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지역도 아닌데, 무슨 방법을 쓰겠다는 거예요?” “해보기 전엔 모르지.” 유건은 능청스럽게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진짜 간다고?’ 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그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건과 할아버지의 대화를 들었다.“그 슈퍼는 꽤 멀어. 차로 왕복하면, 날이 밝고 말 거야.”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전 체력이 좋으니까요.” 그러면서, 할머니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할머니, 제 아내를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하지.” 할머니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유건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남편을 향해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당신도 젊었을 때 그랬잖아요? 날 위해 뭐든 하겠다고.” 할아버지는 웃음을 지었다. “좋아, 차고에서 차를 꺼내올게.” “얘야,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비옷부터 입으렴. 공방에 있을 거야.” “네, 할머니.”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공방으로 가서, 우비를 걸쳤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시연은 현관 앞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여자의 표정은 복잡하고,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왜 나왔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유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작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가지 마요.” “응?” 유건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언제부터 내려와 있었어? 다 들은 거야?” ‘웃을 일이야?’ 그녀는 전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기에, 진지하게 말했다. “한 끼 안 먹는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잖아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진지해하자, 유건도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내일 아침까지 주지한이 못 오면, 넌 8시간 넘게 굶어야 해.” 그러면서,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내가 그걸 알면서도 따뜻한 이불 속에서 편히
현관 앞. 유건이 막 계단에 올라섰을 때,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비 온 뒤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촉촉하게 젖은 풀숲 사이에서, 이름 모를 벌레들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차 타고 갔다 온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젖었어요?” 그러면서도, 몸을 살짝 옆으로 빼며 유건을 안으로 들였다. 유건은 커다란 봉투를 안고,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그는 봉투를 내려놓고, 하나씩 정리하면서 말했다. “쌀을 샀어. 그리고 생선도.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생선찜을 좋아한다고. 식초 찍어서 먹는 거.” 그러다 문득, 말이 끊겼다. ‘언제 다가온 거지?’ 시연은 어느새 손에는 수건을 들고 유건의 앞에 서 있었다. “고개 숙여요.” “아, 응.”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고개를 숙였다. 시연은 조용히 유건의 머리 위에 수건을 덮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샤워할래요?” 시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 유건은 고개를 저었다. “몸까지 젖은 건 아니야.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습기만 좀 찼을 뿐이야.” 그는 테이블 위의 쌀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떻게 먹을래? 밥? 아니면 죽?” “음...” 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밥을 더 먹고 싶어요.” “좋아.” 그는 직접 수건을 들어서 머리를 대충 털어낸 뒤, 조용히 쌀을 씻기 시작했다.시연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유건이 피식 웃었다. “또 그 생각 하는 거지?” “어떤...?” “저 도련님이 저런 것도 해?” 시연은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 할 줄 아는 거 많아.” 그는 자연스럽게 찜기 대신, 노부부가 사용하던
“쌀을 팔던 그 마트 말이야, 주인 부부가 우리나라 분들이더라.” 유건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내가 임신 중이라 입맛이 없다고 했더니, 사모님이 자기도 임신했을 때 그랬다고 하시더라고. 그러면서 이 방법을 알려주셨어.”‘그랬구나.’ 시연은 조용히 들으면서, 비 오는 깊은 밤, 유건이 낯선 사람에게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제 아내가 임신 중이라...’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그리고 묘하게 간질거렸다. 이때, 고요한 공간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시연은 반사적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핸드폰을 들고 한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곳은 조용했고, 거리도 좁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래도 몇 마디는 들렸다. “응, 아직 Y국이야.” ‘여기가 Y국이었어?’ 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직 이틀 정도 더 있어야 해. 걱정하진 말고.” “너도... 몸조심해.” 유건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목소리. 그 따뜻한 배려. 장소미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알겠어, 가서 이야기하자.” 전화를 끊고, 유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멈춰 섰다. 조금 전까지 온기가 가득했던 식탁.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따뜻한 밥과 생선이 그대로인데, 그걸 먹던 사람은 사라졌다. ...다음 날 새벽.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6시가 되기 전. 주지한이 도착했다. 정민환과 정기환도 함께였다. 그들은 차 두 대를 타고 왔다. 유건은 Y국을 떠날 때 급하게 비행기를 예약했기에, 한 번에 네 장을 구하지 못해서 결국 유건과 지한이 먼저 오게 되었다. 이른 시각, 노부부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건 일행은 떠나야 했다. 유건은 직접 노부부에게 인사하러 갔다. “그동안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희를 데리러 온 사
민환과 기환은 다 특수부대 출신이라 두 사람의 감각이 틀릴 리 없었다. 유건은 미간을 좁혔다. ‘CA국이라... 대체 어떤 놈들이길래 나를 몇 번이나 쫓고 위협하고도, 또 뭔가를 하려는 거지?’ “형님...” 그때, 뒷좌석에서 기대어 자고 있던 시연이 살짝 움직였다. “그만.” 유건은 순간적으로 민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더 말하지 마. 지금은 안 돼.’ 민환도 즉시 눈치를 챘다. “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뒷좌석에서, 시연은 단순히 몸을 조금 뒤척였을 뿐이었다. 다행히, 깊이 잠든 듯 보였다. 유건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깼네. 다행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 지저분한 일들은 시연이가 알 필요도 없어.’‘하지만... 시연이가 이 사실을 알면 날 걱정해 주려나?’ 사실, 시연은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 유건과 민환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누군가 고유건을 해치려는 건가?’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유건이 칼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저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했다. 시연은 재벌가의 발이 넓을 거라 생각했다.‘하긴, 고유건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 살인범은 이미 법의 심판을 받았을 거야.’ 그런데, 아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그 배후를 찾지도 못한 거야?’이 사실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이동하는 내내 별다른 문제 없이 ‘웰스'에 도착했다. 주지한이 있었기 때문에 협상 관련된 부분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 일행은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며 시설을 둘러보았다. ‘웰스’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교육 기관이었다.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은 다양한 첨단 산업에 기여해 왔다. “이 학생 말이에요.” 책임자인 30대의 여성은 최근 사례를 소개했다. “우주군처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무려 8개 연구소에서 합
차 안의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도시로 들어설 무렵, 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형수님을 먼저 내려드릴까요?” ‘당연한 걸 왜 묻지?’유건은 이런 질문 전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연이 먼저 거절했다. “아니에요.” “일단 유건 씨가 머무는 숙소로 가요. 괜히 집까지 돌아갈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는, 병원에 좀 들러야 해요.”지동성은 아직 입원 중이었다. 그래서 시연은 아버지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웰스'에서 본 것들, 들은 것들을 그녀는 직접 전해야 했다. 그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유건의 미간이 본능적으로 좁혀졌다. 그는 반대하고 싶었다. “시연아...” “약속했잖아요.” 그녀는 유건의 의도를 미리 읽고, 단호하게 말했다. 유건이 ‘웰스’까지가 마지막이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두 사람은 갈 길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유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마치 쓴 약을 삼킨 것처럼.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어렵게 말했다. “그래, 약속 지킬게.” 그러고는 민환에게 지시했다. “앞 사거리에서 내려줘.” “네, 형님.” 차가 멈추고, 시연이 내렸다. 문을 닫고, 그녀는 유건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시연은 ‘잘 가’라고 했고, ‘다시는 보지 말자'라고는 하지 않았다.때로는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보다, 더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잘 가’라는 말이었다.언젠가 다시 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미. 그렇게 덤덤하게 마무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픈 법이었다.“그래. 잘 가.” 유건은 아주 작게, 입술을 겨우 움직이며 읊조렸다. 차가 움직였다. 그는 거울을 통해, 시연이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느낌. ‘아... 나는 정말로
시연은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는 받지 않았다. 이어서 곧바로 주지한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역시, 같은 결과. 아무도 받지 않았다. 시연의 이마 한가운데 주름이 깊게 잡혔다. ‘불길해.’ 그녀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면, 내 전화를 안 받을 리가 없잖아.’ ‘어떻게 해야 하지? 전화를 계속 거는 건 의미가 없잖아.’ ‘그저 앉아서 속만 태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야.’ ‘망설일 필요가 없겠어.’이렇게 생각하자, 시연은 핸드백을 챙겨 곧장 Mavis호텔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길을 가는 내내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불안감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직접 그곳을 마주했을 때,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Mavis 호텔의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짙은 연기가 솟구쳤고, 불길은 마치 성난 짐승처럼 하늘을 향해 타올랐다. 사람들의 비명, 소방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모든 것이 뒤엉켜 있었다. 시연은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지금 내가 이성을 잃으면 안 돼.’ 그녀는 손에 쥔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그 기도는 닿지 않는 듯했다. 시연이가 핸드폰을 천천히 내렸다.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호텔 주변에는 이미 통제선이 쳐져 있었다. 경찰과 보안 요원들이 사람들을 통제하며 대피를 돕고 있었다. 시연은 사람들 속에서 호텔 직원을 찾았다. 그리고, 금발의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유니폼을 입은 직원. 그녀는 서둘러 다가가, 그 남자 직원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합니다. 혹시 호텔 직원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행이네요!” “제 친구들이 이 호텔에 묵고 있었어요. 혹
간호사는 손에 든 명단을 빠르게 넘겨보며 말했다.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들은 체크 표시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Cem 씨는... 체크 표시가 없네요.” 즉, 유건은 아직 여기에 있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시연은 손에 힘을 주며 간절히 물었다. “혹시... 구급차 안을 볼 수 있을까요? 제 친구가 있을지도 몰라서요.” “네, 가능합니다.”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응급 구조 중이니 방해하지는 말아 주세요.” “네, 물론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이곳에는 혼란과 슬픔이 가득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절망과 비통함이 교차하는 공간. 시연은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구급차 하나하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딜 봐도 유건은 없었다. ‘이상해! 간호사 명단에 없다면, 여기 있어야 하는데.’ ‘혹시, 기록이 잘못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미 병원으로 이송된 걸까?’ 그때 옆을 지나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젊은 여자애가 중년 여성을 부축하고 있었던 것. 엄마와 딸인 것 같고, 딸은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었다. 시연의 귀에 스친 모녀의 대화가 있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의 곁을 떠났어. 이제 받아들여야 해...” “아냐... 아직 아냐...” “엄마...” “...”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눈을 뜨자, 조금 전 시연과 스친 젊은 여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네?” 여자애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혹시 가족을 찾고 계세요?” “네.” “만약 병원에도 없고, 구급차에도 없다면...” 그녀는 조용히 남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보세요.” 그곳은 다른 곳보다 더욱 깊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 말을 끝맺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자애가 의미하는 바를. 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시연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너무 아파서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낮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사라질 수 있지?’ ‘이 사람은... 우선 나부터 호텔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어.’‘하지만, 나 거절했어.’ ‘만약 내가 그게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좀 더... 좀 더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아니야, 아니야...” 시연은 흐느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야! 몇 마디 더 나누는 것으로는 부족해!’ ‘고유건은... 아직 너무 젊잖아!’‘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고유건을 기다리는 인생도 있는데...’‘그리고, 할아버지...’‘고유건은 외아들이고, 고씨 가문의 유일한 손자잖아!’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견딜 수 없으실 거야.’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고유건은 죽지 않았을 거야!’ ‘그 사람은 CA국에 올 이유가 없었는데, 나 때문에 온 거잖아!’ “고유건! 당신 바보야?” 시연은 흐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왔어...? 우리 이미 끝난 사이잖아... 난 당신 책임이 아니라고...” “엉엉...” 여자의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며, 작은 구덩이가 파일 듯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후회해도... 아무리 울어도...’‘고유건이라는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한편, 구급차 옆에서 정민환은 억지로 들것에 눕혀지고 있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형님, 진짜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에요. 저 혼자 걸을 수 있다고요.” “그게 말이 돼?” 유건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이 꼴이 돼놓고, 멀쩡하다고?” 민환의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팔에는 응급처치를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다리에 난 부상으로 인해, 바지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서 당장 정밀 검사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유건의 말에 시연은 멍해졌다. ‘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장소미 때문에 애쓸 필요 없다고...” “장소미 때문이 아니야!” 유건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장소미 얘기 좀 그만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은 너야. 근데 넌 계속 장소미 얘기만 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날 포기하게 하려고?” ‘포기...?’ ‘무슨 포기?’ 순간 얼어붙은 시연의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시연은 급하게 말을 끊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손목이 따뜻한 손에 붙잡혔다. 유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날 벌주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인 줄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설마... 아니겠지.’ “좋아해.” 짧은 세 글자가 공기 속에 맴돌며 터졌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시연은 입술을 벌린 채,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겹쳤다. 유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시연. 나 너 좋아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지시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마음을 너만을 향한다고.”27년 인생, 유건에게 고백이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볼 안쪽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떨릴 일이야...?’ ‘이런 게 고백이라는 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고유건 대표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연애 초
그날 갑자기 셋이 자리를 뜰 때, 성빈한테는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나왔다. ‘좀 미안하긴 했는데...’ “아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평일이잖아. 성빈이 일하는 날이야. 우리처럼 백수들이랑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시연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을 위해 산모 요가 클래스에 함께 들어갔다. 영화는 그냥 그랬다. 극장을 나오자 둘 다 하품만 연발.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G시. “으, 춥다...” 진아는 시연의 팔짱을 끼고, 발을 구르며 입김을 불었다. “우리 샤부샤부 먹자! 얼큰한 걸로!” “평소 가던 데로 가자.” “좋아!” 마침 그 식당은 클럽 근처에 있었다. 클럽 쪽으로 들어서자, 진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시연은 고개를 돌려 진아가 보는 쪽을 따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안에서 나오는 성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곁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빈은 여자의 어깨에 여성용 외투를 살포시 걸쳐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인 그 눈빛은... 분명히 다정했다. “진아야.” 시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진아는 시선을 거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봐봐, 오늘 성빈 안 부르길 잘했지. 바쁘잖아, 저렇게.”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빈이... 연애 안 한다더니. 그럼 저 여자는 뭐지?’ ‘이건 좀 아니잖아?’ 뭔가 기분이 상한 시연은 진아를 살짝 당겼다. “가서 인사나 할까?” “야야...” 진아는 손을 급히 잡아당기며 막았다.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우리가 가면 민폐지.” “진아야...” “가자니까!” 진아는 배를 가볍게 감싸며 투정을 부렸다.“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너는 안 배고파? 얼른! 밥 먹자고.” 결국 시연은 한숨을 쉬며
시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동성이 그런 걸 물어올 줄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이게 걱정이라고? 참...’ 시연은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죽을 날 다 돼가니까, 양심이라도 생긴 건가? 완전 새사람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시연아... 고 대표 좋아하니?” 시연이 침묵하자, 지동성은 조급해졌다. 장미리가 약을 가지러 갔던 참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안 좋아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과거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얘길 굳이 이 사람한테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지동성이 쥐고 있는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까요?” “응, 그래.” 지동성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시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 멀리서 장미리가 약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국 줄이 엄청 길더라고요.” 장미리는 다가와 지동성을 부축했다. “다 받아왔어요. 이만 가요.”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딸 장소미에게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지동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리에게 이끌려 외과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시연의 말만이 맴돌았다. ‘안 좋아해요...’ ...병실 안, 장소미는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소미야, 오늘은 좀 어때?” 장소미가 약 봉투를 내려놓으며 병상 옆에 앉았다. “뭐가 어때요?” 소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맨날 약 바르고, 주사 맞고, 치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거즈로 감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데 봐봐요. 그렇게 해도 맨날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 얘야!” 장미리는 깜짝 놀라 급히 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상처 다시 터지면 어떡해? 조심 좀 해.” 지동성도 진정시키듯 말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