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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작가: 릴리아
빈센트의 질문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 옆에 서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그저 텅 빈 천장을 바라보며 침묵할 뿐이었다.

그때 빈센트의 휴대전화가 울리며 팽팽하게 긴장된 정적이 깨졌다.

"빈센트, 손이 너무 아파..."

이사벨라의 연약하고 흐느끼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내가 누워 있는 곳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빈센트의 표정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금방 갈게."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한 일을 잘 생각해 봐."

그리고 그는 떠났다. 언제나 그랬듯, 나를 버리고 이사벨라에게로.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나 혼자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이어 이사벨라가 들어왔다. 오른손은 두꺼운 붕대로 감겨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승리감이 가득했다.

"소피아, 몸은 좀 어때?"

그녀가 걱정하는 척 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공허하고 무감했다.

이사벨라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얼굴엔 달콤하면서도 독이 서린 미소를 띤 채였다.

"이야기 하나 알려줄게."

"듣고 싶지 않아."

"근데 이 이야기는 당신 이야기인데."

이사벨라의 눈이 번뜩였다.

"왜 빈센트가 네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들여 직접 너를 '교육'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야."

나는 병원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고등학교 때 빈센트와 나는 연인이었어."

이사벨라가 향수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우린 정말 사랑했지. 그 사람은 나한테 정말 잘해줬어. 내가 좋아하는 건 전부 기억했고, 졸업하면 나와 결혼하겠다고까지 말했었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끔찍한 일이 일어났어. 어느 날 밤, 빈센트가 적대 가문의 습격을 받은 거야."

이사벨라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가리켰다.

"내가 그 사람을 구하려고 대신 총알을 맞았어. 총알은 어깨를 관통했고, 나는 거의 죽을 뻔했지."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일 이후 빈센트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어. 평생 나를 보호하고, 그 빚을 갚겠다고 약속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은 고통스럽게 갈비뼈를 두드리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갔고, 빈센트는 내가 돌아오면 바로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어."

이사벨라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목소리는 점점 독기로 물들어 갔다.

"우린 한 번도 연락을 끊은 적이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 다 이야기했지."

"불쌍한 우리 엄마가 로마노 가문에 시집왔는데, 잔인한 로마노 후계자가 엄마를 괴롭히고 있다고. 그 때문에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도."

이사벨라는 미소 지었다.

"그러자 빈센트가 말했어. '네 엄마의 복수를 해주겠다'고. 그래서 빈센트가 네 아버지를 찾아간 거야. 직접 널 교육하겠다고 제안하면서."

그녀의 미소는 눈부실 만큼 환했다.

"설마 로마노 아저씨가 억지로 시킨 줄 알았어? 틀렸어, 소피아. 빈센트가 먼저 원한 일이야."

내 혈관 속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뭐라고?"

"아직 더 있어."

이사벨라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너도 알고 있었어? 너희들이 함께 있었던 모든 순간이 전부 녹화되고 있었다는 거."

"뭐?"

"빈센트는 침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어. 그리고 모든 걸 녹화했지."

이사벨라의 미소는 점점 더 뒤틀리고 악랄해졌다.

"그리고 그 영상들을 나한테 주겠다고 했어. 나중에 널 통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충격 받았어, 소피아?"

이사벨라는 승리자의 표정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센트는 한 번도 널 사랑한 적 없어. 그냥 임무를 수행했을 뿐."

"이제 임무는 끝났고, 그 사람은 나와 결혼할 거야."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그 영상들 전부 복사본을 만들어 놨어. 앞으로 또 나를 건드릴 생각이라면 조심해. 전부 인터넷에 올려서 세상 사람들이 다 보게 만들 테니까."

이사벨라가 떠난 뒤, 나는 침대 위에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말이 끝없이 반복되는 고문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빈센트가 직접 나를 교육하겠다고 자청했다.

이사벨라를 위해 복수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가 함께한 모든 사적인 순간을 녹화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팔에 꽂혀 있던 수액 바늘을 뽑아버리고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간호사들이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병원을 빠져나온 나는 택시를 붙잡았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로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빈센트의 저택으로 가야 했다. 이사벨라의 말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20분 후, 택시는 저택 앞에 급정거했다.

나는 예비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곧장 빈센트의 서재로 달려갔다.

책장 뒤에는 비밀 공간이 있었다. 비밀번호도 알고 있었다.

번호를 입력하자 벽 일부가 미끄러지듯 열렸다. 안에는 감시실이 나타났다.

수많은 컴퓨터, 셀 수 없이 많은 모니터, 각종 첨단 녹화 장비들.

나는 메인 컴퓨터 앞에 앉아 파일 목록을 열었다.

'S'라고 적힌 폴더 안에서 암호화된 하위 폴더 하나를 발견했다.

폴더 이름은, ‘Sophia_Private’

내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나는 클릭했다.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는 영상 파일들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우리가 처음 함께했던 밤부터 마지막 밤까지, 모든 영상이 빠짐없이 존재했다.

나는 첫 번째 영상을 클릭했다.

화면 속에는 빈센트와 내가 침대 위에 함께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모든 장면이 선명한 고화질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나.

"사랑해" 라고 속삭이던 나.

나의 연약함.

나의 신뢰.

나의 완전한 헌신.

그 모든 순간들이.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부 사실이었다. 이사벨라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빈센트는 정말로 모든 것을 녹화해 두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생각하며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순진했는지. 얼마나 희망 없는 바보였는지.

계속 웃었다. 멈출 수 없을 만큼.

그러다 어느 순간, 웃음은 갈라지고 부서진 울음으로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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