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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임공
시연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을 때,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뚱한 중년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장소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작 별거 아닌 연예인 주제에 날 무시해?! 내가 너랑 결혼해 주겠다는데도 날 밤새워 기다리게 한 거냐고!”

소미는 간신히 굴욕을 참아냈다.

‘이 진 대머리가 이런 핑계로 여자를 농락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설령 저 사람이 정말 결혼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여자 입장에서 그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어?’

‘하... 내가 얼마나 재수가 없었길래 저 남자의 눈에 띈 거야?’

‘부모님께서는 나를 아끼는 마음에 지시연한테 대신 가라고 하셨지만...’

‘지시연이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장미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거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지동성도 설설 기며 말했다.

“맞습니다, 화 푸십시오, 진 사장님.”

“화를 풀라고?”

진광수는 분노를 삼킬 수 없었다.

“웃기는 소리! 장소미 씨가 원하지 않는 이상, 나도 억지로 할 생각은 없어! 그냥 파산하고 감옥에 갈 준비나 하는 게 좋을 거야!”

몸을 일으킨 그가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다가 시연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진광수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 집 계집애길래 이렇게 예쁜 거지?’

시연은 화장기가 없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청아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탄력 있는 피부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짙은 이목구비를 가진 전형적인 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가씨는 누구?”

시연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진 사장이구나.’

‘어젯밤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 남자가 훤칠한 키에 탄탄하고 힘 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어. 눈앞의 이 사람은 절대 아니었단 말이지!’

‘우리 우주를 위해서 존엄과 순결을 바쳤는데... 상대를 잘못 찾았던 거야?’

‘하긴... 지금 생각해 보니까 어젯밤의 그 ‘진 사장’은 조금 이상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러면 뭐 해?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늦었는걸...’

장미리는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정당치 못한 중매꾼 역할을 시작했다.

“진 사장님, 제 막내딸인 시연입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G시에서 저희 막내딸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장소미도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으나, 지시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광수가 소미를 마음에 들어 하는 상황에서도 지동성 부부는 지시연을 진광수에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정말 그러네!”

진광수가 연거푸 칭찬했다.

장미리가 마음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진 사장님, 시연이는 아직 남자 친구가 없습니다. 사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시연이를 아내로 삼는 건 어떠신지...”

“나랑 어울릴 것 같긴 하군. 그럼...”

진광수가 거리낌 없이 시연을 훑어보며 더욱 만족스러워했다.

“오늘 저녁에 데리러 올 테니 우선 한번 해보자고. 다시는 실수하지 말고!”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까요!”

진광수가 떠나자 시연이 창백한 얼굴로 지동성을 바라보았다.

“또 저를 팔아넘기시려고요?”

막 입을 떼려던 지동성을 장미리가 막아섰다.

“팔아 넘기다니? 널 여태 키워 놨는데, 이 정도 힘은 보태야 하지 않겠니? 오히려 진 사장이 널 원하는 걸 다행히 여겨야 한다고!”

말을 끝나자마자 장미리가 소미에게 지시했다.

“당장 방문을 걸어 잠그고, 도망가지 못하게 해!”

“알겠어요, 엄마.”

“아빠!”

시연은 이를 악물고 지동성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장미리는 내 계모지만, 아빠, 아빠는 제 친아빠잖아요!’

시연도 지동성이 자신을 향한 어떠한 연민도 느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아버지’를 생명의 지푸라기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그래도 한 번쯤은 날 도와주지 않으실까?’

그러나 지동성은 시연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등을 돌리며 딸을 무시할 뿐이었다.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거라. 설마 네 아버지가 파산하고 감옥에 가는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소미가 시연을 잡아당겼다.

“가자고!”

“이거 놔!”

시연이 노발대발하며 소미를 뿌리쳤다.

“내 발로 갈 거야!”

소미는 시연의 뒤를 바짝 쫓아 2층까지 올라왔고, 방문을 열어 시연을 밀어 넣고는 눈을 부라리며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야, 나대지 좀 마.”

“지우주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치료가 지체되면 좋을 게 하나도 없을 텐데 말이지.”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방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시연은 한스러워서 온몸을 떨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우주를 개의치 않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우주는 누나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정말로 또 내 몸을 팔아야 해?’

그녀는 벅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냈다.

“엄마, 나 이제 어떡해요?”

어머니는 지시연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의 우주는 겨우 한 살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49재가 지나기도 전에 지동성은 장미리와 장소미를 데리고 시연의 앞에 서서 재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더 우스운 것은 장소미가 뜻밖에도 지동성의 친딸이라는 것이었으며, 시연보다 두 달 일찍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지동성은 일찍이 자기 본처를 배신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시연은 자신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엄마가 계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녀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몸을 일으킨 시연이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상자를 하나 꺼냈고, 품에 안더니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상자 안에는 비취 팔찌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전화번호 하나가 적힌 쪽지가 깔려 있었다.

“아직도 이 번호가 연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숫자를 하나씩 눌러 전화를 걸자, 놀랍게도 수화기 너머에서 연결음이 들려왔다!

시연은 긴장감을 느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도 않았고, 엄마도 돌아가셨는데... 날 알아보시려나?’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숨을 깊게 들이마신 시연이 부드럽고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고상훈 어르신이세요? 혹시 부명주 씨를 기억하고 계시는지... 저는 그 분의 딸입니다...”

“네, 곧 뵙겠습니다.”

‘세상에나! 나를 단번에 알아보시잖아?’

전화를 끊은 후, 시연은 팔찌를 챙겨 가방에 넣었고, 옷장에 있던 침대 시트 몇 장을 엮어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괜찮을 거야, 여기는 2층이고 그렇게 높은 편도 아니니까.’

침대 시트 한쪽을 고정한 시연은 가방을 멘 채 침대 시트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고 순조롭게 착지했다.

그리고 그녀는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마당을 뛰쳐나가 고상훈이 준 주소를 따라 고씨 저택으로 향했다.

...

주지한이 대표실 문을 열며 말했다.

“형님, 이 집사님께서 오늘 저녁에 오실 거냐고 여쭤보셨습니다.”

고유건이 잠시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갈 거야.”

그는 원래 자기 집인 SKY전원주택단지에 살았지만, 최근 할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아 고씨 저택을 자주 찾던 참이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유건이 물었다.

“시킨 건 어떻게 됐어?”

“누가 형님께 약을 먹인 건지는 아직 조사 중입니다.”

지한이 말했다.

“아, 그 여자분은 찾았는데, 연예인이더군요. CCTV에 정면이 찍히지는 않았지만, 호텔 출입자 명단에 이름이 있었습니다. 본래 진성그룹의 진광수 사장의 방에 들어가려 했다는데... 확실히 그 일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았어요.”

“알겠어.”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아주 두려워하더라니…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부당한 요구를 받았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던 거라고.’

‘하지만 앞으로는 아무도 그 여자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 수 없을 거야.’

“그 여자, 이름이 뭐야?”

“장소미입니다.”

지한이 핸드폰을 켜고 유건에게 건네주었는데, 화면에는 장소미의 사진이 있었다.

어젯밤 약물을 섭취한 유건은 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던 데다가, 불도 켜지 않아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예쁘네.’

‘할아버지의 건강은 확실히 예전 같지 않으셔. 원래도 나의 혼사를 걱정거리로 여기던 분이셨는데, 요즘은 부쩍 더 자주 말씀하시는 것 같고.’

‘나는 같은 피를 나눈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결혼할 상대를 찾지 못했잖아?’

‘물론 일찍이 할아버지께서 혼사를 정했던 약혼녀가 있긴 하지만… 할아버지도 그 여자애의 부모와 연락이 끊긴 지 한참 되었다고 난감해하시던 참이었고…’

‘그런데 마침 장소미가 나타난 거야.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이자 내 첫 번째 여자, 그리고 내게 순결까지 준 여자라…’

이렇게 생각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결국 찾았어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원하시던 손자며느리를요!’

“지한아, 장소미의 집으로 가자.”

지씨 자택.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지시연을 데리러 온 진광수가 그녀가 도망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노발대발하며 외쳤다.

“나를 물 먹이는 데 재미라도 들린 건가?!”

“저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쓸데없는 소리 좀 집어치워! 이렇게 된 이상, 빈손으로 갈 수는 없겠어!”

진광수는 장소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동생만큼 예쁘지는 않아도 꽤 쓸모가 있겠군! 오늘 밤은 네가 나와 있어 줘야겠어!”

그가 소미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안 돼요, 싫어요, 엄마, 아빠!”

놀란 소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진 사장님, 소미는 아직 어려서 사장님을 잘 모시지 못할 겁니다. 시연이가 돌아오면...”

“저리 꺼지지 못해?!”

소미에게 다가가던 장미리가 진광수의 발에 차이고 말았다.

“엄마, 엄마!”

진광수는 끝내 울부짖는 소미를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씨 저택 앞.

검은색 벤틀리 뮬산이 멈춰서자 지한 말했다.

“형님, 여기입니다.”

차에서 내려 천천히 안으로 향하는 유건은 온몸에서 신사적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광수가 소미를 잡아당기는 것을 본 순간, 뼛속에서부터 음침한 포악함이 폭발하는 듯했다.

‘저 새X가 감히!’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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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연은 진아의 집에 하루 종일 머무르다가 저녁에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가방을 메고 외출했다. 오늘 밤, 그녀는 해야 할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18세가 된 이후, 장미리는 시연에게 일절 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시연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했다. 비록 그녀는 고유건이 준 카드로 우주의 치료비를 지불했으나, 그 외의 비용은 지출할 생각도 없었고, 지출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연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BLUE’였다.‘BLUE’은 G시의 유명한 재벌 마사지 클럽으로서 재벌들의 사치스러운 유흥업소라고 할 수 있었다. 시연은 이곳에서 안마사와 침구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임상의학이 전공인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하여 특별히 한의학의 안마와 침구에 대한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했고, 자격증까지 수료한 바 있었다. 하지만 실습의 자체가 바쁘기 때문에 임시직으로 아르바이트했으며, 손님의 수와 서비스 시간에 따라 임금을 계산하고 정해진 출퇴근 시간조차 없었다. 정규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입이었지만, 시연은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물론 호의적이지 않은 손님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시연은 늘 유연하게 대처했다. 시연은 출근할 때 찍어야 할 직원 카드를 스캔한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 순간, 매니저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시연아, 손님 오셨다!” “네, 바로 갈게요!”그녀는 서둘러 안마와 침술에 필요한 도구를 가지고 나와 객실로 달려갔다. 한 명의 손님에게 서비스를 마친 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손님, 안녕히 가세요. 오늘 밤에는 푹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복도의 다른 한쪽 끝,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유건은 주지한을 따라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그가 앞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한이 물었다.“형님, 왜 그러십니까?” “지한아, 봐봐, 저게 누구야?” 유건의 어조는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낯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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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한아, 비켜.” 지한을 밀쳐낸 유건은 조금 전의 분노를 가라앉힌 채, 다시 평소와 같은 무덤덤하고 고고한 모습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가 담담히 말했다.“무슨 일이야?” “고유건 씨가 절 해고하게 시킨 거예요?” “그래, 맞아.” 그가 시연을 힐끗 쳐다보았다.“대답이 됐니? 지한아, 가자.” “예, 형님...”“잠시만요!”시연이 재빨리 두 걸음 뛰어서 유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잘못했어요!”시연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비굴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다 내 잘못이야.’ ‘결혼으로 저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내가 고유건을 건드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건 간과했으니까!’‘내가 주제넘은 짓을 한 거야!’ “제발요, 해고는 없던 일로 해주세요. 이 일은 제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그녀는 의과대학 마지막 학기의 실습 과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습의는 급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르바이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시연이 짙은 안개가 낀 눈빛으로 간청했다. “제가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혼할게요, 동의할게요. 고...”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힘껏 움켜쥐었다. “네가 이혼을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안 하는 거야?” 분노가 극에 달한 유건이 온몸에서 포악한 기운을 발산하며 말했다. “네까짓 게 감히 몇 번이나 날 건드려?! 겁은 지나가던 개나 줘버린 거야?!” 이 말을 마친 그가 손을 뿌리쳤다. “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하지만 시연이 다시 그를 막았다.“고유건 씨!”유건이 눈살을 찌푸렸다.“꺼지라니까? 사람 말 못 알아들어?!”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괜히...”시연은 그를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는 사는 것만으로도 힘든 사람이에요. 저는 정말 이 일이 필요해요...” 음침하고 냉담한 얼굴의 유건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0화

    아르바이트가 없어졌으니, 지시연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했으며, 가능한 한 빨리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시연이 예상한 바와 같이, 그녀는 실습 업무 자체로도 매우 바빴고, 시간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시연은 일주일간 틈틈이 일자리를 찾았는데, 배가 고프면 빵을 두 입 먹을 뿐이어서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 그녀는 오늘도 야근하고 나서 일자리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 “시연아.”같은 실습의인 주하은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오준수 선생님께서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시연은 멍해졌다.“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알아?” “모르겠어.”주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만 채혈하러 가봐야 해. 너도 얼른 가봐.” “그래, 알겠어.”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날이랑 상황이 비슷한 것 같은데...’ 그녀는 곧바로 오준수의 사무실로 갔다. 오준수는 전문의이자 의대 실습의의 총책임자였다. 시연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오 선생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녀를 한 번 바라본 오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약간의 의혹을 품은 채 입을 열었다.“시연아, 병원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너더러 실습이 중지됐으니까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고 하더라.” 시연이 온몸을 떨며 눈동자를 움츠렸다. “왜... 요?”오준수가 고개를 저었다.“글쎄다, 학교 측에 물어보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만 돌아오더라고.” 총책임자이던 그는 시연이 실습의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론이든 수술 실습이든, 흠잡을 데가 없는 학생이었는데...’오준수도 곤혹스러워했다.“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감도 안 오는 거야?” ‘제가 무슨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시연은 갑자기 심장이 꽉 조이는 듯했다. ‘틀림없이 고유건의 짓이야!’ 시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병원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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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2화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시연은 유건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냥... 조금 나른할 뿐이에요.”“시연아.”유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단호하고 냉정한 톤이었다.“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협의하자는 것도 아니고.”그리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연의 아랫배로 향했다. 그 시선 하나에, 시연은 숨을 삼켰다.“너, 너 자신은 둘째치고... 얘한테까지 무심할 거야?”아이 이야기까지 나오자, 시연의 눈빛엔 망설임이 번졌다.“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이건 일이니까...”‘지금 상황에선 내가 나서야 해...’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유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이 문제는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유건은 바로 양석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결하면서도 공손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양 교수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시연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졌네요.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네, 감사합니다...”전화기 너머에서 양 교수는 무언가를 길게 말했다. 시연은 가만히 입술을 다문 채 기다렸다. 두 손은 자연스럽게 아랫배에 모아졌다.“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유건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놨다.“양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병가를 내주셨어. 바로 다른 사람을 보내시겠대. 그러니까 너는 그냥 푹 쉬어.” 유건은 시계를 확인했다.“지금 아직 7시도 안 됐어. 대체 인원 도착해서 준비하면 충분해.”세미나는 9시 반 시작이었다. 시간상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고마워요.”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한마디에 유건의 가슴이 묘하게 저릿해졌다.‘이젠... 우리 사이가 이렇게나 멀어진 건가?’ ‘‘고맙다’ 같은 말이 이렇게 남처럼 들리다니.’“고마워할 필요가 없어. 별것도 아니잖아.”표정 하나 변하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1화

    문을 닫자마자 유건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굵은 핏줄이 툭툭 뛰기 시작했다. 시연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모습만 떠올려도 속에서 무언가 폭발할 것 같았다.“고유건, 너 진짜 미쳤다. 짐승이 따로 없네.”그는 작게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연은 아픈데,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유건은 방에서 나왔다. 그가 부탁한 호텔 측의 얼음찜질팩과 생강차도 마침 도착했다. 유건은 얼음팩을 시연의 이마에 조심스레 얹어주고, 생강차를 한 숟갈씩 떠서 입에 가져다 댔다. 아플 땐 유난히 말을 잘 듣는 시연이었다. 유건이 물 마시라고 하면 그녀는 얌전히 마셨고, 알코올 솜으로 몸을 닦아줄 때도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건은 점점 녹초가 되어갔다. 그 정성은 점차 효과를 보기 시작했고, 결국 밤엔 시연의 상태도 조금 나아졌다. 베개에 기대어 잠든 그녀의 눈가엔 마른 눈물 자국이 살짝 맺혀 있었다. 유건은 그제야 한숨 돌리며 조용히 그녀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30분 간격으로 체온을 체크했고, 그때마다 시연을 살짝 깨워 물을 마시게 하고, 얼음팩도 계속 갈아주었다. 그렇게 새벽을 지나, 시연의 체온은 다행히 더 오르지 않았다. 곧 동이 트려는 시간이었다. 유건은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저 시연을 바라보는 눈빛엔 절박함과 집착이 뒤섞여 있었다. ‘다행이야... 내가 와서.’ 그가 오지 않았다면, 지난밤 시연 곁에서 지킨 건 은범이었을 것이다. ‘그럼 내가 시연에게 한 모든 일들을... 노은범이 했겠지?’ 그 끔찍한 상상을 하자마자 유건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쭉 흘렀다. ...아침 7시, 시연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시연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고, 막힌 코도 많이 나아졌다. 이어서 팔을 뻗으며 일어나려는데, 유건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일어나긴 왜 일어나? 아직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0화

    시연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말끝도 흐릿했다. “그냥 눕느라... 새 양말도 못 신었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건의 손이 시연의 이마에 조심스레 닿았다. 차가운 손바닥이 화끈거리던 열기에 닿으니, 시연은 본능적으로 눈을 살짝 감았다. ‘시원하네.’ 그 모습에 유건은 순간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해졌다. ‘귀여워. 아픈 사람 맞나...’ 목이 간질거려서 목소리도 저절로 낮아졌다. “의사 왔으니까, 진료받아 보자.” 이어서 고개를 돌려 의사를 향해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네, 고 대표님.” 의사가 다가와 진찰을 시작했다. 귀찮아하던 시연도, 이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의사는 시연의 체온을 측정하고, 목 상태와 복부 상태를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 걸리셨네요. 다행히 열은 심하지 않아요. 임산부이기 때문에 약물은 조심해야 하고요.” 말을 끝내고 나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덧붙였다. “이건 알코올이에요. 대동맥이 지나가는 부위, 예를 들어, 목, 겨드랑이, 허벅지 안쪽... 이런 곳을 닦아드릴게요. 물리적으로 열 내릴 수 있을 겁니다.”“그리고 이마랑 겨드랑이에 얼음팩을 올려주시면 훨씬 나아질 겁니다. 그래도 열이 안 떨어지면, 마지막엔 해열제 투여를 생각해야겠고요.” “그게 다예요?” 유건은 뭔가 미덥지 않은 눈빛으로 물었다. “생강 끓인 물 같은 거, 마셔도 되나요?” 의사가 당황스러운 듯 웃었다. “네, 드셔도 됩니다. 중요한 건 따뜻한 물을 조금씩 자주 마시는 거고요.”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던 지한에게 말했다. “지한아, 방 하나 잡아서 의사 선생님이 쉬실 수 있게 도와. 혹시 밤에 또 무슨 일 있으면 모셔야 하니까.” “네, 형님.” 의사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한과 의사가 방을 나간 뒤, 유건은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제야, 뒤편에 아직도 남아 있던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89화

    ‘허.’ ‘말도 그렇게 하더니, 진짜 행동하는 사람이었네.’ ‘노은범이 이 시간에 여기 온 건... 본인 의지였을까?’ ‘설마 시연이가 직접 불렀을까?’ 그 가능성을 떠올린 순간, 유건의 속은 마치 식초를 들이켠 듯 꽉 막혀버렸다. ‘몸이 아파서 누군가를 불렀는데, 그 누군가가... 왜 내가 아니야?’ 유건은 서늘한 눈으로 은범을 내려다봤다. “노 사장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이 늦은 밤에 남의 아내 방 앞에서 서성이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은범은 비웃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눈빛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 사이, 이미 금 간 지 오래지.’ ‘정상적인 부부였다면... 시연이가 날 찾을 일도 없었겠지.’ 그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연이가 불러서 온 겁니다. 몸이 안 좋아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직접 불렀다고?’ 유건의 눈빛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눈꼬리가 번뜩이며, 살기마저 스쳤다. “노은범.” 유건이 한 걸음 다가섰다. “지금, 죽고 싶어서 여기 온 거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건은 양손으로 은범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챘다. “꺼져.”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지금은 참고 있지만, 한 번 더 건드리면 주먹이 날아갈 수도 있다고.” ‘지금 이 순간, 시연이가 내 아내라는 사실은... 네가 잊고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야.’은범은 겁먹지 않았고,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왜 꺼져야 하죠?” “당신이 대충 다룬 사람일지 몰라도, 내겐... 그 사람이 전부거든요.” 유건의 눈동자가 휘청 흔들렸다. ‘전부?’ 그 말이 유건의 심장을 그대로 쥐어짰다. “죽고 싶구나 진짜.” 이성이 흔들린 유건은 팔을 들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칵- 그리고, 문틈으로 시연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 해...?” 피곤하고 창백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88화

    ‘그래서 그런가... 불길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진다니까.’ 저녁 회의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엔 단순히 목이 간질간질했는데, 곧이어 재채기가 계속 나왔고, 콧물에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깜짝 놀랐다.‘뜨거워... 감기다. 몸살이 왔어.’ 그녀는 임신 중이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었고, 병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시연은 따뜻한 물을 끓여 계속 마시면서, 이불에 몸을 꽁꽁 감쌌다.‘이러면... 땀 나면서 열 좀 빠지겠지.’ 하지만 아무리 이불을 덮고 있어도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몸은 나른하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깐만... 쉬자...’ 그렇게, 시연은 핸드폰 진동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같은 시각, G시. 유건은 회사를 나와 BLUE로 향하던 중, 차에 올라타자마자 첫눈을 마주했다. 창밖에서는 조용히 작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겨울이네...’ 그때, 별산장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말해.” [고 대표님, 우주 도련님께서 며칠 뒤에 건강검진 예약이 잡혀 있는데요. 이쪽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이전 병원 기록을 요청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나한테 물어보면 뭐 해? 사모님한텐 연락 안 했어?” [네, 사모님께 먼저 연락드렸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고요. 바쁘신 것 같아서요.]유건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해볼게.”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계속 진동음만 울릴 뿐, 받지는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회의는 끝났을 텐데.’ ‘잠든 건가?’ 하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럴 리 없는데...’ ‘시연이... 요즘 몸도 약해졌는데...’ 유건은 핸드폰을 꾹 쥐고 곧바로 옆자리에 앉은 지한에게 말했다. “시연이가 L시에 있는 호텔 이름 확인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87화

    임신 후기가 되면서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된 시연은 L시까지 가는 KTX를 예약했다. 출장 기간은 일주일. 짐도 그만큼 많았다. 다행히 양석현 교수가 챙겨줘서 특실로 표를 끊을 수 있었다. 기차에 올라 지정석을 찾아갔지만, 자리 앞에서 시연은 한참을 고민했다. ‘이거... 혼자 올릴 수 있을까?’ 배가 제법 불러온 상태. 짐이 무거워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톡 쳤다. “시연아.” 그녀가 돌아보자, 은범이 웃으며 서 있었다. “은범이...?”시연은 깜짝 놀랐지만, 그의 얼굴이 반갑긴 했다. “이 캐리어 네 거야?” “응.” “내가 해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범은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들어 선반에 올려주었다. “고마워.” “뭘, 당연히 해야지.” 두 사람의 좌석은 우연히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정말 묘한 인연. 시연은 낮게 웃으며 물었다. “난 L시에서 학회 발표가 있어서 가는 거야, 너는 출장?” “응.” 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약 복용 중이라 장거리 운전은 피하라고 하길래, 그냥 기차 타기로 했어.” ‘약...’ ‘그럼, 역시...’ 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은범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그래서 굳이 놀라는 척도, 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은범의 그 담담한 말투 안에서 시연은 뭔가 미묘한 걸 느꼈다. “내가 그거, 알고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구나?” “응.” 은범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날,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웠어.” ‘역시... 알았구나.’ 시연은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제야 그날 이후 유건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모두 들어맞는 듯했다. “너였구나.” “응, 내가 고 대표한테 말했어.” 은범은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곧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했던 일, 정말 미안해. 그 일로 두 사람 사이가 더 꼬인 건 아닌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86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건은 미묘하게 시선을 낮추며 기다렸다. “오늘 온 거, 프로젝트 투자자로서 문 과장님이랑 양 교수님의 체면을 봐서 온 거예요? 아니면... 정말, 나 때문이에요?” ‘이 질문은... 피하지 말고 꼭 해야 해.’ 생각보다 직설적인 질문에 유건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너는,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진심으로, 그녀도 헷갈렸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전자예요.” 그 말에 유건은 피식, 짧은 웃음을 흘렸다. 비웃는 것인지, 자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럼 당연히, 전자지.” 남자의 눈매가 비죽 올라갔다. “설마, 지금... 내가 너 때문에 왔다고 생각한 거야?” 시연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건은, 그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걸 알아챘다. ‘아, 진짜 그렇게 믿은 거야?’ 그는 낮게 웃었다. 어딘가 허탈한 웃음. “너, 참 재밌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궁금하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한다고... 나한테 마음도 없는 여자 붙잡고 질질 끌 사람으로 보여?”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뿐이고, 내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그 말에 시연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착각했구나.’ 무안함과 동시에, 어딘가 가볍게 안도감이 스쳤다. 시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굴었네요. 그냥... 우리가 예전에 했던 그 이상한 결혼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 시절,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 감정의 거래였으니까.’ 유건의 심장이 순간에 세게 쪼여왔다. ‘이상한 결혼 생활?’ ‘그게, 너한텐 그렇게까지 나빴던 거구나.’ 가슴이 먹먹했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담담했다. “나도 그래.” 그는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85화

    유건은 계속 이해가 안 됐다.‘그 정도로 화가 났다고? 내가 온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사실 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예상했다. 시연이 자신을 반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비록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유건도 묘하게 가슴이 쓰렸다. ‘그래...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그 순간, 유건의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갔다. 살짝 몸을 기울여 시연의 귀에 대고 작게 물었다. “아까 족발, 좀 아쉬웠던 거지?”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웬 족발?’ 하지만 놀란 얼굴로 유건을 바라보던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헉... 들켰나?’ 유건은 그 반응 하나로 모든 걸 알아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알았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더 시켜줄게.”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애도 아니고... 고작 한 점 덜 먹었다고 삐지는 거야?” “네?!” 시연은 반사적으로 부르려다 멈췄다. ‘뭐야, 지금 이 사람 왜 이래?’ ‘어디서 갑자기 예전처럼 굴고 있는 건데...’ 시연은 헷갈렸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거야? 아니면 진짜... 뭔가 바뀌었나?’ 잠시 후, 더 주문한 족발이 나왔다. 유건은 그것을 직접 들어 시연 앞에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먹어. 너 한 사람 먹으라고 더 시킨 거야. 그리고 오늘 회식비, 내 카드로 결제했어.” “당신...” 시연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걸 해?’ 하지만 주변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런 자리에서 굳이 따질 수는 없었다. ‘이따가 따로 물어보자.’ 그녀는 결국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고, 족발을 한 점 들어 입에 넣었다. 유건은 조용히 웃었다.며칠간의 출장 때문에 쌓인 피로가 단번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시연도 두 점쯤 먹고 나자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래, 이렇게까지 했는데... 굳이 삐져 있을 필요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84화

    ‘아래층? 무슨 아래층?’ 시연은 헛기침이 나왔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던 그녀는, 곧 유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지금 1층인데, 데리러 와줄래?’‘진짜... 온 거야?’ 그리고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잠깐...” 말도 제대로 안 마친 채, 주변 눈치도 보지 않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1층 로비로 향했다. 그곳에, 유건이 있었다. 정말로. 큰 키, 넓은 어깨, 공항에서 막 돌아온 듯한 모습.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 그 익숙한 실루엣. “시연아.” 유건은 시연을 발견하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길고 고된 이동 끝에도 그 눈빛엔 피곤 대신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어쩐 일이에요...” 시연은 다가가며 말했다. 그 얼굴엔 놀람만 가득했고, 기쁨은 없었다. ‘기뻐해야 하나? 아니잖아.’ 유건은 살짝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초대한 거 아니었어? 지금 보니까... 아닌가 봐?”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표정은 최대한 부드럽게 유지한 채. ‘솔직히 말하면, 진짜로 온 게 아직도 실감 안 나.’ “네가 초대한 거 맞잖아. 나는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못 간다’라고는 안 했고.” 유건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입꼬리에 묘한 웃음까지 살짝 얹었다. 그 말에 시연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아, 또 저런 말장난이네.’ ‘바쁘면 안 와도 괜찮은데... 굳이 시간 내서 오면 나는 또 ‘잘 지내는 부부’처럼 보여야 하잖아...’‘할아버지 앞에서도 그랬고, 이젠 과장님, 교수님들 앞에서도?’ 시연은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 사람이 그걸 몰랐다고?’ ‘난 우리 둘 사이, 서로 암묵적으로 선 그은 줄 알았는데.’ “사실...” 시연이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문광수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선생!” 시연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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