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장소미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장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엄마가 떠준 스웨터는 사랑이 담긴 선물이잖아요. 그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거라고요. 아빠, 그렇죠?” “하하, 그럼.” 지동성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당연하지.” 그는 만족스럽게 딸이 건넨 시계를 받아서 들었다. “네가 고른 시계, 아빠도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고맙다, 우리 딸.” “별말씀을요. 아빠가 좋아하시면 그걸로 충분해요.” 이제 남은 건 유건의 차례였다. 그가 준비한 선물은 작은 상자 하나. 소미가 기대감에 차서 상자를 열어보았다. “뭘 준비한 거예요? 꽤 자그마한 것 같은데... 또 시계인 건 아니겠죠? 저랑 겹칠까 봐서 걱정이네요.” 유건은 짧게 웃으며 말했다. “직접 열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뚜껑을 여는 순간, 반짝이는 자동차 키가 나타났다. “헉...!” 소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반짝였다. “이건...?” “볼보야.” 유건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우와!” 장미리가 즉시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며, 손뼉을 살짝 모았다. “고 대표님, 그건 너무 큰 선물 아닌가요?” 그녀는 곁눈질로 지동성을 바라보았다. ‘보라고요, 우리 딸이 이렇게 좋은 남자를 만났어요.’ “우리 소미, 정말 잘 키웠죠? 이렇게 멋진 사위를 얻었으니까요!” 그 말은 소미를 칭찬하는 듯했지만, 사실상 유건을 띄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 대표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이 다 기쁘네요.” “별말씀을요.” 유건은 짧게 대꾸했지만, 표정은 한결같이 무덤덤했다. 한편, 시연은 그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시계, 자동차... 참, 다들 부럽다.’ 이런 자리에서, 그녀는 확실히 너무 초라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합해도 겨우 2만 원이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는 차
선물을 다 건넨 후, 시연은 아까 남겨둔 케이크를 다시 들었다. 평소에 입맛이 없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늘의 케이크는 꽤 맛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스푼으로 접시 바닥을 긁어 크림까지 깔끔하게 먹어 치우자, 지동성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맛있어?” “네, 꽤 맛있네요.” 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많이 남았어.” 지동성은 바로 다시 한 조각을 잘라 그녀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온화하고 자상한 목소리. “천천히 먹어. 남은 것도 많으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건은 그 광경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어?’ 그녀가 그토록 즐겁게 먹는 걸 보니, 케이크에 무슨 황금이라도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유건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계속 시연에게 머물자, 곧 그것을 눈치챈 소미의 마음이 싸늘해졌다. ‘뭐야? 저 남자... 지시연을 보고 있는 거야?’ ...식사는 길어졌고, 끝났을 때는 어느덧 밤 9시가 넘었을 때였다. 유건과 지동성 모두 술을 꽤 마셨다. 그때, 지동성이 갑자기 말했다. “시연아, 내가 데려다줄게. 밤늦게 혼자 가는 건 위험해.” 그 말을 듣자, 장미리는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사람? 갑자기 왜 이러지?’ ‘10년이 넘도록 관심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보호자라도 되는 것 마냥...’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 “여보, 당신 술 마셨잖아요. 운전도 못 하면서...” “괜찮아.” 지동성이 손을 저었다. “대리운전 부르면 돼.” “그럼 대리가 데려다주면 되겠네요?” “그건 안 돼.” 지동성은 단호했다. “대리는 낯선 사람이잖아.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장미리는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세상에 범죄자만 가득한 것도 아니고...” ‘이 사람, 정말 왜 이래? 너무 갑작스러운 관심인데...’‘이런 식으로 지시연과 가까워지는 건, 절대 나와 소미에게 좋은 일이 아니야.’ 시
“네, 형님.” 민환이 즉시 대답하며 시연을 차로 안내했다. “가시죠.” 시연은 별다른 말 없이 차에 올랐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장소미는 속으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유건이 지시연이랑 같은 차만 안 타면 돼. 그럼 됐어.’ 그 후, 유건은 장미리, 지동성, 장소미를 차에 태운 뒤 운전기사에게 신신당부했다. “안전 운전하세요. 도착하면 연락해 주시고요.” “네, 고 대표님. 안심하셔도 됩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유건의 표정이 완전히 변했다. 어두운 밤보다 더 짙은 어둠이 깔린 얼굴. 그는 단숨에 차 문을 열고 몸을 숙여 탔다. “출발해.” 운전석에 앉아있던 정기환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네?” “민환한테 전화해.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라고.” ‘뭐라고?’ 기환은 멍하니 유건을 쳐다보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고는 곧장 형인 민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형님이 차 세우래.”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뭐?]민환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군말 없이 대답했다. [알았어.]그렇게 해서, 민환은 시연을 태운 채 몇 블록을 가지도 못하고 차를 세웠다. “어? 왜 멈추는 거예요?” 시연은 당황했다. “혹시 차가 고장 난 거예요?” “아니요, 그냥 잠깐 기다리려고요...” 민환이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뭘 기다려? 이거 뭔가 이상한데?’ 그녀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순간, 차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강렬한 술 냄새와 함께, 유건이 마치 폭풍처럼 등장했다. 남자의 분노가 가득한 눈빛. 그리고 유건을 감싼 싸늘한 기운. “유건 씨?” 시연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왜 이래요?” 유건의 몸에서 짙은 술 향이 퍼졌다. 시연은 본능적으로 코를 찡그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제발, 나한테서 좀 떨어져 줄래요?” ‘뭐?’ 그 말이 불을 붙인 성냥처럼, 유건의 분노를
유건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손에 든 케이크 상자를 높이 들고, 이가 갈릴 만큼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이걸 바닥에 내던진다면?” 시연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 유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내 케이크예요. 내려놔요.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진심이네. 이 여자, 이렇게까지 신경 쓰다니.’ 유건은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냉소를 띠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도 장난하는 거 아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거침없이 손을 휘둘렀다. 퍽! “아!” 시연이 놀란 숨을 삼키자, 눈앞에서 케이크 상자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뚜껑이 벌어지면서 속에 있던 케이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흰 크림과 초콜릿 조각이 여기저기 튀었고, 부드러운 시트가 짓눌려 엉망이 되었다. 조용한 밤공기 속, 충격적인 장면. 민환과 기환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형님이... 형님이 진짜로 케이크를 던졌어?’ ‘이렇게까지 화내는 게 몇 년 만인 거지? ‘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볼 자신이 없었다. 이제 그 케이크는 끝났으니까. 몇 초간의 정적.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시연. 그녀는 자신 앞에서 이 모든 것을 저지른 장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짜 던졌네요.” 유건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미친 듯한 기세가 감돌았다. “그래, 던졌어!”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정적. 피식- 시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더욱 유건을 자극했다. “웃겨?” 시연을 향한 남자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너도 인정하는 거지? 내가 던진 게 잘한 거라고.” 그 순간, 여자의 목소리가 낮고도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고유건 씨.” 그 눈빛은 마치 붉은 빛이 서린 듯, 이글거렸다. “당신이 할 줄 아는 게, 고작 이런 거예요?” ‘뭐?’ 유건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지 사장님
뒤돌아선 유건은 다시 시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가슴 한복판에서 치밀어 오르는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며, 낮고 거칠게 말했다. “울지 마.” 그는 눈물을 흘리는 시연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고작 그런 케이크 하나 때문에... 내가 사줄게! 얼마든지 사줄게!” 하지만 시연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건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시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었다. 마치, 그가 공기라도 되는 듯. 민환과 기환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아버렸다.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유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핏줄이 튀어나올 듯한 손가락이 움켜쥔 채, 싸늘한 조소가 입술 끝에 걸렸다.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안 들려?” 그 순간, 여자의 싸늘한 눈빛이 그를 직격했다. 서로가 눈을 마주친 순간, 유건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사준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시연의 차가운 눈빛에 단숨에 부서졌다. 그는 잠시 생각했지만, 도저히 속이 타들어 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너한테 분명히 말했잖아, 앞으로 지동성이 준 돈은 받지 말라고! 물건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은 나이도 많고, 결혼해서 애까지 있어! 너, 내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었잖아!” “네, 맞아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건을 올려다보았다.“그때는 당신이 내 남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남자와 선을 지켜야 했고, 당신의 말도 들어야 했어요.”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당신... 지금은 나한테 어떤 존재예요?” 유건의 목구멍이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 시연은 피곤한 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돈이 많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다시 사준다 해도...” 그녀는 손목을 살짝 흔들며 덧붙였다. “그건, 더 이상 내가
‘진짜 원하는 거?’유건은 멍하니 얼어붙었다. 희미한 생각이 아른거렸고, 터져 나오려 했다. 지하는 담담하게 친구를 바라봤다.“입으로는 네 전처를 위한다면서, 속으로는 지시연이 어떤 남자와도 가까워지는 걸 못 견뎌 하잖아. 지시연의 눈빛과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있잖아.” 그리고 잠시 멈추더니 반문했다. “말해 봐,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 유건은 말없이 목울대를 삼켰다. “가자.” 지하는 유건을 춤추는 구역에서 끌어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어서 유건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술 냄새가 진동하네. 얼음물 좀 마시고 정신 차려.” 유건은 잔을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친구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는 시연이를 좋아해. 만약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면, 시연이의 과거와 아이까지 받아들이고 결혼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야.’ 유건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좋아하는 감정보다 책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건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지하는 술잔을 흔들며 나직이 말했다. “그저 그런 감정이면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기 마련이야. 당연히 그걸 지키려고 책임을 져야 할 이유도 없고.” “하지만 너 자신에게 물어봐. 지시연을 향한 네 감정이 그저 그런 수준인지.” 유건은 깊이 찡그린 채 오래도록 침묵했다. “잘 생각해 봐.” 지하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곤 입맛을 다셨다. “네가 이 상태로 계속 가면, 너도, 지시연도, 장소미도 다 괴로울 거야.” ‘정말 그럴까? 다들 불행해질까?’ 유건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민하다가, 지하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쳇.” 그는 머리가 더 아파져 왔다. “그래서 술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지하는 한숨을 쉬며 유건을 지그시 바라봤다. “로얄호텔에서의 그날 밤, 널 함정에 빠뜨린 놈은 아직 못 찾아냈어?” 유건은 등을 의자에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면서, 우주는 조심스럽게 지동성을 쳐다봤다. ‘이 비행기를 사 준 사람이, 이 아저씨였어.’ 우주는 작은 목소리로 시연에게 물었다. “누나, 이 아저씨도 같이 갈까?” 시연은 살짝 미소 지었다. “우주, 이제 다 컸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응.” 우주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중하게 지동성을 초대했다. “아저씨, 같이 날려요!” “그래...” 그 말을 들은 지동성은 말할 수 없이 감격하며 두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우주야, 난 아저씨가 아니고...”지동성이 무슨 말을 할지 깨달은 시연은 깜짝 놀라 허겁지겁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왜 안 돼?” 지동성도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난 너희 아빠야. 우주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 인정하지 않으면 더 어려워질 거야.” “허.” 시연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조급해지셨어요? 그럼 이런 생각은 해보셨어요? 그쪽은 그동안 한 번도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우주의 세상에는 엄마, 아빠가 없어요. 오직 누나뿐이라고요!” “그쪽이 갑자기 아빠라고 하면, 그게 우주한테 얼마나 큰 충격일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우주는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요!!” 그 말에 지동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 말대로 천천히 하자, 아빠가 기다리마.” ‘동의한다고?’ ‘이렇게 순순히?’ 시연이 가장 놀란 것은, 지동성이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우주를 배려했다는 사실이었다. 지동성은 우주에게 다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가자. 잔디밭에서 날려 봐야지!” “와!” 우주는 기뻐서 폴짝 뛰었다. “누나! 같이 가!” “응.” 잔디밭에서 우주와 한참을 놀던 지동성은 점심시간이 되자 배달 음식을 시켰다. 포장을 뜯던 시연은 표정을 찡그렸다. “뭐예요? 치킨이에요? 밥을 먹으면 되잖아요.”
사진 속 사람은 젊음이 넘쳤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생기가 얼굴 전체에 퍼져 있었다. 시연이 기억하는 그 얼굴보다 더 젊고, 더 예뻤다. 그 얼굴의 주인은 바로 시연의 어머니, 부명주였다. 그 사진을, 시연은 예전에 지동성의 지갑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본 것보다 더 새것이었다. 지금 시연의 눈앞에 있는 건 새로 인화한 사진이었다. ‘기분이 좀... 복잡하네.’ 지동성이 부명주를 깊이 사랑했다는 걸, 시연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를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 왜 바람을 피웠을까?’ ‘사랑하면 그 사람과 관련된 것까지 아끼게 된다고들 하는데...’‘그토록 우리 엄마를 사랑했다면, 나랑 우주한테는 왜 그렇게까지 매정했던 걸까?’ 시연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 멀리서 차가 다가왔다. 지동성이 운전하는 차였다. 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지갑을 조용히 닫아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시연아, 타.” “네.” 두 사람은 어디에도 들르지 않았다. 각자 오후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동성은 차를 몰아 시연을 임진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임진아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 아래, 벤틀리 안. 유건은 운전대를 잡은 채, 옆에 놓인 케이크 상자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하... 나 진짜 답 없다.’유건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다시 레스토랑에 가서 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리고 또 굳이 이걸 시연에게 가져다주러 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고민이 됐다. ‘이걸 줘야 해, 말아야 해...?’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운전대에서 손을 뗐다. ‘당연히 줘야지. 다른 이유도 아니고, 나 때문에 시연이의 케이크가 엉망이 됐으니 보상은 당연한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그는 차에서 내려 케이크를 들고 아파트로 향했다. ...시연이 차에서 내리자, 지동성도 같이 내렸다. “저 혼자 올라가도 돼요.” “어떻게 너 혼자 간다는 거야?”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