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화

Author: 금소
민하윤은 그날 어떻게 집에서 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민희수가 하루건너 자신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문자로 자랑했다.

민하윤은 회사 근처에서 자취했다. 십 평 조금 넘는 크기라 별로 크지 않았지만 욕실 하나가 딸려 있고 가구도 빠짐없이 있었다.

민하윤은 민희수를 언팔로우 하려다가 실수로 민희수의 프로필을 클릭했다.

민희수는 여전히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민씨 가문 별장의 거실에 각종 주얼리와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놓고 사진을 찍어서 올렸다.

그리고 아래 글을 적었다.

[역시 엄마, 아빠 최고. 엄마, 아빠 덕분에 스물셋에 수십억대 혼수를 마련했다.]

민하윤은 민희수가 올렸던 게시물들을 쭉 보았다. 민희수는 누가 봐도 화려한 삶을 사는 재벌가 딸 같아 보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스포츠카와 명품 백, 옷장을 가득 채운 맞춤 드레스와 주얼리들, 그리고 가끔은 가족들과 단톡방에서 나눈 대화를 캡처해서 올리기도 했다. 평소 무뚝뚝하던 민성현은 민희수가 보낸 문자에 꼬박꼬박 답장을 보냈고 유머러스했다. 심지어 늘 까칠하던 송해정도 자애롭고 다정했다. 누구라도 그런 가족 분위기를 부러워할 것이다.

민하윤은 자조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가족 단톡방에는 오직 세 명뿐이었다. 민하윤은 없었다.

민성현, 송해정과의 채팅 기록은 민하윤과 진서우의 정략결혼이 정해졌을 때 멈춰 있었다.

민성현, 송해정은 민하윤을 위해 혼수를 준비했다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하윤아, 예물은 엄마, 아빠가 보관해 줄게. 네가 챙겨가면 결국엔 진씨 가문의 것이 될 거니까. 혼수도 꽤 많아. 그리고 널 위해 가장 좋은 실크 이불 여러 개를 주문했어. 그거 챙겨가.]

당시 민하윤은 바보처럼 그 말에 감동했었다.

그들은 친딸도 아닌 민희수가 결혼할 때는 집과 차, 비싼 보석들이 박힌 주얼리들을 준비해 주었다. 그들보다 더 부유한 진씨 가문에 시집가서 괴롭힘이라도 당할까 봐 말이다. 그러나 민하윤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는 겨우 이불 여러 개를 준비해 주었다.

민하윤은 부모님과 여동생의 연락처를 차단한 뒤 삭제했다. 어차피 민하윤은 이미 평판이 추락했고 그들은 민하윤이 더는 본인들의 체면을 깎지 않고 민씨 가문에서 알아서 나가 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민하윤은 감정을 추스른 뒤 출근 준비를 했다. 그녀는 일부러 셔츠 안에 터틀넥 이너를 입었다. 온몸 곳곳에 키스 마크가 남았는데 그중에서도 목 부근이 특히 심했기 때문이다.

민하윤은 전국 곳곳에 지점을 둔 은행에서 일했다. 민하윤은 명원 태유 은행 본점에서 신용대출 업무 중에서도 대출 관리를 주로 맡았다.

민하윤은 업무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편이라 부서 내 모든 신용대출 업무는 반드시 그녀의 손을 거쳐야 했고, 일반적으로 민하윤이 최종 검토 후 상사에게 보고했다.

실어증은 민하윤의 일상생활에 여러모로 불편함을 주었다. 특히 고객을 상대할 때는 수화를 써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했다. 민하윤은 대학교 때 금융학과 경영학을 복수로 전공하였고 그것이 태유 은행에서 파격적으로 그녀를 채용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민하윤이 이 은행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민하윤의 선배 임형섭이 회사에 그녀를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하윤아, 이건 에스티 벤처 투자의 건축 입찰 대출 자료야. 일단 이것부터 검토해 줘. 임원들은 에스티와 계약을 맺기를 원해. 에스티는 매년 자금 흐름이 수천억에 달하니 말이야. 임원들이 말하길 이번에 에스티와 장기적으로 협력하게 되면 올해 우리 부서 연말 보너스 열 배로 주겠대.”

임형섭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수많은 젊은 여자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민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업무는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나 다음 달 3일에 포리아로 출장 가야 해.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하씨 가문 어르신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 줘.”

임형섭은 붉은색에 금색이 어우러진 초대장을 민하윤에게 건넸고 민하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드레스는 미리 주문해 뒀으니까 내가 준비한 선물을 챙겨 가서 얼굴만 비추면 돼.”

임형섭은 이미 모든 걸 준비해 두었다. 그는 민하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민하윤은 임형섭의 행동이 지나치게 다정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민하윤은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로 수화로 임형섭에게 물었다.

[제가요?]

임형섭은 민하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기에 그녀를 안쓰러워하며 말했다.

“내가 준 초대장을 들고 가면 돼.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눌 필요는 없어.”

민하윤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갔다가 임형섭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까 봐, 또는 일을 망칠까 봐 걱정되었다. 그 순간 임형섭이 회심의 한마디를 했다.

“에스티와 협력하려면 반드시 이 파티에 참석해야 해. 나도 우리 아버지 덕분에 초대장을 얻은 거야.”

임형섭은 민하윤의 능력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민하윤은 그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를 대신하여 불바다도 건널 수 있었다. 하물며 에스티와 연을 맺을 기회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주 좋은 기회였다.

[알겠어요. 갈게요.]

민하윤은 감격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달 뒤, 하씨 가문 저택 앞에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도로 양옆은 비싼 차들로 가득했다.

박달나무로 된 상자 하나를 챙긴 민하윤은 택시 기사에게 길가에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비싼 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에 택시를 타고 갔다가는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될 터였으니 차라리 일찍 차에서 내려 조금 더 걷는 편이 나았다.

민하윤은 자태가 굉장히 좋았고 얼굴도 예뻐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차가 막힌 틈을 타 수많은 사람들이 차 안에서 민하윤을 바라보았다.

민하윤은 임형섭이 준비해 준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정교하고 복잡한 수공예 디자인의 드레스가 민하윤의 완벽한 목선과 허리선을 돋보이게 했다. 민하윤은 긴 머리카락을 낮게 묶어주었고 화려한 액세서리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민하윤의 흰 피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민하윤은 초대장을 들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하씨 가문 저택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검은색 벤틀리가 도착해 가장 좋은 자리에 주차했다.

차 안의 남자는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맞춤 제작된 정장이 그의 몸에 꼭 맞아서 태가 났다. 하도진은 오늘 파티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무심한 얼굴로 긴 다리를 꼰 채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하도진은 시선을 들어 옆에 앉아 있던 집사를 힐끗 보았다.

“할머니가 드디어 그곳에서 돌아온 건가요?”

“할머님께서는 두 달 전 사람을 시켜 본인은 기도를 마친 뒤 돌아올 테니 도련님께서는 우선 회사 일에 익숙해지라고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 이번에 어르신의 생신이 되어 온 가족이 모이자고 했습니다.”

집사는 직접 하도진을 위해 문을 열었다. 그들 때문에 뒤에 차들이 꽉 막혔는데도 집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하씨 가문 어르신의 생신을 축하하러 온 것이지만 하도진은 집으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도진은 5년 만에 다시 낯설면서도 익숙한 본가로 돌아오게 되었다. 가정부들은 바빠서 정신이 없어 보였고 마당에는 디저트와 마실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손님들이 담소를 나누는 소리와 음악 소리, 분수 소리가 어우러졌다. 하도진은 굳은 표정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다른 분위기를 지닌 젊은 남자가 나타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맞춤 정장을 입은 하도진은 매우 눈에 띄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그윽하면서도 차가움이 느껴지는 눈동자, 높은 콧대까지. 잘생긴 얼굴 때문에 젊은 재벌가 딸들은 저도 모르게 하도진을 힐끔댔다. 그러나 하도진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분위기와 압박감 때문에 다들 겁을 먹고 감히 하도진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민하윤은 이런 자리를 싫어했다. 그녀는 선배가 부탁한 선물을 직원에게 건넨 뒤 홀로 파티장 구석 쪽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냈다. 눈앞의 다양한 음식들을 본 민하윤은 왠지 모르게 속이 울렁거렸다. 상한 음식이라도 먹은 것인지 요즘 속이 계속 좋지 않아서 자꾸 토하고 싶었다.

“언니,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민희수는 어떻게 초대장을 구한 걸까? 그녀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꾸민 채로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며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민희수는 일부러 와인잔을 높이 들고 있었는데 오른손 약지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굉장히 눈에 띄었다. 모든 움직임이 계산된 것만 같았다.

민하윤은 그 반지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진씨 가문에서 약혼식 준비를 하면서 민하윤을 위해 준비한 반지였는데 두 달도 되지 않아 그 반지는 민희수의 것이 되었다.

민하윤은 민희수와 괜히 얽히고 싶지도 않았고 괜히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기에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민희수가 일부러 그녀의 앞길을 막고 말했다.

“언니, 언니 추문이 명원에 쫙 퍼졌더라.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는 알지? 내가 언니였으면 엄마, 아빠 망신 안 시키려고 얌전히 집에 숨어 있을 텐데.”

민하윤이 시선을 들어 민희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쁜 눈동자에 냉소와 경멸이 가득했다. 민하윤은 자신의 앞에서 연기를 하는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민하윤은 민희수가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민희수는 민하윤을 화나게 만들어 민하윤이 오늘 하씨 가문의 파티를 망치게 한 뒤 모든 책임을 민하윤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멍청한 생각이었다. 민하윤은 민희수의 바람을 이루어줄 생각이 없었기에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녀의 드레스를 밟는 바람에 민하윤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 순간 높게 쌓아 올려졌던 잔들이 풀밭 위로 와르르 쏟아지면서 큰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민하윤에게로 집중되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479화

    민하윤은 책상 위의 마지막 서류까지 가지런히 정리한 뒤 기지개를 켰다.블라인드 너머로 보이는 사무실 자리는 반 이상 비어 있었고 민하윤은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원증부터 목에서 뺐다.민하윤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하도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하도진은 심심한 듯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고 있었다.옆에서는 삼색이가 가방 안에서 앞발로 벽면을 긁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하도진이 고개를 돌려 보니 삼색이는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 잔뜩 서운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사람과 고양이가 그렇게 눈싸움을 벌였다.“너도 하윤이 보러 가고 싶어?”하도진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고양이 가방을 앞쪽으로 멘 채 검은색 얇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자 늘씬하고 곧게 뻗은 몸이 드러났다.하도진이 신은 가죽 구두는 저녁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딱 퇴근 시간과 겹쳤기에 하도진은 사람들의 흐름을 거슬러 태유 은행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덕분에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도진에게 쏠렸다.심플한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지만 하도진은 이상하리만큼 눈에 띄었다.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길게 뻗은 체형도 그랬고 얼굴까지 워낙 잘생겼다.그런 남자가 앞쪽으로 반려동물 가방까지 메고 있으니 묘한 반전 매력이 더해졌다.그러니 하도진을 돌아보는 사람이 없을 수가 없었다.하도진은 삼색이를 안은 채 태유 은행 로비로 들어가더니 젊은 직원에게 작업용 카드까지 빌려 출입 게이트를 통과했다.“임원실은 몇 층이죠?”“중간 관리자 이상은 거의 다 꼭대기 층의 사무 구역에서 근무해요.”“고마워요.”하도진이 입꼬리를 휘며 웃자 젊은 여직원은 홀린 듯 그를 바라봤다.“연락처 하나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여직원은 용기를 내 먼저 말을 붙였다.“저도 고양이 키우거든요. 가끔 정보 공유해도 좋을 것 같아서요.”하지만 하도진은 고개를 저었다.그러더니 손가락으로 가슴 앞의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얘 엄마가 워낙 관리가 엄해서요.”“아...”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478화

    민하윤은 늘 하도진을 놀라게 했다.하도진은 민하윤의 고집과 질긴 생명력을 오래전부터 봐 왔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소중한 정의감까지 새삼 느끼고 있었다.민하윤은 한 번도 하도진의 손바닥 위에서 길러지는 금실 좋은 새장이 아니었고 절대 하도진이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민하윤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도진 씨도 많이 변했네요.”“퇴근하고 내가 널 데리러 가도 돼? 삼색이가 곧 새끼 낳을 것 같아서 병원에 한 번 더 데려가야 해.”예전의 하도진은 늘 제멋대로였다.민하윤의 기분을 먼저 헤아리는 법도 없었고 하물며 진지하고 평등하게 대화한다는 건 더더욱 기대할 수 없었다.시간은 참 좋은 스승이었다.사람에게 더 잘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니까 말이다.민하윤은 잠깐 생각한 뒤 대답했다.“네. 알겠어요.”“하윤아, 우리 내일 혼인신고 다시 하러 가면 안 돼?”“안 돼요.”“그럼 언제는 되는데?”“도진 씨의 행동을 봐서요.”민하윤은 잠깐 생각하더니 한마디 덧붙였다.“제 기분도 봐야 해요.”하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하윤아, 어젯밤에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벌써 잊은 거 아니지?”민하윤은 가만히 떠올려 봤다.숙취 때문에 어젯밤의 기억은 온통 야릇한 일들만 뒤섞여 남아 있었다.민하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제가 뭐라고 했는데요?”“내가 잘한다고 하면서 나한테 명분이라도 줘야겠다고 했잖아.”하도진은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화가 난 얼굴이었다.민하윤이 돌아서는 속도는 책장 넘기는 속도보다 빠르다고 생각했다.하도진은 얼굴을 굳힌 채 따져 물었다.“잊었어?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민하윤은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렸고 그 순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도진 씨 좀 보세요. 또 성질내네요.”“내가 언제 성질냈어? 너 지금 어디야? 와서 우리 얼굴 보고 똑바로 얘기하자. 하윤아, 나 진짜 어젯밤에 녹음 안 한 게 너무 아쉬워. 네가 어제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477화

    하도진은 차체에 기대선 채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의 담배를 꺼냈다.손마디는 완전히 감각을 잃은 듯 굳어 있었고 손가락도 마음대로 구부러지지 않았다.간신히 손바닥으로 담배를 쳐서 한 개비를 빼낸 뒤 고개를 숙여 물었다.하도진은 금속 라이터를 더듬어 꺼내 몇 번이나 켜려고 노력한 끝에 겨우 불을 붙였다.불꽃이 담배 끝을 핥았다.하도진은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몸을 숙인 채 심하게 기침을 터뜨렸고 담배를 문 채, 외울 정도로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우통 인터내셔널 하버.민하윤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겨우 발을 옮기며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식빵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구워지고 있었고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뜬금없이 울렸다.민하윤은 발신자 이름을 힐끗 보는 순간 혼이 빠진 사람처럼 휴대폰을 뒤집어 식탁 위에 엎어 놨다.하도진은 고집이 황소 같은 사람이었다.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끊임없이 울렸고 대리석 상판 위에서 휴대폰이 이상한 진동음을 냈다.민하윤은 결국 못 참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아직도 화났어?”하도진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무심코 입꼬리를 올렸다.눈을 감은 채, 수화기 너머에서 민하윤이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부루퉁하게 서 있을 모습을 그려 보고 있었다.“할 말 있으면 빨리 해요. 헛소리...”민하윤은 갑자기 말을 멈췄고 손가락을 깨물며 속으로 기겁했다.‘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대담할 수 있지? 머리보다 입이 먼저 움직이다니...’“민하윤, 너한테 할 말이 있어.”하도진은 정말 딴사람처럼 들렸다.낮고 거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전류음을 타고 민하윤의 귀에 스며들었다.“내 말 좀 들어 줄래?”민하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못 이기는 척 작게 대답했다.“네...”“먼저 잘못부터 인정할게. 고은율의 일 때문에 주민혁을 거의 절반 죽여 놨어.”“뭐라고요?”“고은율이 술에 취한 상태로 주민혁한테 강제로 끌려갔어.”하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켠 뒤 잠시 말을 골랐다.“주민혁 그 자식은 너한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476화

    하도진의 눈빛은 알 수 없을 만큼 깊었고 눈 밑으로 핏빛이 서서히 번졌다.주민혁의 그런 말을 듣는 순간, 하도진은 가슴속의 어딘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하도진은 주민혁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고 주먹을 말아 쥔 채 미친 사람처럼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넌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고은율은 소파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었고 얼굴에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은율은 하도진이 마치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걸 건드린 사람처럼 주민혁에게 정말 손을 봐주지 않고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하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사람을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친 뒤 느릿하게 넥타이를 풀었다.그러더니 주먹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하도진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혐오가 가득했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번호 하나를 눌렀다.하도진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담담했다.“도련님, 바쁘십니까? 와서 동생 시신이나 수습하시죠.”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다는 듯 전화를 끊어 버린 하도진은 발끝으로 피범벅이 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진 주민혁을 한 번 툭 건드렸다.하도진은 길게 숨을 내쉰 뒤, 고은율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등을 돌렸다.그대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도진아.”고은율은 넋이 나간 얼굴로 하도진을 불렀다.고은율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고 공포와 울음이 뒤섞여 있었다.“도진아, 또 네가... 날 구해 줬네.”하지만 하도진의 마음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아주 오래전 어느 날, 하도진 역시 혼자 룸 안으로 뛰어들어 처참하게 짓밟히던 고은율을 구해 낸 적이 있었다.“고은율,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려고 해.”고은율은 눈물을 쏟아 내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맨발로 바닥을 딛자 고은율의 하얀 발가락에는 피가 묻었다.고은율은 하도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끝까지는 안 갔어. 나 당하지는 않았어. 도진아, 제발 날 버리지 마. 응?”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475화

    하도진의 차는 길가에 멈춰 섰다.희뿌연 새벽빛 아래 세상은 짙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하도진은 문득 헛웃음이 터졌다.‘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아직 철없는 애송이처럼 이렇게 무모하고 충동적이라니. 내 멘탈이 이렇게나 형편없단 말인가.’민하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해 유혹하기만 해도 하도진은 그토록 하찮고 값싸 보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하도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해가 뜨기 전에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그때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려 댔다.하도진은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차창을 올린 뒤 전화를 받았다.“형 지금 어디야? 은율 누나가 주민혁한테 끌려갔어!”수화기 너머로 진호영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준오 형은 해외 나갔고 나도 그 새끼 사람들한테 맞았어. 형, 지금 어디야?”하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켠 뒤 대뜸 욕부터 퍼부었다.“생각이란 게 있긴 해? 내가 아까 뭐라고 했어? 걔 마음대로 날뛰게 두지 말고 주민혁의 술집에서 바로 데리고 나오라고 했지. 사람 말이 그렇게 알아듣기 어려워? 꼭 일이 이 지경까지 터져야 정신 차리냐?”“나가던 길에 하필 그 새끼랑 마주쳤어. 형 지금 어디냐고? 은율 누나 아직 취해 있어. 진짜 큰일 날까 봐 무서워.”진호영의 목소리는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하도진은 욕설을 뱉으며 핸들을 틀고 액셀을 끝까지 밟았다.하도진은 이런 귀찮은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결국 주민혁 그 개자식이 자기를 향한 원한 때문에 귀신처럼 달라붙어 자기 주변 사람들까지 건드리는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차는 고가도로 위를 미친 듯이 달렸고 짙던 안개도 조금씩 걷혀 갔다.하도진은 차 문도 제대로 닫지 않은 채 주민혁의 라운지 바로 안으로 들이닥쳤다.1층 댄스 플로어에서는 조금 전까지 남녀들이 디제이 음악에 취해 몸을 흔들고 있었지만 다음 순간 새하얀 스포트라이트가 번쩍 켜지자 모두 멍하니 서로 얼굴만 바라봤다.하도진은 2층 룸 문을 발로 걷어찼고 방 안의 상황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주민혁은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474화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슨 사이야? 단순히 잠자리만 하는 사이라는 말은 하지 마. 난 너랑 섹파 안 해.”민하윤은 침대에서 뛰어내리더니 서랍장을 열어 지폐 다발을 꺼내 침대 위에 내던졌다.“이 정도면 돼요?”“지금 뭐 하자는 거야?”하도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식었다. 음산하게 가라앉은 얼굴에 보는 사람마저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하지만 민하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다리는 후들거릴 만큼 힘이 풀려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단호했다.“기억 안 나요? 저랑 처음 잔 다음에 도진 씨도 저한테 이랬잖아요. 두툼한 돈다발을 던졌죠.”“하윤아, 지금 날 돈 받고 몸을 판 남자 취급하는 거야?”하도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숨까지 흐트러졌다.민하윤은 얼굴을 돌린 채 말했다.“그때 도진 씨가 저한테 한 만큼 저도 똑같이 해 주는 거죠.”하도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민하윤이 이렇게까지 독할 줄은 몰랐다.‘진짜 당한 만큼 그대로 돌려주는구나. 좋아.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하도진은 침대 위의 돈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침대 가장자리를 툭툭 두드렸다.“자, 이만큼 줬으면 소중한 손님이 손해 보게 하면 안 되지. 이리 와. 내가 계속 서비스를 잘해 줄게.”민하윤은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기에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아... 아니에요. 안 해도 돼요. 이 정도면 아주 만족스러웠어요.”하도진은 차갑게 웃으며 일부러 돈다발을 흔들어 보였다.“그럴 리가... 이 돈은 너무 많잖아. 우리 손님 손해 보면 안 되지. 올라와. 이만큼이나 받았으니 제대로 해 줄게.”민하윤은 머리를 세차게 저었고 겁에 질린 듯 침만 꿀꺽 삼켰다.민하윤은 애초에 자기도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몰랐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입만 멋대로 움직였다.“아니에요. 남는 건 팁으로 해요.”‘팁? 팁이라고?’하도진은 입꼬리를 올렸지만 웃음은 눈까지 닿지 않았다.‘이 여자가 진짜 날 돈 주고 부르는 남자 취급한 거네.’하도진의 시선이 천천히 민하윤의 몸 위를 훑었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