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내가 만드는 건 G시 음식이니까.’ “아무튼 조심해.” 지동성은 크게 입맛이 없는 듯 대충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왔다. “나가게 되면, 아빠 속옷도 두 세트만 사 와라. 챙기는 걸 깜빡했어.” “아, 네.” 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식사를 마친 후, 핸드폰을 열어 근처를 검색했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형 마트가 하나 있었다. ‘그럼, 여기 가면 되겠네.’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다. 밖은 햇살이 따뜻했고, 하늘은 청량했다. 그녀는 가볍게 산책하듯 걸어갔다. 그리고 마트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모두 챙긴 후, 남성 속옷 코너로 향했다. ‘적당한 걸로 두 개만 사면 되겠지.’ 별 고민 없이, 시연은 가장 기본적인 걸 고른 후, 쇼핑백을 손에 들고 다시 호텔로 천천히 돌아갔다. 거리는 한적했고, 차도 많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 ‘웰스’의 위치를 검색했다. ‘어디에 있는 거지? 호텔에서 얼마나 걸리지? 교통편은...’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모처럼 평온한 시간을 즐겼다. 시연이 호텔 입구에 다다랐을 때, 룸 키를 찾으려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훅-어느새 뻗쳐온 손이 그녀의 쇼핑백을 낚아챘다. “꺄악!” 놀란 시연은 크게 뒷걸음쳤다. 그 충격으로 쇼핑백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먼 길을 온 유건도 바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내가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왜 이러는 거야?’유건은 시연의 반응이 어이가 없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어폰을 낀 그녀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아, 그래서 내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구나.’ 이어서 따뜻하면서도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이어폰 끼고 있었구나. 어쩐지, 몇 번 불러도 못 듣더라.” 그는 한참 전부터 시연을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설마 나를 때리려고?’ 시연은 숨도 못 쉬고,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그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유건을 바라봤다. 휙! 그냥 차가운 공기가 시연의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프지 않잖아?’ 그 순간, 강렬한 충격음. 쾅! 유건의 팔이 여자의 얼굴 바로 옆을 스쳤고, 그의 주먹이 그녀 뒤의 벽을 세게 강타했다. 그 찰나, 시연은 뼈와 단단한 벽이 부딪히는 거친 소리, 그리고 석회 가루가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제대로 친 거잖아...!’ “유건 씨!” 시연의 심장이 움찔하며 떨렸다. 그녀는 급히 남자의 팔을 잡았다. “어디 봐봐요... 괜찮아요?” 그러나 유건은 순식간에 팔을 빼내고, 시연을 내려다보며 비웃듯이 웃었다. “봐서 뭐 하게? 내가 다치든 말든, 네가 신경이라도 쓰나?” 시연은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말했다. “당연히 신경 쓰이죠!” ‘어?’ 말이 나오자마자, 그녀는 멍해졌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리고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이 말 듣고, 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나 유건은 전혀 듣지 못했다. 질투와 분노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신경 쓴다고?” “네가 정말 나한테 신경을 썼다면, 자기 아빠뻘 되는 유부남이랑 같이 해외로 도망쳤을까?”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남성 속옷 상자를 가리켰다. “이거, 그 노친네 거 맞지?” 시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 ‘맞긴 해.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시연이 침묵하는 순간, 유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래, 지시연. 마음대로 해. 이제 더 이상 신경 안 쓸게.” 유건은 기운 없이 팔을 내렸다. “유건 씨!”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시연이 그를 붙잡았다. “이건 오해예요. 설명할 수 있어요. 그
유건이 시키지 않아도, 지한은 할 일은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며 단순히 지시받고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윗사람의 지시를 받고 행동하는 사람은 마치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것과 다름없었다.비록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지한은 그 짧은 시간에도 꽤 중요한 정보를 찾아냈다. “형님.” 그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태산요양병원 쪽에서 들어온 정보인데, 우주가 얼마 전에 ‘웰스'의 평가 테스트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합격했습니다.” “‘웰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유건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이런 전문 기관에 연관될 일이 없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네.” 지한 역시 생소했지만, 보고하기 전에 미리 검색해 두었다. 그는 핸드폰을 열어, 관련 정보를 유건에게 보여주었다. “우수 인재를 선발하고 체계적으로 육성하여 배출하는 기관입니다.” 유건은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 “시연이의 동생, 우주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잖아.” “네.” 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 중 일부는 타고난 천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주가 그중 한 명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처음 테스트를 연결한 사람은 노은범이었습니다. 하지만, ‘웰스’는 수익을 추구하는 기관입니다. 모든 과정이 무료로 제공되는 게 아니죠.” 지한은 짧은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형수님은 노은범의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형수님께서 이번에 CA국에 온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즉, 시연은 지동성의 도움을 받았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유건의 얼굴에서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너무 늦었어. 내가 후회할 일이 너무 많아.’ 유건은 자신이 우주의 형부였고, 우주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아이
지동성은 확실히 몸이 좋지 않았다. 계속 구토하고, 설사까지 동반된 상태였다. 그리고 병원 진단 결과는 환경 변화로 인해 몸이 적응하지 못한 증상이라고 했다. “괜찮아.” 지동성은 손을 흔들며 태연한 척했다. “환경 변화로 인해 몸이 적응하지 못한 거니까 병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시연은 속으로 단호하게 반박했다. 환경 변화로 인해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증상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었다.가벼운 경우도 있지만, 심하면 탈수와 고열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연이 뭐라고 해도, 결국 지동성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여기는 낯선 해외이고, 시연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서 지동성에게 의존적인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지동성은 딸을 안심시키려는 듯,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식재료 사 왔다면서? 저녁은 뭐야?” “샤부샤부를 준비했어요. 그런데... 드실 수 있겠어요?” 시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지동성은 또다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속이 너무 비어서 그래. 오히려 따뜻한 걸 먹으면 나아질지도 몰라.” 일단, 시연은 더 이상 말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거실로 나와, 준비해 둔 샤부샤부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 “먼저 물부터 드세요. 드시다가 이상하면 바로 멈추시고요.” “응, 그래.” 지동성은 조심스럽게 물을 들이켰다. 물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딱 좋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과거가 떠올랐다. ‘명주...’ 최근 들어, 그는 전처 부명주를 자주 떠올렸다. ‘내가 명주를 자주 떠올릴 자격이나 있나?’시연은 조용히 지동성의 앞접시에 음식을 놓아주었다. 주로 야채와 연두부였다. “일단, 고기 말고 이거부터 드세요. 국물도 조금씩 드시고요.” “그래...” 지동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시연은 아버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이
‘그런데, 병원은 어떻게 가지?’ ‘이곳은 G시도 아니고, 입원 절차도 훨씬 복잡할 것 같은데...’ ‘게다가, 우리는 CA국 국민도 아니야.’ ‘단순한 관광 비자로 바로 병원 입원이 가능할까?’ ‘나 혼자서는 다 처리할 수 없을 거야.’‘아니, 아버지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거라고.’시연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럼... 누구한테 도움을 청하지?’ 곰곰이 생각하던 시연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녀는 핸드폰을 움켜쥐고, 손끝을 입술에 가져갔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고, 마침내 용기를 내어 유건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시연아?] 단 한 번의 연결음이 울린 후, 유건은 즉시 전화를 받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나예요.” 시간이 없어서 시연은 더 이상 설명 없이 본론을 말했다. “지동성 사장님이... 지금 많이 아프신 것 같아요. 심한 설사에 열까지... 입원이 필요해요.” “하지만 나 혼자서는 해결 못 해요.” 그녀의 말 속에는‘당신이 도와줘야 할 것 같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유건은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날카롭게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하룻밤 내내 고민했어. 어떻게 사과할지, 어떻게 다시 다가갈지!’ ‘그런데 이 여자가 나한테 먼저 연락한 이유가... 지동성 때문이라고?’‘그 노친네 때문에 나한테 전화했다고?’ ‘이 여자,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차단했었잖아! 이제 와서 연락한 이유가 고작 그 늙은 인간 때문이라고?’ ‘지동성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사람이었나?’ ‘하... 정말 웃기네.’ “듣고 있어요?” 시연은 조금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내 부탁... 들어줄 거예요, 안 들어줄 거예요?” ‘내가 안 들어줄 수가 있나?’ 유건은 이미 너무 많은 걸 놓쳐버렸다. 그렇기에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시연이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흥.”
이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시연은 바보가 아니고, 억지로 모르는 척할 성격도 아니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유건이 자신을 조금은 좋아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장소미를 더 좋아했다. 시연은 유건이 어떻게 그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이혼을 요구한 순간, 시연은 이미 유건을 포기했으니까. 그런데도, 유건은 여전히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시연은 남자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고, 분명하게 말했다. “사람과 물건은 달라요. 당신이 좋아하는 물건은 다 가질 수 있다고 해도, 사람은... 인생에서, 아니, 적어도 어떤 시기에는 오직 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거라고요.”모든 사랑이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양다리, 변덕, 한 손에는 이 사람, 한 손에는 저 사람... 그런 낡아빠진 사고방식은 이미 지난 세기에 사라졌어야 했다. “유건 씨, 당신이 나한테 잘해준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나하네 잘해주는 것과 장소미한테 잘해주는 건 공존할 수 없어요.” 시연은 충분히 차분했다. 이성적이고, 현명했다. 그리고 모든 걸 잘 파악하고 있었다. 유건은 가슴이 저렸다.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시연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서 물었다. “시연아, 나를 좋아한 적은 있어?” ‘미치도록 좋아한 게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그저, 아주 조금이라도...’ 이 말을 들은 시연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 순간, 심장이 움켜 잡힌 듯한 느낌이 들었고, 손끝마저 떨리는 것 같았다.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유건은 충분히 좋은 사람이었다. 시연 역시 그에게 끌렸던 순간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이미 선택했잖아요. 잊었어요? 우리, 지금 이혼
시연의 두 눈이 커지며 놀라움이 스쳤다. ‘이 남자, 점점 뻔뻔해지고 있어. 아예 막 나가기로 한 건가?’ “너도 알잖아. 나 너 좋아해. 그런 내가 불안한 마음으로 떠나게 내버려둘 거야?” ‘뭐? 이게 무슨 궤변이야? 완전 날강도가 따로 없잖아!’ 시연은 아예 유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냥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시연아? 시연아!” 시연이 차에 타지 않자, 유건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차를 몰며 그녀를 따라갔다. 시연은 이미 동선을 확인해 두었다. 지동성이 이 호텔을 예약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여기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거기서 ‘웰스’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물론, 환승이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유건은 여자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 차를 타고 가는 게 더 편하지 않나?’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정류장에 도착하자, 버스가 멈춰 섰다. 시연은 이어폰을 꽂은 채,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한 발을 버스 안으로 내디뎠다. “시연아!” 유건이 크게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서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라!” 버스 안.시연이 막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핸드폰 화면이 켜지며 진동이 울렸다. ‘또 고유건이야? 인제 그만 좀 하지?’ 그녀는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 그냥 무시하면 끝. 역시나, 그 한 통 이후 유건도 더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시간이 지나면 결국 포기하게 되어 있어.’ 그리고 뒤로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시연은 그렇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젯밤 지동성을 돌보느라 거의 잠을 못 잤으니,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기요.” 옆에서 누군가 그녀를 깨웠다. 눈을 뜨니, 서양인 외모를 가진 현지인 버스 기사가 그녀를
마지막 한 번. 그 말을 내뱉을 때, 유건은 표정과 목소리에 변화 없이 담담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말이 맞아. 나는 이미 선택했어. 그러니까 오늘이 마지막이야. 오늘이 지나면, G시로 돌아가서... 더는 너한테 집착하지 않을 거야.”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나 못 믿어?” 유건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 그래도 부부였잖아. 내 사람 됨됨이를 네가 몰라서 그래?” 유건의 성격을 시연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치 않는다면, 유건도 절대 선을 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게 곧 수락이었다. 유건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타.” 차에 올라타자, 차량은 조용히 출발했다. 시연은 시간을 확인한 뒤 물었다. “여기서 ‘웰스'까지 멀어요?” “응.”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가깝진 않아.” 게다가, CA국과 G시는 달랐다. CA국은 넓고, 인구 밀도가 낮았다. 도심을 벗어나자, 시골처럼 한적한 풍경이 펼쳐졌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인적이 드물었고, 길가에는 사막과 숲이 이어졌다. “배 안 고파?” 유건이 룸미러로 시연을 쳐다보았다.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괜찮아요.” 즉, 배가 고프다는 뜻이었다. 유건은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앞에 맥X날드가 있네. 간단하게 뭐 좀 먹자.” “네.” 얼마 지나지 않아, 맥X날드가 보였다. 유건은 차를 세우고 음식을 주문했다. 하지만, 시연은 앞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 유건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직도 입덧이 심해?” “그렇진 않아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토하는 건 덜한데, 입맛이 없어요.” ‘억지로 먹으면 결국 토한다는 거네.’ ‘어쩐지, 많이 말랐다 했어.’ 유건이 속으로 걱정하며 바로 말했다.“이건 다 싫어? 그럼 따로 먹고 싶은 건 없어? 한 입이라도.” “흰 식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