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5화

Author: 임공
비틀거리던 시연은 하마터면 똑바로 서지 못할 뻔했다.

방금 고상훈의 검사를 마친 의사가 유건을 향해 말했다.

“고 대표님, 오셨습니까. 고 어르신께서는 아무 문제가 없으십니다만, 조금 허약하셔서 충분한 영양 섭취와 휴식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르신께서 자극받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좋은 기분을 유지하도록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의사는 이 말을 마치고 병실을 떠났다.

고상훈은 반쯤 누워서 손을 흔들었다.

“유건아, 그리고 시연아, 너희는 오늘 혼인신고를 했잖니... 행복한 신혼 밤을 보내지는 못할망정, 이 할아버지를 보러 오면 어쩌겠다는 게야.”

“어르신.”

시연이 손에 땀을 쥐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상훈이 조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도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게야? 그리고, 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게야?”

“저는...”

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거세게 쥐었다.

“할아버지께서 아직 입원 중이신데, 저희 두 사람이 행복한 신혼 밤을 즐길 수 있겠어요. 그리고 시연 씨는 할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밖에 없어서 죄송하다는 거고요.”

시연은 매우 놀랐다.

‘왜 나의 민낯을 폭로하지 않으려는 거지?’

“하하, 역시 시연이는 참 착한 아이구나.”

고상훈이 활짝 웃었다.

“얼굴 봤으니 됐다. 의사 선생도 괜찮다고 했고... 여기에는 의사 선생과 간호사들이 있을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거라. 너희 둘만 괜찮다면 나는 너무 기쁘단다. 유건아, 오늘은 네가 좀 주동적으로 행동하려무나.”

“네, 할아버지, 그럼 푹 쉬세요.”

시연의 손을 잡은 유건이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다정한 모습은 잠시일 뿐, 유건은 병실을 나오자마자 시연을 뿌리쳤고, 두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충분한 안정이 필요하시니까 당분간은 사실을 숨기는 게 좋겠어.”

‘할아버지께서 결혼을 종용한 여자가 이런 여자였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당장이라도 화병이 도지고 마실 거야.’

유건이 말하지 않아도 시연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유건이 음침하고 냉담한 표정으로 독이 서린 말을 내뱉었다.

“네 이름이 우리 고씨 가문의 등본에 조금이라도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역겹고 더러워 죽겠어.”

‘겉치레인 계약 결혼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여자는 안 돼!’

“!”

놀란 시연이 두 손을 꽉 잡은 채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처럼 모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나는 팔린 몸이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팔려도 한참 잘못 팔린 거지! 나는 이제 남한테 보이기 부끄러운 사람이 된 거야! 더러운 여자가 된 거라고!’

유건이 더는 시연을 상대하기 싫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이혼부터 해야겠어.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로 가정법원으로 가.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회복하기 전까지는 순순히 손자며느리의 역할을 다하도록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시연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몸을 돌려 떠나는 유건의 뒷모습에서는 자만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서서 씁쓸하게 웃었다.

‘저렇게 화낼 만 해, 다 내 잘못이지, 뭐.’

‘그래도... 억울하고 분한 건 참을 수 없어.’

‘어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마다하겠어? 나도 한때는 나를 보물처럼 여겨주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지...’

‘하지만 이번 생에... 그런 사람은 다시는 없을 거야.’

병원을 나선 지시연은 유건이 살고 있는 SKY전원주택단지로 가지 않았고, 곧장 강울대학교 기숙사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을 죽도록 싫어하는 유건과 함께 살 필요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저녁에 시연은 주지한의 전화를 받았다.

[유건 형님께서는 다음 주 수요일에만 시간이 있으십니다. 그날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할 수 있으십니까?]

“네, 가능해요.”

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시간 맞춰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시연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차피 형식적인 계약 결혼일 뿐이었잖아? 전혀 슬퍼할 거 없어. 그저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을 뿐이지...’

며칠 간의 피로와 정신적인 부담을 느끼던 지시연은 모처럼 편안함 잠을 잤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원래의 컨디션을 회복했다.

세수를 마친 시연은 강울대학교병원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강울대학교의 의과대학에서 임상의학 전공의로 공부한 사람이었으며, 현재는 강울대학교병원 외과에서 실습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오늘 낮에 외래 진료가 있었는데, 모처럼 환자가 많지 않아서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었다.

의사 가운을 갈아입은 시연이 한식당 ‘맛나리’로 향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진성빈과 임진아는 이미 도착한 상황이었는데, 그들 셋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임진아와 지시연은 모두 의대를 다녔지만 전공이 달랐고, 성빈은 경영학을 전공하여 그녀들보다 1년 일찍 졸업했다.

그들은 각자의 바쁜 일로 인해 한동안 모일 수 없었다.

하지만 성빈이 얼마 전에 귀국하자마자, 함께 밥을 먹자고 그녀들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시연아, 왔어?”

시연이 탁자로 다가서자, 이미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이 보였다.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

임진아가 말했다.

“성빈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분명 성빈이 혼자서는 다 못 먹을 텐데, 우리가 있어서 다행이지, 뭐. 얘는 늘 이런 식으로 우리를 괴롭힌다니까?”

“그래, 괴롭혔다, 어쩔래?”

그는 제멋대로 한쪽 눈썹을 올리며 시연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나는 우리 시연이만 신경을 쓸 거야. 우리 예쁜 시연이가 많이 먹으면 그만이라고. 진아 너는 먹든 말든 상관없어!”

“너 때문에 짜증 나 죽겠어!”

두 사람이 웃고 떠들자, 시연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시연아.”

성빈이 시연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너, 그 이야기 들었어?”

시연이 밥을 한입 먹으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

진아와 성빈이 눈을 맞추며 그녀의 밥그릇에 갈비를 집어넣었다.

“그게... 노은범이 돌아왔대.”

순간, 시연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몰랐어.”

“톡방에 모두 모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라고.”

성빈이 말한 톡방에는 한 때 시연도 있었지만, 예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노은범과 헤어진 시연은 곧바로 노은범의 번호를 지우고, 톡방을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성빈이 또 물었다.

“시연아, 그럼 그때 너도 같이 갈 거야?”

시연은 입술에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즐거운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가서 뭐 해?”

“그게... 동창 모임인 거지! 모처럼...”

진아가 말했다.

하지만 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더러 전 남자 친구를 만나라고? 나는 노은범이랑 헤어진 그날부터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

“시연아, 화내지 마.”

진아가 황급히 성빈을 노려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시연이가 싫다잖아! 하긴, 누가 그런 나쁜 X을 좋아하겠어?”

“그래 다 내 잘못이지.”

잠시 생각하던 성빈은 약간 짜증이 난 듯 시연을 향해 애교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때 노은범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시연이랑 나는 진작에 연인 사이로 발전했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그 자식은 아직도 우리 시연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잖아.”

“풉...”

진아는 하마터면 물 한 모금에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다.

“성빈 도련님, 거울이나 좀 보고 말씀하세요.”

“저는 제 얼굴에 정말 만족합니다만?”

성빈이 건방진 웃음을 지으며 또 한 번 시연에게 물었다.

“시연아, 요즘도 마귀할멈이 괴롭혀?”

‘마귀할멈’이란 그들이 장미리를 가리키는 은어였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두 사람은 시연의 집안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연은 이번 일을 두 사람에게 입도 뻥끗하지 않을 것이었다.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내 얼굴도 괜찮아 보이지 않아?”

“응, 그래 보여.”

성빈은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혹시라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이 오빠가 있잖아.”

“나도 있잖아!”

진아가 조급하게 손을 들었다.

“그래, 알았어.”

시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무슨 일이 생겨도 그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것이었는데, 두 사람 또한 그녀의 또래이며, 가족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나에게 헌신을 다 하는 건 사실이지만... 절대 내가 자제력을 잃어서는 안 돼.’

‘게다가... 이 일은 이미 해결된 셈이잖아?’

식사를 마친 성빈은 다른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먼저 떠났고, 시연은 진아를 따라 그녀가 세 들어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그날 밤, 시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이따금 준수한 얼굴이 스쳐서 잠을 뒤척인 것이었는데...

‘은범이가 돌아왔다고?’

‘우리 두 사람이 못 만난 지 얼마나 된 거지?’

‘와, 벌써 3년이나 지났구나.’

...

주말에 시연은 월차를 쓴 후, 태산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매주 지우주를 돌보는 데 온갖 노력을 쏟았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우주가 그녀에게 대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 버스에 앉은 그녀에게 ‘친구 추가’ 톡을 보냈다.

하지만 알림을 힐끗 확인한 시연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그냥 무시할 뿐이었다.

태산 요양병원에 도착한 시연은 우주에게 선물할 물건을 들고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울어봐! 더 크게!”

“쓸모없는 물건 같으니라고!”

날카로운 목소리의 여자가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찰싹’하는 찢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여자는 미친 듯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멍청한 자식! 너는 맞아도 울 줄 모르잖아! X신, 그렇게 살아서 뭐 해? 하하하...”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낀 시연이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676화

    병원을 나서자 유건은 시연을 대하는 태도가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원래라면 오늘 회사에 가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여보, 오늘 뭐 하고 싶어?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내가 다 같이할게. 어때?”“좋아.”시연은 유건의 뜻을 알아차렸고,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외래 진료동 로비를 지나 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그때, 시연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시선은 한 방향에 고정돼 있었다.“여보?”유건은 혹시 또 어디가 불편해진 건 아닌지 순간 긴장했다.“왜 그래? 어디 아파?”“아니...”시연은 슬쩍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아는 사람을 봤어. 당신도 아는 사람이야.”“그래?”그녀의 시선을 따라 유건도 고개를 돌렸다.앞쪽 무인 접수기 줄 맨 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누군데?”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지었다.“응?”시연은 웃음을 참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못 알아보겠어? 연기 꽤 그럴듯한데.”“아니, 진짜로 모르겠어. 누군데?”“그만 좀 해.”시연은 가볍게 그를 흘겨봤다.“아무리 그래도, 당신이랑 한때는 엮였던 사람이잖아. 게다가 다 옛날 일이야. 내가 언제까지 그걸로 뭐라고 할 사람처럼 보여?”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장소미였다.“아... 그 사람이구나.”유건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연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나 진짜로 연기한 거 아니야. 당신이 말 안 했으면 진짜로 기억 못 했을걸? 그리고 말이야, 내가 장소미랑 뭐, 제대로 사귀었다고 하기도 애매하지 않나?”“흥!”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잘 사귀었는지 아닌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겠지.”“제발 좀 그만하고, 살려줘.”유건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몇백 년 전 일 같아. 그땐 내가 참... 멍청했잖아.”본인이 스스로 멍청했다고 인정해 버리니, 시연도 더는 파고들 생각이 없어졌다.애초에 그녀도 크게 마음에 담아둔 일은 아니었으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675화

    두 달 뒤.이른 아침, 유건은 눈을 떴다.그는 시연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발소리도 거의 내지 않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시연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한 달 전부터, 시연에게 입덧 증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먹는 족족 토했고, 어떤 날은 물 한 모금만 마셔도 바로 울렁거렸다.식욕은 눈에 띄게 떨어져서 언제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배 안 고파.”집에는 양식 요리사도 있고 한식 요리사도 있었고, 게다가 왕성애까지 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시연이 혹시라도 ‘이게 먹고 싶다’라고 말만 하면, 바로 앞에 차려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그런데도 시연은 까다로워서 유독 유건이 직접 만든 것만 먹었다.그래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유건은 직접 주방에 섰다.특히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아침 전담이었다. 주방에 들어서자 왕성애가 유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재료는 다 준비해 놨어요.”“네, 감사합니다.”왕성애는 앞치마를 가져와 그의 허리에 둘러주며 말했다.“이건 말이죠. 아기가 엄마 대신 대표님한테 기회 주는 거예요. 조이 가졌을 때는 제대로 못 챙겨줬잖아요. 이번엔 다 보상하라는 거죠.”“알아요, 이모님.”유건은 자연스럽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동작은 익숙했고 불평 같은 건 전혀 없었다.오히려 아내가 자기 음식만 찾는다는 사실이 은근히 자랑스러웠다.‘내가 해 준 걸 좋아한다는 거잖아.’잠시 뒤, 시연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상이 완성돼 있었다.식탁에는 시연과 조이가 나란히 앉았다.유건은 접시를 가져와, 모녀 앞에 각각 한 접시씩 놓아 주었다.아내가 임신했다고 해서 조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됐다.오히려 더 신경 써야 했다. ‘동생이 생기면 부모의 사랑이 줄어든다’라는 느낌을 아이에게 주면 안 됐다.물론, 유건과 시연은 그 점을 아주 잘 지켜왔고, 조이는 전혀 그런 불안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조이는 밥을 먹다가 슬쩍 시연을 올려다봤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674화

    이번 D시 여행은 말 그대로 웃음이 끊이지 않는 시간이었다....그로부터 8개월 뒤, 진아는 병원에서 아들을 낳았다.몸무게 3.5kg가 넘는, 아주 건강한 아이였다.임씨 집안의 첫 손주이자 부씨 가문의 막내 증손.태어나는 순간부터 금수저를 물고 나온 아이였다.진아는 몸 상태 때문에 자연분만을 선택하지 못하고,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다.지하는 수술실 밖 준비실에 대기하고 있다가 아이가 태어난 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보호복으로 갈아입고, 장갑을 낀 채 의사에게서 가위를 건네받았다.그리고 아이와 엄마를 잇고 있던 탯줄을 직접 잘랐다.이후, 아이를 품에 안고 진아 곁으로 가서 엄마와 아들을 함께 끌어안았다.“여보, 고생했어.”진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응.”수술실을 나와 진아는 병실로 옮겨졌고, 지하는 그날 밤 내내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곁을 지켰다.그 사이, 양가 어른들은 의료진에게 떡과 감사 선물을 나눠 주고 있었다.“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인사를 마친 뒤에는 백일잔치와 돌잔치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아이 하나 태어났을 뿐인데... 해야 할 일은 끝도 없이 많았다....진아를 보고 나온 뒤, 시연과 유건은 손을 맞잡은 채 병실을 나섰다.“참 좋다.”시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진심으로 진아가 행복해 보여서였다.몇 년 전, 진아가 뇌종양 수술로 아이를 포기하고 사랑마저 포기했던 그 시절에는 아무도 그녀가 이렇게 잘살게 될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그러게.”유건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았다.“아직 시간도 괜찮은데, 조이 데리고 오늘은 밖에서 저녁 먹을까?”“좋... 아!”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발을 헛디뎌 앞으로 휘청였다.“여보!”다행히 유건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품으로 끌어안았다.그런데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유건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시연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유건은 곧바로 시연을 안아 들고 곧장 응급실로 향했다.“선생님,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673화

    “무슨 말씀이세요?”진아는 순간 멍해졌다.부명주는 답답한 듯 재촉했다.“묻는 말에 그냥 대답해!”“그게... 지난달... 지난달쯤이요?”진아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더듬어 계산해 보며 말했다.“어휴!”부명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너 말이야, 너희 둘이 그런 관계인데 생리가 이렇게 오래 안 왔으면, 조금은 눈치를 챘어야지!”“저는...”진아는 아직도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아프고 나서부터는 그게 계속 좀 불규칙했어요.”“불규칙해도 이 정도는 아니지!”부명주는 지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말했다.“너, 믿어도 돼. 쟤 저렇게 토하는 거, 다 너 때문이야.”“네?”진아는 눈을 크게 떴다.“설마요?”“‘설마’는 무슨 ‘설마’?”부명주는 웃음을 터뜨렸다.“요즘 애들은 참... 경험이 없어. 사이 좋은 커플에서 여자가 임신하면, 남자가 대신 입덧하는 경우도 있어!”그러면서 손을 내저었다.“뭐 하고 있어? 당장 병원 가서 검사부터 해!”“아... 네.”병원에 도착해 검사를 마치고, 결과가 나왔을 때 모두가 말문을 잃었다.“내가 뭐랬어?”부명주는 결과지를 들여다보며 활짝 웃었다.“딱 봐도 임신이잖아.”그리고 진아와 지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두 사람, 이렇게 오래 질질 끌었으면 됐다. 아이까지 생겼는데, 이제 빨리 살림 합쳐. 애도 태어나는데 부모가 따로 살 순 없잖아.”“아...?”진아는 입을 벌린 채 자기 배를 내려다봤다.“진짜... 생긴 건가?”지하 역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는 진아의 손을 꽉 잡고, 어쩐지 얌전한 새색시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진아, 그럼 우리... 우웁...”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는 다시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번쩍 고개를 들어 유건을 바라봤다.“방금 봤어?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아?” “내가 왜?”유건은 억울한 표정이었다.“왜냐고?”시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난 조이 가졌을 때,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672화

    우주는 키가 커서 조이를 어깨 위에 가볍게 올려놓을 수 있었다.어디를 가든 조이는 한 발짝도 걷지 않아도 됐다.그게 너무 좋은 조이는 두 팔을 벌리고 소리쳤다.“나 여기 소속이야! 여긴 진짜 천국이야!”그 말이 퍼지자 어른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시간이 흐르면서 하객들도 하나둘씩 도착했다.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됐다.오래된 저택 안에는 붉은 카펫이 길게 깔렸고, 우주는 다시 한번 시연의 손을 잡고,신부를 신랑에게 데려다주었다.그는 유건 앞에 서서 또박또박 말했다.“매형, 누나... 잘 부탁해.”이제는 말도 예전보다 훨씬 또렷해진 소년이었다.“걱정하지 마.”유건은 자기 신부의 손을 맞잡았다. 그 뒤를 조이와 케빈, 두 화동이 따라오며 하늘 가득 꽃잎을 흩뿌렸다.이어서 부케를 던지는 순서가 되자 시연이 크게 외쳤다.“던질게! 하나, 둘, 셋!”두 팔을 뒤로 크게 휘두르자 부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그 꽃다발은 정확히 지하의 손에 떨어졌다.“결혼! 결혼! 결혼!”모두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지하는 꽃다발을 들고 미소 지으며 진아를 바라봤다.진아는 웃으며 입술을 삐죽였다.“나를 왜 봐? 축하해.”지하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을 뿐, 억지로 무언가를 요구하지는 않았다.그날 밤의 피로연은 한밤중을 훌쩍 넘길 때까지 이어졌다.주인과 손님들은 그제야 하나둘 자리를 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진아는 정말로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눕자마자 깊이 잠들었다.그리고 소란스러운 소리에 깼다.어렴풋이... 욕실 쪽에서 지하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야...”진아는 비몽사몽인 채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지하는 변기를 끌어안고 토하고 있었다.“왜 그래?”진아의 잠은 단번에 달아났다.그녀는 급히 쪼그려 앉아 지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왜 이렇게 심하게 토해?”“모, 모르겠어...”지하는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사실 그는 이미 몇 번이나 토했고, 그동안 진아는 깨지 못했을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671화

    원래 시연의 생각은 다시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 것이었다.하지마 그 일은 이미 부명주의 손에 넘어갔고, 거기에 레오까지 합세하니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부명주와 레오는 오래도록 딸을 향한 미안함을 안고 살아왔다.이런 기회가 왔는데, 어떻게 제대로 보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덧붙이자면, 레오는 반년 전 예희주와 정식으로 이혼 절차를 마쳤고, 그다음 날 바로 부명주와 혼인신고 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법적으로도 부부가 되었다.레오와 예희주 사이에 이어졌던 20년이 넘는 질긴 인연은 마침내 하나의 결말에 도달했다.적어도 레오와 예희주는 두 사람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다.레오와 부명주의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CA국의 이름난 인사 중, 올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다 참석했다.레오는 마침내 오랜 한을 풀었다. 젊은 시절부터 사랑해 온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고, 부명주 역시 당당하게 레오의 곁에 설 수 있게 되었다.그 결혼식에 시연과 유건도 휴가를 내고 참석했다.두 사람이 마침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시연과 유건 역시 진심으로 기뻐했다.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자면, 부명주와 레오는 ‘딸에게 보상한다’라는 명목 아래, 원래는 소규모로 하려던 친척 중심의 피로연을 결국 정식 결혼식으로 바꿔 버렸다.앤더슨 가문에 가장 넘쳐나는 건 돈이었다.돈이 있는데, 못 할 게 뭐가 있겠는가?레오는 하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숙소를 준비했고, 결혼식장은 전문가를 불러 따로 연출했다.연회는 말할 것도 없고, 시연의 웨딩드레스만 해도 여덟 벌이었다.거기에 유건의 예복, 들러리 진아의 드레스, 화동 조이와 케빈의 의상까지...준비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부명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조금도 힘들거나 짜증스럽지 않았다.부명주에게 이 모든 분주함은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하객들보다 먼저 시연네 가족이 도착했다.신랑 신부가 직접 준비해야 할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함께 도착한 사람은 진아와 지하였다.“와...”진아는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말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79화

    마지막 한 번. 그 말을 내뱉을 때, 유건은 표정과 목소리에 변화 없이 담담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말이 맞아. 나는 이미 선택했어. 그러니까 오늘이 마지막이야. 오늘이 지나면, G시로 돌아가서... 더는 너한테 집착하지 않을 거야.”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나 못 믿어?” 유건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 그래도 부부였잖아. 내 사람 됨됨이를 네가 몰라서 그래?” 유건의 성격을 시연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치 않는다면, 유건도 절대 선을 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76화

    ‘그런데, 병원은 어떻게 가지?’ ‘이곳은 G시도 아니고, 입원 절차도 훨씬 복잡할 것 같은데...’ ‘게다가, 우리는 CA국 국민도 아니야.’ ‘단순한 관광 비자로 바로 병원 입원이 가능할까?’ ‘나 혼자서는 다 처리할 수 없을 거야.’‘아니, 아버지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거라고.’시연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럼... 누구한테 도움을 청하지?’ 곰곰이 생각하던 시연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녀는 핸드폰을 움켜쥐고, 손끝을 입술에 가져갔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26화

    정기환은 대표실에서 시연을 보자, 놀란 듯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형수님, 어쩐 일이에요? 지금 막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는데요.”“괜찮아요.”시연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 가방을 내려놓았다.“기환 씨도 바쁘잖아요. 난 애도 아니고, 혼자 올 수 있어요.”그리고 물었다.“유건 씨는 아직 회의 중이죠?”“네.” 기환이 옆방을 가리켰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알겠어요.”시연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그럼 난 공부하면서 기다릴게요.”“그래요.”기환은 그녀가 펼친 의학서를 흘깃 보았다.책이 꽤 두꺼웠다. 게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07화

    시연은 천천히 귤을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말해봐,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지시연.”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무릎 위의 가방을 힘껏 쥐었다.“유건 씨에 대한 일이야.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말한 거잖아.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인데?”소미의 호흡이 급해졌다.“나... 난 네가 유건 씨 곁을 떠나주길 바라.”귤을 벗기던 여자의 손이 잠시 멈췄다. 시연은 미소를 지었다.‘할아버지께서 나한테 다시 고씨 가문 본가로 돌아오라고 하신 걸, 장소미가 어떻게 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