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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말랑우유
이동 거리가 꽤 길었다.

나중에 동윤이 차에 탔을 때 추울까 봐 청하는 미리 히터 온도를 한 단계 높였다.

두 사람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어린이집 앞에 도착해 골목을 돌아서자 정문 밖으로 아이들이 두세 줄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테마 활동이 있는 날이라 아이들은 모두 같은 곰돌이 옷을 입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정말 복슬복슬한 아기 곰 무리 같았다.

차를 세운 뒤 두 사람은 함께 내렸다.

아까 끝맺지 못한 이야기가 떠오른 청하가 다시 말했다.

“이혼합의서는 시간 날 때 읽어 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변호사를 통해 다시 작성해도 되고.”

“진짜 마음 정한 거야?”

재언은 눈조차 들지 않았다. 청하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였다.

“우리가 이혼하면 동윤이 인생에도 큰 영향이 가. 본인 생각만 하지 말고 그만 이기적으로 굴어.”

‘이기적이라고?’

그 단어는 예상보다 아프게 박혔다.

청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윤이는 내가 낳은 아이야.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잘 키울 거야.”

“뭘로 잘해 줄 건데? 네 월급으로 동윤이한테 들어가는 한 달 생활비의 절반이나 감당할 수 있어?”

재언은 무표정한 채 두 팔을 접고 차에 기대섰다.

“미리 말해 두는데, 동윤이는 내 아들이야. 네가 없는 살림에 악착같이 사는 건 네 선택이지만 동윤이까지 그럴 이유는 없어.”

“그래? 당신 아들?”

청하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럼 저기서 어떤 애가 동윤이인지는 알아볼 수 있어?”

재언의 시선이 앞에서 신나게 뛰노는 ‘아기곰’들에게 향했다.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턱이 굳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답이었다.

재언은 자기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친아버지가 자기 아이 얼굴도 몰라본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청하는 니트 자락을 여미고 시선을 거두었다.

“그만 찾아. 동윤이는 여기 없어.”

동윤이는 대기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선생님이 안에서 안고 나왔을 때도 아이는 졸음에 취해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청하의 품에 안겼다.

“엄마.”

동윤이가 눈을 비볐다.

“엄마 왔어? 나 데리러 온 거야?”

세 살배기 아이는 통통하고 말랑말랑해, 하얀 찐빵처럼 사랑스러웠다.

어떻게 봐도 예쁠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응.”

막 잠에서 깬 아이가 추울까 걱정된 청하는 외투로 동윤이의 얼굴 주변을 꼼꼼히 감싸 주며 부드럽게 달랬다.

“많이 졸려? 더 자도 돼. 금방 집에 갈 거야.”

동윤이는 아쉬운 듯 몇 번 더 눈을 깜빡였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엄마 품에서 다시 잠들었다.

깊이 잠들어 집에 가는 내내 거의 깨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재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당황한 듯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대표님, 집에 와서 가방을 확인했는데 제가 사원증을 댁 거실 소파에 두고 온 것 같아요.]

재언은 셔츠 깃의 단추를 풀며 여전히 느긋한 태도를 유지했다.

“잃어버렸으면 다시 발급받으면 돼.”

[그, 그런데 청하 선배님이 보실까 봐...]

“보면 어때?”

재언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아까부터 졸린다고 했잖아. 집에 갔으면 푹 쉬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평소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인내와 다정함이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청하는 몇 년째 재언에게서 저런 말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는 자주 들었다. 그때의 재언은 청하의 턱을 잡고 입을 맞추면서도 달래는 말을 잊지 않았고, 청하는 그럴 때마다 재언에게 화를 오래 내지 못했다.

이런 사소한 기억들이 오히려 눈앞의 남자를 더 낯설게 만들었다.

아득히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고작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재언이 자신에게 했던 모든 행동과 말을 이제는 다른 여자에게 하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재언이 눈을 들어 앞좌석에서 운전 중인 청하를 바라봤다.

“다미 물건은?”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 네가 버렸어?”

방금 전 다미를 달래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온기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응. 내가 버렸어.”

‘어차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잖아.’

청하는 갈수록 굵어지는 눈발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물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왜 나한테 물어?”

솜을 주먹으로 친 것처럼 아무 반응도 얻지 못했다.

차 안에는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다미는 아직 어린애야. 너도 그런 더러운 생각으로 애를 괴롭힐 필요까지는 없잖아.”

재언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더러운 생각?’

자기 남편이 이런 악의적인 딱지를 붙일 줄은 청하도 몰랐다.

알고 지낸 지 7년, 결혼한 지 3년.

오랜 연애에는 권태가 찾아온다는 말은 정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법칙이었을까?

뒷좌석의 동윤이는 고른 숨을 내쉬며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부모가 어떤 말로 서로를 상처 입히고 있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

...

집에 도착한 청하는 동윤이를 아기 침대에 눕혔다.

아이가 다시 깊이 잠든 걸 확인한 뒤에야 침실을 나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바로 다음에 손목이 거칠게 붙잡혔다.

재언은 청하의 비스듬한 뒤쪽에 서 있었다. 구김 하나 없이 다려진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은 걸 보니 외출할 모양이었다. 어디를 가든 청하에게 미리 알려 준 적은 없었다.

재언의 시선이 청하의 손목에 남은 멍에 닿았다. 눈썹 끝이 살짝 모이며 청하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손목은 왜 그래?”

“나 하기 싫다고 했잖아.”

두 사람의 말이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3초 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왜. 내가 억지로라도 널 덮칠까 봐?”

재언의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냉담함만 남아 있었다.

“안심해. 이제 너한테 그 정도로 관심이 있지는 않으니까.”

아무리 예쁜 꽃도 오래 보면 질리는 법인데, 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가느다란 바늘처럼 청하의 가슴을 촘촘히 찔렀다.

아프기는 했다.

하지만 아픔보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더 컸다.

청하는 재언의 손을 떼어 내고 한 걸음 물러섰다.

재언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가슴을 후벼 팠다.

“나 요즘 바빠.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이런 식으로 빙빙 돌리지 말고.”

“넌 얌전히 내 아내로만 있으면 돼. 조건은 네가 정해.”

재언에게 청하의 이혼 요구는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재언은 이미 충분히 청하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부 사이의 위로나 다독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업 파트너 간에 생기는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마치 협상처럼.

‘돈? 차?’

‘아니면 집?’

청하가 입만 열면 무엇이든 줄 수 있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청하는 처음 재언과 함께하던 때를 기억했다.

그때 재언은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한 청년이었고, 20평도 되지 않는 작은 월세방에서 청하에게 촛불을 끄며 소원을 빌라고 했다.

진심 어린 눈으로 언젠가는 더 좋은 삶을 주겠다고 낮게 약속했었다.

이제는 돈이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사람이 되었다.

정말 많이 변했다.

너무 많이 변해서 같은 사람인지조차 낯설 정도였다.

“왜 당신 눈에는 모든 일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걸로 보일까?”

청하의 표정은 여전히 잔잔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운 칼날 같았다.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일과 돈만 보고 사는 줄 알지 마. 돈이 목적이었다면 이미 7년 전에 가진 것도 없던 당신을 따라나서지도 않았어.”

“나는 당신과 결혼한 거지, 당신한테 팔려 온 게 아니야. 이혼을 요구할 권리는 나한테도 있어.”

“그리고 난 당신한테 빚진 거 없어. 그런 말투로 나를 몰아세울 권리도 당신한테는 없어.”

청하는 한 단어씩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

몇 년 동안 사람들은 ‘심재언의 아내’가 성격이 온순하고 웬만한 일에는 화도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청하는 언제 어디서나 부드러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화를 내는 법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래서 재언 역시 자신의 아내가 유순하고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여겨 왔다.

그제야 재언은 청하의 태도가 장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재언이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고 주먹 반 개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거리에서 멈췄다.

재언은 청하를 똑바로 바라봤다.

잠시 침묵한 뒤 재언이 낮게 물었다.

“진심이야?”

“응.”

청하는 재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야.”

“그동안 너무 편하게 살아서 이곳이 얼마나 냉정한 곳인지 잊은 거야? 나랑 이혼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해?”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재언의 목소리도 한없이 낮아졌다.

“내 아내라는 이름이 없어지면 이곳에서 아무것도 못 해. 며칠도 못 버티고 나한테 돌아와 빌게 될걸.”

재언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청하의 턱을 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그때 재언은 청하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게 됐다.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눈이었다.

청하는 아주 느리게 한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럼 한번 두고 봐.”

청하는 흔들림 없이 재언을 바라봤다. 눈 안에는 불필요한 감정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정말 당신한테 돌아와 비는지...”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작은 트리거 하나면 모든 게 터질 듯했다.

1초.

2초.

재언이 청하의 턱에서 손을 뗐다. 목소리는 차가웠다.

“너도 이제 18살이 아니야. 정신 좀 차려. 언제까지 이렇게 철없이 굴 거야?”

재언이 집을 나서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집 밖으로 나온 재언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 전 청하에게 보였던 짜증스러운 말투와는 전혀 달랐다.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왜 아직 안 자느냐고, 배고프지 않으냐고, 먹고 싶은 건 없는지 물었다.

청하는 혼자 거실에 남았다. 손끝과 발끝이 차갑게 식었다.

머릿속에는 재언이 남긴 말이 계속 맴돌았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였다.

그런데 무게는 돌덩이처럼 내려앉아 청하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고 숨이 막혔다.

‘그래... 나는 이제 18살이 아니야.’

‘하지만 그 사람 곁에는 언제든 새로운 18살의 여자애가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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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방정식   제30화

    동윤은 그제야 만족한 듯 눈을 감고 얌전히 누웠다.그렇게 청하와 재언은 다시 한 침대에 누웠다. 동윤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고, 청하는 아들의 등에 한 손을 올린 채 가볍게 토닥여 잠을 재웠다.평소보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웠다. 청하는 이제 막 잠든 아이가 깰까 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어두운 방 안에서 재언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로 다른 숨소리만 잔잔하게 뒤섞였다. 듣고 있자니 슬슬 저절로 졸음이 밀려왔다.얼마쯤 누워 있었는지도 모른 채 청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았고, 의식도 차츰 흐려졌다. 호흡은 어느새 고르게 가라앉았다.완전히 잠들기 직전, 곁에서 재언이 몸을 일으키는 듯한 기척과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재언이 방을 나갔다. 그가 자리를 뜨자 청하의 몸을 짓누르던 긴장도 금세 풀렸다. 그제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새벽 3시가 되어 재언이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와 아들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동윤은 팔다리를 사방으로 벌린 채 자고 있었고, 작은 이불은 발치까지 차 내려가 있었다.동윤이는 원래 잠버릇이 얌전한 아이가 아니었다.지난 두 달 동안 아들과 단둘이 지내며 재언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아이 옷 하나 제대로 벗겨 줄 줄 몰랐지만, 이제는 동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게 됐다.가끔 둘만 남아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재언도 새삼 깨닫곤 했다. 아이 하나를 돌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정말 어려운 일이었다.재언은 손을 뻗어 아들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고개를 들던 재언의 시선이 잠든 청하에게 머물렀다. 청하는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은 베개 곁에 힘없이 놓여 있었고, 희미한 달빛이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잠든 모습은 더없이 차분하고 평온해 보였다.청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은 어쩌면 ‘온화함’

  • 사랑의 방정식   제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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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방정식   제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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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방정식   제27화

    용현은 마지못해 짧게 대답을 한 뒤, 동료 몇 사람에게 이끌려 자리를 떴다.청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멀어지는 용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가족 간의 정, 사랑, 우정. 살아오는 내내 청하에게 늘 부족했던 것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별다를 것 없는 삶이었고, 굳이 꺼내 말할 만한 것도 많지 않았다.그래도 다행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났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비좁은 대기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재언은 청하의 입가에 남은 웃음을 바라봤다.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지만 말투는 유난히 건조했다.“네 손 데었을 때 바로 내가 데리고 가서 흐르는 물에 손부터 식혀 줬고, 의료진도 내가 불렀고, 치료비도 내가 냈는데. 서용현 PD가 대체 뭘 안심한다는 거지?”청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귀에 익게 들어 온 냉랭한 말투였다.“심 대표님 말씀은... 제가 비용을 정산해 드려야 한다는 뜻인가요?”부드럽고 담담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날이 서 있었다. 재언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이 여자 눈에는 내가 그렇게 돈이나 밝히는 쪼잔한 사람으로 보이나?’청하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말다툼할 생각조차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준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준환은 왕진 가방을 정리하며 물었다.“너희 둘, 대체 무슨 일이야?”재언은 대답하지 않았다.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들어와.”문이 살짝 열리며 한다미가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대표님, 룸에 음식 새로 차려 놨어요. 아까 거의 못 드셨잖아요. 지금이라도 조금 더 드시겠어요?”재언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아까 마음 한구석을 아주 미세하게 건드렸던 감정이, 대체 누구의 발걸음이 되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인지 재언 자신도 알 수 없었다.준환은 멀어지는 한다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의 일

  • 사랑의 방정식   제26화

    지난 몇 년 동안 청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용현은 직접 봤고, 청하가 어떤 사람인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39도가 넘는 고열에도 조정실에 앉아 촬영 화면을 끝까지 확인하고 편집했다. 사람 봐 가며 함부로 대하는 기업인들에게 술을 억지로 받아 마시다가 위경련이 와 나무 아래에서 토하고 그대로 쪼그려 잠든 적도 있었다. 다음 날에는 또 동윤이를 돌봐야 했는데, 심씨 집안에서 일하는 시터는 아이가 모기에 몇 군데 물렸다는 이유로 청하가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탓했다.그때도 용현은 청하 바로 뒤에서 모든 걸 봤다. 그리고 남편인 재언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왜 모든 걸 여자 혼자 감당해야 했던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이제야 나타난 재언은 정작 다른 여자를 지키고 있었다.재언의 시선이 용현에게 향했다. 도전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본 재언이 눈썹을 아주 조금 들었다. 주변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우리 청하 선배?”“그만해!”두 사람이 말을 잇기 전에 청하가 먼저 끊었다.“내가 뜨거운 물 가까이에 있던 것도 잘못이니까 한다미 씨 책임만은 아니고.”청하는 평온한 표정으로 다미에게 거리감 있게 말했다.“게다가 심재언 대표도 곁에 있는데 누가 한다미 씨한테 뭘 하겠어? 그러니까 안심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다미는 청하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 처음 봤다. 늘 말로든 분위기로든 자신이 밀렸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속이 시원해졌다.‘나보다 능력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 뭐 해?’‘결국 심 대표님은 내 편이잖아.’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미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옆의 준환은 여자들 사이의 신경전에 관심이 없었다. 청하의 손을 잡아 다시 치료를 이어 갔다.청하는 피부가 희고 손도 부드러웠다. 흉터가 남으면 아까울 정도였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준환에게 부드럽게 물었다.“조금 빨리 해 주실 수 있어요?”“그러면 많이 아플 겁니다.”화상 치료는 섬세하게 해야 했다. 서두르면 피부

  • 사랑의 방정식   제25화

    최민은 표정이 굳어 바로 자리를 떠났다.자리에 남은 용현은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따라가지 않았다.청하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재언이 방향을 잡아 이끌자 오히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몇 걸음 만에 세면대로 도착했다.차가운 흐르는 물이 손등에 닿자 불에 덴 듯 따갑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내가 할게.”청하는 재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재언은 놓지 않고 오히려 손목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태도도 부드럽지 않았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움직이지 마.”청하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너무 아파 더 실랑이할 힘도 없었다.도시의 욕실과 달리 공간은 좁고 답답했다. 누런 조명은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키가 큰 재언은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청하의 손목을 잡아 수도꼭지 아래 흐르는 물에 갖다 댔다. 찬물로 계속 열을 식히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급히 따라온 다미는 바로 그 모습을 보게 됐다.오랫동안 부부로 살아온 두 사람은 어딘가 닮은 분위기가 있었다. 가까이 붙어 서 있는 모습은 뜻밖에 친밀해 보였다.다미는 문을 짚은 채 시선을 굳혔다.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촬영지가 외진 곳이라 의사가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최민이 운전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달리라고 했지만 한 시간 뒤에야 도착했다.아는 얼굴을 본 청하는 예의상 인사했다.“진 선생님, 오랜만이에요.”손등의 화상은 이미 흐르는 찬물로 응급 처치를 한 상태였다. 진준환은 대충 살펴본 뒤 시선을 거두고 의료 가방을 열었다. 늘 그렇듯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가능하다면 저는 제수씨를 병원 밖에서는 평생 안 보고 싶습니다.”청하는 자조하듯 웃었다.“미안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또 이런 모습만 보여 드리네요.”“됐어.”준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재언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널 여기까지 부른 건, 둘이 수다 떨라고 한 게 아니야.”준환은 무표정하게 재언을 한 번 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청하의 상처를 치료했다. 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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