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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랑의 방정식: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윤청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청하가 탔던 호주 시드니발 비행기가 심한 난기류를 만나, 추락의 위기를 간신히 이겨내고 도착했다.겨우 착륙해 입국장 출구 앞에 서 있었지만 다리는 아직도 후들거렸다.심재언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전화받지 않는 남편의 태도는 이미 식어 버린 청하의 마음을 한 번 더 차갑게 만들었다....청하는 집으로 돌아왔다.재언은 잔뜩 취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소파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고, 입에는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 반 개비가 물려 있었다. 그 옆에는 젊은 여자가 바짝 붙어 있어, 누가 봐도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여자는 얼굴을 붉힌 채 재언의 넥타이를 풀더니 셔츠 단추에까지 손을 댔다.재언은 여자의 손을 막지 않았다. 표정에서는 속내를 읽기 어려웠다.청하가 문을 닫는 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청하를 확인한 여자는 흠칫 놀라며 황급히 손을 거뒀다.“선배님.”그제야 청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봤다. 방송국에 새로 들어온 인턴 아나운서 한다미였다. 청순한 인상이 돋보이는 여자였다.다미를 뽑을 때 최종 검토를 맡았던 사람도 청하였다. 당시 청하는 어릴 적 자기 모습이 떠오른다며, 패기도 있고 끈기도 있는 친구라고 좋게 평가했었다.“안녕하세요.”청하는 예의상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회식에서 심 대표님이 술을 좀 많이 드셨어요. 속이 안 좋아지실까 봐 걱정돼서 저만 남아 있었어요.”다미는 옆에 놓인, 이미 차갑게 식은 꿀물을 가리키며 얌전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선배님, 혹시 불쾌하신 건 아니죠?”다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녀린 몸을 작게 웅크리고 서 있었다. 무척 순해 보였다.재언이 좋아할 법한 타입이었다.청하조차 그런 다미에게 모진 말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아니에요.”청하가 담담하게 답했다.“고마워요.”다미는 조심스레 청하를 살폈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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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동 거리가 꽤 길었다. 나중에 동윤이 차에 탔을 때 추울까 봐 청하는 미리 히터 온도를 한 단계 높였다.두 사람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가 어린이집 앞에 도착해 골목을 돌아서자 정문 밖으로 아이들이 두세 줄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늘은 테마 활동이 있는 날이라 아이들은 모두 같은 곰돌이 옷을 입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정말 복슬복슬한 아기 곰 무리 같았다.차를 세운 뒤 두 사람은 함께 내렸다.아까 끝맺지 못한 이야기가 떠오른 청하가 다시 말했다.“이혼합의서는 시간 날 때 읽어 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변호사를 통해 다시 작성해도 되고.”“진짜 마음 정한 거야?”재언은 눈조차 들지 않았다. 청하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였다.“우리가 이혼하면 동윤이 인생에도 큰 영향이 가. 본인 생각만 하지 말고 그만 이기적으로 굴어.”‘이기적이라고?’그 단어는 예상보다 아프게 박혔다.청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동윤이는 내가 낳은 아이야.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잘 키울 거야.”“뭘로 잘해 줄 건데? 네 월급으로 동윤이한테 들어가는 한 달 생활비의 절반이나 감당할 수 있어?”재언은 무표정한 채 두 팔을 접고 차에 기대섰다.“미리 말해 두는데, 동윤이는 내 아들이야. 네가 없는 살림에 악착같이 사는 건 네 선택이지만 동윤이까지 그럴 이유는 없어.”“그래? 당신 아들?”청하가 나직하게 물었다.“그럼 저기서 어떤 애가 동윤이인지는 알아볼 수 있어?”재언의 시선이 앞에서 신나게 뛰노는 ‘아기곰’들에게 향했다.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턱이 굳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묵이 답이었다.재언은 자기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친아버지가 자기 아이 얼굴도 몰라본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청하는 니트 자락을 여미고 시선을 거두었다.“그만 찾아. 동윤이는 여기 없어.”동윤이는 대기실에서 잠들어 있었다.선생님이 안에서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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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시계의 초침만 조용히 움직였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SZ그룹의 비서실장 최민이 한 번 다녀갔다. 문을 두드린 최민은 재언이 뒤늦게 준비한 아들의 생일 선물을 두고 갔다.한정판 로봇 장난감이었다.아쉽게도 세 살 아이가 가지고 놀기에는 조금 복잡한 제품이었다.게다가 동윤이의 생일은 벌써 석 달이나 지나 있었다. 아이는 오래전에 선물 이야기를 잊었으니, 이제 와서 주든 말든 큰 차이가 없었다.청하는 예의상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권했다. 최민은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삼킨 끝에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불편한 데는 없으시고요?”청하는 바로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괜찮아요. 왜요?”최민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오늘 큰일을 겪으셔서 많이 피곤하실 것 같습니다. 더 방해하지 않고 가 보겠습니다. 혹시라도 몸이 이상하시면 꼭 바로 연락 주십시오.”잠깐 머뭇거리던 최민이 덧붙였다.“대표님은 요즘 워낙 바쁘셔서 오늘 뉴스를 아직 못 보신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시간 나시는 대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최민은 자신이 거짓말할 때 얼마나 티가 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시선이 자꾸 흔들렸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청하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감사 인사만 건넸다.“최 실장님도 고생 많았어요.”청하가 몹시 지쳐 보이자 최민도 더 머물지 않았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사실 최민은 이미 재언에게 청하가 오늘 비행 사고를 겪었고 자칫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고 보고했다.하지만 재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사고 보도를 본 최민조차 가슴을 졸이며 청하의 안부를 걱정했다. 그런데 정작 상사이자 청하의 남편인 재언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차가웠다.결혼한 지 3년.최민은 청하가 그 시간을 대체 어떻게 버텨 왔는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무관심한 남편, 끊임없이 무시하고 압박하는 시댁 사람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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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한부모 가정.’그 말을 듣자 청하의 머릿속이 잠깐 텅 비었다.차가 천천히 출발했다.사실 선생님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이런 결혼이 한부모 가정과 대체 뭐가 다를까?...출장에서 막 돌아온 터라 방송국에는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청하는 길고 검은 머리를 낮은 포니테일로 단정하게 묶었다.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허벅지까지 슬릿이 들어간 몸에 붙는 롱스커트를 입은 채, 두꺼운 서류 뭉치를 안고 사무실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PD님, 드디어 돌아오셨어요!”조연출 지아는 가족이라도 만난 듯 반색했다. 당장 청하를 붙잡고 울기라도 할 태세였다.“빨리 스튜디오 좀 가 보세요. 지금 난리 났어요.”청하의 가느다란 눈썹이 살짝 모였다.“무슨 일인데?”방송국은 어젯밤부터 뒤집혀 있었다. 다만 청하가 장거리 출장에서 막 돌아와 쉬고 있을 거로 생각해 누구도 선뜻 연락하지 못했다.현재 방송국에서 새로 준비 중인 프로그램은 인터뷰 형식의 토크쇼였다. 원래 메인 진행자는 정식 아나운서 과정을 밟고 경력도 많으며 인지도까지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메인 스폰서 측에서 갑자기 진행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두 달 동안 정식 절차를 거쳐 따낸 자리를 하루아침에 빼앗긴 원래 진행자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스튜디오에서 크게 항의하며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청하가 현장에 도착하자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어제 청하의 집에 있던 인턴 아나운서 한다미였다. 지금은 원래 진행자인 이수빈에게 멱살을 잡힌 채 호되게 질책받고 있었다.“실력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나랑 경쟁해. 갑자기 내 자리를 빼앗는 건 무슨 짓이야? 울긴 왜 울어? 네가 피해자인 척하지 마!”다미는 고개를 숙이고 눈시울을 붉혔다. 당황과 초조가 그대로 드러났다.“죄송해요.”“죄송하면 끝이야? 하필 남의 남편 건드려 놓고 여기서 불쌍한 척은 왜 해. 최소한 부끄러운 줄은 알아야지...”“그만해.”청하가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가 차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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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청하는 18살이 되던 해, 시드니의 한 대학에 합격했다.그 시절의 시드니는 지금보다 치안도 불안하고 물가도 비쌌다. 돈도 배경도 없는 어린 청하가 혼자 버티기에는 녹록지 않은 곳이었다.청하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했다.어느 날 낯선 외국인 남자 몇 명이 청하의 앞을 막아섰다. 음흉한 눈으로 청하를 훑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청하는 전에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피하려 했지만 남자들은 일부러 몸을 부딪쳤다. 쟁반 위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깨졌고, 커피까지 쏟아져 옷 앞부분이 흠뻑 젖었다.그때는 사람이 많은 오후였다. 소란이 생기자 주변 시선이 몰렸다. 청하는 당황해 쟁반으로 젖은 옷을 가렸지만 남자들은 계속 다가왔다. 급기야 쟁반까지 빼앗으려 했다.“여자 하나 괴롭히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남자 여럿이.”재언이 나타났다. 청하 앞을 막아선 재언은 남자들이 쓰는 언어로 유창하게 욕설을 퍼부으며 비웃었다.뒤이어 탁자가 넘어지고 접시까지 전부 깨졌다. 재언은 자기 돈으로 가게에 변상했다. 청하는 재언의 뒤를 따라가 돈을 갚겠다고 했지만 재언은 받지 않았다.“여자한테 돈 받는 건 좀 그렇잖아.”비스듬히 걸린 흐린 가로등 불빛 아래 재언의 얼굴에는 싸움으로 생긴 상처가 선명했다. 그래도 재언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다음에 또 보게 되면, 그때는 이렇게 엉망인 꼴로 만나지 말자.”재언의 목소리가 차가운 바람 사이로 멀어졌다.낯선 도시에서 혼자 버티던 18살의 청하는 그날 처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나중에야 청하는 재언이 당시 시드니에서 가장 주목받던 프로 복서라는 사실을 알았다. 혼자서 건장한 남자 셋을 쓰러뜨린 게 우연이 아니었다.그 인연을 계기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사람이 됐다.두 사람은 연인이 됐다.그 시절 재언은 청하를 진심으로 아꼈다. 가진 돈은 많지 않았지만 경기에서 우승해 받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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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청하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이미 방송국 직원들에게 새 지시가 내려간 뒤였다. 모두 급히 움직이며 원래 진행자인 이수빈의 메이크업과 의상을 다시 준비하고 있었다.촬영장은 소란스러웠고 사람들은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오갔다.조금 전까지 정장을 갈아입고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던 다미만 구석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이미 다 정해진 일이었는데 왜 갑자기 바뀐 거지?’언제 다가왔는지 청하가 다미 옆에 섰다. 다미는 급히 입술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인사했다.“선배님...”다미는 청하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저절로 움츠러들었다.청하가 말했다.“옷은 예쁘네요. 한다미 씨한테는 별로 안 어울리지만...”다미가 굳었다. 자신이 지금 입은 건 짙은 와인색의 강렬한 정장이었다. 어깨에는 패드까지 들어가 있었지만 지나치게 마르고 작은 체격 탓에 원래 옷이 가진 세련된 실루엣을 살리지 못했다. 오히려 과하게 꾸민 듯 촌스러워 보였다. 어린아이가 어른 옷을 몰래 입은 것처럼 어딘가 어색했다.사실 스타일리스트도 이미 다미에데 옷을 입히기 전부터 다른 옷으로 바꾸자고 했다. 하지만 다미는 와인색 정장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입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안 어울리는지 알아요?”몇 번이나 고집하자 스타일리스트는 어쩔 수 없이 입혀 주었다. 사이즈가 너무 커 안쪽 곳곳을 옷핀으로 집어 놓은 탓에 움직일 때마다 몸이 찔려 불편했다.다미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을 한껏 낮추는 말투로 말했다.“제가 아직 어려서 선배님 같은 분위기는 못 내겠죠. 그래도 몇 번 더 입어 보고 익숙해지면 저한테도 맞을 거예요.”‘익숙해지면 맞는다고?’청하는 다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쪽 촬영장만 바라봤다.“한다미 씨, 한마디만 충고할게요.”“사람이 옷을 입는 거지, 옷이 사람을 입는 건 아니에요. 아무리 좋은 옷도 결국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일 뿐이에요. 올라가고 싶다면 마지막에는 결국 실력으로 승부가 결정됩니다.”재언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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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지난 3년 동안 청하의 결혼 생활은 남편이 없는 과부나 다름없었다.재언은 집에 거의 오지 않았고 아들에게 쏟는 관심도 지나치게 적었다.동윤이 세 살이 되기까지 겪은 크고 작은 모든 중요한 일에는 청하가 아이 곁에 있었다. 울며 젖을 떼던 날도, 비틀거리며 처음 걸음을 떼던 날도, 처음 옹알이 같은 단어를 내뱉던 날도 청하가 있었다.아버지인 재언은 거의 아무것도 함께하지 않았다.그런 재언이 이제 와 당연하다는 듯 청하에게 왜 아들을 데리러 가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있었다.청하는 몇 초 동안 말을 고른 뒤 조용히 답했다.“어린이집 선생님들은 다 책임감 있는 분들이야. 나랑 이모님이 선생님들과 따로 연락하는 단톡방도 있고, 등록된 보호자인지 확인되지 않으면 절대 아이를 하원시키지 않아.”“정말 사고 가능성을 따지자면 동윤이 선생님들 곁에 있을 때보다 당신 옆에 있을 때 더 위험할 수 있어.”재언의 미간이 거의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좁아졌다. 눈을 들어 청하를 바라보니 전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원래 부드럽게 이어지던 턱선도 살이 빠져 날카로워 보였다.“내 아들이야. 내가 무슨 일이 생기게 두겠어?”“그럼 동윤이 뭘 먹으면 알레르기 반응이 오는지 알아?”청하가 물었다.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 듯 재언은 몇 초간 대답하지 못했다.청하는 그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그냥 말해. 이런 일을 가져다가 당신이 위에서 나를 가르치듯 비난할 근거로 쓰지는 말고.”“지난 3년 동안 나는 혼자서 늘 이렇게 살았어. 당신이 없어도 나랑 동윤이는 잘 지냈어.”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오히려 지나치게 평온해서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재언은 마지막 문장의 뜻을 알아들었다.“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 그거였어?”‘당신이 없어도 우리는 잘 지낸다.’청하는 대답하지 않았다.침묵은 사실상 인정과 같았다.“그렇게 빨리 이혼하고 싶다면 못 해 줄 것도 없지.”재언은 물건의 가격을 정하듯 아무 감정 없이 단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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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한밤중에 동윤이 다시 한번 깼다.동윤이는 잠에서 깨도 투정을 부리기보다는 사람에게 달라붙는 편이었다. 작은 몸을 청하 품에 꼭 웅크렸다.태어난 뒤 엄마와 떨어져 지낸 적이 거의 없던 아이였다. 지난 두 달 동안 갑자기 청하가 곁에 없자 불안이 커진 모양이었다. 꼭 청하의 옷자락을 움켜쥐어야 다시 잠들 수 있었다.청하는 동윤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재웠다.그날따라 유난히 피곤했다. 기운을 전부 빼앗긴 사람처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얼마 지나지 않아 청하도 함께 잠들었다.꿈속에서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복싱은 부상이 잦은 운동이라 경기나 훈련이 있는 날이면 재언의 몸에 상처가 늘었다. 뼈가 부러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하지만 재언은 독한 사람이었다. 다치는 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관중석에서 지켜보는 청하만 마음을 졸였다. 결국 재언은 청하가 경기장에 오는 걸 강제로 막았다. 몰래 보러 갔다가 들킨 날에는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데려가며 으름장을 놓았다.“또 몰래 보러 오면 진짜 혼난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후 재언은 경기에서 내려올 때마다 애타게 기다리는 청하에게 꼭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무사함.]고작 세 글자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청하를 안심시키기엔 충분했다.얼마나 크게 다쳤든, 이겼든 졌든 그 메시지는 빠진 적이 없었다. 경기가 끝난 뒤 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나누던 포옹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재언이 우승컵을 들던 모든 순간에 청하가 곁에 있었다.그때의 청하는 그 시간이 영원할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아무것도 없던 시절을 함께 견뎠으니 가장 높은 곳에서도 함께 만날 거라고 믿었다.달칵-고요한 집 안에서 아주 작은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안방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하는 아직 잠이 덜 깨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문을 열고 나갔다.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거실의 사람을 바라봤다. 의식은 아직 오래전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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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저장된 이름은 ‘서용현 PD’였다.서용현.재언도 아는 사람이었다.청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이미 방송국 제작본부를 이끄는 핵심 인물이었다. 능력이 뛰어나고 전국 단위의 프로그램 제작이나 광고 쪽 인맥도 넓어 업계에서 이름이 꽤 알려져 있었다. 이번 시드니 출장도 재현이 청하와 함께 다녀왔다.[선배, 자? 내일 아침은 내가 챙겨 갈게. 선배는 자꾸 끼니를 거르잖아. 위도 계속 안 좋은데 그렇게 살면 진짜 큰일 나.]내용만 놓고 보면 특별히 연인처럼 보이는 말은 없었다.하지만 한밤중에 남자 동료가 남편 있는 여자 상사에게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면 아무 마음도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재언도 남자였다. 남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는 잘 알았다.청하가 국수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자 재언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거뒀다.맛은 예전과 똑같았다.재언은 천천히 몇 젓가락을 먹었다. 청하가 식탁 위 핸드폰을 집으려고 손을 뻗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먼저 손을 막았다. 눈을 들어 무심하게 말했다.“짜.”청하는 이 국수를 셀 수도 없이 많이 끓였다. 소금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도 손이 기억할 정도였다. 갑자기 짜질 리 없었다.청하의 목소리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입맛이 변했나 보지.”재언은 그 말의 다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뜬금없이 물었다.“너희 방송국 서용현은 결혼했어?”청하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잠시 뒤 답했다.“아니. 당분간 결혼 생각 없다고 했어.”청하의 직장 이야기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낯설었다.“잘 아네.”“오래 같이 일했으니까 당연히 알지.”청하는 여전히 차분했다.그 태도가 재언의 신경을 건드린 듯 아주 짧은 냉소가 흘렀다.“그래서 그 남자 때문에 나랑 이혼하려는 거야?”청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둘이 호주에 두 달이나 붙어 있다가 오더니 몸도 마음도 다 그 남자한테 간 거야?”재언은 청하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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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조금 뒤 재언이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청하는 이미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옆의 아기 침대에서는 동윤이도 깊이 잠들어 젖꼭지를 문 채 가끔 작게 쪽쪽 빠는 소리를 냈다.재언은 침대 오른쪽에 누웠다. 매트리스가 푹 꺼지자 눈을 감고 있던 청하는 등을 돌려 더 멀리 떨어졌다.침대는 넓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성인 두 명이 더 누울 수 있을 만큼 거리가 벌어져 이불 끝도 닿지 않았다.젊었을 때는 작은 소파 하나에 몸을 붙이고 자도 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재언이 같은 방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답답하고 공기가 부족한 것 같아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새벽 내내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누가 먼저 잠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 청하가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재언이 일찍 나간 모양이었다.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요리사가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동윤은 아기 의자에 얌전히 앉아 민숙이 타 준 분유를 두 손으로 들고 마셨다. 호주에서 사 온 토끼 인형에도 작은 턱받이를 둘러놓았다.청하가 예의 바르게 물었다.“아침에는 원래 안 오시는데,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평소 이 요리사는 저녁 식사만 준비했다. 아침과 점심은 각자 해결해 왔다.체격이 좋은 요리사가 푸근하게 웃었다.“대표님이 앞으로 아침도 제가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모님께서 출근이 급하면 아침을 못 드실까 봐 그러신 것 같습니다.”청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럼 부탁드릴게요.”오늘은 동윤의 어린이집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원래 장혜리가 손자를 데리고 옷을 사러 가려고 했지만 오래된 허리 통증이 심해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해 계획이 취소됐다.청하의 일정도 바쁘지 않아 동윤과 민숙을 데리고 함께 출근하기로 했다.동윤이는 방송국에 처음 오는 게 아니었다. 엄마 손을 잡고 익숙한 듯 종종걸음으로 안까지 뛰어갔다.통통하고 귀여운 데다 예의까지 바른 세 살 아이를 싫어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동윤아.”멀리서 용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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