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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임공
“고 대표님.”

진광수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었는데, 상업계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고유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유건은 진광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장소미를 응시하였다.

‘저 여자가 바로 어젯밤에 내 품에서 간드러지게 신음하던 여자라는 거지...?’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거센 힘으로 진광수를 바닥에 뒤집어엎었다.

“으악!”

진광수가 갑자기 피가 잔뜩 문득 이빨 하나를 뱉어냈다.

이 광경을 본 지동성의 일가족은 겁에 질려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유건은 얇은 입술로 조롱의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의 말투는 얇고 예리한 칼날 같았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진광수는 처절한 모습으로 땅에 엎드려 입을 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고 대표님, 정말이지 장소미 씨가 고 대표님의 여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건드린 적도 없지만요. 정말입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의 말을 들은 유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미를 바라보았다.

“확실해요?”

소미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확실해요...”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고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진광수가 헐레벌떡 저택을 뛰어나갔다.

지동성 일가가 분분히 서로를 마주 보던 찰나, 유건이 허리를 숙여 소미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부드러운 손끝으로 소미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울어요? 겁낼 거 하나도 없어요.”

“내가 있으니까 아무도 소미 씨를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약간은 허스키하고 저음인 목소리를 들은 소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저를 아세요?”

“어젯밤에...”

이 말을 뱉는 유건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

“로얄호텔 7203호실, 소미 씨와 나, 이제 알겠어요?”

‘어젯밤?’

‘로얄호텔?’

‘나와 이 남자?’

지동성 일가는 말이 막힐 정도로 놀랐다.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럼 지시연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던 거야? 어젯밤에 호텔에 간 건 맞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실수로 눈앞에 있는 저 남자의 침대에 올랐던 거냐고!’

‘게다가 저 남자는 시연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어젯밤의 여자가 소미라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소미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유건이 드디어 얇은 입술을 열었다.

“고유건입니다.”

‘고! 유! 건?’

G시에서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GP 그룹의 대표이자 G시 최고의 권력자인 고유건, 그는 사람됨이 겸손하여 결코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젊고 준수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니...

소미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고, 심장 박동도 덩달아 급격히 빨라졌다.

‘지금이 기회야!’

‘고유건이 잘못 알고 있는 이상, 어젯밤에 이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사람은 나인 거라고!’

소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는 제가 방을 잘못 찾아서 그만... 오늘 여기 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젯밤의 기억을 되찾으려 했으나, 야속하게도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하지 않은 일은 개의치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미 씨는 이미 내 사람입니다. 마침 아내가 필요하던 참인데, 저랑 결혼하시죠.”

‘결혼?’

세 사람은 이 엄청난 기쁨에 정신이 멍해져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답을 듣지 못한 유건이 눈썹을 찌푸렸다.

“왜 대답이 없어요? 싫은 겁니까?”

“그럴 리가요!”

소미가 정신을 차리고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결혼... 할게요.”

유건은 그제야 만족했다.

“그럼 결혼에 관한 건 다 내가 준비할게요. 소미 씨는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고, 그냥 차분히 내 아내가 되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네, 모두 유건 씨의 의견에 따를게요.”

소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좋은 마음을 내비쳤다.

소미뿐만 아니라 지동성과 장미리도 큰 기쁨에 빠졌다.

‘우리 소미가 고 대표님에게 시집만 가면, 우리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

고씨 저택.

고상훈이 비취 팔찌를 다시 상자에 넣어 시연에게 건넸다.

“받아 둬라, 원래 너한테 주려던 거였으니까.”

“네, 어르신.”

“아직도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를 게냐?”

고상훈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 당시에 네 어머니가 나를 구했기 때문에, 나는 그 대가로 이 팔찌를 주면서 너와 유건이의 혼약을 정했던 거란다. 헌데, 연락이 끊겼던 몇 년 동안 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그래도 네가 나를 찾아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벌써 시집갈 나이가 다 되었는데, 그냥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어떻겠니?”

“...”

시연은 아무리 노력해도 고상훈을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

시연의 어머니인 부명주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혼약에 대해 말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부명주 역시 시연에게 이 혼약을 진실로 여길 수 없으며, 그저 고상훈이 은혜에 보답하려고 한 말을 냉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연이 오늘 고상훈을 찾아온 것은 혼약을 위해서가 아니었으며, 동생 우주의 치료비를 빌리기 위한 것이었다.

‘엄마가 어르신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분명 돈을 빌려주실 거야. 게다가 나는 그 돈을 꼭 갚을 생각이고...’

‘막다른 길에 다다르지만 않았더라면, 이 집에 와서 돈을 빌릴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야.’

시연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제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상훈이 말했다.

“유건이가 온 모양이구나!”

그렇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고유건이었다.

유건은 고상훈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지동성의 저택에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빨리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이 경사를 고상훈에게 전하여 그를 기쁘게 해 줄 생각이었다.

유건은 긴 다리를 내디디며 안으로 들어왔는데, 따뜻한 조명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풍채를 비추자, 그는 더욱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저랑 식사도 하시고 바둑도...”

그가 하려던 말을 갑자기 멈추고 시연을 바라보았다.

가늘고 늘씬한 여인은 희고 윤기 흐르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고상훈이 반갑다는 듯 손자를 끌고 왔다.

“유건아, 이 아이가 바로 네 약혼녀인 지시연이란다. 잘 준비해서 시연이와 결혼하도록 하거라.”

“안녕하세요.”

시연이 급히 일어나 유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유건은 조금 전까지의 행복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듯했다.

‘이 여자가 여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던 내 약혼녀라고?’

‘이틀만 일찍 나타났어도 할아버지를 위해서 소미 씨와의 결혼을 결심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내 곁에는 소미 씨가 있어. 게다가 소미 씨는 나와 보낸 그날 밤이 처음이라서… 내가 소미 씨의 첫 남자인 셈이지. 난 소미 씨를 책임지고 싶고, 이미 그렇게 하겠다고 소미 씨와 약속하기도 했어.’

‘나는 절대 소미 씨를 버리지 않을 거야. 절대 다른 여자는 받아들일 수 없어.’

유건이 시연을 힐끗 보고는 거절했다.

“할아버지, 저는 지시연 씨와 결혼할 수 없어요.”

“뭐야?”

고상훈이 경악했다.

“할아버지, 저는 이미 결혼할 여자가 있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상훈이 그를 밀쳐냈다.

‘평생 효도하던 유건이가 내 말을 거스르는 날이 올 줄이야!’

“헛소리는 집어치우거라!”

유건이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절대 지시연 씨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의 시선이 시연에게 떨어지자, 시연은 뼛속까지 전해지는 서늘함을 느꼈다.

“어린 시절에 약속한 결혼을 여태 진심으로 여긴 건 아니죠?”

“그 입 닥치지 못해?! 네가 아주 미쳤구나!”

고상훈은 가슴을 가린 채 숨을 크게 쉬었다.

“내가 여태 너를 그렇게 가르쳤니?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은혜에 보답하고, 뱉은 말은 지켜야하는 법이거늘!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네가 감히 이 할아비를 곤경에 빠뜨리다니! 아...”

갑자기 눈을 감은 고상훈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할아버지!”

“어르신!”

고상훈은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았고 병실로 옮겨졌다.

고상훈의 상태를 확인한 유건은 로비에 있던 시연을 찾아갔다.

시연은 두 손을 모은 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어르신은 괜찮으세요?”

“네.”

유건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유건가 자신을 귀찮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챈 시연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는 제가 혼약을 위해서 온 게 아니었다고 전해주세요.”

시연도 고상훈이 혼약을 고집하며 화가 나서 쓰러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돈을 빌릴 면목을 잃게 된 셈이었다.

“어르신께서 괜찮으시다니 저는 이만...”

하지만 시연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입을 열었다.

그의 음침한 눈빛은 한기가 되어 시연의 뼛속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어쩜 그렇게 마음대로 행동하는 겁니까? 지시연 씨가 저지른 사고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어요?”

‘이 여자만 아니었어도,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시는 일은 없었을 거야.’

‘할아버지는 한평생 신뢰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분이셔. 그런 할아버지의 목숨을 걸고 도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유건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조롱의 빛이 깔려 있었다.

“저를 할아버지를 쓰러뜨린 불효자식으로 만들고 싶은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결혼은 꼭 해야 할 것 같군요.”

시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

그녀는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의 말에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어르신께서 쓰러지신 데에는 분명히 내 책임도 있어. 내가 어르신을 찾아가지만 않았더라면...’

유건이 시연을 흘겨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저랑 거래 하나 하시죠, 형식적으로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다는 것만 할아버지께 보여드리는 거예요. 실질적인 부부관계는 없고, 서로 간섭도 하지 않는 거죠.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이혼하는 거예요, 어때요?”

‘아, 계약 결혼을 하자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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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한아, 비켜.” 지한을 밀쳐낸 유건은 조금 전의 분노를 가라앉힌 채, 다시 평소와 같은 무덤덤하고 고고한 모습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가 담담히 말했다.“무슨 일이야?” “고유건 씨가 절 해고하게 시킨 거예요?” “그래, 맞아.” 그가 시연을 힐끗 쳐다보았다.“대답이 됐니? 지한아, 가자.” “예, 형님...”“잠시만요!”시연이 재빨리 두 걸음 뛰어서 유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잘못했어요!”시연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비굴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다 내 잘못이야.’ ‘결혼으로 저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내가 고유건을 건드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건 간과했으니까!’‘내가 주제넘은 짓을 한 거야!’ “제발요, 해고는 없던 일로 해주세요. 이 일은 제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그녀는 의과대학 마지막 학기의 실습 과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습의는 급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르바이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시연이 짙은 안개가 낀 눈빛으로 간청했다. “제가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혼할게요, 동의할게요. 고...”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힘껏 움켜쥐었다. “네가 이혼을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안 하는 거야?” 분노가 극에 달한 유건이 온몸에서 포악한 기운을 발산하며 말했다. “네까짓 게 감히 몇 번이나 날 건드려?! 겁은 지나가던 개나 줘버린 거야?!” 이 말을 마친 그가 손을 뿌리쳤다. “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하지만 시연이 다시 그를 막았다.“고유건 씨!”유건이 눈살을 찌푸렸다.“꺼지라니까? 사람 말 못 알아들어?!”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괜히...”시연은 그를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는 사는 것만으로도 힘든 사람이에요. 저는 정말 이 일이 필요해요...” 음침하고 냉담한 얼굴의 유건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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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바이트가 없어졌으니, 지시연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했으며, 가능한 한 빨리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시연이 예상한 바와 같이, 그녀는 실습 업무 자체로도 매우 바빴고, 시간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시연은 일주일간 틈틈이 일자리를 찾았는데, 배가 고프면 빵을 두 입 먹을 뿐이어서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 그녀는 오늘도 야근하고 나서 일자리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 “시연아.”같은 실습의인 주하은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오준수 선생님께서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시연은 멍해졌다.“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알아?” “모르겠어.”주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만 채혈하러 가봐야 해. 너도 얼른 가봐.” “그래, 알겠어.”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날이랑 상황이 비슷한 것 같은데...’ 그녀는 곧바로 오준수의 사무실로 갔다. 오준수는 전문의이자 의대 실습의의 총책임자였다. 시연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오 선생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녀를 한 번 바라본 오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약간의 의혹을 품은 채 입을 열었다.“시연아, 병원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너더러 실습이 중지됐으니까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고 하더라.” 시연이 온몸을 떨며 눈동자를 움츠렸다. “왜... 요?”오준수가 고개를 저었다.“글쎄다, 학교 측에 물어보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만 돌아오더라고.” 총책임자이던 그는 시연이 실습의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론이든 수술 실습이든, 흠잡을 데가 없는 학생이었는데...’오준수도 곤혹스러워했다.“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감도 안 오는 거야?” ‘제가 무슨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시연은 갑자기 심장이 꽉 조이는 듯했다. ‘틀림없이 고유건의 짓이야!’ 시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병원에 말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1화

    병실에 들어선 시연은 침대 옆에 앉았다. 고상훈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시연아,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니? 짐은 다 챙긴 게야?” ‘준비? 짐을 챙긴다는 건 또 무슨 말씀이시지?’ 시연은 정신이 멍해져서 대답할 수 없었다.곧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고상훈이 말했다.“설마 유건이가 너한테 말을 하지 않은 게야? 이 자식이! 이럴 줄 알았어, 성의 없이 한 대답일 줄 알았다고!” 사실, 조만간 고상훈의 오랜 친구가 생일을 쇨 예정이었는데, 그는 직접 갈 수 없어서 고유건에게 지시연과 함께 가라고 한 것이었다. 이는 고상훈이 좋은 뜻을 가지고 한 말이었다.이 나이까지 살아온 그가 어떻게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유건과 시연을 붙여 놓으려 했다. “시연아, 이 할아비의 말을 좀 듣거라.” 고상훈은 두 젊은이 때문에 마음을 졸였다. “유건이가 다른 사람한테 지시를 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미 결혼한 이상, 감정을 잘 가다듬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니?” “네.”지시연은 반박할 수 없어서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착한 아이구나.”고상훈이 흐뭇하게 웃었다.“시연아, 유건이는 너한테 맡기마.” 병실에서 나온 지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실습이 중단된 일을 겪은 그녀는 유건을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상훈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시연은 어려서부터 그 누구의 귀여움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상훈은 늘 시연에게 잘해주었고, 그녀는 이를 감사하고 소중히 여겼다.‘그래, 다녀오자. 다 어르신을 위한 일이잖아.’ ‘어차피 이미 실습을 정지당했기 때문에 휴가를 낼 필요도 없어. 하지만... 생신을 축하하는 자리면 선물은 준비해야겠지?’ ‘돈이 없어서 비싼 걸 살 수는 없으니까, 마음을 담은 선물을 준비하자.’ 마침 시간이 있었던 시연은 천음사로 향하는데... 그녀는 저녁에 기숙사에 돌아와 짐을 싸고 유건에게 전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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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00화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9화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8화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7화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6화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5화

    유건은 할아버지의 말에 눈을 크게 떴고,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할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흥.”고상훈은 비웃듯 콧소리를 내뱉고, 차갑게 손자를 곁눈질했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서 묻는 거냐?”“할아버지...”“유건아, 난 아픈 거지, 죽은 게 아니야!”단호하게 떨어지는 목소리.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톤이었다.“너, 또 그 여자 연예인이랑 엮였지? 맞냐, 아니냐?”“그게 아니라... 소미 씨가 그때 다쳐서...”유건은 급히 해명하려 했지만, 고상훈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변명 같은 건 필요 없어!”고상훈은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 시연이랑 따로 산다는 것도... 내가 몰랐을 것 같냐? 결국 다 그 여자 때문이잖아. 그러고도 네 주제에 시연이가 외도했다고 몰아세워?”그 말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나는...’고상훈의 시선이 이번엔 시연을 향했다. 그 눈빛엔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가득했다.“시연아, 할아버지가 정말 미안하다.”“아니에요...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을 막았다. 목이 콱 멘 듯했다.‘이런 말을 들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넌 좋은 아이야. 그건 내가 제일 잘 안다.”고상훈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유건을 향해 돌아섰다.“시연이가 바람을 피웠다고? 그건 그냥 핑계야. 네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만든 말이지.”“할아버지...”유건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딱히 내놓을 말도 없었다.‘맞아, 결국 내가 잘못한 거니까.’ “제 잘못입니다.”유건도 더는 변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시연을 오해했고, 다그쳤고, 상처 줬으니 말이다.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됐어.”고상훈은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애초에 넌 시연이랑 결혼할 생각이 없었잖아. 그걸 내가 억지로 밀어붙인 거고. 결국 이 모든 잘못은 나한테 있는 거다.”그는 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4화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 도착할 즈음, 시연이 눈을 떴다.“도착했어요?”“거의 다 왔어.”유건은 살짝 아쉬웠다. ‘이렇게 금방 깨다니... 좀 더 자도 되는데.’“조금만 더 누워 있어. 도착하면 깨울게.”“이젠 안 잘래요.”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곧 임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아야, 나야... 응, 나 도착했어. 혹시 골목 입구 쪽으로 나올 수 있어? 눈이 와서 미끄러질까 봐. 고마워.”그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유건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도착도 하기 전에 이미 다 정해둔 거야.’‘결국... 나랑은 끝까지 선 긋겠다는 거네.’차가 골목을 돌자, 시연의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저기 세워줘요.”시연은 고개를 돌려 유건에게 미소를 지었다.“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진아가 날 데리러 올 거라서, 이만 여기서 내릴게요.”“그래.”유건은 간신히 목을 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혀끝이 씁쓸했다. ‘왜 이렇게 입안이 쓰디쓴 거야...’길 건너, 빨간 롱패딩을 입은 진아가 아이처럼 방방 뛰며 이쪽으로 달려왔다.“시연아!”차에서 막 내리는 시연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거기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마! 우리 아가 다치면 안 되잖아. 아가야, 이모가 왔어!”시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모! 잘 들려요!” 유건은 차 안에서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연이 진아의 팔짱을 끼고, 조심스레 발을 옮기며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그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그는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지한이 힐끔 유건을 보았다. ‘형님이 형수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누가 봐도 뻔한데...’‘왜 그렇게 혼자 아닌 척하는 건지... 참 답답하네.’ 지한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외쳤다. ‘이래서야 어찌 제대로 풀리겠냐고요...’그때,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한 번 보고, 곧장 받았다.“네, 할아버지.”전화기 너머로 낮고 단호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3화

    “아...”시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놀란 눈으로 유건을 올려다봤다. 이내 눈동자 깊숙이 깔린 공포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방금... 진짜로 넘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아이까지...’“놀랐지?”유건은 미안함과 자책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사실, 유건 역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놀랐다. 턱 끝을 시연의 머리 위에 살며시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미안해, 내 잘못이야.”‘네가 손을 뿌리쳤어도, 내가 끝까지 잡았어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너한테 판단을 맡긴 내가 바보지.’잠시 생각을 정리한 유건은 망설임 없이 긴 팔을 뻗어 시연을 그대로 안아 올렸다.“꺅!”몸이 허공에 뜨자 시연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유건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따뜻하고 단단한 품속, 시연은 어느새 어리고 여린 고양이처럼 유건 품 안에 조용히 안겨 있었다.‘왜 이렇게... 익숙하고 편하지...?’유건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물처럼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차까지 안고 갈게. 금방이야.”말을 내뱉자마자, 유건은 조금 후회했다. ‘아니, 너무 가깝잖아? 차를 더 멀리 대라고 할 걸 그랬어...’ 지한이 차 옆에 서 있다가 타이밍 맞춰 문을 열어줬다. 유건은 허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시연을 차 안에 내려놓았다.그녀는 문득, 시트 위에 놓인 작은 쿠션 하나를 발견했다. ‘예전엔 이런 거 없었는데... 설마, 날 위해 준비한 건가?’곧 유건도 차에 올라탄 후, 운전석의 지한에게 조용히 말했다.“출발하자. 그리고 천천히 가. 시간은 충분하니까.”“네, 형님.”차는 조용히 눈길을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밖에선 여전히 눈이 퍼붓는 중이었지만, 차 안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시연이 롱패딩을 벗자, 유건은 바로 담요를 꺼내 그녀 무릎 위에 덮어주었다.“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잠깐 눈 좀 붙여.”그 순간, 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정돈된 이목구비, 잔잔한 눈빛. 그제야 의문이 떠올랐다.“근데..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2화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시연은 유건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냥... 조금 나른할 뿐이에요.”“시연아.”유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단호하고 냉정한 톤이었다.“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협의하자는 것도 아니고.”그리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연의 아랫배로 향했다. 그 시선 하나에, 시연은 숨을 삼켰다.“너, 너 자신은 둘째치고... 얘한테까지 무심할 거야?”아이 이야기까지 나오자, 시연의 눈빛엔 망설임이 번졌다.“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이건 일이니까...”‘지금 상황에선 내가 나서야 해...’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유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이 문제는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유건은 바로 양석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결하면서도 공손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양 교수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시연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졌네요.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네, 감사합니다...”전화기 너머에서 양 교수는 무언가를 길게 말했다. 시연은 가만히 입술을 다문 채 기다렸다. 두 손은 자연스럽게 아랫배에 모아졌다.“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유건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놨다.“양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병가를 내주셨어. 바로 다른 사람을 보내시겠대. 그러니까 너는 그냥 푹 쉬어.” 유건은 시계를 확인했다.“지금 아직 7시도 안 됐어. 대체 인원 도착해서 준비하면 충분해.”세미나는 9시 반 시작이었다. 시간상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고마워요.”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한마디에 유건의 가슴이 묘하게 저릿해졌다.‘이젠... 우리 사이가 이렇게나 멀어진 건가?’ ‘‘고맙다’ 같은 말이 이렇게 남처럼 들리다니.’“고마워할 필요가 없어. 별것도 아니잖아.”표정 하나 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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