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시연에게 키스하는 유건의 행동에는 분명히 어떤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이건... 내 분풀이야...’ 그는 불쾌함을 발산하듯 시연을 깨물었다. 물론, 세게가 아니라 살짝이었다. 시연은 원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물리기까지 하니,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바로 입을 열어, 그대로 되물었다. 남자는 가볍게였지만, 시연은 제대로였다. 아프게, 확실하게. “읍...” 고통을 느낀 유건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깊어지고, 거칠어졌다. ‘미쳤나, 이 남자...?’ 시연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유건이 얼마나 거칠게 키스하든, 그녀도 그만큼 세게 물었다. 결국 입 안에 금세 피비린내가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놓았다. 시연이 고개를 들자, 유건의 입가에 피가 맺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웃고 있었다. 이어서 손끝으로 피를 닦았고, 손에 붉은 자국이 묻었다. “진짜 독하다. 사람을 이 정도로 문다고?” 시연은 순간 당황했다. 이 정도로 세게 물 줄은 몰랐다. ‘내 잘못인가...?’ 하지만 곧 눈을 부릅떴다. “누가 먼저 키스하래요? 자업자득이죠.” “뭐?” 유건의 가늘어진 눈엔 모호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이젠 내 아내한테 키스하는 것도 자업자득이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난 듯한 말을 남기고 욕실을 나가버렸다. “옷은 밖에 있으니까 당신이 알아서 골라.” 밖으로 나온 시연은, 그제야 유건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아 이 바보... 내 짐을 통째로 보냈네.’ 시연은 한숨을 쉬며 캐리어 앞으로 다가갔고, 옷을 골라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병실로 나오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돌리니, 발코니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옆모습이 어딘가 쓸쓸하고 지쳐 보였다. 시연은 아무 말 없이 보호자 침대로 가서 앉았다. 머리는 아
유건은 숨이 턱 막혔다. 마치 이빨을 드러낸 들고양이가 가슴팍을 사정없이 할퀸 듯, 마음에 생채기가 그대로 남았다. ‘이 기분, 진짜 최악이다.’ 표정이 굳어졌지만, 여전히 잘생긴 남자의 얼굴에 억지 미소가 걸렸다. “내 아내한테 잘해주는 게 왜 시간 낭비야? 그리고 당신, 내 아내인 이상 단 하루도 도망 못 갈 줄 알아. 알아서 하면 뒷일은 감당해야 할 거야.” ‘허...?’ 시연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손해 보는 건 내가 아니니까...” 그리고 말을 툭 끊고, 시선을 돌렸다. “머리 다 말렸어요? 나 이만 잘 거예요.” “응, 다 말렸어.” 유건은 수건을 옆에 내려놓고 시연을 번쩍 안아 올렸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팔은요...? 팔 망가지게 하려고요?”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힘써도 돼요?” “괜찮아.” 유건은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피부만 좀 까진 거라 괜찮아. 그리고 내가 안 안아주면, 당신이 혼자 알아서 침대에 누울 수 있을 것 같아?” 말하는 사이, 그는 시연을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당신...!” 시연은 눈을 부릅떴다. “같이 안 잘 거라고 했잖아요!” “진정해.” 유건은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당신이 싫어하니까 약속한 거고, 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보호자 침대는 싫다며? 당신은 여기서 자. 나는 보호자 침대에서 잘게.” ‘뭐...?’ 시연은 어이가 없었다. ‘나는 환자 침대에서 자고, 환자인 고유건 씨는 보호자 침대에서 잔다고?’ “장난치지 좀 마요!” “여보, 내 말 좀 들어.” 유건은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당신이 편히 못 자면, 나도 편히 못 자. 그러니까 그냥 자.”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시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면 내가 마음이라도 돌릴 줄 아나?’ “그럼 알아서 해요.” 이제 할 말은 다 한 듯, 시연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
시연은 민환을 바라보며 말했고, 민환은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정말 땅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겠지.’ 하지만 그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즉, 시연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얼른 가 봐요.” 시연은 가방을 들었다. “나도 출근해야 해서요.”“여보!” 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화났어?”“그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시연은 차분하지만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화났다고 하면, 그 여자 만나러 안 갈 거예요?” “여보... 장소미 씨가 지금 많이 힘들어...” 유건은 난감한 얼굴이었다.“알아요. 그래서 나도 당신이 가는 거 안 막았잖아요.” 시연은 유건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나는 내 일이 있고, 내 일을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당신이 내 일을 방해하면... 나, 당신이 미워질 거예요.” ‘미워질 거라고?’ 그 단어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유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곧이어 그는 여자의 손을 놓았다.시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사무실에 도착한 후, 인수인계를 마치고 잠시 앉았는데, 유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 “무슨 일인데요?” [지금 회사로 가는 중이야.] ‘회사? 장소미는? 그럼 팔은?’ 시연은 잠깐 놀라 물었다. “수액은 안 맞아도 돼요?”[맞아야지. 낮엔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에 병원에서 맞을 생각이야.] ‘정말 일에 미친 사람.’ 시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지난번에도 칼을 맞고 병실에서조차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때 유건이 덧붙였다. [오늘 퇴근하고 데리러 갈게.] 시연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당신은... 당신이나 잘 챙기세요.”[그렇게 정했어. 병원 앞에서 기다릴게.] 그 말을 끝으로 유건은 전화를 끊었다. 시연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걸로 다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조 선생님, 그런 뜻이 아니라...” 시연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팀도 아니고, 조한나가 맡은 환자 상태는 시연이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진료차트를 정리하란 말인가?“그럼 입 다물고 하라는 대로 해!” 조한나는 차트를 시연 손에 억지로 쥐여주며 말했다. “빨리 처리해. 난 약속 있어서 가봐야 해!”“아, 조 선생님...” 시연이 불렀지만, 조한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시연은 진료차트를 품에 안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어. 그냥 해야지...’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유건이었다.[여보. 나 지금 병원 앞이야. 내려올래?]시연은 손에 들린 진료차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일 안 끝났어요. 좀 더 있어야 해요.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요.”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유건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표정은 어두워졌고,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눌렀다. ‘안 내려온다고? 그럼 내가 올라가야지.’‘남자는 융통성 있어야 하니까... 뭐 이런 일쯤이야.’그는 외과 병동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리고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조한나가 나왔다.그녀는 전화 중이었다. “나 출발했어. 근데 나오기 직전에 누군가 진료차트를 처리하라고 하길래, 지시연한테 맡겼어. 어, 그 재벌 며느리 말이야.” “맞지? 나도 걔 되게 유난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잘났으면 그냥 집에서 살림이나 살지, 뭐 하러 여기 와서 일을 해? 너 그거 알아? 양석현 교수가 걔한테 얼마나 잘하는데. 난 걔네 둘 뭐 있는 줄 알... 아악!”순간, 핸드폰이 손에서 확 낚아채졌다. 조한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누, 누구...!!!”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손을 들어, 그녀의 핸드폰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쾅!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꺄아악!” 조한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유건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건은 간신히 유지하던 표정을 더는 감추지 못 했다. “내가 보기엔, 네가 너무 모르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 관계엔 아무 영향도 없을 거야.” ‘영향이 없다고? 그럴 리가...’ “당신은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난 달라요.” 시연은 입술을 꾹 눌러 담았다.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란 건 인정해요. 나도 한때는 당신한테 마음이 있었고, 앞으로 쭉 함께할 수 있겠다는 환상도 품었으니까요.” “그럼 계속 그렇게 생각해.”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말하는 유건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하지만 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이젠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럴 필요 없어...” 유건은 놀란 듯 여자의 손을 붙잡고,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럴 필요 없어, 여보. 난 정말로 장소미 씨를 보살펴주고 있을 뿐이야. 그 이상은 없어.” ‘그 이상은 없다고?’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하나만 물을게요. 대체 언제까지 장소미를 돌볼 생각이에요? 하루? 이틀?”유건은 말이 없었다. 소미의 상태를 생각하면, 금방 끝날 일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루아침에 회복시킬 수 있는 병은 아니었다.“오래 걸릴 거잖아요?” 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내 입장에선 얼마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여보...” “그 여자를 보살피고 싶으면, 마음껏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내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그렇게까지 잘해주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유건 씨, 난 싫어요.”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남자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냈다. 허공에 남은 손끝을 바라보자, 유건은 가슴이 싸하게 저며왔다. “나한테... 아무런 미련도 없는 거야?” “있죠.” 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솔직하게 말했다. “당연히 아쉽고, 조금은 슬플 거예요. 하지만 인생엔 사랑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잃는 건 안타깝지만... 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식사를 마치고, 유건은 약속대로 시연을 진아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기환은 이미 짐을 옮겨놓은 상태였다.“도착했어요. 난 이만 올라갈게요.” 시연은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손이 탁 잡혔다. 유건은 앞을 보며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 건물, 복도 등이 다 고장 나 있어. 당신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어떡해?”‘진짜 별걸 다 챙기네.’ ‘이럴 필요가 있을까? 지금 우리 같은 사이에?시연은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고유건도 시간이 지나면 알겠지. 내가 애교 부리는 것도, 밀당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다음 날, 시연은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오전에 정리해야 할 자료와 진료차트가 한가득, 오후엔 외래 진료까지 있었다.외래 진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병원 로비 쪽이 왁자지껄해졌다.시연은 마지막 환자를 진료하고 차트를 건네며 당부했다. “정해진 날짜에 꼭 다시 오세요.” “네, 선생님.”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시연은 궁금해져서 복도를 따라 걸었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날카롭고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보지 마! 다들 그만 봐!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시연은 잠깐 멍해졌다가, 곧 머릿속에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곧이어 두 눈이 그 사실을 확인해 줬다. 조한나였다.로비 한쪽, 병원 홍보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의료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환자와 보호자였다.“비켜! 다들 꺼져! 가라고!!” “야, 사진 속 여자랑 똑같은데?” “진짜야? 가슴에 명찰 달고 있잖아.” “맞네, 조한나라고 적혀 있어!” “어머, 저 여의사, 진짜 뻔뻔하네.”“더러워, 손대지 마!” “아악!”조한나는 눈이 벌게진 채, 게시판에 붙은 사진을 찢고 사람들을 마구 밀쳤다. 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소리 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시연이
시연은 손에 들고 있던 ‘팸플릿’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조한나의 상대 남자들... 얼굴은 꽤 괜찮았다.‘인성은 글러도, 눈은 제대로 달린 모양이네.’그렇게 감탄하고 있던 찰나, 시연의 눈앞이 훅 어두워졌다. 누군가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은은한 민트향의 향수 냄새. 누군지 안 봐도 알 것 같은 그 향기.유건은 시연의 손에서 팸플릿을 쓱 빼내고 나서야, 두 손을 풀었다. “이런 거 보지 마. 예쁜 눈 더럽히지 말란 뜻이야.”‘또 시작이네...’시연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만으로도 유건은 알 수 있었다. ‘나랑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거구나...’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하지. 내가 잘못했으니까. 조금만 참자.’“오늘 저녁은 같이 못 먹겠어.” 유건은 말투를 낮춰 설명했다. “수액 맞고, 바로 옆 도시로 가야 해. 비즈니스 미팅이 있어.”“나한테 그런 말 안 해도 돼요.” 시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일찍이 그런 반응을 예상한 유건은 예전만큼 동요하지 않았다.“아니, 해야 해.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매일 당신한테 보고할 거야.”‘맘대로 하던가.’ 시연은 그저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 다 했어요? 그럼 어서 수액 맞으러 가요.” ‘제발 빨리 좀 가라.’유건은 그녀의 표정에서 ‘귀찮음’ 세 글자를 읽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내일 오후, 늦어도 저녁엔 돌아올 거야.”“그래요...” 시연은 성의 없는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유건은 더 이상 붙잡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시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만큼은 안 봐도 되네. 다행이야.’그리고 몸을 돌리자마자, 기환과 딱 마주쳤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를 은근히 지켜주는 사람이었다.기환은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시연을 보자 화들짝 놀라 그 봉투를 얼른 등 뒤로 숨겼다. “형수님, 이제 퇴근하세요?”“그건
‘고유건... 보기 드물게 화가 나 있었는데... 정말, 나 때문일까?’시연의 마음이 더욱더 복잡해졌다.“형수님.” 기환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흰 다 알아요. 형님이 진심으로 형수님 좋아하신다는 거요. 정말로 잘해주시잖아요.”“그래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부정하지 않았다.“나한테는 정말 잘해줘요. 근데... 나한테만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장소미한테도 잘하니까요. 아니, 어쩌면... 더 잘하겠죠.” ...다음 날, 시연은 마침 휴무였다. 오랜만에 게으름을 부릴 수 있었고, 거의 정오가 다 돼서야 눈을 떴다. 진아는 출근하면서 식사를 챙겨놓고 갔다.시연이 늦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지동성이었다.“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시연아, 지금 어디야?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장소미 상태가 그 정도면 바쁠 만도 한데... 날 보러 나올 시간이 있나?’“어디서요?” [강울대 뒷길, 거기서 보자.]“좋아요.” 전화를 끊고도 시연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식사를 마친 뒤 옷을 챙겨 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강울대 뒷골목. 그곳에 도착하자, 지동성은 이미 와 있었다.“시연아, 여기.” 그가 손을 흔들었다.시연은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요? 아버지도 바쁘실 텐데.”지동성은 잠시 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알고 있구나?”그는 얼굴빛이 조금 바뀌었다. “하긴, 소미가 다친 건 워낙 큰일이니까... 네가 모를 리 없지.”“설마 그 얘기 하려고 절 부른 건 아니겠죠?” 시연의 말투엔 은근한 짜증이 묻어났다. “용건은 뭐죠?” “알았어, 바로 말할게.” 지동성은 황급히 말을 돌리며, 옆에 두었던 갈색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이게 뭐죠?”“전에 말했던 집문서야. 너랑 우주 명의로 된 집문서랑 열쇠, 그리고 네가 지난번에 안 가져간 카드도 같이 들어 있어.”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