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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0 14:23:27

교실 뒤편에서 이준을 만난 린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준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상이 인간의 도리보다 우선시되는 광기. 그것이 지금 이 땅을 뒤덮고 있는 공산주의의 민낯이었다. 그들은 가족의 유대를 끊고, 오직 당에 대한 충성만을 요구했다.

"그게 그들이 말하는 혁명입니다.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혁명이죠."

이준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이미 전선에서 그런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다.

자식의 손에 죽어가는 부모, 형제를 배신하고 훈장을 받는 청년들.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으며 굴러가고 있었다.

린은 고개를 저으며 괴로워했다. 그녀에게 교육은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었지만, 현실은 그 희망을 비웃듯 어둠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준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린,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꿈을 꾸게 하는 것. 그것이 저들의 총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질 날이 올 겁니다."

린은 이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묵직한 군복에서 나는 화약 냄새와 땀 냄새가 신기하게도 그녀를 안심시켰다.

"약속해 줘요, 한. 절대로... 저들처럼 변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주겠다고."

이준은 그녀의 머릿결에 가만히 턱을 괴었다.

"약속합니다. 당신의 미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이 전장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날 밤, 이준은 초소에서 홀로 달빛을 받으며 린이 주었던 보랏빛 야생화를 꺼내 보았다. 꽃잎은 말라 비틀어졌지만, 그 향기는 여전히 살아있는 듯했다.

'만약 이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이준은 결코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를 가정을 해보았다. 그녀를 데리고 한국의 사계절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산과 진달래 피는 봄의 언덕을. 붉은 대지가 아닌, 생명이 움트는 그 땅에서 그녀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현실의 바람은 차가웠다. 정글 깊은 곳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다시 시작될 기습의 전조였다. 이준은 야생화를 소중하게 수첩 사이에 끼워 넣고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번뜩이는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를 증오했고, 사랑을 나약함이라 비웃었다. 하지만 이준에게 사랑은 더 이상 나약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야 할 단 하나의 이유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전원 전투 준비. 쥐새끼 한 마리도 살려보내지 않는다."

이준의 명령이 소대원들에게 전달되었다. 그의 눈빛은 린 앞에서와는 달리 서늘한 살기로 가득 찼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는 기꺼이 괴물이 되어야 했다.

총성이 다시 정글의 정적을 깨뜨렸다. 불꽃이 난무하는 전장 한복판에서 이준은 린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렀다.

'린, 조금만 기다려요. 이 밤이 지나면 다시 당신의 교실 앞으로 가겠습니다.'

비명이 난무하고 살점이 튀는 지옥 속에서도, 이준의 가슴 한구석은 오직 한 여인을 위한 온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사상을 넘어선, 전쟁조차 앗아갈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가장 숭고한 갈망이었다.

정글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깔렸지만, 그 어둠조차 두 사람의 필연적인 인연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깊은 어둠이 있었기에, 서로를 향한 빛은 더욱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언어를 넘어선 진심

밤새 이어진 포성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짙은 안개가 정글의 비린내를 덮으며 마을로 내려앉았다. 한이준은 피로로 충혈된 눈을 비비며 소총을 어깨에 메고 부대로 복귀했다. 그의 왼쪽 팔뚝 군복이 날카로운 나뭇가지나 파편에 스친 듯 길게 찢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살았군. 또 하루를 벌었어.’

이준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옮겼다. 전우들의 거친 숨소리와 군화가 진흙바닥을 짓밟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웠다.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는 습관처럼 린의 교실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직 수업이 시작될 시간은 아니었지만, 낡은 건물 옆 작은 공터에는 누군가 서성이고 있었다.

린이었다.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초췌한 안색으로 마을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다 복귀하는 소대원들 틈에서 이준의 형체를 발견하자마자, 그녀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이 번졌다. 린은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준에게 달려왔다.

"한! 한!"

그녀의 다급한 부름에 이준은 멈춰 섰다. 다가온 린은 이준의 찢어진 소매와 핏자국을 발견하고는 짧은 비명을 삼키며 입술을 가렸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며 이준의 팔 근처를 맴돌았다. 차마 만지지는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에 이준은 가슴 한구석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다.

"괜찮습니다. 스친 것뿐이에요."

이준이 짐짓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녀는 이준의 온전한 오른손을 잡고 자신의 교실 뒤편, 작은 평상이 놓인 그늘로 이끌었다. 소대원들이 짓궂은 농담을 던지며 지나갔지만, 지금 이준에게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눈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구급상자를 찾아오는 여인의 뒷모습만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린은 깨끗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이준의 상처 주위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차가운 물기가 닿자 이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린은 깜짝 놀라며 상처 부위에 입바람을 불어넣었다.

"아파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린이 미안해할 일이 아닙니다. 이건 내 일이니까요."

이준의 대답에 린은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는 슬픔과 의문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왜 이런 무서운 일을 해야 해요? 한은... 한국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나요?"

이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쟁터의 먼지와 화약 연기에 찌든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먼 과거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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