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슈트를 쫙 빼입고 어딘가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바를 찾은 다른 손님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이러한 차림새는 별의별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술집보다는 셀럽들만 드나드는 회원제 클럽에서나 볼 법했다.물론 부자들의 생각은 종잡을 수 없었다. 어쩌면 동네 술집의 푸근한 분위기를 체험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바텐더는 가식적인 미소를 장착했다.“어서 오세요.”유현진은 불쾌한 듯 술잔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했다.“어서 오세요는 무슨, 아직 술도 안 따라줬잖아. 얼른 따르지 않고 뭐해?”바텐더도 술주정하는 그녀에게 두손 두발을 들었기에 꾹 참고 달래주었다.“손님, 곧 마감할 거라서 남은 술이 없어요.” “거짓말, 다른 사람들은 다 술 마시고 있는데 왜 나만 없어?”그녀를 속이기 쉽지는 않은 듯싶었다. 부가티 차주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바텐더는 문득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진짜 없어요. 저분이 술을 몽땅 결제했는데, 아니면 내일 다시 오실래요?”유현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뒤돌아 앉았고, 깔끔한 옷차림의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을 어렴풋이 보았다.테이블을 짚고 휘청거리며 일어선 그녀는 상대방의 멱살을 덥석 움켜쥐더니 손가락으로 턱을 가리켰다.“술을 몽땅 결제했다는 사람이 당신이야?”발갛게 달아오른 볼과 흐트러진 옷,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온몸으로 술 냄새를 풍기는 그녀한테서 평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가리키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대답해, 네가 술 다 샀냐고!”바텐더가 대충 둘러댄 말을 철석같이 믿은 그녀는 단단히 따질 기세로 강한서를 노려보았다.“내가 먼저 왔는데 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술을 다 결제하는 거지? 선착순 몰라?”바텐더는 강한서가 화를 낼까 봐 조마조마한 가슴을 부여잡고 얼른 끼어들었다.“손님, 이분이 술에 취해서... 신경 쓰지 마세요.”“안 취했거든!”유현진은 고개를 홱 돌리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강한서의 턱을 받쳐 들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입술부터 목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곤드레만드레 취한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입술에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잘 생겼으니까 난 솔로야.”술기운이 살살 풍기는 따뜻한 숨결에 왠지 모르게 야릇한 분위기가 풍겼다.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그의 가슴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반쯤 감긴 두 눈으로 유혹의 눈빛을 보냈다.“내가 60만 원 주면 내 남자친구 할래?”그러자 강한서의 낯빛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그녀를 차갑게 빤히 쳐다보았다.“60만 원? 너무 적은 거 아니야?”유현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지금 시세에 60만이면 적지 않을 텐데?”“지금 시세?”강한서가 코웃음을 쳤다.“아는 게 많은가 보네.”그녀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을 굳게 먹은 듯했다.“알았어! 얼굴값 하는 것 같으니까 10만 더 줄게. 70만, 어때? 더는 못 줘.”지금 이 순간 강한서는 그녀가 정신을 차리게끔 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를 옆에 있는 어항에 푹 담가버리고 싶었다.‘오늘 밤 내가 안 왔더라면 아무 남자랑 자겠단 말이잖아!’그 생각에 강한서의 낯빛이 또 더 어두워졌다.유현진은 위험이 닥쳐온 줄도 모르고 지갑에서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강한서의 셔츠 옷깃을 풀어 카드를 옷깃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남자에 굶주린 여자처럼 그의 가슴을 만지며 빵끗 웃었다.“내 돈 떼먹어서는 안 돼.”강한서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바의 종업원이 그를 불러세웠다.“한수 씨, 사모님께서 아직 계산 안 하셨어요.”강한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속만 썩이는 여자를 힐끗 보고는 들고 있던 가죽 재킷을 종업원에게 건넸다.“안에 골드카드 있어요. 비번 없으니까 그냥 긁으면 돼요.”짜증 섞인 강한서의 표정을 본 종업원은 한시도 지체할세라 째깍 결제한 뒤 카드를 다시 재킷에 넣어 두 손으로 강한서에게 건넸다.“조심히 가세요,
그녀의 두 눈은 동그랗고 큰 데다가 눈꼬리도 길었다. 정신이 또렷했을 때는 늘 차가운 빛이 담겨있었지만 웃을 때는 또 아름답고 매력이 넘쳤다. 지금처럼 술에 취해 실눈을 떴을 때가 가장 유혹적이었고 저도 모르게 사람을 홀렸다.강한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보다가 낮은 중저음으로 말했다.“어디서 자고 싶은데?”유현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결국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희 집.”강한서의 두 눈이 번쩍였다.“정말이야?”눈앞이 빙빙 돌아 유현진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러고는 강한서의 얼굴을 받쳐 들고 해롱해롱한 눈빛으로 말했다.“너한테 70만 원이나 줬는데 호텔 방까지 잡으면 돈 너무 많이 쓰잖아. 돈도 아낄 겸 그냥 너희 집으로 가. 나중에 이혼 소송할지도 모르거든.”강한서는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주도면밀한 계획을 칭찬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가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집 간 걸 남편이 알기라도 하면 어떡해?”그러자 유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난 남편 없어. 과부야.”말문이 막힌 강한서는 이를 꽉 깨물었다.“과부가 이혼을 해?”유현진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정신이 해롱해롱한 탓에 앞뒤 말이 전혀 맞지 않았다. 강한서 때문에 술을 깨기는커녕 오히려 더 헷갈렸다.“짜증 나! 넌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내 남자친구 하기 싫으면 돈 다시 돌려줘!”그러고는 손을 마구 흔들며 강한서의 몸을 더듬거렸다. 강한서는 그녀의 두 손을 꽉 누르고 안전벨트를 해준 뒤 무덤덤하게 말했다.“이미 늦었어.”그러고는 차에 시동을 걸어 질주해갔다.“차 세워. 내릴 거야!”유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반항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핸들을 뺏는 등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고 그를 빤히 째려보기만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위협만 가하고 할퀼 용기는 없는 버려진 길고양이 같았다.강한서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 만체했다.“지금 날 납치하려고?
유현진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눈시울도 점점 붉어졌다.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네 말이 맞아. 그 사람은 날 신경 쓰지도 않아...”그녀가 추돌 사고를 당하고 언제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다.강한서의 얼굴이 찌푸려졌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이상했다. 그는 변명하듯 설명을 늘어놓았다.“이런 말도 안 되는 꿍꿍이를 누가 믿냐 이거야.”유현진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한서는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더 남았지만 꾹 참았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무슨 말이 통하겠는가 말이다. 무슨 얘기를 하든 결국에는 화가 날 것인데 그럴 바엔 차라리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게 나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아름드리 펜션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인기척을 들은 가정부가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강한서가 차에서 그녀를 안고 내렸다. 가정부가 우산을 들고 가까이 가서야 그 여자가 유현진이라는 걸 알았다.“사모님 왜 이래요?”강한서는 가정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욕실에 가서 물 좀 받아놔요.”유현진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던 그때 강한서의 시선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다. 눈가가 촉촉한 걸 보니 아무래도 아까 울었나 보다. 그 모습에 강한서는 입을 삐죽거렸다.“대표님, 물 다 받아놓았어요.”가정부가 도와주려 하자 강한서가 그녀의 도움을 피하며 덤덤하게 말했다.“해장국 좀 끓여주세요.”가정부는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물러났다.욕조의 뜨거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욕실 전체가 수증기로 자욱했다.강한서는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고 잠깐 내려보다가 그녀가 입은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그녀의 하얀 속살이 예고 없이 드러났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찌푸린 얼굴로 수건을 그녀의 몸에 휙 던지고는 돌아섰다.욕실 문을 연 순간 문 앞에 있던 가정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가 갑자기 문을 열어 당황한 가정부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유현진은 마치 렉에 걸린 것처럼 멈칫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한서가 그녀 옆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는데 얼굴 절반이 베개에 가려져 있었다. 갑자기 잠에서 깨서 그런지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시선을 아래로 향해보니 그녀의 손이 강한서의 가슴팍에 머물러 있었고 그의 가슴 근육을 어루만지고 있었던 것이었다.화들짝 놀란 그녀는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런 질문을 내뱉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강한서는 눈 뜨기도 귀찮았다.“네가 나랑 밤을 보내겠다고 했잖아.”유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필름이 끊겼던 장면들이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둘 생각나기 시작했다.“너랑 밤을 보내고 싶은데 얼마야?”“귀하게 생긴 게 싸지는 않겠어.”“너랑 자고 싶어.”...유현진은 지금 당장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그녀는 선택적 난청처럼 강한서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강한서가 손을 뻗어 그녀를 확 잡아당겼다.“아직 돈 안 줬어. 어딜 도망가려고?”“누... 누가 도망간다고 그래?”유현진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이불로 몸을 감쌌다. 그녀의 두 볼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나저나 무슨 돈?”강한서는 왼손으로 머리를 지탱하고 오른손으로 이불을 잡아당겼다.“밤 함께 보낸 값 그러지. 70만 원.”‘취해서 한 소리인데 정말 믿은 거야?’유현진이 빨개진 얼굴로 이를 꽉 깨물었다.“우린 그저 침대에서 단순히 잠만 잤을 뿐인데 내가 왜 70만 원을 줘야 해?”‘날 바보로 아나?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잖아!’강한서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단순히 잠만 잤길래 그 정도지, 다른 게 있었으면 그 돈으로 됐겠어?”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어젯밤에 취해서 한 말을 곧이곧대로 지켜야 해?”그러자 강한서가 무섭게 실눈을 뜨며 말했다.“취하면 아무 남자랑 같이 밤을 보내도 돼? 유부녀라는 사
이건 키스가 아니라 깨문 것이었다!유현진은 그를 벗어나려 힘껏 발버둥 쳤지만 강한서는 이불로 그녀의 사지를 마치 누에처럼 꽁꽁 감싸고 그녀의 입술을 마구 비벼댔다.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던 그녀는 반항하지도 못했고 발버둥 치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강한서도 힘을 점점 풀었고 깨물던 것이 나중에는 키스로 변해버렸다.강한서의 입술이 그녀의 하얗고 섹시한 쇄골에 닿는 순간 유현진이 갑자기 말했다.“강한서, 지금 질투 나서 나한테 화내는 거야?”강한서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몸 아래에 있던 유현진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물었다.“나 사랑해?”강한서는 손에 힘을 풀고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착각하지 마, 유현진! 우리가 이혼하기 전까지 넌 여전히 한주 강씨 가문 맏며느리야! 자신의 본분을 지켜. 괜히 사고 쳐서 따라다니면서 사고 수습하게 하지 말고!”그는 옷을 입고 안방을 나섰다. 유현진은 천장을 빤히 올려다보며 자신을 비웃었다. 그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의 화를 돋우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그런데도 그 질문을 내뱉는 순간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여전히 반전이라곤 없었다.그녀는 강한서의 스킨십에 가슴이 떨린 자신이 너무도 싫었고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기대하는 자신이 너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다시 울리자 유현진은 충전기를 빼고 통화버튼을 눌렀다.“현진아.”차미주의 목소리에 유현진이 대답했다.“응.”차미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놀라 죽는 줄 알았잖아. 어젯밤에는 왜 안 들어왔어? 연락도 안 되고 대체 어디 간 거야? 나 하마터면 신고할 뻔했어!”숙취 때문에 두통이 생겨난 유현진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아무 일 없어. 어젯밤에는... 엄마랑 있었어. 배터리가 없어서 휴대폰이 꺼졌어. 충전기도 없었고.”그녀는 차미주가 걱정할까 봐 술에 잔뜩 취했었다는 사실을 숨겼다.“알았어.
신미정은 무슨 뜻이지?송민영이 임신한 사실을 아는 상황에서 가정부를 통해 약을 먹이다니. 여자는 그들 가문을 위해 아이를 낳아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아이를 낳기만 한다면 혼인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거야?’유현진의 찡그린 표정을 본 가정부가 말했다.“큰 사모님께서 특별히 대추를 많이 넣으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쓰지는 않을 거예요.”유현진은 입술을 잘근 씹더니 말했다.“장씨 아주머니, 아주머니도 보셨잖아요. 저와 한서는 곧 이혼해요. 약은 필요 없어요.”“무슨 말씀이세요, 사모님. 부부 사이에 마찰도 있는 거죠. 싸울 때마다 이혼을 입에 달고 사실 수는 없어요. 대표님께서 만약 사모님을 걱정하지 않으셨다면 어젯밤 전화를 받고 곧바로 오시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말인데요, 곧 이혼할 부부가 잠자리를 가지는 법은 없어요.”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어떻게 가정부에게 어젯밤에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잠만 잤다고 알려야 할지 몰랐다.“큰 사모님께서 이 약은 두 분이 잠자리를 가진 후에 드시라고 했어요. 임신 확률을 높여준대요. 사모님께서 임신을 하시면 가정에도 행복이 깃들 거예요.”유현진이 수차례나 들었던 말이었다.처음에는 그녀 역시 이런 줄로만 알았다. 강한서와 그녀의 혼인에 감정의 기초가 없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그들을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으로 말이다.하지만 모든 건 그녀의 헛된 희망이었고 강한서는 그녀와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 역시 서서히 강한서를 묶어두는 도구로 아이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아이는 무고한 생명이었고 부모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지 도구로 사용되어선 안 되었다.지금의 그녀는 강한서와 아이를 가지려고 들지 않았고 그녀 자신의 가치를 아이를 낳는 것에 두지 않았다.“장씨 아주머니, 저희는 지금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요.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사모님, 큰 사모님께서 저한테 반드시 사모님께서 약을 드시는 모습
유현진이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말 잘했네. 난 건강하니까 정상적인 남자랑 잤다면 분명 임신했을 거야. 약을 먹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말하다가 약을 강한서에게 쥐여주며 이어서 말했다.“너나 마셔!”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강한서는 손에 들린 탕약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가정부가 서재에서 나오자 강한서 역시 집을 나가고 없었다.테이블에 놓인 빈 그릇을 본 가정부는 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호텔에 도착했을 때에는 약속했던 시간보다 몇 분 늦었다.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차미주가 유현진을 보자마자 낮은 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정말 너무들 하는군.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했으니 우리가 제일 빠른 줄 알았는데 꼴찌라니! 탑이 아닌 배우들은 정말 힘들겠어. 배역 하나를 위해 이토록 애써야 하니까 말이야.”유현진은 복도를 둘러보았다. 밖에는 30명 남짓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매니저와 함께 자리했고 어떤 연예인들은 매니저가 없이 혼자 온 사람도 있었다.강한서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그녀는 예쁜 외모 하나로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사실상 예쁘게 생긴 사람은 널렸고 미모는 어느새 가장 보통의 요건이 되었다.전문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들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반드시 자신의 업무 능력이 뛰어나야 했고 얼굴은 그저 금상첨화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이 사실에 직면한 유현진은 바짝 긴장했다.차미주가 그녀의 심경의 변화를 눈치채고 낮은 소리로 위로했다.“긴장할 것 없어. 캠퍼스에 늘 있었던 과제라고 생각해. 정상적으로 발휘만 잘 하면 문제없어. 복잡하게 생각 말고 준비한 것만 잘 보여줘. 그럼 반은 성공한 거야.”유현진은 긴장이 조금 풀려서 답했다.“최선을 다할게.”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다부진 체격의 여자가 서류를 들고 안에서 나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이름 부르는 대로 들어오세요. 대사를 외우는 시간과 연기를 하는 시간이 8분을 초과해서는 안 돼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