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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말랑우유
지난 3년 동안 청하의 결혼 생활은 남편이 없는 과부나 다름없었다.

재언은 집에 거의 오지 않았고 아들에게 쏟는 관심도 지나치게 적었다.

동윤이 세 살이 되기까지 겪은 크고 작은 모든 중요한 일에는 청하가 아이 곁에 있었다.

울며 젖을 떼던 날도, 비틀거리며 처음 걸음을 떼던 날도, 처음 옹알이 같은 단어를 내뱉던 날도 청하가 있었다.

아버지인 재언은 거의 아무것도 함께하지 않았다.

그런 재언이 이제 와 당연하다는 듯 청하에게 왜 아들을 데리러 가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있었다.

청하는 몇 초 동안 말을 고른 뒤 조용히 답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다 책임감 있는 분들이야. 나랑 이모님이 선생님들과 따로 연락하는 단톡방도 있고, 등록된 보호자인지 확인되지 않으면 절대 아이를 하원시키지 않아.”

“정말 사고 가능성을 따지자면 동윤이 선생님들 곁에 있을 때보다 당신 옆에 있을 때 더 위험할 수 있어.”

재언의 미간이 거의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좁아졌다. 눈을 들어 청하를 바라보니 전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원래 부드럽게 이어지던 턱선도 살이 빠져 날카로워 보였다.

“내 아들이야. 내가 무슨 일이 생기게 두겠어?”

“그럼 동윤이 뭘 먹으면 알레르기 반응이 오는지 알아?”

청하가 물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 듯 재언은 몇 초간 대답하지 못했다.

청하는 그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그냥 말해. 이런 일을 가져다가 당신이 위에서 나를 가르치듯 비난할 근거로 쓰지는 말고.”

“지난 3년 동안 나는 혼자서 늘 이렇게 살았어. 당신이 없어도 나랑 동윤이는 잘 지냈어.”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평온해서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언은 마지막 문장의 뜻을 알아들었다.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 그거였어?”

‘당신이 없어도 우리는 잘 지낸다.’

청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사실상 인정과 같았다.

“그렇게 빨리 이혼하고 싶다면 못 해 줄 것도 없지.”

재언은 물건의 가격을 정하듯 아무 감정 없이 단정했다.

“동윤이는 내가 데려가. 원하는 돈은 네가 정해.”

그 말이 떨어지자 물처럼 잔잔하던 청하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매끈한 도자기에 실금이 난 것처럼 완벽한 평정이 깨졌다.

이상하게도 그제야 예전보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더 이상 아무 반응 없이 재언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청하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동윤이는 우리 둘 중 누가 가져갈지 다투는 물건이 아니야.”

“그럼 네가 양육권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야? 그게 제일 편하지.”

재언은 여전히 차갑고 자신만만했다. 모든 걸 자기 손안에 쥔 사람의 태도였다.

“나랑 정면으로 싸울 생각은 하지 마. 네게 7년을 더 줘도 지금 네 힘으로는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평범한 말투였지만 무딘 칼이 청하의 가장 약한 곳을 여러 번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재언이 정말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마음먹으면 청하가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청하에게는 재언이 가진 수준의 자본이나 힘도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대등하지 않았다.

재언은 냉담한 표정으로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손목에 찬 고가의 시계가 청하의 눈을 아프게 했다.

문득 오래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재언은 값도 나가지 않는 붉은 실로 된 팔찌를 차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웃으며 자랑했다.

“이거 내 여자 친구가 만들어 준 거야. 다치지 말라고.”

그때 두 사람의 바람은 단순했다.

청하는 늘 재언이 무사하기를 바랐고, 재언은 청하에게 집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밖에 눈이 내려서인지 청하는 갑자기 추위를 느꼈다.

찬 기운이 손끝부터 저릿하게 파고들었다.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청하는 눈을 질끈 감고 약한 모습을 재언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다.

“당신이 정말 아들을 그렇게 아낀다면 동윤이 아직도 당신과 단둘이 있는 걸 무서워하지는 않겠지.”

청하가 길게 숨을 내쉬고 물었다.

“당신이 붙잡으려는 건 동윤이야, 아니면 심씨 집안 후계자야?”

잠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네가 그걸 굳이 구분해서 알 필요는 없어.”

“동윤이는 내 아들이고 심씨 집안을 이을 아이이기도 해. 너랑 살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겠지만 나랑 있으면 원하는 길을 얼마든지 고를 수 있어. 동윤이 원한다면 우리 집안이 못 해 줄 건 없어.”

재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압박감이 실려 있었다.

“돈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얼마나 다른지, 윤청하. 너야말로 제일 잘 알잖아.”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청하는 그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삼키지도 뱉지도 못했다. 목 안이 따갑게 아파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 내가 모를 리 없지.’

재언과 함께하던 시절 얼마나 가난했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청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그 말을 어떻게 재언이 할 수 있을까?

‘심재언... 감히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청하는 그 자리에 선 채 재언의 차가운 눈을 바라봤다. 눈가가 붉어졌고 메마른 웃음이 아주 조금 번졌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깨뜨렸다.

수화기 너머로 다미의 밝고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여자가 품은 호감이 숨김없이 묻어났다.

[대표님, 오늘 친구 생일이라 술을 좀 마셨는데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요.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저 좀 데리러 와 주실 수 있어요?]

창밖에서는 거센 바람이 불어 유리창까지 울렸다.

재언은 딱 3초 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주소 보내.”

재언은 그대로 나갔다. 문이 단정하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청하의 머릿속에서 마지막으로 버티던 끈도 끊어졌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게 이어져 있던 투명한 실이 끝까지 늘어나다 탄력을 잃고 뚝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소리가 머릿속에서 오래 울렸다. 뒤에서 침실 문이 열렸다.

동윤이는 조금 전 부모가 어떤 싸움을 했는지 전혀 몰랐다. 맨발로 걸어 나와 졸린 눈을 비비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아빠 어디 갔어?”

청하는 한참 뒤에야 아이 곁으로 걸어가 쪼그려 앉았다. 온몸의 힘을 다 써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처럼 힘겨웠다. 겨우 목소리를 내 부드럽게 말했다.

“아빠 일하러 갔어. 동윤이 다시 예쁘게 자자.”

세 살짜리 아이는 사실 일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다.

다만 동윤이의 기억 속에서는 아빠가 일하러 가면 늘 집을 떠났고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야 돌아왔다. 할머니가 아빠 일할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동윤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랑한 목소리가 졸음에 뭉개졌다.

“응, 착하게 있을게. 아빠 방해 안 할게. 아빠 일 끝나면 나 ‘키즈카페’ 데려가 줄 거지?”

청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맑은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같은 시각.

다미는 술집의 룸에서 나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밖에 섰다. 제법 취해 있었다.

찬바람에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다가 익숙한 SZ그룹 소유의 업무용 세단을 발견하자 환하게 웃으며 급히 달려갔다.

뒷문을 열고 타자 재언은 막 담배에 불을 붙인 참이었다. 한쪽 팔꿈치를 창가에 괸 채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 같은 오만한 태도였다.

다미는 술집 입구에서 구경하듯 몰래 바라보는 친구들을 흘끗 확인했다.

괜히 어깨가 올라갔다. 웃으며 재언 쪽으로 다가앉았다.

“대표님, 진짜 와 주실 줄 몰랐어요.”

재언은 앞만 바라봤다.

“네가 오라고 전화했잖아.”

다미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다미는 재언의 기분이 자주 바뀐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도 느꼈다.

평소였다면 눈치를 보고 조용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술기운 탓인지 오늘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자리를 빼앗긴 억울함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혹시 오늘 일 때문에 기분 안 좋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청하 선배님이랑 경쟁할 생각 없어요. 제 자리가 어디인지 알아요.”

다미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대표님이 진행자는 저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청하 선배님은 사정도 안 듣고 저를 심하게 혼냈어요.”

“옷 하나 가지고 사람을 깎아내리기도 하고요. 저도 잘 지내보고 싶은데 이제 무서워서 못 하겠어요...”

“굳이 잘 지낼 이유가 있어?”

재언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다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대표님은 정말 저한테 잘해 주세요.”

재언이 손을 한 번 들자 앞좌석의 기사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재언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배를 끄고 여전히 눈도 들지 않았다. 무심하게 묻는 말투였다.

“어제 들었던 가방은 오늘 왜 안 들었어?”

다미가 멍하니 되물었다.

“대표님이 잘못 기억하신 거 아니에요? 저는 어제 가방을 안...”

말끝에서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술이 한꺼번에 깨는 듯 손발이 차가워졌다.

‘알고 있었어. 내가 거짓말한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앞좌석의 최민이 룸미러로 창백해진 다미를 살폈다.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한다미 씨, 차 안 온도를 낮춰 드릴까요?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 같습니다.”

다미가 대답하기 전에 재언이 담담하게 지시했다.

“차 세워. 밖이 더 시원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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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방정식   제30화

    동윤은 그제야 만족한 듯 눈을 감고 얌전히 누웠다.그렇게 청하와 재언은 다시 한 침대에 누웠다. 동윤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고, 청하는 아들의 등에 한 손을 올린 채 가볍게 토닥여 잠을 재웠다.평소보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웠다. 청하는 이제 막 잠든 아이가 깰까 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어두운 방 안에서 재언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로 다른 숨소리만 잔잔하게 뒤섞였다. 듣고 있자니 슬슬 저절로 졸음이 밀려왔다.얼마쯤 누워 있었는지도 모른 채 청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았고, 의식도 차츰 흐려졌다. 호흡은 어느새 고르게 가라앉았다.완전히 잠들기 직전, 곁에서 재언이 몸을 일으키는 듯한 기척과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재언이 방을 나갔다. 그가 자리를 뜨자 청하의 몸을 짓누르던 긴장도 금세 풀렸다. 그제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새벽 3시가 되어 재언이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와 아들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동윤은 팔다리를 사방으로 벌린 채 자고 있었고, 작은 이불은 발치까지 차 내려가 있었다.동윤이는 원래 잠버릇이 얌전한 아이가 아니었다.지난 두 달 동안 아들과 단둘이 지내며 재언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아이 옷 하나 제대로 벗겨 줄 줄 몰랐지만, 이제는 동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게 됐다.가끔 둘만 남아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재언도 새삼 깨닫곤 했다. 아이 하나를 돌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정말 어려운 일이었다.재언은 손을 뻗어 아들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고개를 들던 재언의 시선이 잠든 청하에게 머물렀다. 청하는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은 베개 곁에 힘없이 놓여 있었고, 희미한 달빛이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잠든 모습은 더없이 차분하고 평온해 보였다.청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은 어쩌면 ‘온화함’

  • 사랑의 방정식   제29화

    ‘안경 아빠? 앞치마 엄마?’‘대체 무슨 소리야?’재언은 미간을 찌푸리고 청하를 바라봤다. 청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설명했다.“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인물들이야.”그대로 시선을 거두려던 재언은 청하의 붕대가 피에 젖은 것을 발견했다. 잠시 침묵한 뒤 담담하게 말했다.“동윤아, 가서 구급상자 가져와.”동윤이는 말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 자기 머리보다도 큰 구급상자를 품에 안고 달려왔다. 짧고 통통한 다리인데도 달리는 건 제법 빨랐다.“아빠, 여기!”재언은 구급상자를 받아 들고 청하에게 손을 내밀었다.“손.”청하는 아이 앞에서는 두 사람 사이가 지나치게 냉랭해 보이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다친 손을 내밀었다.예전에 선수 생활을 했던 탓인지 재언은 이런 작은 상처를 수도 없이 처리해 본 사람이었다. 손놀림은 익숙했고 처치도 수준급이었다.사실 전화 한 통이면 주치의가 10분 안에 올 수 있었다. 다만 재언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고, 청하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재언은 붕대 끝을 단단히 묶었다.“됐어. 이틀 정도는 손 함부로 쓰지 마.”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동윤이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엄마, 아직 아빠한테 고맙다고 안 했잖아!”“고마워.”청하는 잠깐 말을 멈췄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해 끝내 한마디를 덧붙였다.“저기...”지나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를 들었지만 재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표정이 한층 더 무심해졌을 뿐이었다.“아니야...”평소에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만큼 바쁘던 재언이 웬일인지 그날은 한가했다. 재언이 떠나지 않으니 청하도 대놓고 나가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동윤의 성화에 못 이겨 세 사람은 거실에 앉아 올해 새로 나온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을 함께 봤다. 따뜻하면서도 아이가 배울 만한 교훈이 담긴 작품이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청하는 화면을 진지하게 보며 동윤이 이해하기

  • 사랑의 방정식   제28화

    점심 무렵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오후 촬영은 예정대로 이어졌다.청하의 손은 사실 크게 다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국장이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 일주일 동안 집에서 쉬기로 했다.“국장님, 저 정말 괜찮아요.”“윤 PD, 이번에는 내 말 들어. 이참에 집에서 푹 쉬면서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말고.”국장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방송국에는 네 편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한다미가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지는 못해.”‘내 편? 참 따뜻한 말인데...’청하는 미소를 띠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청하가 떠난 뒤, 국장은 웃음을 거두고 조연출을 불렀다.“그 한다미라는 친구 말이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굳이 내가 가르쳐 줄 필요 없겠지?”조연출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뜻을 알아챘다.“국장님, 설마 일부러 띄워 줬다가 스스로 무너지게 하시려는 겁니까?”“누가 일부러 무너뜨린대.”국장이 미간을 찌푸렸다.“방송국에서 줄 수 있는 기회와 지원은 제대로 줄 거야. 그걸 한다미가 받아낼 실력이 있는지는 본인 몫이지. 못 버티고 사라진다 해도 우리 방송국 책임은 아니잖아.”조연출은 뜻을 완전히 알아듣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국장님, 더 말씀 안 하셔도 알겠습니다.”국장은 길게 숨을 내쉬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재언을 정면으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결국 이런 방식으로라도 다미가 현실의 벽을 직접 부딪쳐 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청하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윤도 어린이집에서 돌아왔다. 이번에는 재언이 직접 데려온 모양이었다. 아이는 현관에 들어서기도 전에 목소리부터 들려왔다.“엄마! 엄마! 오늘은 왜 동윤이 데리러 안 왔어?”재언이 턱짓으로 안방 쪽을 가리키자, 동윤이는 곧장 안방으로 뛰어갔다.청하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자마자 작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지고 입술도 삐죽 튀어나왔다.“엄마, 왜 다쳤어? 많이 아파?”집에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 주는 아이가 있으니, 아픈

  • 사랑의 방정식   제27화

    용현은 마지못해 짧게 대답을 한 뒤, 동료 몇 사람에게 이끌려 자리를 떴다.청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멀어지는 용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가족 간의 정, 사랑, 우정. 살아오는 내내 청하에게 늘 부족했던 것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별다를 것 없는 삶이었고, 굳이 꺼내 말할 만한 것도 많지 않았다.그래도 다행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났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비좁은 대기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재언은 청하의 입가에 남은 웃음을 바라봤다.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지만 말투는 유난히 건조했다.“네 손 데었을 때 바로 내가 데리고 가서 흐르는 물에 손부터 식혀 줬고, 의료진도 내가 불렀고, 치료비도 내가 냈는데. 서용현 PD가 대체 뭘 안심한다는 거지?”청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귀에 익게 들어 온 냉랭한 말투였다.“심 대표님 말씀은... 제가 비용을 정산해 드려야 한다는 뜻인가요?”부드럽고 담담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날이 서 있었다. 재언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이 여자 눈에는 내가 그렇게 돈이나 밝히는 쪼잔한 사람으로 보이나?’청하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말다툼할 생각조차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준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준환은 왕진 가방을 정리하며 물었다.“너희 둘, 대체 무슨 일이야?”재언은 대답하지 않았다.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들어와.”문이 살짝 열리며 한다미가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대표님, 룸에 음식 새로 차려 놨어요. 아까 거의 못 드셨잖아요. 지금이라도 조금 더 드시겠어요?”재언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아까 마음 한구석을 아주 미세하게 건드렸던 감정이, 대체 누구의 발걸음이 되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인지 재언 자신도 알 수 없었다.준환은 멀어지는 한다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의 일

  • 사랑의 방정식   제26화

    지난 몇 년 동안 청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용현은 직접 봤고, 청하가 어떤 사람인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39도가 넘는 고열에도 조정실에 앉아 촬영 화면을 끝까지 확인하고 편집했다. 사람 봐 가며 함부로 대하는 기업인들에게 술을 억지로 받아 마시다가 위경련이 와 나무 아래에서 토하고 그대로 쪼그려 잠든 적도 있었다. 다음 날에는 또 동윤이를 돌봐야 했는데, 심씨 집안에서 일하는 시터는 아이가 모기에 몇 군데 물렸다는 이유로 청하가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탓했다.그때도 용현은 청하 바로 뒤에서 모든 걸 봤다. 그리고 남편인 재언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왜 모든 걸 여자 혼자 감당해야 했던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이제야 나타난 재언은 정작 다른 여자를 지키고 있었다.재언의 시선이 용현에게 향했다. 도전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본 재언이 눈썹을 아주 조금 들었다. 주변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우리 청하 선배?”“그만해!”두 사람이 말을 잇기 전에 청하가 먼저 끊었다.“내가 뜨거운 물 가까이에 있던 것도 잘못이니까 한다미 씨 책임만은 아니고.”청하는 평온한 표정으로 다미에게 거리감 있게 말했다.“게다가 심재언 대표도 곁에 있는데 누가 한다미 씨한테 뭘 하겠어? 그러니까 안심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다미는 청하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 처음 봤다. 늘 말로든 분위기로든 자신이 밀렸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속이 시원해졌다.‘나보다 능력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 뭐 해?’‘결국 심 대표님은 내 편이잖아.’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미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옆의 준환은 여자들 사이의 신경전에 관심이 없었다. 청하의 손을 잡아 다시 치료를 이어 갔다.청하는 피부가 희고 손도 부드러웠다. 흉터가 남으면 아까울 정도였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준환에게 부드럽게 물었다.“조금 빨리 해 주실 수 있어요?”“그러면 많이 아플 겁니다.”화상 치료는 섬세하게 해야 했다. 서두르면 피부

  • 사랑의 방정식   제25화

    최민은 표정이 굳어 바로 자리를 떠났다.자리에 남은 용현은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따라가지 않았다.청하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재언이 방향을 잡아 이끌자 오히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몇 걸음 만에 세면대로 도착했다.차가운 흐르는 물이 손등에 닿자 불에 덴 듯 따갑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내가 할게.”청하는 재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재언은 놓지 않고 오히려 손목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태도도 부드럽지 않았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움직이지 마.”청하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너무 아파 더 실랑이할 힘도 없었다.도시의 욕실과 달리 공간은 좁고 답답했다. 누런 조명은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키가 큰 재언은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청하의 손목을 잡아 수도꼭지 아래 흐르는 물에 갖다 댔다. 찬물로 계속 열을 식히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급히 따라온 다미는 바로 그 모습을 보게 됐다.오랫동안 부부로 살아온 두 사람은 어딘가 닮은 분위기가 있었다. 가까이 붙어 서 있는 모습은 뜻밖에 친밀해 보였다.다미는 문을 짚은 채 시선을 굳혔다.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촬영지가 외진 곳이라 의사가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최민이 운전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달리라고 했지만 한 시간 뒤에야 도착했다.아는 얼굴을 본 청하는 예의상 인사했다.“진 선생님, 오랜만이에요.”손등의 화상은 이미 흐르는 찬물로 응급 처치를 한 상태였다. 진준환은 대충 살펴본 뒤 시선을 거두고 의료 가방을 열었다. 늘 그렇듯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가능하다면 저는 제수씨를 병원 밖에서는 평생 안 보고 싶습니다.”청하는 자조하듯 웃었다.“미안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또 이런 모습만 보여 드리네요.”“됐어.”준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재언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널 여기까지 부른 건, 둘이 수다 떨라고 한 게 아니야.”준환은 무표정하게 재언을 한 번 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청하의 상처를 치료했다. 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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