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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방정식
사랑의 방정식
Author: 말랑우유

제1화

Author: 말랑우유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윤청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청하가 탔던 호주 시드니발 비행기가 심한 난기류를 만나, 추락의 위기를 간신히 이겨내고 도착했다.

겨우 착륙해 입국장 출구 앞에 서 있었지만 다리는 아직도 후들거렸다.

심재언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전화받지 않는 남편의 태도는 이미 식어 버린 청하의 마음을 한 번 더 차갑게 만들었다.

...

청하는 집으로 돌아왔다.

재언은 잔뜩 취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소파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고, 입에는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 반 개비가 물려 있었다.

그 옆에는 젊은 여자가 바짝 붙어 있어, 누가 봐도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여자는 얼굴을 붉힌 채 재언의 넥타이를 풀더니 셔츠 단추에까지 손을 댔다.

재언은 여자의 손을 막지 않았다. 표정에서는 속내를 읽기 어려웠다.

청하가 문을 닫는 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청하를 확인한 여자는 흠칫 놀라며 황급히 손을 거뒀다.

“선배님.”

그제야 청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봤다. 방송국에 새로 들어온 인턴 아나운서 한다미였다. 청순한 인상이 돋보이는 여자였다.

다미를 뽑을 때 최종 검토를 맡았던 사람도 청하였다.

당시 청하는 어릴 적 자기 모습이 떠오른다며, 패기도 있고 끈기도 있는 친구라고 좋게 평가했었다.

“안녕하세요.”

청하는 예의상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회식에서 심 대표님이 술을 좀 많이 드셨어요. 속이 안 좋아지실까 봐 걱정돼서 저만 남아 있었어요.”

다미는 옆에 놓인, 이미 차갑게 식은 꿀물을 가리키며 얌전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선배님, 혹시 불쾌하신 건 아니죠?”

다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녀린 몸을 작게 웅크리고 서 있었다. 무척 순해 보였다.

재언이 좋아할 법한 타입이었다.

청하조차 그런 다미에게 모진 말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에요.”

청하가 담담하게 답했다.

“고마워요.”

다미는 조심스레 청하를 살폈다. 정말 화도 내지 않고 따지지도 않자 오히려 맥이 빠진 듯 말했다.

“그럼 선배님도 오셨으니 저는 먼저 갈게요. 아, 저 꿀물은 꼭 드시게 해주세요.”

다미가 떠나고 나자 집 안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재언은 술기운에 기운이 빠진 듯 눈꺼풀을 반쯤 내린 채 두 팔을 접고 소파에 기대 있었다. 한참 뒤 느릿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는데, 취한 건지 깨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냉기가 재언의 주변을 감돌았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청하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떨어진 결혼사진 액자를 주워들었다.

액자는 깨져 있었고 주변에는 날카로운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액자 안에는 구겨진 사진 한 장만 남아 있었다. 혼인신고를 앞두고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다.

사진 속 두 사람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고, 서로를 불편해하는 기색마저 역력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재언은 혼자 차를 몰고 가 버렸다. 작별 인사조차 없었던 그날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결혼한 지 어언 3년.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은 이것 한 장뿐이었다.

아마 마지막 사진이 될 가능성도 컸다.

청하가 액자를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으려던 때, 뒤에서 누군가 청하를 끌어안았다.

재언의 몸은 무거웠다. 체중의 절반 이상을 청하에게 기대며 두 팔로 허리를 감쌌다.

사진을 쥔 청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대를 붙잡듯 물었다.

“왜 전화 안 받았어?”

재언은 청하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꽤 뒤에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가?”

차분하던 청하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였다.

“나 오늘 당신한테 열 번도 넘게 전화했어. 왜 한 번도 안 받았냐고.”

재언은 귀찮다는 기색을 조금 내비쳤다.

“못 들었어.”

‘못 들었다고?’

시드니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기 보름 전부터 청하는 항공편과 도착 시간을 재언에게 보내 두었다. 예정된 착륙 시각보다 무려 열 시간이 늦어진 지금까지도 말이다.

비행기는 갑작스러운 난기류를 만나 탑승객 전원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관련 소식은 아직도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탑승객들의 무사 귀환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언은 청하의 남편이었다. 그럼에도 아내를 걱정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왜 이제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재언이 한 말은 딱 한 마디였다.

전화벨 소리를 못 들었다고.

청하는 몸도 마음도 지쳐 더 말할 기운조차 없어서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답했다.

“응.”

‘됐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한참 뒤, 술이 어느 정도 깬 듯 재언의 목소리가 조금 또렷해졌다. 집 안을 둘러보던 재언이 낮게 물었다.

“한다미는?”

조금 전까지 있다가 나간 다미를 묻는 말이었다.

“갔어.”

“네가 내보냈어?”

“필요하면 다시 불러 줄게.”

청하는 그 말만 했다.

재언의 숨결에서는 아직 가시지 않은 술 냄새가 났다. 입술이 청하의 귓불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말투가 왜 그래. 질투해?”

그 숨결이 너무 가까웠고 뜨거웠다.

그리고 재언의 아랫입술이 청하의 예민한 귓불을 스치자 간지러운 감각이 번졌다.

“아니.”

청하가 얼굴을 돌리고 피하자 재언은 기분이 상한 듯 청하의 턱을 붙잡았다.

“왜 피해?”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려던 청하의 뒤통수를 재언의 손이 바로 감쌌다.

재언은 청하의 몸을 돌려 그대로 소파 위에 눌렀다. 소파가 깊게 꺼졌고, 곧 재언의 입술이 거칠게 내려앉았다.

예고도 없이 시작된 키스는 거칠었다. 입술이 얼얼해질 정도로 집요하게 이어진 남자의 키스에 청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재언에게서는 담배와 술 냄새, 상대를 제 뜻대로 몰아붙이려는 기세가 뒤섞여 있었다.

청하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재언이 크림색 니트 밑단을 걷어 올리자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매끈하고 흰 피부에서는 은은한 바디워시 향기가 났다.

주변 공기는 뜨겁고 눅진했다. 두 사람의 피부가 빈틈없이 맞닿았다.

재언은 청하의 예민한 귓불에 입을 맞춘 뒤 손바닥을 청하의 아랫배 위에 얹었다.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해도 돼?”

“오늘 너무 피곤해.”

청하는 눈을 감은 채 재언의 손길을 분명히 거부했다.

“동윤이 수업도 곧 끝나. 오래 못 봐서 너무 보고 싶어.”

청하와 재언에게는 세 살 된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심동윤이었다.

“나는? 나는 안 보고 싶었어?”

청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듣지 못한 재언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숨을 고르던 재언이 다시 물었다.

“지금 몇 시야?”

“5시 31분.”

동윤이의 어린이집 하원 시간까지 30분도 남지 않았다.

“알았어.”

술기운이 많이 가신 재언은 그제야 청하를 놓아주었다. 느긋하게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단추를 하나씩 풀며 욕실로 향한 재언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10분만 기다려.”

오후 5시 39분.

샤워를 마친 재언은 편안한 반목 검은 니트로 갈아입고 나왔다.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올리자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선명한 턱선이 드러났다.

거실은 청하가 이미 먼지 하나 없이 정리해 두었고 현관 옆에는 검은 쓰레기봉투 두 개만 놓여 있었다.

“준비됐으면 나가자.”

청하는 말을 마치고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

재언도 나가려다 거실 탁자 위에 낯선 서류가 놓인 걸 보고 무심하게 물었다.

“탁자에 있는 건 뭐야?”

“이혼합의서.”

청하의 말투는 지나치게 아무렇지도 않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듣는 사람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재언이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재언과 청하의 차분한 시선이 마주쳤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만으로는 감정을 알 수 없었다.

“무슨 뜻이야?”

청하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문을 열려 했다.

재언이 한 손으로 문을 짚어 막아서며 앞을 가로막았다.

“대답해.”

재언이 재차 물었다.

“무슨 뜻이냐고?!”

청하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싸울 생각도 없었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내 운전 실력으로 15분 안에 어린이집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재언은 잠시 청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을 거뒀다.

청하는 한 손에 쓰레기봉투 두 개를 들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뒤에 남은 재언이 잠시 침묵한 끝에 낮게 말했다.

“내가 이혼 안 하겠다고 하면?”

청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2월의 B시에는 눈 섞인 찬 바람이 몰아쳤다.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렸고, 청하는 손이 얼어 감각이 둔해지며 시야도 조금 흐렸다.

그리고 표정은 담담했고 목소리는 작았다.

“난 동윤이만 있으면 돼.”

그녀는 남편의 재산은 바라지도 않고, ‘심재언의 아내’라는 자리도 필요 없었다.

이제 청하는 심재언에게 어떤 기대도 품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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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방정식   제30화

    동윤은 그제야 만족한 듯 눈을 감고 얌전히 누웠다.그렇게 청하와 재언은 다시 한 침대에 누웠다. 동윤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고, 청하는 아들의 등에 한 손을 올린 채 가볍게 토닥여 잠을 재웠다.평소보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웠다. 청하는 이제 막 잠든 아이가 깰까 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어두운 방 안에서 재언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로 다른 숨소리만 잔잔하게 뒤섞였다. 듣고 있자니 슬슬 저절로 졸음이 밀려왔다.얼마쯤 누워 있었는지도 모른 채 청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았고, 의식도 차츰 흐려졌다. 호흡은 어느새 고르게 가라앉았다.완전히 잠들기 직전, 곁에서 재언이 몸을 일으키는 듯한 기척과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재언이 방을 나갔다. 그가 자리를 뜨자 청하의 몸을 짓누르던 긴장도 금세 풀렸다. 그제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새벽 3시가 되어 재언이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와 아들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동윤은 팔다리를 사방으로 벌린 채 자고 있었고, 작은 이불은 발치까지 차 내려가 있었다.동윤이는 원래 잠버릇이 얌전한 아이가 아니었다.지난 두 달 동안 아들과 단둘이 지내며 재언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아이 옷 하나 제대로 벗겨 줄 줄 몰랐지만, 이제는 동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게 됐다.가끔 둘만 남아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재언도 새삼 깨닫곤 했다. 아이 하나를 돌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정말 어려운 일이었다.재언은 손을 뻗어 아들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고개를 들던 재언의 시선이 잠든 청하에게 머물렀다. 청하는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은 베개 곁에 힘없이 놓여 있었고, 희미한 달빛이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잠든 모습은 더없이 차분하고 평온해 보였다.청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은 어쩌면 ‘온화함’

  • 사랑의 방정식   제29화

    ‘안경 아빠? 앞치마 엄마?’‘대체 무슨 소리야?’재언은 미간을 찌푸리고 청하를 바라봤다. 청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설명했다.“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인물들이야.”그대로 시선을 거두려던 재언은 청하의 붕대가 피에 젖은 것을 발견했다. 잠시 침묵한 뒤 담담하게 말했다.“동윤아, 가서 구급상자 가져와.”동윤이는 말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 자기 머리보다도 큰 구급상자를 품에 안고 달려왔다. 짧고 통통한 다리인데도 달리는 건 제법 빨랐다.“아빠, 여기!”재언은 구급상자를 받아 들고 청하에게 손을 내밀었다.“손.”청하는 아이 앞에서는 두 사람 사이가 지나치게 냉랭해 보이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다친 손을 내밀었다.예전에 선수 생활을 했던 탓인지 재언은 이런 작은 상처를 수도 없이 처리해 본 사람이었다. 손놀림은 익숙했고 처치도 수준급이었다.사실 전화 한 통이면 주치의가 10분 안에 올 수 있었다. 다만 재언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고, 청하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재언은 붕대 끝을 단단히 묶었다.“됐어. 이틀 정도는 손 함부로 쓰지 마.”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동윤이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엄마, 아직 아빠한테 고맙다고 안 했잖아!”“고마워.”청하는 잠깐 말을 멈췄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해 끝내 한마디를 덧붙였다.“저기...”지나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를 들었지만 재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표정이 한층 더 무심해졌을 뿐이었다.“아니야...”평소에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만큼 바쁘던 재언이 웬일인지 그날은 한가했다. 재언이 떠나지 않으니 청하도 대놓고 나가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동윤의 성화에 못 이겨 세 사람은 거실에 앉아 올해 새로 나온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을 함께 봤다. 따뜻하면서도 아이가 배울 만한 교훈이 담긴 작품이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청하는 화면을 진지하게 보며 동윤이 이해하기

  • 사랑의 방정식   제28화

    점심 무렵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오후 촬영은 예정대로 이어졌다.청하의 손은 사실 크게 다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국장이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 일주일 동안 집에서 쉬기로 했다.“국장님, 저 정말 괜찮아요.”“윤 PD, 이번에는 내 말 들어. 이참에 집에서 푹 쉬면서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말고.”국장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방송국에는 네 편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한다미가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지는 못해.”‘내 편? 참 따뜻한 말인데...’청하는 미소를 띠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청하가 떠난 뒤, 국장은 웃음을 거두고 조연출을 불렀다.“그 한다미라는 친구 말이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굳이 내가 가르쳐 줄 필요 없겠지?”조연출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뜻을 알아챘다.“국장님, 설마 일부러 띄워 줬다가 스스로 무너지게 하시려는 겁니까?”“누가 일부러 무너뜨린대.”국장이 미간을 찌푸렸다.“방송국에서 줄 수 있는 기회와 지원은 제대로 줄 거야. 그걸 한다미가 받아낼 실력이 있는지는 본인 몫이지. 못 버티고 사라진다 해도 우리 방송국 책임은 아니잖아.”조연출은 뜻을 완전히 알아듣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국장님, 더 말씀 안 하셔도 알겠습니다.”국장은 길게 숨을 내쉬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재언을 정면으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결국 이런 방식으로라도 다미가 현실의 벽을 직접 부딪쳐 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청하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윤도 어린이집에서 돌아왔다. 이번에는 재언이 직접 데려온 모양이었다. 아이는 현관에 들어서기도 전에 목소리부터 들려왔다.“엄마! 엄마! 오늘은 왜 동윤이 데리러 안 왔어?”재언이 턱짓으로 안방 쪽을 가리키자, 동윤이는 곧장 안방으로 뛰어갔다.청하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자마자 작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지고 입술도 삐죽 튀어나왔다.“엄마, 왜 다쳤어? 많이 아파?”집에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 주는 아이가 있으니, 아픈

  • 사랑의 방정식   제27화

    용현은 마지못해 짧게 대답을 한 뒤, 동료 몇 사람에게 이끌려 자리를 떴다.청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멀어지는 용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가족 간의 정, 사랑, 우정. 살아오는 내내 청하에게 늘 부족했던 것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별다를 것 없는 삶이었고, 굳이 꺼내 말할 만한 것도 많지 않았다.그래도 다행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났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비좁은 대기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재언은 청하의 입가에 남은 웃음을 바라봤다.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지만 말투는 유난히 건조했다.“네 손 데었을 때 바로 내가 데리고 가서 흐르는 물에 손부터 식혀 줬고, 의료진도 내가 불렀고, 치료비도 내가 냈는데. 서용현 PD가 대체 뭘 안심한다는 거지?”청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귀에 익게 들어 온 냉랭한 말투였다.“심 대표님 말씀은... 제가 비용을 정산해 드려야 한다는 뜻인가요?”부드럽고 담담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날이 서 있었다. 재언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이 여자 눈에는 내가 그렇게 돈이나 밝히는 쪼잔한 사람으로 보이나?’청하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말다툼할 생각조차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준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준환은 왕진 가방을 정리하며 물었다.“너희 둘, 대체 무슨 일이야?”재언은 대답하지 않았다.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들어와.”문이 살짝 열리며 한다미가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대표님, 룸에 음식 새로 차려 놨어요. 아까 거의 못 드셨잖아요. 지금이라도 조금 더 드시겠어요?”재언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아까 마음 한구석을 아주 미세하게 건드렸던 감정이, 대체 누구의 발걸음이 되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인지 재언 자신도 알 수 없었다.준환은 멀어지는 한다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의 일

  • 사랑의 방정식   제26화

    지난 몇 년 동안 청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용현은 직접 봤고, 청하가 어떤 사람인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39도가 넘는 고열에도 조정실에 앉아 촬영 화면을 끝까지 확인하고 편집했다. 사람 봐 가며 함부로 대하는 기업인들에게 술을 억지로 받아 마시다가 위경련이 와 나무 아래에서 토하고 그대로 쪼그려 잠든 적도 있었다. 다음 날에는 또 동윤이를 돌봐야 했는데, 심씨 집안에서 일하는 시터는 아이가 모기에 몇 군데 물렸다는 이유로 청하가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탓했다.그때도 용현은 청하 바로 뒤에서 모든 걸 봤다. 그리고 남편인 재언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왜 모든 걸 여자 혼자 감당해야 했던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이제야 나타난 재언은 정작 다른 여자를 지키고 있었다.재언의 시선이 용현에게 향했다. 도전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본 재언이 눈썹을 아주 조금 들었다. 주변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우리 청하 선배?”“그만해!”두 사람이 말을 잇기 전에 청하가 먼저 끊었다.“내가 뜨거운 물 가까이에 있던 것도 잘못이니까 한다미 씨 책임만은 아니고.”청하는 평온한 표정으로 다미에게 거리감 있게 말했다.“게다가 심재언 대표도 곁에 있는데 누가 한다미 씨한테 뭘 하겠어? 그러니까 안심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다미는 청하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 처음 봤다. 늘 말로든 분위기로든 자신이 밀렸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속이 시원해졌다.‘나보다 능력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 뭐 해?’‘결국 심 대표님은 내 편이잖아.’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미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옆의 준환은 여자들 사이의 신경전에 관심이 없었다. 청하의 손을 잡아 다시 치료를 이어 갔다.청하는 피부가 희고 손도 부드러웠다. 흉터가 남으면 아까울 정도였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준환에게 부드럽게 물었다.“조금 빨리 해 주실 수 있어요?”“그러면 많이 아플 겁니다.”화상 치료는 섬세하게 해야 했다. 서두르면 피부

  • 사랑의 방정식   제25화

    최민은 표정이 굳어 바로 자리를 떠났다.자리에 남은 용현은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따라가지 않았다.청하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재언이 방향을 잡아 이끌자 오히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몇 걸음 만에 세면대로 도착했다.차가운 흐르는 물이 손등에 닿자 불에 덴 듯 따갑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내가 할게.”청하는 재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재언은 놓지 않고 오히려 손목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태도도 부드럽지 않았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움직이지 마.”청하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너무 아파 더 실랑이할 힘도 없었다.도시의 욕실과 달리 공간은 좁고 답답했다. 누런 조명은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키가 큰 재언은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청하의 손목을 잡아 수도꼭지 아래 흐르는 물에 갖다 댔다. 찬물로 계속 열을 식히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급히 따라온 다미는 바로 그 모습을 보게 됐다.오랫동안 부부로 살아온 두 사람은 어딘가 닮은 분위기가 있었다. 가까이 붙어 서 있는 모습은 뜻밖에 친밀해 보였다.다미는 문을 짚은 채 시선을 굳혔다.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촬영지가 외진 곳이라 의사가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최민이 운전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달리라고 했지만 한 시간 뒤에야 도착했다.아는 얼굴을 본 청하는 예의상 인사했다.“진 선생님, 오랜만이에요.”손등의 화상은 이미 흐르는 찬물로 응급 처치를 한 상태였다. 진준환은 대충 살펴본 뒤 시선을 거두고 의료 가방을 열었다. 늘 그렇듯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가능하다면 저는 제수씨를 병원 밖에서는 평생 안 보고 싶습니다.”청하는 자조하듯 웃었다.“미안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또 이런 모습만 보여 드리네요.”“됐어.”준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재언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널 여기까지 부른 건, 둘이 수다 떨라고 한 게 아니야.”준환은 무표정하게 재언을 한 번 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청하의 상처를 치료했다. 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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