사람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문 쪽을 바라봤다. 문이 열리고, 시연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여행용 캐리어, 다른 손에는 작은 쇼핑백. 시연은 고개를 들자마자 병실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았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지한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좀 들어주실래요?” “네, 형수님.” 지한이 서둘러 다가가 쇼핑백을 받은 후, 바로 물었다. “캐리어는 어떻게 할까요?” “우선 옷장 쪽에 놔주세요. 제가 정리할게요.” “네.” 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놓고 옷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시연은 병실을 둘러보며 유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분들, 당신 친구들이에요?” “응.” 유건은 입을 삐죽
‘또 화가 났네?’ 시연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마 내가 온 타이밍이 문제였을 거야. 내가 오자마자 장소미가 자리를 비웠으니까.’‘뭐... 기분이 나쁜 것도 이해는 되네.’“미안해요.” ‘내가 일단 사과하고 보는 게 상책이야.’ 이어서 그녀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럼... 지금 뭐라도 먹을래요?” 유건은 짜증이 치밀어 고개를 홱 돌렸다. “안 먹어. 그냥 굶어 죽을래.” ‘‘먹을래요’ 라니? 지금 먹을 게 넘어가겠어?’ ‘이 여자, 정말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야!’‘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굶고 있었는데! 남자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시연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아, 이제 보니까 하나도 안 다쳤네. 성질 하나는 멀쩡하니까.’ 그녀는 말없이 보온 가방을 열었고, 하나씩 식기를 꺼낸 후 죽을 덜어냈다. “지금은 유동식만 가능해요. 성애 이모님이 죽을 끓여주셨어요.” 시연은 부드러운 쌀죽을 그릇에 담아 유건의 앞에 내밀었지만, 그는 힐끗 보고도 꿈쩍하지 않았다.시연이 의아해했다. “싫어서 그래요? 그럼 뭐 먹고 싶어요? 이모님한테 전화해서 다시 부탁할까요?” 말하면서 그릇을 조금 더 가까이 밀었다. “일단 이거라도 좀 먹어봐요. 그냥 참고 먹어보라고요.” 시연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달랬다. 하지만, 유건은 시연의 의도를 간파하고 냉소를 지었다. “그게 먹으라고 부탁하는 태도야?” 이 말을 듣고 시연이는 순간에 말문이 막혔다.‘그럼 뭐 어쩌라는 건데?’ ‘손도 멀쩡하잖아. 숟가락을 못 드는 것도 아니고, 죽 한 그릇 못 먹는 것도 아닐 텐데.’ 여자가 가만히 있자, 유건은 이를 악문 채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빨리 먹여 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1초. 2초... 결국, 시연이 먼저 물러섰다. 그녀는 그릇을 들고, 한 숟가락을 떠서 내밀었다. “알겠어요. 먹여 줄게요.” 유건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입을 벌렸다.
유건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지며 불쾌함이 짙게 깔렸다. “너 지금 가겠다는 거야?” ‘그럼 안 가고 여기 남으라고?’시연이는 헛웃음이 났다. 유건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고, 비웃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입원했는데, 아내라면 당연히 옆에서 간호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유건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시연이가 보기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일반적인 부부’ 사이에서나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그녀는 충동적으로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나라고? 장소미가 아니라?’ ‘장소미를 찾아가다 사고를 당했잖아. 그럼 곁에서 간호해야 하는 사람도 당연히 장소미여야 하는 거 아닌가?’하지만, 시연은 입을 열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역시... 제멋대로구나.’ 시연은 체념했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답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여기 남을게요.” 유건은 순간적으로 놀랐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그는 기분이 살짝 풀리는 듯했지만, 괜히 체면을 차리듯 툴툴거렸다.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둬.” “억지 아니에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다만, 내 짐을 안 챙겨왔어요. 집에 다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유건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시켜서 가져오면 되잖아.” ‘이런 사소한 일까지 직접 움직여야 하나?’ ‘임신 중인데?’ ‘이 여자, 자기 남편이 돈이 많다는 걸 깜빡한 거야?’ 하지만,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생활용품이야 쉽게 챙길 수 있지만, 읽을 책이 필요해요. 전문 서적이라 다른 사람이 챙기기 어려워요.” 결국, 시연이 직접 집에 가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 여자, 나랑 있는 시간이 그렇게 싫은 거야?’ 유건은 기분이 더러워져서 냉소적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유건의 말에 시연은 멍해졌다. ‘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장소미 때문에 애쓸 필요 없다고...” “장소미 때문이 아니야!” 유건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장소미 얘기 좀 그만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은 너야. 근데 넌 계속 장소미 얘기만 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날 포기하게 하려고?” ‘포기...?’ ‘무슨 포기?’ 순간 얼어붙은 시연의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시연은 급하게 말을 끊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손목이 따뜻한 손에 붙잡혔다. 유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날 벌주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인 줄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설마... 아니겠지.’ “좋아해.” 짧은 세 글자가 공기 속에 맴돌며 터졌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시연은 입술을 벌린 채,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겹쳤다. 유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시연. 나 너 좋아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지시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마음을 너만을 향한다고.”27년 인생, 유건에게 고백이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볼 안쪽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떨릴 일이야...?’ ‘이런 게 고백이라는 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고유건 대표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연애 초
그날 갑자기 셋이 자리를 뜰 때, 성빈한테는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나왔다. ‘좀 미안하긴 했는데...’ “아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평일이잖아. 성빈이 일하는 날이야. 우리처럼 백수들이랑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시연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을 위해 산모 요가 클래스에 함께 들어갔다. 영화는 그냥 그랬다. 극장을 나오자 둘 다 하품만 연발.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G시. “으, 춥다...” 진아는 시연의 팔짱을 끼고, 발을 구르며 입김을 불었다. “우리 샤부샤부 먹자! 얼큰한 걸로!” “평소 가던 데로 가자.” “좋아!” 마침 그 식당은 클럽 근처에 있었다. 클럽 쪽으로 들어서자, 진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시연은 고개를 돌려 진아가 보는 쪽을 따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안에서 나오는 성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곁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빈은 여자의 어깨에 여성용 외투를 살포시 걸쳐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인 그 눈빛은... 분명히 다정했다. “진아야.” 시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진아는 시선을 거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봐봐, 오늘 성빈 안 부르길 잘했지. 바쁘잖아, 저렇게.”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빈이... 연애 안 한다더니. 그럼 저 여자는 뭐지?’ ‘이건 좀 아니잖아?’ 뭔가 기분이 상한 시연은 진아를 살짝 당겼다. “가서 인사나 할까?” “야야...” 진아는 손을 급히 잡아당기며 막았다.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우리가 가면 민폐지.” “진아야...” “가자니까!” 진아는 배를 가볍게 감싸며 투정을 부렸다.“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너는 안 배고파? 얼른! 밥 먹자고.” 결국 시연은 한숨을 쉬며
시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동성이 그런 걸 물어올 줄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이게 걱정이라고? 참...’ 시연은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죽을 날 다 돼가니까, 양심이라도 생긴 건가? 완전 새사람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시연아... 고 대표 좋아하니?” 시연이 침묵하자, 지동성은 조급해졌다. 장미리가 약을 가지러 갔던 참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안 좋아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과거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얘길 굳이 이 사람한테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지동성이 쥐고 있는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까요?” “응, 그래.” 지동성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시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 멀리서 장미리가 약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국 줄이 엄청 길더라고요.” 장미리는 다가와 지동성을 부축했다. “다 받아왔어요. 이만 가요.”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딸 장소미에게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지동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리에게 이끌려 외과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시연의 말만이 맴돌았다. ‘안 좋아해요...’ ...병실 안, 장소미는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소미야, 오늘은 좀 어때?” 장소미가 약 봉투를 내려놓으며 병상 옆에 앉았다. “뭐가 어때요?” 소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맨날 약 바르고, 주사 맞고, 치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거즈로 감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데 봐봐요. 그렇게 해도 맨날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 얘야!” 장미리는 깜짝 놀라 급히 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상처 다시 터지면 어떡해? 조심 좀 해.” 지동성도 진정시키듯 말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