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5화

Author: 임공
비틀거리던 시연은 하마터면 똑바로 서지 못할 뻔했다.

방금 고상훈의 검사를 마친 의사가 유건을 향해 말했다.

“고 대표님, 오셨습니까. 고 어르신께서는 아무 문제가 없으십니다만, 조금 허약하셔서 충분한 영양 섭취와 휴식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르신께서 자극받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좋은 기분을 유지하도록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의사는 이 말을 마치고 병실을 떠났다.

고상훈은 반쯤 누워서 손을 흔들었다.

“유건아, 그리고 시연아, 너희는 오늘 혼인신고를 했잖니... 행복한 신혼 밤을 보내지는 못할망정, 이 할아버지를 보러 오면 어쩌겠다는 게야.”

“어르신.”

시연이 손에 땀을 쥐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상훈이 조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도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게야? 그리고, 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게야?”

“저는...”

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거세게 쥐었다.

“할아버지께서 아직 입원 중이신데, 저희 두 사람이 행복한 신혼 밤을 즐길 수 있겠어요. 그리고 시연 씨는 할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밖에 없어서 죄송하다는 거고요.”

시연은 매우 놀랐다.

‘왜 나의 민낯을 폭로하지 않으려는 거지?’

“하하, 역시 시연이는 참 착한 아이구나.”

고상훈이 활짝 웃었다.

“얼굴 봤으니 됐다. 의사 선생도 괜찮다고 했고... 여기에는 의사 선생과 간호사들이 있을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거라. 너희 둘만 괜찮다면 나는 너무 기쁘단다. 유건아, 오늘은 네가 좀 주동적으로 행동하려무나.”

“네, 할아버지, 그럼 푹 쉬세요.”

시연의 손을 잡은 유건이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다정한 모습은 잠시일 뿐, 유건은 병실을 나오자마자 시연을 뿌리쳤고, 두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충분한 안정이 필요하시니까 당분간은 사실을 숨기는 게 좋겠어.”

‘할아버지께서 결혼을 종용한 여자가 이런 여자였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당장이라도 화병이 도지고 마실 거야.’

유건이 말하지 않아도 시연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유건이 음침하고 냉담한 표정으로 독이 서린 말을 내뱉었다.

“네 이름이 우리 고씨 가문의 등본에 조금이라도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역겹고 더러워 죽겠어.”

‘겉치레인 계약 결혼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여자는 안 돼!’

“!”

놀란 시연이 두 손을 꽉 잡은 채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처럼 모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나는 팔린 몸이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팔려도 한참 잘못 팔린 거지! 나는 이제 남한테 보이기 부끄러운 사람이 된 거야! 더러운 여자가 된 거라고!’

유건이 더는 시연을 상대하기 싫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이혼부터 해야겠어.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로 가정법원으로 가.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회복하기 전까지는 순순히 손자며느리의 역할을 다하도록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시연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몸을 돌려 떠나는 유건의 뒷모습에서는 자만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서서 씁쓸하게 웃었다.

‘저렇게 화낼 만 해, 다 내 잘못이지, 뭐.’

‘그래도... 억울하고 분한 건 참을 수 없어.’

‘어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마다하겠어? 나도 한때는 나를 보물처럼 여겨주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지...’

‘하지만 이번 생에... 그런 사람은 다시는 없을 거야.’

병원을 나선 지시연은 유건이 살고 있는 SKY전원주택단지로 가지 않았고, 곧장 강울대학교 기숙사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을 죽도록 싫어하는 유건과 함께 살 필요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저녁에 시연은 주지한의 전화를 받았다.

[유건 형님께서는 다음 주 수요일에만 시간이 있으십니다. 그날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할 수 있으십니까?]

“네, 가능해요.”

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시간 맞춰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시연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차피 형식적인 계약 결혼일 뿐이었잖아? 전혀 슬퍼할 거 없어. 그저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을 뿐이지...’

며칠 간의 피로와 정신적인 부담을 느끼던 지시연은 모처럼 편안함 잠을 잤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원래의 컨디션을 회복했다.

세수를 마친 시연은 강울대학교병원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강울대학교의 의과대학에서 임상의학 전공의로 공부한 사람이었으며, 현재는 강울대학교병원 외과에서 실습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오늘 낮에 외래 진료가 있었는데, 모처럼 환자가 많지 않아서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었다.

의사 가운을 갈아입은 시연이 한식당 ‘맛나리’로 향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진성빈과 임진아는 이미 도착한 상황이었는데, 그들 셋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임진아와 지시연은 모두 의대를 다녔지만 전공이 달랐고, 성빈은 경영학을 전공하여 그녀들보다 1년 일찍 졸업했다.

그들은 각자의 바쁜 일로 인해 한동안 모일 수 없었다.

하지만 성빈이 얼마 전에 귀국하자마자, 함께 밥을 먹자고 그녀들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시연아, 왔어?”

시연이 탁자로 다가서자, 이미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이 보였다.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

임진아가 말했다.

“성빈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분명 성빈이 혼자서는 다 못 먹을 텐데, 우리가 있어서 다행이지, 뭐. 얘는 늘 이런 식으로 우리를 괴롭힌다니까?”

“그래, 괴롭혔다, 어쩔래?”

그는 제멋대로 한쪽 눈썹을 올리며 시연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나는 우리 시연이만 신경을 쓸 거야. 우리 예쁜 시연이가 많이 먹으면 그만이라고. 진아 너는 먹든 말든 상관없어!”

“너 때문에 짜증 나 죽겠어!”

두 사람이 웃고 떠들자, 시연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시연아.”

성빈이 시연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너, 그 이야기 들었어?”

시연이 밥을 한입 먹으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

진아와 성빈이 눈을 맞추며 그녀의 밥그릇에 갈비를 집어넣었다.

“그게... 노은범이 돌아왔대.”

순간, 시연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몰랐어.”

“톡방에 모두 모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라고.”

성빈이 말한 톡방에는 한 때 시연도 있었지만, 예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노은범과 헤어진 시연은 곧바로 노은범의 번호를 지우고, 톡방을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성빈이 또 물었다.

“시연아, 그럼 그때 너도 같이 갈 거야?”

시연은 입술에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즐거운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가서 뭐 해?”

“그게... 동창 모임인 거지! 모처럼...”

진아가 말했다.

하지만 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더러 전 남자 친구를 만나라고? 나는 노은범이랑 헤어진 그날부터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

“시연아, 화내지 마.”

진아가 황급히 성빈을 노려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시연이가 싫다잖아! 하긴, 누가 그런 나쁜 X을 좋아하겠어?”

“그래 다 내 잘못이지.”

잠시 생각하던 성빈은 약간 짜증이 난 듯 시연을 향해 애교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때 노은범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시연이랑 나는 진작에 연인 사이로 발전했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그 자식은 아직도 우리 시연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잖아.”

“풉...”

진아는 하마터면 물 한 모금에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다.

“성빈 도련님, 거울이나 좀 보고 말씀하세요.”

“저는 제 얼굴에 정말 만족합니다만?”

성빈이 건방진 웃음을 지으며 또 한 번 시연에게 물었다.

“시연아, 요즘도 마귀할멈이 괴롭혀?”

‘마귀할멈’이란 그들이 장미리를 가리키는 은어였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두 사람은 시연의 집안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연은 이번 일을 두 사람에게 입도 뻥끗하지 않을 것이었다.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내 얼굴도 괜찮아 보이지 않아?”

“응, 그래 보여.”

성빈은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혹시라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이 오빠가 있잖아.”

“나도 있잖아!”

진아가 조급하게 손을 들었다.

“그래, 알았어.”

시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무슨 일이 생겨도 그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것이었는데, 두 사람 또한 그녀의 또래이며, 가족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나에게 헌신을 다 하는 건 사실이지만... 절대 내가 자제력을 잃어서는 안 돼.’

‘게다가... 이 일은 이미 해결된 셈이잖아?’

식사를 마친 성빈은 다른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먼저 떠났고, 시연은 진아를 따라 그녀가 세 들어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그날 밤, 시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이따금 준수한 얼굴이 스쳐서 잠을 뒤척인 것이었는데...

‘은범이가 돌아왔다고?’

‘우리 두 사람이 못 만난 지 얼마나 된 거지?’

‘와, 벌써 3년이나 지났구나.’

...

주말에 시연은 월차를 쓴 후, 태산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매주 지우주를 돌보는 데 온갖 노력을 쏟았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우주가 그녀에게 대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 버스에 앉은 그녀에게 ‘친구 추가’ 톡을 보냈다.

하지만 알림을 힐끗 확인한 시연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그냥 무시할 뿐이었다.

태산 요양병원에 도착한 시연은 우주에게 선물할 물건을 들고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울어봐! 더 크게!”

“쓸모없는 물건 같으니라고!”

날카로운 목소리의 여자가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찰싹’하는 찢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여자는 미친 듯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멍청한 자식! 너는 맞아도 울 줄 모르잖아! X신, 그렇게 살아서 뭐 해? 하하하...”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낀 시연이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171화

    그날 밤, 시연은 또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늘 그렇듯 약을 삼키고 억지로 눈을 붙였다.한밤중.갑자기 속이 뒤틀리며 잠에서 벌떡 깼다. 입을 틀어막은 채, 시연은 황급히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변기를 부여잡고 한참을 토해냈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거울에 비친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유령 같았다.찬물로 얼굴을 적시고서야 겨우 심호흡이 가능했다.‘왜 토한 거지?’제일 먼저 떠오른 건 임신이었다.유건과 함께일 때 늘 조심했지만, 세상에 백 퍼센트 완벽한 피임 따윈 없으니까.‘괜한 추측 말고... 내일 확인해 보면 되겠지.’그날 밤, 시연의 잠은 온통 뒤숭숭했다....다음 날 아침.시연은 강울대병원 앞 약국에서 조심스레 조기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진료 사이 짬을 내어 화장실에서 확인한 결과는 임신이 아니었다. 그녀도 안도감이 밀려왔다.‘조이는 아직 아빠랑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는데...’‘내가 어떻게 또 동생을 만들어 줄 수 있겠어. 그렇다면 구토의 이유는 뭘까?’시연은 무의식적으로 배를 쓸어내렸다.‘아마... 요즘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겠지. 고유건도... 언젠가는 잊게 되겠지.’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한다는 말처럼......이른 아침, 유건이 병원에 도착했다. 고상훈을 보러 온 길이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있었다.마침 간병인의 부축을 받아 고상훈이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 앉던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낯선 여자가 들어왔다. 단정히 틀어 올린 머리, 번쩍이는 보석을 두른 고급 정장 차림.두 걸음 다가서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빛에는 감춰지지 않는 비굴함과 주저함이 섞여 있었다.“어르신...”“음?”고상훈은 순간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곧 땅에 묻히긴 하나 보네. 이른 아침부터... 죽은 귀신을 다 보는구나.”“어르신!”심화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입술은 떨려 말을 잇기조차 힘들었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170화

    “아니에요!”시연은 더는 감출 수 없어, 다급히 터져 나왔다.“우리... 헤어졌어요.”“헤어졌어도...”리슬은 자동으로 받아치다, 문득 멈췄다. 굳은 듯 시연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시연 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 헤... 헤어졌다고요?”“네.”시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헤어졌어요.”리슬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충격과 혼란이 얼굴에 동시에 스쳤다.“제가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이 나라 말이 좀 서툴러서 그런데, 제가 잘못 이해한 거 아니죠? 헤어졌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사실은 입 밖에 꺼내기조차 힘든 말이었지만, 리슬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시연은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아마 리슬 씨가 이해한 게 맞을 거예요. 헤어졌다는 건... 다시는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리슬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말도 안 돼요...”분명 농담일 거라 생각했다.“장난치지 마요!”“장난 아니에요.”시연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이런 걸 어떻게 장난으로 해요?”“이, 이게...”너무 충격적이라, 리슬의 말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시연은 조용히 일어나며 말했다.“리슬 씨는 앉아 있어요. 제 선배가 오셔서 제가 인사드려야 할 것 같아요.”“네...”리슬은 멍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에게 이 소식은 마치 쓰나미처럼 몰아친 충격이었다.‘말도 안 돼... 두 사람이 진짜 헤어졌다고?’리슬은 믿을 수 없었다. 유건은 그렇게 쉽게 헤어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그런데...‘잠깐만... 두 사람이 끝났다는 건, 지금 고유건... 싱글이라는 거네?’그제야 가슴이 두근거렸다.리슬의 볼은 어느새 달아올라 붉게 물들어 있었다....케이크 커팅이 시작됐다.시연은 아현에게 손을 이끌려 단상 앞으로 섰다. 변이준 옆에는 아현의 아버지 최효강이 서 있었다.“아현아.”최효강이 딸에게 당부했다.“첫 조각은 이준 삼촌께 드려야지. 삼촌, 그동안 고생 많으셨잖아.”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169화

    “언니,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요. 손님들 좀 챙기고 올게요.”“응.”오늘은 아현의 생일 파티였다. 당연히 시연만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조금 있다가 케이크 자를 땐 꼭 같이 해줘야 해요.”아현은 장난스럽게 윙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알았어.”시연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주위를 둘러보던 시연은, 조금 전 아현이 털어놓은 비밀이 머릿속에 맴돌아 여전히 복잡했다.‘이준 선배...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무심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의 모습을 찾았지만, 쉽게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입구 쪽에서 익숙한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유건과 도리슬이었다.유건이 앞서 걸었고, 리슬은 뒤따르고 있었다.리슬은 뭔가를 계속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유건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오히려 짙은 짜증이 깔려 있었다.‘역시... 고유건... 이런 데선 감정을 숨기지도 않네.’“아, 정말...”결국 리슬이 참다못해 목소리를 높였다.“내 말 듣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혼자 온 거예요? 시연 씨는요?”순간, 유건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듯했다.“내 뒤에 붙어다니지 마. 그리고 내 일을 보고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아...”리슬은 입술을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성격이 왜 이래요... 시연 씨한테도 이래요?”곧 스스로 답을 내렸다.‘아니겠지. 시연 씨는 그런 사람 아니니까. 오히려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인데...’아마 남자는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다르게 대하는 걸지도 몰랐다.잠깐 사이, 유건은 벌써 리슬을 따돌리며 홀을 벗어나 있었다.“흥.”리슬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혼잣말했다.“무시하기는... 내가 붙잡고 싶어서 붙잡는 것도 아닌데...”그러고는 시선을 옮기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어?”리슬의 눈이 시연에게 닿았다.“시연 씨!”리슬은 발끝을 들어 손을 흔들며 반가운 듯 인사했다.시연은 도망칠 틈도 없이 시선을 마주쳤다.“안녕하세요.”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리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168화

    사실, 서른을 갓 넘긴 남자가 여자와 가까이 지내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정상적인 남자라면...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거잖아.’아무도 본 적 없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닐 터였다.시연이 애매하게 대답하자, 아현은 금세 안달 난 얼굴이 되었다.“언니! 언니가 좀 더 꼼꼼히 지켜봐야 해요! 변이준이 원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거든요. 있어도 티 절대 안 내요!”“그건...”시연은 난처하게 웃으며 조심스레 말했다.“그래도 그건 선배의 사생활이잖아. 내가 일부러 관찰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난 기자도 아니고, 더군다나 선배가 연예인인 것도 아닌데.’“언니!”아현은 금방이라도 울 듯, 맑은 눈망울을 껌뻑이며 시연을 바라봤다.“제 행복을 위해서예요. 언니가 꼭 도와줘야 해요!”시연은 크게 눈을 떴다.“네... 네 행복?”그제야, 시연은 자신이 짐작한 게 맞다는 걸 확신했다.“너, 선배를...”“맞아요!”아현은 숨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전 변이준을 좋아해요! 언니 왜 그렇게 놀라요? 제가 변이준이랑 어울리지 않나요?”“아, 아니!”시연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정말 그런 뜻 아니야!”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준이 말했던 나이 차가 번뜩 떠올랐다.무려 열한 살.‘물론, 진짜 사랑이라면 나이쯤은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어.’‘그래도... 세대 차이, 가치관 차이는 분명히 있겠지.’“흥.”아현은 삐친 듯 코웃음을 쳤다.“고작 열한 살 차이잖아요. 그게 뭐 대수예요? 제가 나이 많은 거 신경 안 쓰겠다는데, 변이준이 왜 신경 써야 하죠?”시연은 그제야 알았다.아현의 마음은 뜨겁지만, 어쩐지 일방적인 짝사랑처럼 느껴졌다.“내 생각엔...”시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선배가 널 싫어하는 건 아닐 거야.”“변이준, 감히 딴마음 먹기만 해봐!”아현은 고개를 번쩍 들며 당당하게 말했다.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렇다 해도... 선배는 아현이보다 나이가 많잖아. 아무래도 더 신중할 수밖에 없고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167화

    주말.시연은 조이를 잘 챙겨 두고 외출 준비를 했다.“엄마.”조이는 아쉬운 얼굴로 엄마를 붙잡았다.“오늘 언제 와요? 오늘은 조이랑 같이 자기로 한 날이잖아요.”어릴 때부터 시연은 조이가 혼자 잘 수 있도록 습관을 들여왔다.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엄마 품을 찾았다. 그래서 시연은 늘 주말엔 함께 자 주겠다고 약속하곤 했다.“엄마 잊지 않았어.”시연은 마음이 짠해 딸아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엄마 다녀오면 바로 옆에 있을 거야. 조이가 눈 뜨면 엄마가 꼭 곁에 있을 거야.”“정말요?”“그럼.”안심한 조이는 얌전히 엄마를 현관까지 배웅했다.“엄마, 기다릴 거예요.”“그래, 알았어.”문을 닫자, 시연의 가슴은 알 수 없는 시림으로 저렸다.‘조이가 요즘 더 나한테 의지하는 게 느껴져...’‘아저씨가 없으니까 이제 엄마밖에 없는 거겠지.’예전처럼 조이가 아저씨를 찾으며 떼쓰진 않았다. 어린 나이지만, 아이 나름대로 어렴풋이 느낀 것이다. 엄마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아직 이렇게 어린데... 이런 눈치까지 봐야 한다니... 시연은 조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시연은 차를 몰고 은수에 도착했다. 초대장을 내밀자 안내 직원이 곧장 그녀를 홀 안으로 인도했다.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화려한 분위기로 북적였다.시연은 난감해졌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이준과 아현뿐인데, 두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디 가서 뭘 하고 있어야 하지...?’“시연 언니!”익숙한 목소리가 등을 쳤다.돌아보니, 공주 드레스를 입은 아현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아현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시연의 손을 꼭 잡았다.“언니, 진짜 왔네요? 사실 언니 안 올까 봐 걱정했어요.”“왜 안 와?”시연은 핸드백에서 정성스레 포장한 상자를 꺼냈다.“생일 축하해.”“고마워요.”아현은 선물을 받아 들며 코끝을 씰룩였다.“말했어야 했는데... 비싼 건 준비 안 해도 됐어요.”“안 비싸.”시연은 장난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166화

    “정말요?”시연은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이준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근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아현이가 성숙해 보이는 게 아니라... 선배가 너무 젊어 보여요.”남자는 원래 노화에서 여자보다 유리했다.게다가 이준은 워낙 자기 관리가 철저한 편이었다. 식습관과 생활 리듬을 지키고, 아무리 바빠도 운동을 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아부는 그만.”이준이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내밀었다.“이거, 아현이가 너한테 꼭 전해 달라고 했어.”“저한테요? 뭐죠?”시연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받아 들고 열어 보았다.이준이 옆에서 설명을 덧붙였다.“아현이가 이번 주에 스무 살 되거든. 집에서 생일 파티를 열 건데, 꼭 언니를 초대하라고 당부하더라.”“그래요?”시연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이거 영광인데요? 저도 나름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나 보네요.”이준은 피식 웃었다.“넌 나랑 동년배지만, 사실 아현이랑 나이 차이도 몇 살 안 나잖아. 그런데도 ‘아이’라고 부르는 게 웃기지 않냐? 내 눈엔 너희 둘 다 그냥 애들이야.”“에?”시연이 초대장을 확인하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장소가... ‘은수’?”은수...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예전에... 유건이 한강우한테서 ‘은수’ 그 부지를 따냈을 때, 나도 한몫했었지.’그곳은 시연이 알기로 모두 고급 시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생일 파티를 한다고 쉽게 빌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이준은 그녀의 눈빛을 읽고 미리 말을 덧붙였다.“아현이 성이 ‘최’잖아. G시 최씨 가문의 딸이야. ‘은수’ 그곳에서 파티 여는 거, 당연한 거지.”G시의 최씨 가문.도시 상류층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집안이었다.‘아현이가... 그런 집안 딸이었다니.’시연은 새삼 놀랐다.아현은 어디까지나 이준을 따라다니는 귀여운 동생쯤으로만 보였으니까.늘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마치 주인 없는 강아지 같았다.“그러니 꼭 와야 해.”이준은 더 말하지 않고, 두어 번 당부만 남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