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꽃, 누구한테 주려는 거지?’“다 준비됐습니다.”가게 주인이 꽃다발을 건넸다.“감사합니다.”“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여기요, 고객님.”유건은 핸드폰을 꺼내 QR코드를 스캔해 결제했다....꽃집을 나서며, 유건이 손을 내밀었다.“내가 들게.”“괜찮아요.”시연은 고개를 저었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꺼냈다.“다른 일 없어요? 나는 기환 씨랑 가도 돼요.”“응?”유건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기환이랑 나랑 같아?”“아니요.”시연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냥, 당신이 지루할까 봐요.”그는 꽃을 받아 들었다.“성묘 가는 거야?”“짐작했어요?”“하.”유건은 코웃음을 쳤다.“국화에 카네이션까지 샀는데, 너무 티 나잖아. 근데 누구 성묘야? 오늘은 무슨 날도 아니잖아.”“아는 어르신이에요.”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날 많이 아껴 주셨던 분이죠.”“그럼 가자.”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같이 갈게.”시연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차는 도시 서쪽에 있는 주선교의 하늘길 묘원에 멈췄다.도착하자마자, 시연이 입을 열었다.“혼자 올라갈게요. 당신이랑 기환 씨는 여기서 기다려줘요.”“안 돼.”유건은 단칼에 거절했다.“당신, 정말 정신 안 차릴 거야? 납치, 교통사고, 그것도 모자라 흉기 상해까지... 그동안 몇 번이나 당했는데, 정말 안 무서워?”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오늘은 나 혼자 가야 해요.”그녀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유건은 타이르고 싶었지만, 시연이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 흔들었다.“딱 이번 한 번만...”그는 한숨을 쉬었다. 시연이 이렇게 나올 때면, 그는 결국 져줄 수밖에 없었다.“좋아, 대신 우리 눈에 보이는 곳까지만 가. 알겠지?”“그래요.”...차에서 내린 시연이 앞장서 걸었다.유건과 기환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를 지켜봤다.점점 언덕을 오르자, 시연
“...미안하다.”지동성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아빠가 잘못했다. 깊이 생각하지 못했어.”“됐어요.”시연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과한다고 우주가 다치기 전으로 돌아가나요?”“시연아... 아, 맞다.”지동성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지갑을 꺼내어 카드를 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지난번에 주려던 거야. 받아.”시연이 움직이지 않자, 그는 다시 설득했다.“필요할 거야.”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중요한 날에 너 혼자 왔구나. 고 대표는 네 곁을 지키지 않았어, 그 말인즉슨, 그 사람은 널 충분히 아끼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오래갈 것 같니? 고씨 가문을 떠나게 되면, 너는 돈이 필요할 거야.” 시연은 잠시 흔들렸다.왜냐하면 지동성이 한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지동성 집안의 재산 중에는 시연과 우주의 몫도 있는 게 맞았다.“시연아, 받아. 거절하지 말고.”그때, 뒤에서 깊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럴 필요 없습니다.”...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시연은 긴장했다.뒤를 돌아보자, 유건의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반사적으로 유건의 앞을 가로막았다.즉, 묘비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듯했다.“왜 왔어요? 기다리라고 했잖아요.”유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왜 오면 안 되는데?”‘안 왔으면, 내 와이프 딴 남자한테 뺏겼을지도 몰라.’그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었다.멀리서도 지동성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고, 두 사람이 얘기하는 것도 알 수 있었다.처음에는 시연과 지동성이 친척과 같은 관계라고 하니, 지동성이 두 마디 정도하고 간다면 유건도 이해할 참이었다. ‘가족 같은 사이니까, 그냥 몇 마디 하는 거겠지.’하지만, 지동성은 계속 떠날 기미가 없었다.‘뭐야, 카드까지 내밀고 있잖아?’유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는 시연의 손목을 잡아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그리고 지동성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 사장님, 아내도 따
유건이 본 것은 시연이 가져온 꽃과 묘비 위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여자는 젊었고, 눈매와 이목구비가 시연과 닮아 있었다.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후, 묘비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하... 이제 모든 게 명확해졌네”유건은 냉소하며 발끝에서부터 냉기가 스며들었다.그리고 단숨에 시연이 오늘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바로 ‘부명주’라는 사람이었으며, 그녀는 시연의 친어머니였다.그는 천천히 시연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분이 네가 말한 ‘어르신’이야?”남자의 눈빛이 차가웠다.“지금, 내 앞에서 한번 불러보지 그래? ‘이모’라고.” 시연은 눈을 감았다가 뜬 후,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엄마예요. 오늘은 엄마의 기일이고요.”“이제야 말하네?”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얼굴이 굳어지고, 감정이 격해져 제어할 수 없었다.그리고 짜증스럽게 발을 구르더니, 마지막엔 참지 못하고 욕설까지 터져 나왔다.“씨X, 난 완전 바보였네! 지시연, 넌 대체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시연은 고개를 숙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시연, 난 네 남편이야!”법적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두 사람은 부부였다.결혼식도 했고, 부부로서 관계도 맺었다.그런데 장모 기일에, 묘지까지 왔으면서도 유건은 제지당하고 말았다.“설명해. 왜 거짓말했어? 왜 날 못 오게 했어?”시연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천천히 말했다.“당신을 오게 하면...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소개해야 하죠?”“뭐...?”유건은 어이없어졌고, 시연은 이어서 말했다.“엄마한테 ‘이 사람이 내 남편이에요, 엄마의 사위예요’라고 해야 하나요?”“아니, 당연한 거잖아.”유건이 답했다.“하지만...”시연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난 일 년에 최소 다섯 번은 여기에 와요. 설, 한식, 추석, 그리고 생일이랑 기일...”그러다 목소리가 서늘해졌다.“그런데 다음번에 올 때, 내가 혼자라면요...?”“여보...”유건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그러나 시연은
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무의식적으로 발코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주저하다가 조용히 입을 뗐다.“소미 씨, 미안해. 난 못 갈 것 같아.”[네?]소미는 당황했는데, 유건이 거절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부탁한 건, 거의 다 들어줬던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랜 세월 쌓인 정’까지 있었는데...[왜요?]“미안해.”유건은 차분하게 말했다.“우주가 이제 막 퇴원했어. 아직 회복 중이라 시연이도 신경이 예민한 상태야. 난 두 사람 곁을 지켜야 해.”[아...]소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지시연 곁을 지켜야 한다고? 하루 24시간 내내?’‘둘은 이미 부부가 됐는데, 매일 함께 있는 걸로는 부족해서, 단 몇 시간조차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거야?’ 소미는 손을 꼭 쥐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이해해요. 그래야죠.]“그날엔 지한을 보낼게.”유건은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소미 씨가 그 바닥에서 가볍게 보이는 일은 없을 거야.”[그래요. 고마워요.]전화를 끊자마자, 소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힘껏 던졌다.핸드폰이 벽에 부딪혀 땅에 떨어졌다.“신경이 예민하다고?”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그래? 그럼 내 마음은...?’‘지시연 곁을 지켜주겠다고? 그럼 나는?’ ...조용한 나날이 흐르던 어느 날.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시연은 양석현 교수에게 호출받았다.“교수님.”“오, 시연이 왔구나!”양석현 교수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아니, 오히려 들뜬 기색이었다.“어서 앉아! 임신 중인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고 대표님이 나를 탓할 거 아니야!” “무슨 일이신데요?”시연은 피식 웃으며 앉았다.“제가 그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에요? 저, 그 정도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은 아니에요.” “아니, 네 나이 또래라면 누구든 놀랄 만한 소식이야.”양석현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돌렸다.“솔직히 말하면, 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어떻게 그래요?”시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웃었다.“교수님께서는 늘 저를 위해 힘써 주셨잖아요. 감사한 건 저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나한테 감사할 거 없어.”양석현은 눈가가 촉촉해지며 말했다.“감사해야 할 사람은 너 자신이야. 역경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냈으니까.”“네...”시연은 목이 메어 끄덕였다.양석현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만약 대학원 입학 특별전형 대상자로 선정되면, 너는 강울대병원 인턴으로 근무할 기회를 얻게 돼. 그렇게 되면, 학업도, 경력도 한층 더 안정될 거야. 결과를 기다려보자꾸나.”“네.”...양석현 교수 연구실을 나서자, 시연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계속 진동했다.너무 기쁜 나머지,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확인도 안 한 채 곧바로 받았다.“여보세요?”[여보.]유건이었다.[퇴근했어? 나 지금 병원 앞이야.]“아, 그래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시연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건물 출입문을 나서자, 유건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시연은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며 거의 뛰다시피 남자에게 달려갔다.“뛰지 마!”유건이 급히 말렸지만, 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허리를 감싸 안고,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유건은 순간 얼어붙었다. 마치 몸이 굳어버린 듯했다.하지만 곧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뛰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안 듣네?”“유건 씨.”시연은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지만, 눈물방울이 눈가에 가득 맺혀 있었다.그리고 곧,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여보?!”유건은 당황하여 손발이 엉켜 허둥댔다.“갑자기 왜 울어?”‘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선배한테 혼났어? 동료가 괴롭혔어? 아니면, 환자가 당신을 힘들게 했어?”그러나 시연은 계속 울기만 했고, 대답이 없었다.“말해봐!”유건은 점점 초조해졌다.“대체 어떤 개XX가 널 울렸어?!”“아, 아니에요.”시연이
결국, 유건은 시연을 빠르게 차에 실려 집으로 향했다....침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바닥에는 남성 재킷, 넥타이, 여성 숄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시연은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하기 싫었다.그러나 몸이 끈적거려 너무 불편했다.“저기...”눈도 뜨지 않은 채, 옆에 있는 남자를 발끝으로 살짝 툭 찼다.“안 씻어요?” 시연은 깔끔한 걸 좋아했고, 유건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먼저? 아니면 내가 먼저?”시연은 눈을 부릅뜨며 노려봤다.“나 혼자 씻으라고요?”‘지금 내 상태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푸흣... 하하, 알았어.”유건은 기꺼이 시연을 안아 들고, 여자를 번쩍 안아 욕실로 향했다.그가 시연을 씻겨 주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사실, 처음부터 유건이 먼저 나섰다.그는 이런 부부간의 애정 표현을 꽤 즐기는 편이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런 일이 그에게 일종의 ‘고통’이나 다름없었다. 유건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시연의 입술을 깨물듯이 키스했다.“아얏, 아파요...”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왜 깨물어요?”유건은 대답 대신 입술을 따라 천천히 입맞춤을 퍼부었다.“우리 아기는 언제 태어나지?”‘응...?’‘설마... 그것도 모른다고?’유건은 고개를 젓다가 피식 웃었다.“이 아이, 나중에 정말 효도해야 해.”그는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이 녀석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든지...”그 순간, 시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푹 잠든 후, 다음 날 아침.오늘은 출산 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보통 이 시기의 임산부는 한 달에 한 번만 검진을 받으면 되지만, 시연의 초기 상태가 다소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오선화는 특별 지시를 하여 일주일에 한 번 검진을 받도록 했다. 이번에 유건은 시연과 함께 병원에 동행했다.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 후, 오선화와 유건은 또다시 시연을 피해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확실히 좋아졌습니다.”오선화는 차트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지난번보다
유건이 이렇게까지 많은 걸 해줬는데, 시연은 자신이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아...”시연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자신을 나무랐다.‘너무 쉽게 마음이 흔들려...’‘다짐했잖아. 더 이상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결국, 그녀는 선물을 주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상자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유건이 돌아왔을 때, 욕실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시연이 샤워 중이라는 걸 알기에 방해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은 후, 소파에 앉았다.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상자가 눈에 띄었다.“이건 뭐지?”그는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다.손바닥 크기의 작은 상자였다. 시계 상자처럼 보였다.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열어보았다.그런데 시계가 아니었다.황동으로 만들어진 반듯한 네모의 그 물건은, 라이터였다.손안의 정교한 그 물건은 표면이 매끄럽게 연마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작은 영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To H.]그는 무심코 속삭였다.“To H?”그 순간, 유건의 눈이 흔들렸다.‘H?’‘‘husband’? 나잖아?!’‘나한테 주는 선물인가?’‘하긴, 이 방에서 나한테 이런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유건은 바로 떠올렸다.시연이 직접 자신의 생일 선물을 준비했다던 기환의 말을. ‘설마... 이건가?’유건은 손아귀에 서서히 힘을 주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때, 욕실 안에 샤워기 소리가 멈췄다.시연이 욕실에서 나왔고, 곧바로 유건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리고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 순간, 당황스러움에 시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녀는 급히 달려갔다.“유건 씨...!”“응?”유건은 웃으며 대답했고,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괜히 애쓰지 마. 당신, 나보다 키 작은 거 알잖아. 뺏을 수 있겠어?”시연도 그걸 알고 있었다.‘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건가...’그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
“네.”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딱히 움직임은 없어요. 아마, 자기들 살기 바쁠 거예요.” 고상훈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때마침 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수술 날짜 정해졌어요. 이번 주 금요일인데, 그날은 할아버지 한 분만 수술이 잡혀 있어서 양석현 교수님께서 직접 집도하실 거예요. 물론 저도 양 교수님 곁에서 그분을 도와드릴 거고요. 할아버지, 제가 같이 있어 드릴게요.” “그래, 잘 됐구나.” 고상훈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착한 손자며느리가 옆에 있는데, 내가 뭐가 무섭겠냐.” 수술 이야기를 마친 뒤, 유건은 먼저 병원을 나서 회사로 향했다. 시연은 고상훈 곁에 조금 더 머물다가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복도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심재규였다. 그는 유건이 우주를 위해 따로 모셔 온 정신과 교수였다. “심 교수님?” “사모님.” 심재규 역시 시연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시간이라면, 그는 분명 태산요양병원에 있어야 할 터였다. 그래서 심재규도 급히 해명했다. “오늘 진행해야 할 우주 군의 치료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요양병원을 떠나기 전에 최예민 선생님께 인수인계도 다 해뒀고요.” “혹시라도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급한 볼일이 생기는 바람에... 바로 처리하고 돌아갈 겁니다.” 시연은 손을 내저었다. “교수님, 긴장하지 마세요. 따지러 온 건 아니니까요.” 그 말투와 표정이 진심처럼 느껴져, 심재규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제 환자 중 한 분이 지난번에 다쳤는데, 이후로 통 진료를 받으러 못 오셔서요. 시간 날 때 한번 보려고 들렀습니다.” “환자 보러 오신 거였군요?” 같은 의료인으로서, 시연은 그런 의사들을 가장 존경했다. ‘역시 심 교수님은 진짜 의사야.’ “교수님처럼 진심으로 환자를 생각하시는 분께 뭐라 할 이유는 없죠.” “사모님, 과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